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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記者 購讀|東亞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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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寧하세요. 신광영 論說委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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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30~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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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敎師 銃器武裝해야”…美, 銃은 銃으로 막을 수 있다는 幻想

    美國 텍사스州 유밸디의 銃器 亂射 犧牲者 追慕行事에는 허리에 拳銃을 차고 自願奉仕를 온 住民들이 적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前 大統領을 2番 連續 支持할 程度로 共和黨 텃밭인 유밸디는 銃器 所持에 寬大한 典型的인 텍사스 시골이다. 小銃이 復權 景品으로 자주 내걸리는, 美國에서 가장 重武裝한 地域 中 하나다. 이런 마을에서 지난달 24日 銃器 事故로 初等學生 19名과 敎師 2名이 숨지자 武裝의 自由를 保障해야 한다는 住民들의 오랜 信念에도 龜裂이 생기기 始作했다. 犧牲된 아이의 三寸이 “더 以上의 慘事를 막으려면 敎師들을 銃으로 무장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다른 犧牲者의 할아버지가 “銃器 所持의 自由가 果然 무엇을 지켜줬나. 그 自由가 結局 사람을 죽였다”며 反論을 편다. 銃器 事故로 家族을 잃은 사람들은 銃器 規制 强化에 곧잘 贊成할 것 같지만 오히려 反對인 境遇도 많다. 事件 當時 銃을 갖고 있었다면 맞서 싸울 수 있고 애初에 犯罪者가 銃을 들고 威脅할 엄두를 못 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銃器 規制를 執拗하게 막아온 全美銃器協會(NRA) 等이 主管하는 射擊大會에선 마트나 피자집에 銃을 든 怪漢이 亂入한 狀況을 假定해 怪漢 服裝의 標的을 먼저 명중시키는 參加者가 優勝컵을 쥔다. ‘銃을 든 惡黨을 막는 건 오직 銃을 든 善한 市民’이라는 銃器 擁護論者들의 世界觀이 投影된 것이다. 武裝의 自由를 保障한 修正憲法 2條까지 굳이 안 가더라도, 나와 家族의 生命을 언제 到着할지 모를 警察에 依存하지 않고 스스로 지키자는 主張은 皮膚에 와 닿는 나름의 說得力이 있다. 하지만 銃은 銃으로 막을 수 있다는 集團 心理는 現實에선 ‘幻想’에 가깝다. 이番 유밸디 銃器 亂射犯人 18歲 高校生은 學校로 進入하자마자 4學年 敎室에 亂入해 100餘 발을 쐈다. 마침 敎師들이 銃을 갖고 있어 곧바로 對應 射擊을 했다면 被害를 줄일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發生한 犧牲은 되돌릴 수 없다. 이番 事件에서 유밸디 警察은 學校로 進入하고도 1時間 넘게 犯人을 制壓하지 못했다. 警察은 “容疑者의 位置를 특정하지 못한 狀態에서 섣불리 움직이면 隊員들이 銃에 맞거나 學生들 被害가 더 커질 수 있었다”고 했다. 警察이 不實 對應을 했다면 잘못이지만 이는 武裝한 警察도 銃器犯을 單숨에 制壓하기 어렵다는 點을 보여준다. 銃器가 擴散되면 公權力의 火力은 더 强해지고, 그에 맞서 犯罪者들 亦是 더욱 致命的인 武器를 動員하면서 銃器 性能이 上向 平準化된 結果다. 銃器犯이 銃을 든 市民에 依해 現場에서 制壓된 事例도 極히 드물다. 敎師나 警備員이 武裝한다고 해서 銃器 테러犯들이 犯行을 抛棄할 可能性도 높지 않다. 그들은 大部分 犯行 直後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射殺된다. 죽기로 마음먹은 이들을 相對로 ‘힘의 均衡’을 통한 抑制 效果를 期待하기는 어렵다. 實際 危險 狀況이 벌어졌을 때 銃을 가진 사람이 銃이 없는 사람보다 죽거나 다칠 確率이 5倍假量 높다는 硏究結果도 있다. 自身의 對應 能力을 過大評價해 銃이 없었다면 回避했을 危險을 무릅쓰기 때문이다. 實效性 있는 銃器 規制 導入이 가장 確實한 解法일 텐데 美國人들은 거의 折半씩 贊反으로 갈려 接點을 찾는 데 番番이 失敗해왔다. 2012年 26名이 숨진 샌디훅 初等學校 銃器 事件처럼 다른 나라라면 歷史에 刻印될 慘事가 숱하게 이어져도 美國은 달라지는 게 없다. 美國 歷史에서 銃은 自由와 獨立의 象徵이었다. 銃을 든 民兵隊가 英國軍과 맞서 싸워 獨立을 爭取했고, 以後에도 聯邦政府의 暴政에 對備하기 위해 市民들의 自己防禦權을 保障했다. “國民을 武裝解除 시키는 것은 그들을 奴隸化하는 가장 效果的 方法”이라는 美國 建國의 아버지 조지 메이슨의 말은 當代의 常識이었다. 하지만 文明時代 以前의 傳統으로 흘려보냈어야 할 慣習이 200年 넘게 畸形的으로 살아남아 美國을 半으로 쪼개 놓는 分裂의 象徵이 됐다. 美 言論에선 ‘正體性의 詛呪’ ‘銃이라는 傳染病(Gun Epidemic)’이라는 表現까지 써가며 慨歎한다. 相當數 美國人들은 아침에 子女를 登校시키며 안아줄 때 이 瞬間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恐怖를 每日같이 느낀다고 한다. 銃器에 對해선 事實上 ‘無政府 狀態’에 머물러 있는 美國은 舊習을 제때 淸算하지 못하고, 政治가 分裂을 縫合하지 못할 때 어떤 代價가 따르는지를 보여준다.신광영 記者 neo@donga.com}

    • 20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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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品格 外交’ 機會를 黑歷史로 만든 國會

    우크라이나의 시골에는 좁은 숲길과 넓은 平野가 번갈아 이어지는 地形이 많다. 러시아軍과 우크라이나軍은 廣闊한 平野를 사이에 두고 兩 끝의 숲에 몸을 숨긴 채 銃擊戰을 벌인다. 며칠 前 우크라이나軍이 駐屯해 있는 숲에 30, 40代 女性들이 찾아왔다. 西部 都市인 르비우 隣近에 사는 이들은 男便들이 屬한 部隊를 搜所聞해 東部戰線人 이곳까지 車를 몰고 왔다. “우리 男便들, 只今 어디에 있나요?” 部隊長은 慘澹한 表情으로 數百 m 앞 平野를 가리켰다. “저기에 있습니다. 3日째.” 平野 너머의 숲에서 러시아軍이 銃을 겨누고 있어 屍身 收拾을 못 하고 있던 참이었다. 女性들은 部隊長의 挽留에도 寂寞한 平野로 걸어 나갔다. 언제든 맞은便 숲에서 銃彈이 날아들 수 있는 狀況이었다. 女性들은 平野에 널린 屍身들의 얼굴을 하나씩 確認했다. 그러곤 各自의 男便을 등에 지고 넘어졌다 일어서길 反復하며 我軍 쪽 숲으로 되돌아왔다. 男便들은 서로에게 이웃이자 戰友였다. 러시아의 侵攻 直後 함께 軍에 自願해 같은 部隊로 配置됐다. 마을에 남겨진 婦人들은 最近 갑자기 連絡이 끊긴 男便들을 찾아보자며 맨몸으로 戰場에 온 것이었다. 이들은 男便의 주검을 싣고 故鄕으로 돌아와 合同 葬禮를 치렀다. 요즘 우크라이나 各地에서 이런 悲劇이 벌어진다. 70日째를 맞는 우크라이나 戰爭은 長期戰이 될 可能性이 높다.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領土의 相當 部分을 抛棄하며 完全히 屈服하기 前까진 戰爭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抵抗 意志를 꺾기 위해 갈수록 殘忍하게 우크라이나人들을 殺害하며 核 攻擊 等 威脅 水位를 높이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支援해 온 美國은 軍事 援助 等에 42兆 원(藥 330億 달러)을 追加 投入하기로 했다. 戰爭이 아무리 길어져도 抛棄하지 않겠다는 意志를 드러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크라이나가 이 正當한 抗戰에서 勝利하길 바라고 있다. 同時에 하루빨리 戰爭이 끝나 죽음의 行列이 멈추기를 바란다. 안타까운 것은 이 두 바람이 現在로선 兩立하기 어렵다는 點이다. 푸틴의 帝國主義的 野心을 충족시켜 주지 않는 以上 戰爭을 빨리 끝내기 어렵고, 그렇다고 끝까지 結社 抗戰할 境遇 犧牲은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不正한 平和가 옳은 戰爭보다 낫다’는 獨逸 格言이 있다. 어떤 名分에도 避하는 게 上策일 만큼 戰爭은 너무도 悽慘하다는 意味다. 조 바이든 美國 大統領은 며칠 前 우크라이나 追加 支援을 發表하며 그와는 對蹠點에 있는 말을 했다. “싸움의 費用이 싸지는 않지만, 攻擊에 屈服하는 代價는 더 비쌀 것이다.” 우크라이나人들은 不正한 平和 代身 屈服하지 않는 길을 擇했다. 지난달 戰場에서 男便과 아들을 잃은 한 女性은 “蘇聯 밑에서 살아봐서 그게 어떤 건지 알고 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러시아에 占領當한 땅에서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南部 헤르손 等 一部 占領地에서 벌써부터 레닌 銅像을 다시 세우고 文化財를 掠奪하는 等 民族性을 抹殺하고 있다. 貨幣도 루블貨로 바꾸고 休校 狀態인 學校를 열어 思想 敎育을 準備하고 있다. 그 地域 靑年들은 러시아 軍服을 입고 同族이나 다른 弱小國 市民들에게 銃을 겨누게 될까 봐 齒를 떤다. 20餘 年 前 러시아의 大量 虐殺 被害者였던 체첸人들은 이番 戰爭에서 우크라이나人을 虐殺하는 데 動員되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代價란 그런 것이다. 지난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大統領이 汝矣島 國會圖書館에서 火傷演說을 했을 때 參席한 議員은 不過 50名 남짓이었다. 豫定된 午後 5時에 맞춰 火傷에 登場한 젤렌스키 大統領은 議員들이 서로 握手를 건네고 잡담하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 演說을 始作했다. 그날의 휑한 國會 講堂 寫眞은 “우크라이나의 主張에 다른 國家들은 아무 關心이 없다”는 러시아 言論의 宣傳에 要緊하게 쓰였다. 美國 英國 日本 等 다른 나라 議員들처럼 全員 參席해 起立拍手를 쳤어야 했다고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나라마다 事情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事情을 考慮하면 帝國主義 歷史를 가진 强大國들보다 더욱 세련된 方式으로 抗戰 中인 國家의 元首에게 尊重과 共感을 표했어야 했다. 只今 우크라이나人들은 어떻게든 抵抗하지 않을 수 없고, 抵抗하자니 너무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日帝强占期와 6·25戰爭을 겪으며 뼈저리게 實感했던 딜레마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젤렌스키 大統領의 國會 演說은 ‘屈服하지 않는 길’을 먼저 걸었던 우리가 品格 있는 外交를 선보일 機會였지만 國際的 亡身을 自招한 黑歷史가 되어버렸다. 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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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戰爭의 여러 얼굴들

    박완서의 첫 小說 ‘羅牧’은 6·25戰爭 中이던 1951年 美軍 PX에서 함께 일한 畫家 朴壽根을 모티브로 쓴 作品이다. 서울대 國文科에 入學했지만 곧 戰爭통에 家族을 잃고 生計를 책임져야 했던 박완서는 肖像畫와 映畫 看板을 그려 家族을 扶養하는 朴壽根에게 큰 慰勞를 느꼈다. ‘그는 看板쟁이 中에서도 가장 存在感 없는 看板쟁이로 一貫했다. 밑바닥 人生으로 보이는 사람들 안에 別의別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淸掃夫 中 中學校 先生님이 있는가 하면, 高官의 未亡人도 있었다. 戰爭이란 그런 것이었다.’ 우리에겐 먼 過去인 戰爭이 只今 우크라이나에선 40日째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人들이 들려주는 生存 스토리는 戰爭의 여러 얼굴을 들춰낸다. “집에서 待避한 저는 엄마, 雙둥이 女同生, 姨母, 四寸과 함께 히치하이킹을 했어요. 사람이 많아 아무도 태워주지 않았어요. 砲聲 속에 밤을 꼬박 새고 다음 날 겨우 車 한 臺를 잡았어요. 제가 타고 나니 엄마랑 동생이 앉을 자리가 없는 거예요. 제가 내리면서 엄마한테 타라고 하니까 안 타겠다고 버텨서 서로 껴안고 울었어요. 보다 못한 車主분이 自己 짐을 버리고 그 자리에 포개서 타라고 했어요. 추리고 추린 짐일 텐데….”(아나스타샤·22) “産婦人科가 爆擊을 當해 妊娠婦 數十 名이 제가 있던 마리우폴 劇場으로 왔어요. 붐벼서 다들 힘들었지만 妊産婦들에게 建物 右側 脫衣室을 내줬어요. 거기가 가장 덜 추웠거든요. 하지만 그 配慮가 너무 後悔돼요. 러시아가 미사일로 建物 오른쪽을 때려서 妊娠婦들은 살아남지 못했어요. 먼지 안개를 헤치고 脫出을 하려는데 아는 꼬마가 넋이 나가 있었어요. 아이 어깨를 흔들면서 소리쳤죠. ‘네 아빠가 돌아가셨어. 너는 살아야 한다. 아빠를 위해 살아야 해!’”(나디야·50대) “마리우폴에선 屍身을 보면 毯요로 덮어줘요. 누군지 알면 이름 적은 종이를 甁에 넣어 屍身 옆에 두고요. 저와 艱辛히 이 죽음의 都市를 빠져나온 男子親舊는 못 데리고 온 外할머니를 걱정했어요. 남겨진 이들이 러시아로 끌려간다는 所聞이 돌았거든요. 저희는 마리우폴에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고 警備兵에게 事情했어요. 罪責感을 안고 살아갈 自信이 없었어요.”(안나·21) “30年 間 痲醉科 醫師로 일하다 隱退하면서 유튜브로 刺繡를 배웠어요. 집에서 待避할 때 그동안 만든 自首 數百 點을 가방에 넣어 나왔죠. 急할 때 팔아서 非常金 벌려고요. 근데 너무 무거워서 가방을 버렸어요. 只今은 우리 軍人들 입을 防彈조끼를 바느질해요.”(부텐코·65) “체첸人인 저는 戰爭이 뭔지 알아요. 23年 前 러시아의 砲彈이 쏟아지던 날, 그로즈니(체첸의 首都)에 있던 집에서 잠옷 바람으로 洞네 벙커까지 어둡고 탁 트인 길을 내달리던 記憶이 생생해요. 동생은 그날 밤 죽어서 체첸의 共同墓地에 묻혔어요. 美國 內 反戰 示威에서 우크라이나人을 만났는데 제가 러시아 國籍이어서 敵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羞恥心과 罪責感이 들더군요. 체첸人 親舊는 동생이 러시아 軍服을 입고 이番 戰爭에 投入됐는데도 우크라이나를 支持했어요. 그 親舊는 며칠 뒤 동생이 戰死한 것 같다는 連絡을 받고 많이 울었어요.”(밀라나) “한 달 前 入隊했어요. 누굴 害칠 수 있는 性格이 아니지만 銃을 안 들 수 없는 狀況이잖아요. 그놈(러시아軍)들이 여기 와 있는 게 正말 火가 나요. 그래도 이 戰爭에서 죽는 사람이 最大限 없었으면 해요. 러시아 軍人들도요.”(우크라이나 兵士) “孫女의 부축을 받으며 避亂 列車를 기다리는데 獨逸軍이 쳐들어왔던 1941年이 떠오르더군요. 머리 위로 죽음이 날아다니는 느낌…. 81年 前 그때와 똑같아요. 저는 歷史家이고 홀로코스트 關聯 冊까지 썼는데 平生을 바친 일이 蒸發해버린 것 같아요. 이番엔 러시아를 避해 獨逸로 避亂을 왔어요. 아이러니하죠.”(보리스·86) “제가 몰던 노란色 스쿨버스를 사람들 待避시키는 데 씁니다. 한 할머니가 버스에 오르질 못하고 강아지를 안고 울었어요. 伴侶動物까진 못 태우거든요. 道路에 간간히 보이는 車輛 뒤窓에는 ‘baby(아기)’ ‘people(民間人)’라고 쓰인 圖畫紙가 큼직하게 붙어있어요. 攻擊하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門손잡이 4곳에 흰 헝겊을 묶어 놓은 車도 많고요. 이제 마을은 버려진 映畫 세트場처럼 荒凉해요. 恐怖映畫 속에서 사는 氣分이죠. 다음 砲彈은 어디로 떨어질까. 이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세르기·57) “하루 한 番 수프 한 그릇을 받아와 2, 4, 6歲 딸을 먹여요. 큰딸은 이곳 地下鐵驛으로 오기 前날 제가 해준 롤케이크가 꿈에 나온대요. 제 職業이 製빵師인데 아이들에게 먹을 걸 못 줘서 가슴이 찢어져요. 暫時나마 배고픔을 잊게 해주려고 童話冊을 읽어줘도 아이들 눈빛이 더 以上 반짝이지 않아요. 어떤 분이 꿀 한 甁을 줘서 겨우 살아있어요. 한 끼에 꿀 한 스푼…. 러시아 軍人이 아이들에게 沙糖을 주려 해서 처음엔 拒絶하다가 저도 모르게 ‘沙糖 줘, 雪糖’이라고 말했어요.”(율리야·33)요즘 우크라이나 地下鐵驛은 하나의 작은 마을이다. 멈춰선 에스컬레이터는 어린이들이 서로를 뒤쫓는 놀이터가 됐고, 傾斜진 欄干에 빨래가 널려 있다. 列車 遲延 放送이 나왔을 域內 스피커에선 攻襲 사이렌이 흘러나온다. 線路 周邊 大型 볼록거울 앞에서 10代 少女들은 얼굴을 비추며 머리를 빗는다. 列車는 門이 활짝 열린 채 宿所로 쓰인다. 車窓 앞 生水甁에 꽂힌 粉紅 튤립 다발이 地上의 世上을 떠올리게 한다.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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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크라 戰爭 40日째… 우크라 地下鐵驛은 마을이 됐다

    박완서의 첫 小說 ‘羅牧’은 6·25戰爭 中이던 1951年 美軍 PX에서 함께 일한 畫家 朴壽根을 모티브로 쓴 作品이다. 서울대 國文科에 入學했지만 곧 戰爭통에 家族을 잃고 生計를 책임져야 했던 박완서는 肖像畫와 映畫 看板을 그려 家族을 扶養하는 朴壽根에게 큰 慰勞를 느꼈다. ‘그는 看板쟁이 中에서도 가장 存在感 없는 看板쟁이로 一貫했다. 밑바닥 人生으로 보이는 사람들 안에 別의別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淸掃夫 中 中學校 先生님이 있는가 하면, 高官의 未亡人도 있었다. 戰爭이란 그런 것이었다.’ 우리에겐 먼 過去인 戰爭이 只今 우크라이나에선 40日째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人들이 들려주는 生存 스토리는 戰爭의 여러 얼굴을 들춰낸다. “집에서 待避한 저는 엄마, 雙둥이 女同生, 姨母, 四寸과 함께 히치하이킹을 했어요. 사람이 많아 아무도 태워주지 않았어요. 砲聲 속에 밤을 꼬박 새고 다음 날 겨우 車 한 臺를 잡았어요. 제가 타고 나니 엄마랑 동생이 앉을 자리가 없는 거예요. 제가 내리면서 엄마한테 타라고 하니까 안 타겠다고 버텨서 서로 껴안고 울었어요. 보다 못한 車主분이 自己 짐을 버리고 그 자리에 포개서 타라고 했어요. 추리고 추린 짐일 텐데….”(아나스타샤·22) “産婦人科가 爆擊을 當해 妊娠婦 數十 名이 제가 있던 마리우폴 劇場으로 왔어요. 붐벼서 다들 힘들었지만 妊産婦들에게 建物 右側 脫衣室을 내줬어요. 거기가 가장 덜 추웠거든요. 하지만 그 配慮가 너무 後悔돼요. 러시아가 미사일로 建物 오른쪽을 때려서 妊娠婦들은 살아남지 못했어요. 먼지 안개를 헤치고 脫出을 하려는데 아는 꼬마가 넋이 나가 있었어요. 아이 어깨를 흔들면서 소리쳤죠. ‘네 아빠가 돌아가셨어. 너는 살아야 한다. 아빠를 위해 살아야 해!’”(나디야·50대) “마리우폴에선 屍身을 보면 毯요로 덮어줘요. 누군지 알면 이름 적은 종이를 甁에 넣어 屍身 옆에 두고요. 저와 艱辛히 이 죽음의 都市를 빠져나온 男子親舊는 못 데리고 온 外할머니를 걱정했어요. 남겨진 이들이 러시아로 끌려간다는 所聞이 돌았거든요. 저희는 마리우폴에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고 警備兵에게 事情했어요. 罪責感을 안고 살아갈 自信이 없었어요.”(안나·21) “30年 間 痲醉科 醫師로 일하다 隱退하면서 유튜브로 刺繡를 배웠어요. 집에서 待避할 때 그동안 만든 自首 數百 點을 가방에 넣어 나왔죠. 急할 때 팔아서 非常金 벌려고요. 근데 너무 무거워서 가방을 버렸어요. 只今은 우리 軍人들 입을 防彈조끼를 바느질해요.”(부텐코·65) “체첸人인 저는 戰爭이 뭔지 알아요. 23年 前 러시아의 砲彈이 쏟아지던 날, 그로즈니(체첸의 首都)에 있던 집에서 잠옷 바람으로 洞네 벙커까지 어둡고 탁 트인 길을 내달리던 記憶이 생생해요. 동생은 그날 밤 죽어서 체첸의 共同墓地에 묻혔어요. 美國 內 反戰 示威에서 우크라이나人을 만났는데 제가 러시아 國籍이어서 敵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羞恥心과 罪責感이 들더군요. 체첸人 親舊는 동생이 러시아 軍服을 입고 이番 戰爭에 投入됐는데도 우크라이나를 支持했어요. 그 親舊는 며칠 뒤 동생이 戰死한 것 같다는 連絡을 받고 많이 울었어요.”(밀라나)“한 달 前 入隊했어요. 누굴 害칠 수 있는 性格이 아니지만 銃을 안 들 수 없는 狀況이잖아요. 그놈(러시아軍)들이 여기 와 있는 게 正말 火가 나요. 그래도 이 戰爭에서 죽는 사람이 最大限 없었으면 해요. 러시아 軍人들도요.”(우크라이나 兵士) “孫女의 부축을 받으며 避亂 列車를 기다리는데 獨逸軍이 쳐들어왔던 1941年이 떠오르더군요. 머리 위로 죽음이 날아다니는 느낌…. 81年 前 그때와 똑같아요. 저는 歷史家이고 홀로코스트 關聯 冊까지 썼는데 平生을 바친 일이 蒸發해버린 것 같아요. 이番엔 러시아를 避해 獨逸로 避亂을 왔어요. 아이러니하죠.”(보리스·86) “제가 몰던 노란色 스쿨버스를 사람들 待避시키는 데 씁니다. 한 할머니가 버스에 오르질 못하고 강아지를 안고 울었어요. 伴侶動物까진 못 태우거든요. 道路에 간간히 보이는 車輛 뒤窓에는 ‘baby(아기)’ ‘people(民間人)’라고 쓰인 圖畫紙가 큼직하게 붙어있어요. 攻擊하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門손잡이 4곳에 흰 헝겊을 묶어 놓은 車도 많고요. 이제 마을은 버려진 映畫 세트場처럼 荒凉해요. 恐怖映畫 속에서 사는 氣分이죠. 다음 砲彈은 어디로 떨어질까. 이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세르기·57) “하루 한 番 수프 한 그릇을 받아와 2, 4, 6歲 딸을 먹여요. 큰딸은 이곳 地下鐵驛으로 오기 前날 제가 해준 롤케이크가 꿈에 나온대요. 제 職業이 製빵師인데 아이들에게 먹을 걸 못 줘서 가슴이 찢어져요. 暫時나마 배고픔을 잊게 해주려고 童話冊을 읽어줘도 아이들 눈빛이 더 以上 반짝이지 않아요. 어떤 분이 꿀 한 甁을 줘서 겨우 살아있어요. 한 끼에 꿀 한 스푼…. 러시아 軍人이 아이들에게 沙糖을 주려 해서 처음엔 拒絶하다가 저도 모르게 ‘沙糖 줘, 雪糖’이라고 말했어요.”(율리야·33) 요즘 우크라이나 地下鐵驛은 하나의 작은 마을이다. 멈춰선 에스컬레이터는 어린이들이 서로를 뒤쫓는 놀이터가 됐고, 傾斜진 欄干에 빨래가 널려 있다. 列車 遲延 放送이 나왔을 域內 스피커에선 攻襲 사이렌이 흘러나온다. 線路 周邊 大型 볼록거울 앞에서 10代 少女들은 얼굴을 비추며 머리를 빗는다. 列車는 門이 활짝 열린 채 宿所로 쓰인다. 車窓 앞 生水甁에 꽂힌 粉紅 튤립 다발이 地上의 世上을 떠올리게 한다.신광영 記者 neo@donga.com}

    • 202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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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름을 끼얹어 불을 끄려는 푸틴[글로벌 이슈/신광영]

    블라디미르 푸틴이 상트페테르부르크 副市長이던 1996年 그의 祕書는 푸틴에 對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職員들에게 일을 시킬 때 시킨 대로 處理됐으면 그걸로 그만이었어요. 어떤 方式으로 處理됐는지, 途中에 어떤 問題가 있었는지는 따지지 않는 분이죠.” 願하는 結果만 나오면 過程은 묻지 않는 푸틴의 性格은 大統領이 된 後에도 이어졌다. 2002年 10月 모스크바 劇場 테러事件이 났을 때다. 푸틴이 체첸을 侵攻해 焦土化시키자 체첸 테러犯 41名이 뮤지컬 觀覽客 912名을 人質로 잡고 撤軍을 要求했다. 푸틴의 指示로 着手된 그날 鎭壓 作戰에는 痲醉가스가 動員됐다. 建物 換氣口를 통해 가스가 撒布됐다. 人質犯과 人質들 모두 意識이 昏迷한 狀態가 되자 特殊部隊가 進入해 테러犯을 全員 射殺했다. 大成功인 듯 보였지만 問題는 人質들이었다. 125名이 깨어나지 못하고 숨졌다. 가스 撒布 作戰이 人質들에게 安全할지는 크게 考慮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밤 푸틴은 TV에 나와 成功的 作戰이라며 指揮部를 致賀했다. 死亡한 市民들에 對해선 “모든 人質을 다 求할 수는 없었다”고만 했다. 푸틴이 22年間 執權하며 체첸, 그루지야(조지아), 크림半島 等 舊蘇聯 聯邦國들을 持續的으로 侵攻한 것도 그의 結果 志向的 性格과 關聯이 있다. 戰爭이야말로 目的 達成을 위해 過程上의 問題를 過小評價하는 態度가 가장 極端化된 行爲다. 民主主義 國家라면 指導者의 이런 氣質的 缺陷은 政治的 審判을 면할 수 없다. 하지만 푸틴은 戰爭을 벌일 때마다 帝國에 對한 鄕愁와 劣敗感에 젖은 러시아 國民들로부터 强力한 支持를 받았다. 이番 우크라이나 侵攻을 두고도 러시아 內에 反戰 示威가 열리긴 하지만 國民의 60%는 如前히 푸틴을 支持하고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結果를 達成하고 過程은 祕密에 부치는 KGB式 統治를 하면서도 푸틴은 挑戰者의 싹을 잘라내면서 乘勝長驅해 왔다. 흙수저 出身에서 自手成家해 ‘國民의 大統領’이 됐다는 自己 確信, ‘大러시아 復元’이라는 時代錯誤的 所信, 西方의 尊重을 받지 못했던 傷處와 그로 인한 被害 意識이 結合되면서 푸틴은 90年 前 히틀러의 모습으로 21世紀 市民들과 맞서고 있다.요즘 푸틴의 精神狀態를 憂慮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그는 앞선 成功에서 배운 것으로 다음의 成功을 만들려는 나름의 一貫性을 보이고 있다. 2000年 체첸을 降伏시키면서 攄得한 ‘끝장내기식 攻擊’ 노하우를 土臺로 2008年 그루지야를 侵攻해 5日 만에 勝利했다. 自國民 保護를 名分으로 瞬息間에 領土를 占領하는 이때의 手法은 2014年 우크라이나 크림半島 强制合倂 때 그대로 適用됐다. 當時 無力했던 우크라이나軍과 물렁했던 西方의 制裁는 지난달 우크라이나를 全面 侵攻하는 데 自信感을 불어넣어줬을 것이다. 只今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苦戰하자 核 攻擊 威脅을 하고 있다. 이게 먹히면 다음 侵攻 땐 初期부터 核 카드를 쓰려 할 可能性이 높다. 그런데 푸틴은 이番에도 成功할 수 있을까. 그는 西方 制裁에는 단단히 對備했지만 우크라이나에서 伏兵을 만났다. 家族을 폴란드 國境에 내려주고 다시 돌아와 銃을 잡는 아버지들, 빈병에 스티로폼 가루를 밀어 넣으며 火焰甁을 만드는 女性들, 망치라도 들고 싸우겠다는 老人들, 生捕된 러시아 兵士들에게 따뜻한 수프를 먹이며 그들의 家族과 映像通話를 連結해주는 사람들 말이다. 푸틴이 侵攻 直前 演說에서 “國家로서 正體性을 가진 적이 없다”며 얕잡아봤던 나라의 國民들이 죽음을 覺悟하고 똘똘 뭉쳐 있다. ‘다음은 우리 次例’라고 느낀 폴란드 等 隣接國에선 우크라이나 避亂民을 自己 집에 재우고, 다음 行先地까지 車로 태워주겠다며 마중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全 世界에서 義勇軍 數萬 名이 우크라이나로 모여들고 있다. 勿論 푸틴은 大量殺傷武器를 쏟아부어 期於코 軍事的 勝利를 達成하려 할 테지만 그렇게 이겨봐야 무슨 意味가 있을 것인가. 4000萬 名이 넘는 우크라이나人들 가슴에 뿌려진 怨恨은 끝없는 抵抗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西方에는 歷史上 어느 때보다 經濟·軍事的으로 一致團結하는 名分을 줬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掌握이라는 結果를 얻기 위해 가장 確實한 方法인 全面 侵攻을 擇했다. 그 過程에서 벌어질 國際秩序 破壞, 主權 侵害, 民間人 殺傷은 늘 그래왔듯 介意치 않았다. 그 結果 한 番도 經驗하지 못했던 ‘過程’의 反擊에 直面해 있다. 푸틴이 더 큰 蠻行으로 이를 突破하려 한다면 기름을 끼얹어 불을 끄려는 꼴이 될 것이다. 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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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어른들의 戰爭에서 ‘人間 防牌’가 된 아이들

    3日(現地 時間) 美軍의 이슬람國家(IS) 首魁 除去 作戰이 끝난 자리에는 어린아이들의 痕跡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무너진 甓돌 더미 사이로 불에 탄 縫製 토끼 人形과 나무로 된 아기寢臺, 粉紅色 반짝이 샌들이 있었다. 爆彈 破片에 으스러진 壁에는 파란 플라스틱으로 된 幼兒用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IS의 首魁인 아부 이브라힘 알下詩味 알쿠라이시는 시리아 北西部의 한 마을에 숨어 지냈다. 隱身處인 3層짜리 甓돌집에는 어린이 10餘 名도 함께 살았다. 알쿠라이시가 美軍의 攻襲을 避하기 위해 ‘人間 防牌’로 動員한 自身과 部下의 子女들이었다. 1層에는 그의 存在를 全혀 모르는 平凡한 시리아人 一家族이 살았다. 美軍은 한 달 前에 이미 알쿠라이시의 位置를 確認하고도 어린이와 女性의 犧牲을 憂慮해 헬기 攻襲을 하지 못했다. 그 代身 我軍의 危險 負擔이 큰 特殊部隊 投入을 決定했다. 3日 새벽, 隊員들이 隱身處를 에워싸자 아랍語 通譯官의 擴聲器 放送이 울려 퍼졌다. “降伏하고 나오면 모두 安全할 것이다. 나오지 않는 者는 죽는다.” 3層에 있던 알쿠라이시는 家族들에게 살 機會를 주지 않았다. 아이들을 옆에 둔 채로 自爆을 擇했다. 轟音과 함께 窓밖으로 屍身들이 튕겨져 나갔다. 어린이 6名을 包含해 最小 13名이 卽死했다. 生後 15日 된 아기 等 어린이 4名은 救助됐다. 어린이를 ‘人間 防牌’로 活用하는 것은 IS의 戰術 中 하나다. 이들에게 아이들은 ‘戰爭에 쓰이는 長斫(firewood)’이라는 말도 있다. 2017年 IS 根據地였던 이라크 北部 都市 모술에서는 허리에 爆彈을 두른 7歲 男子아이가 이라크 政府軍에 發見됐다. IS 隊員들이 移動할 땐 西方 聯合軍의 드론 攻擊을 避하기 위해 어린이와 女性을 同行時키祈禱 했다. 이런 卑怯한 戰術을 쓰는 건 IS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軍部는 市民들의 武裝 反擊을 無力化하기 위해 民家에서 拉致한 어린이와 女性들을 最前線에 앞세우고 銃擊戰을 벌였다. 시리아 政府軍도 2012年 叛軍이 攻擊하지 못하도록 8∼13歲 아이들을 집에서 끌어내 탱크나 政府軍 輸送 버스 앞에 묶었다. 탈레반은 2010年 美軍과 交戰하다 後退하면서 어린이 5名의 어깨를 나란히 묶어 美軍 앞에 세웠다. 아이들이 뒤를 볼 수도, 뿔뿔이 도망칠 수도 없게 잡아놓은 것이다. 戰爭의 慘禍 속에 있는 어린이의 모습은 人類를 覺醒하게 해왔다. 베트남戰이 한창이던 1972年 美軍의 네이팜彈 誤爆으로 온몸에 火傷을 입어 옷을 모조리 찢어버리고 알몸으로 내달리던 9歲 베트남 少女의 寫眞을 우리는 記憶한다. 1984年 蘇聯의 아프가니스탄 侵攻 當時 카메라를 또렷이 凝視하던 12歲 아프간 少女의 草綠빛 눈瞳子 亦是 이 戰爭에 無關心했던 世界人들에게 울림을 줬다. 2015年 터키 海邊에서 얼굴을 파묻은 채 屍身으로 發見된 세 살배기 시리아 難民 알란 쿠르디는 유럽의 難民 政策에 變化를 불러왔다. 사람은 苦難에 處한 어린이를 보면 아무리 먼 나라 일이라도 마음의 距離가 가까워진다. 지켜주고 싶은 本能이 發動한다. 아이에게 焦點을 맞춘 戰爭 寫眞들이 우리 記憶 속에 오래 刻印되는 것도 그런 吸引力 때문일 것이다. 美軍의 알쿠라이시 除去 作戰 直後 現場에서 撮影된 寫眞에는 아이들이 나오지 않는다. 半破된 建物 內部의 빨랫줄에 길이가 제各各인 兒童服 바지들이 遺品처럼 걸려 있을 뿐이다. IS 首魁 隱身處의 널브러진 세간 寫眞을 보고 있자면 그의 自爆으로 날벼락 같은 最後를 맞았을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人間 防牌는 사람의 本性을 逆利用하는 一部 勢力의 極惡함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른이 살자고 아이를 死地로 내모는 이 野蠻은 戰爭의 本質과 맞닿아 있다. 어떠한 戰爭에서든 어른들의 決定으로 아이들이 목숨을 빼앗긴다. 그런 수많은 無辜한 죽음들로 戰爭은 構成될 수밖에 없다. 現在 一觸卽發의 狀況인 우크라이나에서 戰爭이 난다면, 그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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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巨大한 체스板에 갇힌 우크라이나 사람들

    우크라이나 出身의 노벨 文學賞 受賞 作家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러시아의 統治에 짓눌린 소비에트聯邦 民草들의 생생한 證言을 冊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담았다. 이 冊에는 우크라이나에서 發生한 체르노빌 原電 爆發로 廢墟가 된 마을에 살았던 한 12歲 少女가 나온다. “나는 집에만 있어요. 우리 班 애들이 내가 白血病에 걸렸다는 걸 알아냈을 때, 내 옆에 안 앉으려 했어요. 나한테 닿을까 봐 무서워했어요. 醫師 先生님이 그러시는데요, 우리 아빠가 체르노빌에서 일해서 내가 아픈 거래요. 그래도 난 아빠가 아주 좋아요.” 災殃이 벌어지면 아이들은 無防備 狀態로 悲劇을 맞는다. 러시아의 侵攻 憂慮로 戰雲이 감도는 只今의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7年째 內戰 中인 우크라이나 東部 接境地 곳곳에는 狙擊手와 地雷를 警告하는 標識板이 있다. 아이들은 學校에서 地雷 避하는 方法을 배운다. 이곳의 16歲 女學生은 最近 外信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러시아가 크림半島를 侵攻한) 2014年에 女同生이 태어났어요. 저도 무서웠지만 그 갓난아기가 너무 걱정됐어요. 이제 다시 砲擊과 銃聲이 들려와 그때가 자꾸 떠올라요. 우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동생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같은 마을에 사는 80代 老夫婦는 말한다. “우리는 文盲인데, 第2次 世界大戰과 1947年 蘇聯 大飢饉에서도 살아남았어요. 하지만 只今은 每日 밤 잠들기 前 企圖하고, 살아서 幸福하니까 아침에 다시 祈禱합니다.” 89番째 生日을 앞둔 이웃집 할머니는 “요즘 밤마다 지붕 위로 銃알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서 잠이 안 온다. 내 人生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한다. 우크라이나는 땅이 넓고 肥沃해 유라시아의 代表的인 穀倉地帶다. 하지만 同時에 强大國들의 火藥庫라는 宿命을 안고 있다. 유럽 列强이 洞房으로 進出하는 橋頭堡였고, 러시아엔 黑海와 地中海로 나가는 唯一한 出口였다. 폴란드에 이어 獨逸, 그러곤 러시아의 支配를 받았다. 체르노빌 慘事 以前에도 1930年代 스탈린이 集團農業을 推進하며 우크라이나를 收奪해 數百萬 名이 굶어 죽은 ‘홀路度모르(기아 虐殺)’가 恣行됐다. 우크라이나는 1991年 러시아에서 獨立한 後에도 ‘戰爭 中이거나 戰爭을 準備하면서’ 30餘 年을 보내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繼續 손아귀에 쥔 채 西方과의 安保 緩衝地帶로 남기려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天然가스 供給 等 經濟·軍事的 목줄을 쥐고 親러 人事를 大統領에 앉혀 掌握力을 維持했다. 그럴수록 우크라이나에선 北大西洋條約機構(NATO·나토)와 유럽聯合(EU)에 加入해 러시아와의 惡緣을 끊어내려는 輿論이 거세졌다. ‘親러’와 ‘親西方’ 大統領이 交叉 執權하며 各各의 支持 基盤이 있는 우크라이나 東部와 西部는 分裂됐다. 親러 政權이 西歐化 熱望을 抑壓할 땐 오렌지 革命(2004年), 유로마이단 革命(2014年) 같은 市民 抵抗이 뒤따랐다. 유로마이단 革命으로 親러 政權이 崩壞하자 러시아는 곧바로 우크라이나 南端의 크림半島를 빼앗은 뒤 러시아系가 많은 우크라이나 東部地域의 分離獨立을 支援하며 分裂을 부추겼다. 只今 우크라이나 國境에는 10萬 名이 넘는 러시아軍이 集結해 있다. 러시아는 美國과 EU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加入을 不許하라”고 要求하고 있다. 나토가 코앞까지 東進해 오는 것은 坐視할 수 없는 安保 威脅이라는 것이다. 美國이 아프가니스탄에서 撤軍하는 等 遠距離 介入을 줄이고 있고, 臺灣을 두고 中國과의 角逐戰에 注力하고 있어 좋은 機會라고 본 것 같다. 러시아産 天然가스에 크게 依存하는 EU 國家들 亦是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形便이다. 조 바이든 美國 大統領은 “우크라이나 侵攻 時 經濟 制裁 等 超强勁 對應을 하겠다”고 警告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大統領에겐 큰 威脅이 되지 않을 것이란 分析이 많다. 美國으로선 軍事 介入까지 하기엔 負擔이 크고, 가만 놔두자니 中國에 自信感을 심어주는 結果로 이어질 수 있어 苦心하고 있다. 나라의 命運이 百尺竿頭에 있는 우크라이나는 親러와 親西方 間의 分裂이 極甚해 國會議員들이 亂鬪劇을 자주 벌이는 것으로 有名하다. 政治權의 無能과 腐敗에 幻滅을 느낀 國民들은 2019年 코미디언 出身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大統領으로 選出했다. 現在 國家情報局長과 安保補佐官 等 安保 컨트롤타워를 그의 개그맨 同僚들이 맡고 있다. 美國과 러시아의 ‘巨大한 체스板’에 갇힌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處地는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때 美蘇 冷戰의 最前方이었고, 이제는 美中 葛藤의 한복판에 선 우리와 겹쳐지는 대목이 적지 않아서다. 그들의 오랜 試鍊이 이제는 끝나기를 바라지만 우크라이나의 1月은 그 어느 때보다 殘忍할 듯하다. 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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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신광영]욕실에 갇힌 老人 살린 不在中 電話 50通

    그날 아침 老人의 집에선 아무 人기척이 없었다. 玄關門을 두드려도 應答이 없었다. 警察官은 强制로라도 門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홀로 사는 77歲 男性이 보름 넘게 連絡이 안 된다는 申告가 들어왔을 때부터 豫想된 狀況이었다. 警察官 2名과 消防隊員 4名이 집으로 들어섰을 때 內部는 찜질房처럼 후끈했다. 보일러가 켜진 狀態로 오랜 期間이 흐른 듯했다. 警察官과 隊員들은 房 3칸, 居室, 베란다로 各其 흩어졌다. 老人은 보이지 않았다. 크게 불러도 答이 없었다. 그때 안房을 搜索하던 隊員이 同僚들을 불러 모았다. 안房에 딸린 化粧室의 門이 잠겨 있었다. 門손잡이는 뜯겨져 없었고, 잠금 裝置만 걸려 있었다. 이番에도 强制 開放을 했다. 浴室 門을 살며시 열자 타일 바닥 위로 두 다리가 보였다. 隊員들은 呼吸을 가다듬고 內部로 들어섰다. 老人은 머리를 壁에 기댄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팔을 힘겹게 움직여 보였다. 門이 두 次例나 뜯기는 소리가 나는데도 氣力이 없어 소리를 내지 못한 듯했다. 隊員들은 서둘러 老人을 病院으로 移送했다. 老人은 한 坪 남짓한 浴室에서 불이 繼續 켜진 채로 보름假量 갇혀 있었다. 밤낮 區分이 안 돼 時間의 흐름도 느끼기 어려웠다. 샤워하러 浴室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門이 잠겨버린 것이었다. 警察은 “老人이 浴室 門을 열고 나오려 안간힘을 쓰다가 門고리가 빠진 것 같다”고 했다. 水道물을 마시며 渴症을 견디고, 보일러가 켜져 있어 低體溫症을 避할 수 있었던 게 그나마 多幸이었다. 警察은 保護者 連絡을 위해 老人의 携帶電話를 찾았다. 電話機는 寢臺 옆 充電器에 꽂혀있었다. 보름 동안 不在中 電話가 50餘 通 와 있었다. 老人은 電話벨이 繼續 울리는데도 浴室에 갇혀 받지 못하고, 救助 要請도 못 해 답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老人에겐 보름間 50通이 넘는 電話를 걸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를 살린 것은 바로 그 不在中 電話들이었다. 그의 社會的 關係網에 危險 狀況이 捕捉된 것이다. 老人의 두 親舊는 그와 連絡이 닿지 않자 집에 찾아와 門을 두드리고, 아파트 管理事務所에 確認을 請하고, 警察에 申告했다. 그들은 “보름 前쯤 우리 집에서 같이 김장을 담그고 수肉도 해먹고 헤어졌는데 그 뒤로 이 親舊가 連絡이 안 돼요. 꼭 좀 찾아주세요”라고 申告했다. 老人은 構造 當日인 7日 午後 아들의 保護를 받으며 退院했다. 老人의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都市에 살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무뚝뚝한 便이라 平素 살갑게 지낸 것은 아니지만 間間이 살피고 連絡해 왔다고 한다. 코로나19로 接觸이 뜸해지고 몇 週 바쁘게 지내는 사이 아버지에게 아찔한 일이 벌어진 듯했다. 요즘은 홀몸老人의 집에 活動量感知器, 應急呼出機 等을 設置해 孤獨死를 줄이는 ‘福祉 技術’이 開發되고 있다. 通信社들은 ‘AI 安否電話’ 서비스를 出市하고 一部 地自體는 管內 어르신들에게 ‘돌봄 電話’를 돌린다. 尖端 技術과 찾아가는 行政도 必要하지만, 一旦 나부터 父母님께 더 자주 連絡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광영 社會部 次長 neo@donga.com}

    •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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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救助要請 받은 警察이 構造要請 한다며 逃亡쳤다 [光化門에서/신광영]

    두 警察官은 빌라 2層 階段에서 마주쳤다. 新入 巡警은 3層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經歷 20年 次인 警衛는 올라가던 길이었다. 몇 秒 前 3層에선 悲鳴이 울렸다. 윗집 男子가 凶器로 엄마의 목을 찌르는 것을 보고 딸이 외친 소리였다. 그 光景을 본 巡警이 아래로 내달리다 先任者와 階段에서 遭遇한 것이다. 經緯 옆에 있던 被害 女性의 男便은 “빨리 올라가자”고 재촉했다. 經緯에겐 拳銃이, 巡警에겐 테이저건이 있었다. 하지만 두 警察官은 1層으로 내려가 빌라 밖으로 나갔다. 男便은 혼자 3層에 올라갔다. 한 坪 남짓한 집 앞 複道에 夫人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딸은 그 좁은 곳에서 凶器 攻擊을 받고 있었다. 男便은 칼을 든 男子를 맨손으로 制壓하면서 여러 곳을 찔렸다. 15日 發生한 仁川 凶器 亂動 事件은 112 申告者가 凶器에 찔리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出動 警察官이 등을 돌린 事件이다. 警察의 不實 對應이 그동안 적잖이 있었지만 大部分 無能과 未熟함, 後進的 治安 시스템의 問題였다. 이番처럼 市民을 救하려는 意志 自體를 抛棄했던 前例는 찾기 어렵다. 警察官이라면 凶惡犯을 簡單히 制壓하지는 못하더라도 市民을 救하기 爲해 危險을 무릅쓸 것이라는 最小限의 期待가 무너진 것이다. 犯罪者가 警察을 두려워하는 건 나를 알아보는 瞬間 어떻게든 잡으려 들 것이라는 걱정 때문인데 그런 前提마저 흔들리게 됐다. 두 警察官은 現場을 벗어난 理由에 對해 “救助 要請을 하려 했다”고 解明했다. 세월호 事件 當時 沈沒하는 배에 乘客들을 놔둔 채 ‘나 홀로 脫出’을 한 船長과 船員들이 “海警에 救助 要請을 했다”고 主張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事件 後 警察은 敎育 訓鍊 强化, 매뉴얼 整備 等 對策을 쏟아내고 있다. 必要한 措置이긴 하지만 事件 現場은 豫測이 不可能해 언제든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걸 메우는 것은 結局 出動 警察官의 職業意識과 犧牲精神이다. 平凡한 市民도 危險에 處한 사람을 보면 構造에 나서는 境遇가 많다. 2019年 慶南 진주시의 한 아파트에서 벌어진 ‘안인득 放火 殺人 事件’ 때 管理事務所 收拾 職員이 많은 住民을 살렸다. 當時 안인득은 아파트 4層 집에 불을 낸 뒤 煙氣를 避해 1層으로 내려오는 住民들을 노렸다. 이 職員은 안인득이 휘두른 凶器에 찔린 뒤에도 꼭대기層(10層)까지 집집마다 다니며 “아래로 가면 안 된다”고 알렸다. 管理室 收拾 職員도 緊急 狀況에선 이 같은 職業精神을 發揮한다. 하물며 警察이 112 申告者가 칼에 찔리는 것을 보고도 外面한다면 政府가 警察官을 제대로 選拔해 훈련시키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只今의 警察官 採用制度가 職業意識과 使命感을 檢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警察 公務員 採用 때 英語, 韓國史, 刑法 等 筆記試驗 比重이 50%를 차지한다. 知識 習得 能力이 當落을 左右한다. 美國, 캐나다 等 外國에도 筆記試驗이 있다. 하지만 實際 現場 狀況을 提示한 뒤 指導 理解, 몽타주 識別, 容疑者와 證人 찾기 等 職務 適性을 主로 評價한다. 特히 志願者의 周邊人, 高校 時節 敎師, 大學敎授 等을 面談해 志願者의 性向이 警察 業務에 맞는지 數個月間 資質을 檢證한다. 이番 事件으로 非難 輿論이 커지자 一部 警察官은 “우리도 職場人”이라는 反應을 보인다. 그들 亦是 한 家庭의 家長이자 所重한 生命인 것은 맞다. 하지만 警察이 停年과 年金이 保障되는 安定的인 職場으로 그친다면 存在할 理由가 없다. 警察官은 모두가 뒷걸음질 칠 때 毅然하게 威脅에 맞서는 職業人이다. 이 當然한 前提를 다시 세워야 하는 課題가 警察 앞에 놓여있다.신광영 社會部 次長 neo@donga.com}

    • 202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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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신광영]고성능 安全 設備로 우리는 더 安全해졌을까

    지난달 서울 衿川區에서 ‘불 없는 火災 事件’이 있었다. 불이 나지도 않았는데 地下 工事場에서 二酸化炭素 消火設備가 作動돼 作業者 4名이 窒息死했다. 불을 잡으려고 設置한 消火設備가 사람을 잡은 事件이었다. 이 消化設備는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와 달리 高濃縮 二酸化炭素를 放出한다. 불난 곳의 酸素 濃度를 확 낮춰 불의 숨筒을 끊는 方式이다. 불이 살 수 없는 環境에선 사람도 瞬息間에 窒息할 수 있다. 一般人에겐 낯선 消火設備지만 意外로 가까이 있다. 展示物에 물이 묻으면 안 되는 美術館, 博物館뿐 아니라 地下鐵驛, 百貨店, 病院 等에 設置돼있다. 警察이 이番 事件의 經緯를 搜査하고 있는데 두 가지 事實이 이미 드러났다. 失手든 故意든 누군가 消火設備를 作動시키는 스위치를 눌렀고, 二酸化炭素가 放出되기 前 警報가 울렸지만 相當數가 卽時 待避하지 않았다는 點이다. 安全 設備는 여러 딜레마 속에서 妥協을 거치며 만들어진다. 한 例로 아파트 屋上 門을 열어놓을지 말지도 簡單치 않은 問題다. 잠가놓자니 火災 時 住民들이 待避할 수 없고, 열어놓자니 虞犯 地帶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온 게 火災가 感知될 때만 열리는 自動 開閉裝置다. 이番 事件 現場에서 消化設備 作動 버튼은 누구나 누를 수 있도록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었다. 버튼을 꽁꽁 숨겨놓거나 누를 때 번거롭게 해놓으면 잘못 누를 可能性은 줄지만 정작 緊急 狀況에서 設備를 作動시키기 어렵다는 點을 考慮한 것 같다. 補完策으로 放出 버튼과 放出 遲延 버튼을 나란히 設置했다. 或如 잘못 눌렀다면 바로잡을 수 있게 한 것이다. 하지만 빈틈이 많은 妥協策이었다. 두 버튼은 色깔만 다를 뿐 크기가 같다. 訓鍊받은 專門家가 아니면 阿鼻叫喚의 狀況에서 헷갈리기 쉽다. 이番 事件에서 버튼을 눌렀던 사람은 바로 옆 階段으로 待避하지 않고 오히려 內部로 들어갔다가 結局 숨졌다. 警察은 그가 二酸化炭素 放出을 멈추려다 버튼을 잘못 눌렀을 可能性을 調査하고 있다. 無色無臭人 二酸化炭素에 色이나 냄새를 넣어 사람이 直觀的으로 危險을 알아챌 수 있게 하지 않은 點도 問題였다. 그렇다고 消火設備만 탓하기는 어렵다. 設備가 作動하기 前 待避 警報가 울렸을 때 卽時 待避하지 않은 作業者가 많았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눈앞에 불이나 煙氣가 보이지 않아 待避를 躊躇했을 수 있다. 또 非常벨이 잘못 울리는 狀況을 자주 經驗하면 警報가 들려도 深刻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人間에겐 感覺의 ‘恒常性’을 維持하려는 本能이 있다. 外部 刺戟을 全部 받아들이면 處理해야 할 負擔이 너무 커지므로 選擇的으로 刺戟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주어진 環境에 適應하고 나면 自然스레 安全에 둔감해질 수 있다. 安全 設備가 高度化된다고 해서 반드시 더 安全해지는 것은 아닌 理由가 거기에 있다. 安全벨트가 普遍化되고 車路가 잘 닦여 있으면 運轉者가 쉽게 速度를 높이듯, 사람마다 受容 可能한 危險의 總量이 있어서 安全한 環境에 있으면 그만큼 緊張을 늦추기 쉽다. 安全을 지키는 것은 人間의 本性과 맞서는 일이다. 가만히 두면 危險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게 人間이므로 持續的인 敎育으로 本能을 거스를 수 있게 해야 한다. 요즘처럼 高性能의 安全 設備가 많아질수록 우리가 어떤 設備의 影響圈에 있는지 正確히 認知하지 못하면 언제든 ‘安全의 逆襲’을 當할 수 있다.신광영 社會部 次長 neo@donga.com}

    • 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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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신광영]음주운전자 떨게 하는 生活密着型 不利益

    飮酒運轉으로 처음 摘發된 初犯들은 警察에서 調査를 받고 나면 大槪 이런 質問을 해온다고 交通事故調査係 警察官들은 말한다. “或是, 會社에 通報가 되나요?” 罰金이나 免許取消 處分보다 飮酒運轉 事實이 會社에 알려질까 봐 戰戰兢兢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善處를 付託하며 反省文과 家族들 歎願書를 恭遜하게 내민다. 再犯들은 다르다. 調査 내내 堂堂하다. 飮酒 違反者가 겪는 不利益이 甘受할 만하다는 걸 經驗으로 안다. 처음 걸리면 300萬~500萬 원, 그다음은 1000萬 원 程度인 罰金은 내면 그만이다. 1, 2年 免許 없이 사는 것도 해보니 할 만하다. 큰 事故만 안 내면 3番까지는 걸려도 實刑을 살지 않는다. 公務員이 아니면 會社에 通報되지도 않는다. 그래서인지 調査室에서 警察官에게 속내를 드러낼 程度로 여유롭다. “刑事님, 술 마시고 運轉하면 핸들링이 確實히 ‘스무쓰’해요.” 飮酒運轉을 한 사람 中 44%는 또다시 술에 醉해 運轉대를 잡는다. 再犯까지 걸리는 期間도 갈수록 줄어든다. 처음 摘發된 後 두 番째 摘發까지는 536日, 3回까지는 419日, 4回까지는 129日이 걸린다. 團束에 걸려본 經驗이 오히려 飮酒運轉에 對한 拒否感과 두려움을 덜어주는 셈이다. 飮酒運轉은 特異한 犯罪다. 運轉者가 罪를 짓고도 罪責感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當場은 被害者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용케 안 걸리고 無事 歸家하면 完全 犯罪로 끝난다. 泄瀉 사람을 치더라도 過失犯의 禮遇를 받는다.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運轉하기로 마음먹은 것인데 法은 “殺人이나 傷害의 故意는 없었던 것 아니냐”며 寬容을 베푼다. 再犯者의 飮酒運轉은 自身이나 他人에게 致命傷을 입힌 뒤에야 멈춘다. 最近 50代 치킨 配達夫, 두 아이를 둔 30代 엄마, 알바 後 歸家하던 20代 女大生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모두 再犯者였다. 飮酒運轉이 恣行될 때마다 潛在的 被害가 차곡차곡 쌓이는데 慘事가 現實化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只今의 制度다. 飮酒 測定 拒否 等 嫌疑로 12日 拘束된 張濟元 議員의 아들 래퍼 張龍峻 氏(活動名 노엘)는 2019年에도 서울 都心에서 時速 119km로 달리다 오토바이를 치었다. 血中알코올濃度가 免許取消 數値를 크게 웃도는 0.129%였다. 그 渦中에 ‘運轉者 바꿔치기’를 하고 逃走했는데 被害者에게 3500萬 원을 주고 合意해 懲役 1年 6個月, 執行猶豫 2年을 宣告받았다. 그 程度 代價는 堪當할 만했는지 그는 不過 1年餘 만에 飮酒 測定 不應罪를 저질렀다. 張 氏 앞에 펼쳐진 ‘再犯者의 길’을 보고 있노라면 이番에 拘束된 것이 그에겐 다행스러운 일이다. 또 飮酒運轉을 하다 끔찍한 人命事故를 내기 前에 犯罪 習慣을 바로잡을 機會가 생겼기 때문이다. 警察署 調査室에서 飮酒運轉者들이 보이는 態度에는 問題의 解法이 숨어 있다. 그들은 法定刑만 巨創한 觀念的 處罰보다 皮膚로 와닿는 不利益에 銳敏하다. 自身이 屬한 集團에 飮酒運轉 事實이 알려지고, 오랫동안 運轉을 못 하게 될까 봐 걱정한다. 常習犯에 對해선 身上을 公開하는 濠洲나, 運轉免許를 平生 剝奪하는 노르웨이처럼 原因을 攻掠해야 效果를 期待할 수 있다. 生活密着型 不利益이 執拗하게 이어지는 것을 飮酒運轉者들은 두려워한다.신광영 社會部 次長 neo@donga.com}

    • 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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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신광영]6·25고아 품은 폴란드 敎師… 아프간 아이들 맞게 된 우리

    “蹴球靴 언제 와요?” 忠北 鎭川郡 國家公務員人材開發院에 머물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은 요즘 틈만 나면 職員들에게 이걸 묻는다. 職員들이 얼마 前 아이들 발 사이즈를 재고 간 以後 난生처음 蹴球靴를 新語볼 期待에 부풀어 있다. 아프간에선 蹴球 할 엄두를 못 냈던 女子아이들도 20名 넘게 蹴球를 始作했다. 하루 1時間의 野外活動 時間에 運動場은 뛰노는 아이들로 분주해진다. 지난달 入國한 아프간 特別寄與者 家族 390名 中 約 60%는 어린이 等 未成年者다. 우리에게도 戰爭을 避해 먼 나라로 떠났던 아이들이 있었다. 1953年 봄, 南北韓 어린이 1200餘 名을 태운 列車가 폴란드 시골의 프와코비遞易에 들어섰다. 6·25戰爭 통에 父母를 잃은 孤兒들이었다. 當時 김일성은 10萬 名이 넘는 南北韓 孤兒들을 돌볼 수 없게 되자 東유럽 國家에 保育을 委託했다. 아이들을 맞은 건 폴란드人 保育院 敎師들이었다. 그들 눈에 비친 아이들은 戰爭의 衝擊과 父母를 잃은 喪失感에 떨고 있었다. 아이들은 飮食이 있는데도 틈틈이 숲에서 고사리와 이끼를 캐 왔고, 寢臺와 이불이 있는데도 爆彈이 터질까 봐 寢臺 밑에 들어가 잤다. 敎師들은 寢臺 밑에서 惡夢을 꾸는 아이들을 달래며 寢臺에 눕히고 밤새 돌봤다. 敎師들은 아이들에게 自身들을 마마(엄마), 파파(아빠)로 부르게 했다. 敎師들은 以後 60餘 年이 지나 80, 90代 老人이 되어서도 當時 아이들이 했던 韓國말을 뚜렷이 記憶했다. “빨리는 서두르는 거, 食事는 먹는 거. 아이들은 ‘食事, 빨리’ 이 말을 자주 했어요.” 한 白髮의 女敎師는 아이들이 故鄕을 생각하며 부르던 韓國 動搖를 그대로 記憶해 불렀다. 敎師들의 보살핌 속에 安定을 찾아가던 아이들은 폴란드에 온 지 6年 만인 1959年 모두 北送됐다. “엄마, 우리는 가요.” 이 말을 하며 아이들은 울었다. 아이들은 北韓에 돌아간 뒤 保育院에 숱하게 便紙를 보냈다. 院長에게 繼續 便紙를 보내 自己를 데려가 달라고 哀願하는 아이도 있었다.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年)에는 아이가 그런 便紙를 보내다가 北韓 當局에 걸릴까 봐 答狀을 끊어야 했던 保育院 院長이 나온다. 90代 中盤의 그는 주름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아이 이름 세 글字를 말하며 “사무치게 未安하다”고 했다. “우리도 慘酷한 歷史를 겪었어요. 그것은 너무도 아픈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사랑한다고 꼭 傳해주세요.” 폴란드 敎師들은 1939∼1945年 6年間 獨逸 나치軍의 蠻行을 겪었다. 길가에 屍體가 널려 있는 것을 보며 자랐다. 父母가 아우슈비츠 收容所로 끌려가 保育院에서 자란 敎師들도 있었다. 이들은 먼 나라 戰爭孤兒들의 傷處를 끌어안으며 傷處의 連帶를 이뤄냈다. 13日 鎭川 人材開發院에서 아프간人들은 記者들과 만났다. “아프간에선 너무 危險하고 不安했어요. 모든 삶을 抛棄하고 온 저희에게 安全한 곳을 주고 사랑을 베풀어 줘 韓國에 感謝합니다.” 侵略과 戰爭의 傷處를 딛고 일어선 우리는 오랜 內戰의 生存者들을 보듬는 ‘傷處 입은 治癒者’가 될 수 있을까. 신광영 社會部 次長 neo@donga.com}

    • 2021-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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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신광영]그날 밤 保護觀察館은 왜 車 핸들을 돌렸을까

    電子발찌 附着自認 강윤성의 집까지는 車로 13分 距離였다. 지난달 27日 서울東部保護觀察所 黨職者들은 강윤성이 夜밤에 無斷 外出했다는 警報를 듣고 出動하던 길이었다. 0時 35分頃 그의 집에 거의 到着했을 때였다. 職員들은 그와 通話를 마치고는 車 핸들을 돌렸다. 56歲인 강윤성은 27年을 監獄에서 보냈다. 17歲 때부터 14次例 監獄을 오갔다. 나오면 몇 달 뒤 더 큰 罪로 다시 들어가기를 反復하는 ‘犯罪 人生’이었다. 올 5月 出所 前 15年의 收監生活은 强盜强姦으로 5年을 살고 나온 지 4個月 만에 벌인 짓의 代價였다. 그는 女性 혼자 運轉하는 車輛을 들이받은 뒤 女性이 車에서 나오는 瞬間 拉致해 돈을 빼앗고 性醜行했다. 30日間 40名이 當했다. 保護觀察觀이 出動했던 그날 밤, 無斷 外出은 강윤성이 犯行 過程에서 唯一하게 내비친 빈틈이었다. 當時 그의 집에는 凶器와 工業用 切斷機, 몇 時間 前 殺害한 女性의 屍身이 있었다. 이미 벌어진 慘劇과 앞으로 벌어질 시나리오가 집 안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집 앞까지 온 保護觀察官들은 “便宜店에 다녀왔다”는 강윤성의 말에 車를 돌렸다. 그의 異常行動을 感知했던 발목의 足鎖는 그 瞬間 無力化됐다. 當時 保護觀察所 車에는 2人 1條의 黨職者 2名이 타고 있었다. 서울 東部地域 電子발찌 附着者 110名이 이들의 監督 對象이었다. 現場에 出動하면 携帶用 機器로 나머지 109名의 動線을 볼 수 있지만 有事時 卽刻的인 對應이 쉽지 않다. 그래서 附着者가 집에 돌아온 것으로 確認되면 바로 現場에 가는 代身 追後에 離脫 事由를 調査하는 게 慣行이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調査를 보면 電子監督 部署 保護觀察館의 19%가 電子발찌 附着者로부터 暴行을 當한 적이 있다. 辱說이나 脅迫, 侮辱을 當한 境遇는 76%다. 이들의 가장 큰 苦衷은 ‘反抗的인 附着者들과의 關係 形成’이다. 언제 事件이 날지 몰라 不安하고, 制裁 手段이 不足해 附着者에게 끌려 다닌다고 한다. 保護觀察所 關係者들은 “萬若 그때 黨職者들이 집에 들어가려 했다면 致命的인 攻擊을 當했을 것”이라는 自嘲 섞인 反應도 보인다. 강윤성이 殺害한 女性 屍身을 집에 두고 버젓이 無斷 外出을 敢行한 것은 그렇게 해도 꼬리가 안 잡힐 거라고 自信했기 때문일 수 있다. 집에 屍身이 있을 可能性을 想定하지 못한 것은 保護觀察館 個人에게 責任을 묻기 어려운 ‘시스템的 無能’의 結果다. 最惡을 想像하는 能力은 想像한 것을 檢證할 수 있게 運身의 幅이 保障될 때 생겨난다. 더 많은 豫算을 들여 監視者를 늘리고, 이들에게 더 剛한 權限을 附與해 다른 基本權의 犧牲을 甘受해야 可能한 일이다. 강윤성의 집에 5次例나 갔지만 令狀이 없어 番番이 되돌아온 警察 亦是 門을 뜯고라도 들어가게 하려면 一部 人權侵害 素地를 容認하는 負擔을 覺悟해야 한다. 電子발찌는 犯罪者의 社會 復歸와 市民의 安全을 折衷하는 方案으로 導入됐다. 犯罪者라도 罪값을 치른 後에는 삶을 이어가야 하니 말이다. 강윤성 事件은 그들을 품기 위해 치러야 할 ‘共存 費用’李 만만치 않음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신광영 社會部 次長 neo@donga.com}

    •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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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신광영]유죄 推定의 危險 일깨운 ‘哭聲 事件’

    被害者는 17歲의 知的障礙 女性이었다. 그는 아랫집에 사는 50代 男性을 犯人으로 指目했다. 被害 陳述도 具體的이었다. 아랫집 男性 金某 氏는 嫌疑를 否認했다. “被害者를 본 記憶이 없다”고 했다. 警察과 檢察, 法院은 被害者의 말을 믿었다. 1審 法院은 2017年 金 氏에게 懲役 6年을 宣告했다. 지적장애 2級인 未成年者를 집과 모텔에서 3次例 性暴行해 罪質이 나쁜데도 뻔뻔하게 犯行을 否認한다며 무겁게 處罰했다. 金 氏에 對한 檢察 公訴狀과 法院 判決文에는 ‘被害者의 知的 能力에 비춰’라는 表現이 많이 나온다. 金 氏가 “被害者 陳述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抗辯할 때마다 어김없이 登場한다. “知的 能力이 不足한 被害者가 모텔 相互를 正確하게 記憶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꾸며낸 이야기라면 그럴듯하게 꾸며냈을 것인데 그렇지 않다”. “被害者가 거짓말을 할 理由가 없다.” 被害者는 어려서부터 全南 谷城에서 姑母, 姑母夫와 한집에 살았다. 아버지는 死亡하고 어머니는 精神障礙人 施設에 있어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姑母 夫婦는 조카를 學校에 보내지 않고 飼料 配達 일을 시켰다. 被害者는 虐待와 暴行 속에 자랐다. 姑母를 무서워했다. 被害者는 “加害者가 잠겨 있는 門을 열고 집에 들어왔다”고 警察에 陳述했다. “잠긴 門을 加害者가 어떻게 열었느냐”는 質問에는 答하지 않았고, 警察은 더 묻지 않았다. 警察은 被害者가 犯行 場所로 指目한 모텔을 踏査한다면서 看板 寫眞만 찍고 왔다. 陳述 內容이 맞는지 建物 內部를 確認하지 않았다. 모텔에는 事件 當時 閉鎖回路(CC)TV 映像이 남아있었다. 警察은 이것도 살펴보지 않았다. 被害者는 加害者가 自身을 車에 태워 모텔에 갈 때 앞 琉璃에 내비게이션이 달려있었다고 했는데, 金 氏의 車 내비게이션은 앞 琉璃가 아닌 運轉대 옆에 埋立돼 있었다. 여러 疑問에도 金 氏에 對한 有罪 判決은 2審 裁判에서도 뒤집힐 幾微가 보이지 않았다. 宣告 期日을 며칠 앞두고 被害者가 法廷에 나왔다. 當時 被害者는 姑母 집에서 나와 다른 地域에 살고 있었다. 1年 넘게 홀로 事件을 파헤쳐 온 金 씨의 딸이 가까스로 被害者를 搜所聞해 事實을 말해 달라고 付託했다. 被害者가 證言臺에서 한 말은 裁判部를 混亂에 빠뜨렸다. “저 아저씨가 아니에요. 姑母夫가 그랬어요.” 姑母는 男便이 眞犯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도 조카에게 “아랫집 아저씨가 한 짓”이라고 陳述할 것을 指示했다. 被害者는 “姑母에게 맞으면 너무 아파서” 그 말에 따랐다고 했다. 被害者가 警察 調査를 받을 땐 늘 姑母가 保護者로 同席했다. 知的 能力에 비춰 陳述에 限界가 있을 것이란 搜査機關과 法院의 判斷과 달리 被害者는 被害 狀況을 正確하게 記憶했다. 앞 琉璃에 내비게이션이 달린 車輛은 다름아닌 姑母夫의 車였다. 警察이 열어보지 않았던 모텔 CCTV에는 姑母夫가 被害者를 데리고 들어가는 場面이 담겨있었다. 被害者의 陳述을 조금만 誠意껏 確認했다면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金 氏가 1年 가까이 抑鬱한 獄살이를 하는 동안 被害者는 眞犯과 한집에 살아야 했다. 以後에도 性暴力이 持續되자 結局 도망쳤다. 檢·警과 法院은 搜査와 裁判 過程에서 被害者에게 憐憫을 느꼈을 법하다. 犯人을 斷罪해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有罪 推定의 誘惑에 빠지면 冷徹한 檢證이 必要할 때 豫斷과 推定으로 빈틈을 메우게 된다. 그 結果 實體가 밝혀지지 않으면 被害者는 벼랑 끝으로 더 내몰린다. 金 氏에겐 “反省하지 않는다”며 懲役 6年의 重刑을 宣告했던 法院은 眞犯인 姑母夫에게 懲役 2年 6個月을 宣告했다. 罪를 뉘우치고 있고, 被害者와 合意했다는 게 減輕 事由였다. 다만 誣告罪가 認定돼 姑母夫는 懲役 3年 6個月, 姑母는 懲役 7年에 處해졌다. 被害者가 報復 危險을 무릅쓰고 證言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繼續 懲役을 살았을 金 氏는 2019年 1月 2審에서 無罪 判決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獄살이를 했던 傷處가 아물기는 어렵다. 性暴行犯이라는, 이미 찍혀버린 烙印度 잘 지워지지 않는다. 올 6月 法院은 金 氏가 國家를 相對로 提起한 損害賠償 請求를 棄却하며 國家의 責任이 없다고 判決했다. 搜査機關과 法院이 故意로 誤判을 한 것은 아니라는 理由에서였다. 謝過를 받고 싶다는 金 氏의 要求에 警察은 “檢事가 起訴했다”고 하고, 檢察은 “法院이 判斷했다”고 하고, 法院은 “遺憾”이라고 한다. 性暴力 被害者를 危險에 빠뜨리고 公權力에 依한 無辜한 被害者를 만들어 낸 責任은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 됐다.신광영 社會部 次長 neo@donga.com}

    • 202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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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신광영]음식물쓰레기 늪에 빠진 한 淸掃夫의 외로운 죽음

    쓰레기 淸掃夫의 作業服은 螢光色이다. 깜깜한 새벽에 거리에서 일하려니 ‘保護色’ 유니폼을 입는다. 낮에 집 앞에 쓰레기가 내놓여 있으면 美觀을 해치고, 사람들 틈으로 淸掃車가 지나면 惡臭와 騷音 民願이 많아진다고 한다. 淸掃夫들은 淸掃車 뒤便 작은 발板 위에 발을 딛고 道路를 누빈다. 飮酒 車輛에 치여 죽거나 다치는 일이 생기지만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빠르게 쓰레기를 치우려는 苦肉之策이다. 13日 釜山에서 飮食物쓰레기를 處理하다 貯藏庫에 墜落해 숨진 50代 淸掃勞動者 亦是 미끄러운 발板 위에서 作業을 했다. 그는 收去車가 飮食物쓰레기를 貯藏庫 안으로 잘 비워낼 수 있게 삽으로 殘餘物을 긁어내고 있었다. 時間은 새벽 3時, 螢光色 作業服 차림이었다. 그가 깨끗이 긁어내야 다시 收去하러 나가는 트럭이 길거리에 汚物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事故 當時 그가 서 있던 쓰레기處理場 바닥은 겨울 氷板길처럼 미끄러웠다. 하루 數十 臺의 收去車가 오가며 바닥은 飮食物 기름氣와 濕氣로 겹겹이 코팅됐다. 그가 갑자기 中心을 잃고 巨大한 늪 속으로 墜落하는 場面이 담긴 閉鎖回路(CC)TV를 보면서 平素 飮食物쓰레기를 버릴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집 밖의 飮食物쓰레기 收去桶 門을 열 때면 나는 惡臭와 不快한 비주얼을 被害 마스크 쓴 얼굴을 限껏 뒤로 돌린다. 飮食物들을 서둘러 收去桶에 털어 넣고 繼續 고개를 돌린 채로 門을 닫는다. 그러곤 쓰레기가 담겼던 비닐이 皮膚에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아 비닐 쓰레기桶에 후다닥 던진다. 눈을 避하고 코를 틀어막았던 그런 쓰레기가 하루 數十 t씩 모이는 곳이 그의 일터였다. 事故 當時 3m 깊이의 貯藏庫에 飮食物쓰레기는 1m만 차 있었다. 살아나올 수 있었을 것 같지만 요즘 같은 暴炎에는 飮食物쓰레기에서 水分이 많이 나와 늪이 되어 버린다. 固體라면 딛고서, 液體라면 헤엄쳐서라도 나왔을 텐데 늪은 허우적거릴수록 깊이 빠져든다. 그는 飮食物찌꺼기에 氣道가 막혀 窒息死로 生을 마감했다. 이런 危險을 職員들도 알고, 業體 側도 알았지만 貯藏庫 周邊에는 사다리도, 救命튜브度, 하다못해 밧줄도 없었다. 2人 1組로 함께 勤務했던 職員은 크레인을 動員해 同僚를 救하려다 그 亦是 貯藏고 안으로 墜落해 重傷을 입었다. 두 달 前인 5月 24日 새벽 3時 같은 地域의 다른 飮食物쓰레기 處理場에서도 30代 職員이 비슷한 事故로 목숨을 잃었다. 以後에도 最小限의 生存 裝置는 갖춰지지 않았다. 더럽고, 危險하고, 힘든 ‘3D’ 業種 從事者들 없이는 單 하루도 都市를 支撐할 수 없다. 그들만큼 必須不可缺한 職業人도 드물다. 하지만 ‘3D’는 ‘3비(非)’ 取扱을 받는다. 勞苦는 記憶되지 않고, 危險은 改善되지 않으며, 事故 責任은 제대로 糾明되지 않는다. 淸掃夫의 螢光色 作業服은 消防官, 警察官, 軍人 같은 制服 公務員(Man In Uniform)의 制服과 比較해도 무게가 決코 가볍지 않다. 얼룩진 作業服을 입고 새벽 勤務를 나서는 그들에게 우리는 모두 빚지고 있다.신광영 社會部 次長 neo@donga.com}

    • 20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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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신광영]김학의 事件의 本質 누가 흐렸나

    金學義 前 法務部 次官 事件 搜査가 8年째 이어지고 있다. 數詞는 生物이라는데 이 事件만큼 力動的인 事例도 흔치 않다. 攻擊과 守備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登場人物의 스펙트럼이 다채로워졌다. 본 事件의 ‘主演’인 金 前 次官과 建設業者 윤중천 氏는 뒤로 빠지고 어느새 ‘助演’들로 舞臺가 채워졌다. 國民的 公憤을 불러일으켰던 性接待 疑惑은 事實로 밝혀졌지만 公訴時效가 지나 處罰할 수 없게 됐다. 只今의 金學義 事件은 金 前 次官이 公權力 濫用의 被害者인 事件이다. “高位 公職者와 建設業者의 癒着이라는 本質을 봐야 한다.” 金 前 次官을 不法 出國禁止하는 데 關與했거나, 出金 過程에 違法이 있었는지 밝히려던 檢察 搜査를 妨害한 嫌疑를 받는 사람들은 이런 主張을 하고 싶을 것이다. 搜査를 앞둔 金 前 次官이 2019年 3月 그날 밤 泰國行 飛行機에 오르도록 놔뒀어야 하느냐는 抗辯도 있을 수 있다. 眞相 糾明을 위해 當時 特段의 措置가 必要했던 것은 맞다. 性接待 事件에 對한 2013年 警察의 1次 搜査, 以後 2次例의 檢察 搜査는 不實했다. 搜査의 基本인 金 前 借款에 對한 押收搜索과 計座追跡이 搜査 始作 6年 만인 2019年에야 이뤄졌다. 그해 大檢 過去事眞相調査團의 勸告로 出帆한 檢察 搜査團은 出帆한 지 不過 4日 만에 그런 强制搜査에 着手했다. 그 程度로 앞서 進行된 搜査에서 해놓은 게 없었다. 金 前 次官 性接待 事件 搜査는 ‘舊體制’와의 戰爭이기도 했다. 檢事의 스폰서 慣行은 公職者가 地位를 惡用해 私的 利益을 누린 代表的 舊惡이었다. 嫌疑를 最初 認知한 警察이 高檢長 出身의 法務部 次官을 搜査하는 것 亦是 慣行에 對한 挑戰이었다. 警察이 檢事를 相對로 벌이는 搜査는 檢察에서 番番이 막히던 때였다. 文在寅 政府가 이 問題를 바로잡겠다고 나선 것은 充分히 名分이 있었다. 하지만 舊態를 淸算하겠다면서 같은 舊態를 反復하는 逆說이 벌어졌다. 大統領의 指示가 떨어지자 大統領民政首席祕書官室과 法務部, 大檢 幹部들이 一絲不亂하게 움직여 要件에 맞지 않는 緊急 出國禁止를 敢行했다. 그들 中 一部는 出金 經緯를 밝히려던 搜査팀의 搜査까지 撫摩한 嫌疑를 받고 있다. 이 一連의 事態를 搜査한 水原地檢 搜査팀은 大檢의 反對에 부닥쳐 李光喆 民政祕書官을 起訴하지 못할 뻔했다가 팀 解體 하루 前 奇襲作戰 하듯 가까스로 起訴했다. 前半期 6年이 不實·縮小 搜査였다면 金 前 次官 出金 以後 後半期는 節次를 건너뛴 暴走 機關車式 搜査였다. 指向點이 달랐을 뿐, 힘을 가진 쪽이 덜 가진 쪽을 찍어 누르는 作動 原理는 다르지 않았다. 不法 出金 搜査 自體가 事件의 本質을 흐린 것이 아니라 違法的으로 出金 措置가 내려지면서 本質이 汚染되기 始作한 것이다. 出金 過程의 違法 行爲에 對한 責任을 回避한 채 金 前 次官에게만 責任을 물으려 한다면 金學義 事件은 政治權力이 ‘選擇的 正義’를 追求한 事件으로 記錄될 것이다. 同時에 金 前 次官을 國家 權力의 被害者로 格上시켜 免罪符를 주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 事件의 本質이 가장 深刻하게 흐려지는 結末이다. 신광영 社會部 次長 neo@donga.com}

    • 2021-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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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신광영]성폭력 加害者 死亡했다고 ‘없었던 事件’으로 덮는다면

    性醜行을 當한 뒤 事件 撫摩 壓力에 시달리다 지난달 極端的 選擇을 한 空軍 姨母 中士는 加害者로부터 이런 文字를 받았다.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加害者의 이 말은 이 中士를 向한 그 어떤 脅迫보다 卑劣한 것이었다. 眞實은 묻어버리고,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멍에까지 씌우려는 엄포였으니 말이다. 다른 部隊에선 女軍 宿所에 侵入해 不法 撮影한 副士官 事件을 맡은 軍士警察이 被害를 呼訴하는 女軍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너, 얘 죽이려고 그러는구나.” 加害者의 목숨을 云云하며 被害者의 입을 막는 일들이 이렇듯 흔하게 벌어진다. 性暴力 事件에서 加害者가 死亡하면 搜査機關은 ‘公訴權 없음’으로 終結한다. 아무리 끔찍한 事件이라도 이 다섯 글字가 全部인 ‘한 줄 事件’李 되고 만다. 나름의 理由는 있다. 加害者가 없으면 實體 糾明에 限界가 있고 防禦權 行事도 어렵다. 搜査해 봐야 實益이 없는 事件에 限定된 搜査力을 마냥 投入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는 刑事事件 處理를 ‘國家 vs 加害者’의 舊道路만 본 것이다. 刑事司法制度는 加害者에 對한 斷罪뿐 아니라 被害者의 被害를 회복시키는 데 窮極的인 存在 理由가 있다. 性暴力 事件은 大槪 明確한 物證이 없다. 그래서 加害者가 死亡해 實體 糾明이 中斷되면 被害者는 곧바로 ‘加害者’로 몰린다. 朴元淳 前 서울市長 性醜行 事件, 로펌 代表辯護士 性暴行 事件 等 많은 被害者들이 이런 2次 被害를 겪고 있다. “어떤 自殺은 아주 最終的인 形態의 加害”라고 小說家 정세랑은 冊에 쓰기도 했다. 政治的 波長이 컸던 朴 前 市長 事件은 關聯 事件 判決과 國家人權委員會 調査로 間接的으로나마 被害가 認定됐다. 하지만 個人 間의 事件에서 ‘公訴權 없음’ 處分이 나면 被害를 인정받을 길이 없다. 로펌 代表 性暴力 事件 被害者는 加害者의 極端的 選擇으로 身元이 드러날 危機에 놓였다. 같은 로펌에 勤務했던 女性 辯護士들 名單이 各種 團톡房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非難을 받고 있다. 被害者는 지난 6個月間의 搜査로 事件이 거의 마무리된 만큼 搜査 結果를 通報해 달라고 警察에 要請했지만 實現 可能性은 높지 않다. 美國 聯邦地方法院은 2019年 性犯罪로 起訴된 億萬長者 제프리 엡스타인이 裁判 途中 拘置所에서 極端的 選擇을 하자 意外의 決定을 내렸다. 檢察의 公訴棄却 申請을 받아들이지 않고, 代身 被害者들이 法廷에 나와 證言하도록 했다. 被害者가 法廷에서 被害 事實을 말할 權利를 保障하는 ‘犯罪 被害者 權利法(Crime Victim’s Rights Act)‘을 根據로 그들의 被害를 公式化한 것이다. “正義가 있다면 저를 명예로이 해주십시오.” 2013年 上官에게 性醜行을 當했던 陸軍 오모 大尉는 이런 遺書를 남기고 世上을 떠났다. 國家가 어떤 境遇에도 性犯罪를 끝까지 밝힐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被害者는 삶을 부여잡을 勇氣를 낼 수 있고, 加害者 亦是 남은 名譽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極端的 選擇을 避하게 된다. ’公訴權 없음‘ 處理 慣行이 自身의 모든 걸 걸고 搜査機關을 찾은 被害者를 좌절시키고, 加害者에겐 自殺하면 덮어준다는 그릇된 메시지를 주고 있다면 代案을 찾아야 할 때가 됐다.신광영 社會部 次長 neo@donga.com}

    • 202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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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신광영]‘한강 醫大生 事件’은 어떤 事件으로 記憶될까

    아버지는 서울 江南警察署長 또는 세브란스病院 敎授, 外三寸은 前 서울 西草警察署腸, 큰아버지는 法務部 次官…. 손정민 氏(22)가 盤浦漢江公園에서 親舊와 술을 마신 뒤 숨진 채 發見된 事件에 關心이 쏠리면서 同席했던 親舊의 家族에 對한 갖가지 推測이 나왔다. 모두 事實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臆測들이 이어지고 있다. 스물두 살의 長成한 아들로 키워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힘들게 醫大에 간 아들이 젊음을 누리지도 못하고 生을 마감한 게 얼마나 慌忙한지 共感하는 40, 50代 엄마들의 反應이 特히 뜨거운 것은 充分히 理解할 만하다. 徹底한 眞相 糾明을 바라는 要求 亦是 正當하다. 漢江公園이라는 日常的인 空間에서 健壯한 靑年이 하룻밤 새 幽明을 달리한 事件이라면 누구나 같은 悲劇을 當할 수 있다. 搜査와 裁判은 市民의 平穩한 日常을 保護하려는 國家의 公的 서비스다. 市民들은 刑事司法制度의 ‘顧客’이자 ‘株主’로서 發言權이 있다. 17日 5周年을 맞은 ‘강남역 殺人事件’은 女性을 犧牲羊으로 삼는 젠더 犯罪를 根絶하자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契機였다. 以後 女性 相對 犯罪를 對하는 搜査機關과 法院의 態度가 보다 斷乎해졌다. 하지만 合理的 根據 없이 搜査 結果를 豫斷하고, 搜査 方向에 影響을 미치려는 輿論몰이는 實體 糾明에 致命的인 障礙 要因이다. 搜査 經驗이 많은 警察과 檢事들은 “修士는 사람의 人生을 다루는 일이다. 신중함과 節制力을 잃는 瞬間 失敗의 길로 들어선다”고 한다. 1988年 ‘華城 連鎖殺人 事件’을 搜査했던 警察이 眞犯인 이춘재는 돌려보내고 윤성여 氏를 犯人으로 指目한 것이나, 1972年 ‘派出所長 딸 被殺事件’ 搜査팀이 映畫 ‘7番房의 膳物’ 實際 人物인 정원섭 氏를 犯人으로 내몬 것도 섣부른 搜査 프레임과 確證 偏向이 겹친 結果다. 失敗한 數詞는 無辜한 市民을 20年, 15年씩 監獄에 가두고 殺人魔人 眞犯이 거리를 闊步하게 해준다. 孫 氏 事件을 搜査하는 西草警察署 앞에서 며칠 前 集會가 열렸다. “○○○ 自首하라” “○○○를 逮捕하라”는 親舊의 實名이 담긴 口號가 울려 퍼졌다. 參加者들은 親舊와 그의 家族을 ‘신발群’ ‘신발君네’라고 불렀다. “親舊가 아무리 힘들어도 죽은 것만큼은 아니다” “우리 主張이 事實이 아니라면 (親舊 側이) 아니라고 할 것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14日 加害 養母에게 無期懲役이 宣告된 ‘정인이 事件’ 亦是 輿論의 뜨거운 共感을 불러일으킨 事例다. 擔當 裁判部에는 “정인이 또래 두 딸을 키우는 엄마입니다” “20個月 된 孫女의 할머니입니다” “두 돌 아들을 둔 아빠입니다”로 始作하는 陳情書 수만 通이 接受됐다. 虐待 被害 兒童을 保護하는 委託家庭이 되겠다는 申請은 事件 以後 두 달間 630件 넘게 들어왔다. 지난해 1年間 申請 件數(467件)보다 훨씬 많다. 個人에게 큰 아픔을 안긴 事件이라도 實體가 糾明된 뒤에는 社會的 善循環을 만드는 動力이 된다. 하지만 孫 氏 事件을 두고 벌어지는 一部의 臆測과 攻擊은 이 事件이 우리에게 남기게 될 所重한 메시지를 歪曲할 수 있다.신광영 社會部 次長 neo@donga.com}

    • 202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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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재형 監査院長 夫婦, “난 엄마 배에서 안 나왔대” 아이의 말에…

    《“倍로 낳은 子息이든 가슴으로 낳은 子息이든 예쁠 때는 뭘 해도 예쁘고, 말 안 들을 때는 얄밉죠. 하하하….” 최재형 監査院長(65·司法硏修院 13期)과 夫人 이소연 氏(61)는 5日 東亞日報와의 인터뷰에서 배로 낳은 두 딸과 가슴으로 낳은 두 아들 이야기를 하며 큰소리로 웃었다. 崔 院長은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는 것은 人生이라는 하나의 宇宙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며 “入養이든 出産이든 똑같이 힘들고 또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崔 院長과 夫人 李 氏는 두 딸이 中高校生이던 中年의 나이에 두 아들을 入養했다. 2000年 生後 9個月의 진호 氏(21)를 入養한 뒤 2006年 열 살이던 榮進 氏(25)를 入養했다. 夫婦는 入養 父母로서 겪었던 喜怒哀樂을 2004年부터 2011年까지 8年間 韓國入養弘報會 홈페이지에 約 150篇의 日記로 꾸준히 남겼다.》○ “망태 자루 속의 고양이”“영진이를 낳은 어머니로부터 入養 同意를 받았다는 消息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우리 딸이 大學 入學했을 때보다 더 기뻤어요.” 崔 院長 夫婦는 2006年 初等學校 4學年이던 榮進 氏를 家族으로 맞았을 때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當時 崔 院長은 50歲, 李 氏는 46歲였다. 6年 前 入養한 둘째 아들 진호 氏가 아직 幼稚園生이라 初等學生을 키우면 보다 수월할 것 같았다. 하지만 現實은 期待와 달랐다. 榮進 氏는 아들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事故뭉치가 되어버렸다. 泰然하게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마치 10年間 부리지 못했던 응석과 말썽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親切하고 禮儀 바른 아이였지만, 傷處 입고 깨져버린 마음은 쉽게 아물지 않는 걸까. 李 氏가 동생인 진호보다 冊을 30分 더 보라고 하면 “엄마는 내가 미워서 잠을 못 자게 하려고 그런다”며 火를 내곤 했다. 知人은 그런 영진이를 마치 ‘망태 자루 속에 있는 고양이’ 같다고 했다. 구멍이 숭숭 뚫려 사랑을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網태. 崔 院長은 그때를 이렇게 回想했다. “入養 後 몇 年間은 힘들었죠. 어느 날 꿈에서 내가 회초리를 들었는데 영진이가 내 손을 낚아채더니 ‘아버지, 왜 이러세요’ 하는 겁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理解와 忍耐가 必要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4年間 찾아 헤맨 아들의 여린 本心 어떻게든 家族의 울타리 안에서 榮進 氏를 바꿔 보려던 崔 院長 夫婦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세 아이를 키우며 定立해온 養育 方式을 내려놓고 專門家의 助言을 求했다. 여러 種類의 家庭心理相談을 받았고 小兒精神科 醫師와 定期的으로 相談했다. 그러자 안갯속 같던 큰아들의 여린 마음이 보이기 始作했다. 專門家들이 提示한 答은 생각보다 簡單했다. “영진이가 태어나자마자 엄마로부터 分離되면서 생긴, 그리고 그 以後에 아물지 않은 傷處가 解決되어야만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崔 院長은 “영진이의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가 다 나올 수 있도록 父母가 마치 쓰레기桶처럼 있는 그대로 다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榮進 氏의 마음이 다시 채워지는 데는 4年이 넘게 걸렸다. “몇 年을 같이 살면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영진이가 내가 豫想했던 對答을 한 記憶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瞬間 제가 뭔가 말을 건넸는데 영진이가 부드러운 反應을 보였어요. ‘李 아이가 달라지는구나’ 생각이 들었죠.”(최 院長)入養될 때 아이의 나이가 많을수록 아이와 父母가 겪는 어려움은 어릴 때 入養한 境遇보다 몇 곱절 커진다는 게 崔 院長의 생각이다. “아무리 좋은 家庭으로 入養되더라도 아이가 겪는 精神的 衝擊은 英語를 한마디도 못하는데 뉴욕 타임스스퀘어 앞에 홀로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영진이度 그런 衝擊을 받았을 거예요. 時間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죠. 正말 많이 힘들었겠구나….” 父母가 어릴 적 속 썩이던 이야기를 꺼낼 때면 未安한 듯 소리 내 웃는다는 榮進 氏는 8月 네덜란드로 留學을 떠난다. 네덜란드의 有名 藝術 敎育機關인 ArtEZ藝術隊에서 4年間 留學할 豫定이다. “영진이 떠나면 이제 맛있는 라면이랑 떡볶이, 부침개는 누가 만들어 주나 걱정이에요.”(최 院長)○ 公開 入養 했지만 偏見에 傷處받았던 아들 2000年 9個月 아기일 때 崔 院長 夫婦의 품에 안긴 진호 氏. 李 氏는 聖家庭入養원에서 自願奉仕를 하며 갓난아기인 진호를 돌보다 入養을 決心했다. 崔 院長 夫婦는 진호 氏가 入養 事實을 最大限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公開 入養을 했다. 어려서부터 오랜 期間에 걸쳐 入養 事實을 받아들이면 傷處를 보다 잘 克服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決定이었지만 진호 氏가 入養에 對한 偏見에 부딪혀 傷處받는 모습에 가슴 아팠던 瞬間이 많았다고 한다. 진호 氏가 初等學校 때 親했던 親舊와 다투다가 ‘孤兒’라는 말을 듣고 큰 傷處를 입은 일은 崔 院長의 記憶에 아직도 뚜렷이 남아있다. “진호에게 ‘크면 누구랑 結婚할래?’라고 장난스레 물었더니 親한 入養 家族의 또래 女子아이 이름을 대더라고요. ‘自己 마음을 잘 理解할 것 같다’라고 하면서…. 表現은 못 하지만 아픔이 있다는 걸 알았죠.”(최 院長) 李 氏는 2004年 9月 日記에서 “진호가 요즘 ‘내가 말 안 들으면 나 버릴 거지’라는 말을 가끔 한다. 智圓이 예원이度 똑같이 惹端을 맞고 컸지만 한 番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진호한테 이런 말을 듣자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마음이 서글퍼진다”고 썼다. 그래도 崔 院長 夫婦에게 진호 氏는 사랑스러운 ‘껌딱紙’ 막내아들이라고 한다. 故人이 된 崔 院長의 母親은 生前 진호 氏의 寫眞을 恒常 紙匣에 넣어 간직했다.○ “정인이 事件, 가슴 아프지만 入養 萎縮돼선 안돼” 崔 院長은 入養 制度에 對해 “어쩔 수 없이 元來 家庭에서 養育되기 어려운 아이들이 家庭의 품에서 사랑을 먹으며 자랄 수 있도록 해주는 代案”이라고 했다. 崔 院長은 “열 달間 아이를 抛棄하지 않고 出産한 父母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可能하면 願家庭을 保護해야 한다”면서도 “다만 그게 不可能한 境遇 아이들이 危險에 내던져지지 않도록 國家가 苦悶해야 한다”고 强調했다. 崔 院長은 그러면서 國內 入養이 于先 考慮돼야 하는 것은 맞지만 아이의 幸福을 위해 必要하다면 海外 入養에 對해서도 보다 前向的인 姿勢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崔 院長은 1審 宣告를 앞두고 있는 ‘정인이 事件’에 對해선 入養보다 家庭에서의 兒童虐待 問題로 接近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정인이 事件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入養 以後 事後 管理를 잘해야 할 것 같다. 다만, 이番 事件 때문에 入養 自體가 萎縮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崔 院長은 國內 兒童虐待 加害者 中 親父母의 比率이 72.3%였던 反面 入養 父母의 比率은 0.3%에 그친다는 保健福祉部 資料(2019年 基準) 等을 言及하기도 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이 氏가 불쑥 携帶電話를 꺼내 榮進 氏가 만든 美術 作品 寫眞을 記者에게 보여줬다. “주책”이라며 婦人을 말리던 崔 院長도 어느덧 携帶電話를 꺼내 軍 服務 中인 진호 氏와 入隊 直前 찍은 家族寫眞을 보여줬다. 영락없는 ‘子息 바보’였다. “두 딸을 키울 때랑 마찬가지죠. 보람도 있고 때론 火도 나는 것. 入養을 했다고 다를 게 뭐 있나요.”(최 院長) “아이들에게 우리가 많이 준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우리가 받은 게 더 많았네요.”(이 氏)인터뷰=신광영 社會部 次長 neo@donga.com / 整理=권기범·유채연 記者}

    • 2021-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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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에서/신광영]클림트 名作 되찾은 美國… 慰安婦 責任 못 묻는 우리

    天才 畫家 구스타프 클림트의 名作들은 60年 넘게 主人 손을 떠나 있었다. 1938年 獨逸 나치政權이 한 유대人 家族에게서 클림트 그림을 掠奪했고 以後 오스트리아 政府의 手中으로 넘어갔다. 當時 美國으로 亡命했던 그림 主人 마리아 알트만은 2000年 빼앗긴 그림들을 되찾으려 나섰다. 美國 캘리포니아法院에 오스트리아 政府를 相對로 返還 請求 訴訟을 냈다. 하지만 障礙物이 있었다. 한 國家의 法院이 다른 國家를 相對로 裁判할 수 없다는 ‘國家免除’라는 國際慣習法 原則이다. 迂餘曲折 끝에 알트만은 그림을 돌려받았다. 어떻게 可能했을까. 美國에 ‘外國主權免除法(FSIA)’라는 法이 있었다. 外國 政府가 正當한 補償 없이 自國民의 財産을 빼앗아 商業的으로 活用한 境遇 ‘國家免除’를 適用하지 않는다는 國內法을 마련해놓은 德分이었다. 日本도 外國 政府가 國家免除를 防牌삼아 責任을 避하지 못하도록 2009年 法을 만들었다. “自國民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外國의 行爲에 對해 國家免除가 認定되지 않는다”고 못 박은 것이다. 日本은 國家免除의 例外를 擴大해야 한다는 ‘UN 國家免除協約’까지 批准한 全 世界 22個國 中 하나다. 日本의 法대로라면 ‘慰安婦’ 被害를 惹起한 加害國은 責任을 免하기 어렵다. 우리는 어떨까. 日本이 慰安婦 被害者들에게 賠償해야 하느냐를 두고 서울중앙지법에서 最近 3個月 사이 正反對 判決이 나왔다. 한 裁判部는 1月 “日本에 賠償 責任이 있다”고 했고, 다른 裁判部는 지난 21日 “日本에 責任을 물을 수 없다”고 했다. 두 裁判部는 國家免除를 다르게 解釋했다. ‘1月 裁判部’는 反人道的 犯罪를 저지른 國家가 賠償을 回避하려고 國家免除 理論 뒤에 숨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法的 節次는 그 自體가 目的이 아닌 正義를 實現하는 手段이어야 하므로 日本의 慰安婦 運營은 國家免除의 例外라고 봤다. 法과 實體的 定義가 따로 떨어질 수 없다는 常識에 가까운 論理였다. 2015年 韓日 政府 間에 ‘慰安婦 合意’가 있긴 했지만 被害者의 意思가 反映되지 않아 裁判이 唯一한 救濟 手段이라는 點도 考慮됐다. ‘4月 裁判部’ 亦是 國家免除를 萬古不變의 價値로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國際的으로 反人道的 犯罪에 對해 外國 政府의 責任을 물은 判例가 거의 없고, 個別 訴訟보다 國家 間 外交로 解決하라는 게 國家免除의 趣旨라고 했다. 눈길이 간 대목은 우리 政府와 國會가 國家免除의 例外를 定立하는 等 慰安婦 問題 解決을 위한 對內外的인 努力을 하지 않았다고 指摘한 點이다. “行政府와 立法府의 政策的 意思決定이 없는 狀況에서 司法府가 抽象的인 基準으로 새로운 基準을 創設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美國과 日本은 國益을 지키려 國家免除의 例外를 積極的으로 넓혀왔다. 弱小國의 설움을 알기에 더욱 切實하고 緻密했어야 할 우리는 慰安婦 問題에 憤怒하는 데 그칠 뿐이었다. 文在寅 政府는 朴槿惠 政府의 2015年 慰安婦 合意를 批判하면서 和解治癒財團을 없앤 뒤 3年 넘게 無對策이다. 文 大統領은 1月 日本의 賠償 責任을 認定한 判決이 나왔을 때 “당혹스럽다”고 했고, 日本이 4月 判決에 對해 “適切한 判決”이라고 立場을 내자 反駁하지 못하고 있다. 1月과 4月의 두 判決은 얼핏 正反對로 보이지만 “大韓民國이 慰安婦 被害者들을 위해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한목소리로 묻고 있다.신광영 社會部 次長 neo@donga.com}

    • 2021-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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