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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왜 왔어?” “나 돌아갈래” ‘分斷의 私生兒’ 끌어안으라!|신동아

“너 왜 왔어?” “나 돌아갈래” ‘分斷의 私生兒’ 끌어안으라!

脫北 靑年博士가 본 ‘統一大舶’ 민낯

  • 주승현 | 민주평통 諮問委員·北韓離脫住民·政治學 博士 joosy3050@naver.com

    入力 2015-08-20 10: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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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第3國을 選擇하는 脫北者가 늘었다.
    • 脫남入北(脫南入北)자도 登場했다. 北韓이 ‘曺國’이라며 되돌아가게 해달라는 이들도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너 왜 왔어?” “나 돌아갈래” ‘분단의 사생아’ 끌어안으라!
    “너왜 왔어?”

    中央合同訊問센터 搜査官이 던진 첫 質問은 싸늘했다. 軍事分界線을 넘은 後 歸順 事實을 알리고자 虛空에 銃 서너 발을 쏜 탓에 防寒服에 스민 매캐한 火藥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狀態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韓國에 와 있다는 事實이 꿈만 같았다. 搜査官의 거친 물음은 迷夢을 헤매던 나를 깨웠다.

    하나 “그럼 다시 돌아갈까요?”

    “그럼 다시 돌아갈까요?”

    얼떨결에 되받아친 내 對答이 끝나기도 前에 恐怖가 掩襲했다.



    “그런 態度面 이곳에서 永遠히 나갈 수 없어.”

    搜査官은 옅은 微笑를 지으면서 得意滿滿한 表情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제야 나는 對北 傳單과 心理戰 放送을 통해 밝힌 歸順者에 對한 配慮와 幻影이 實際로 存在하지 않는다는 것을 本能的으로 깨달았다. 休戰線이라는 死線을 넘어왔으되 또 다른 斜線이 내 앞에 서 있다는 事實을 直觀했다.

    그나마 나는 多幸이었다. 中央合同訊問센터와 脫北者 定着機關 하나圓을 거쳐 韓國 生活을 始作한 뒤, 태어나 처음 接해본 인터넷을 통해 무시무시하다는 中央合同訊問센터의 實相을 알았다. 毆打와 拷問을 當한 脫北者들이 法定 訴訟을 進行한다는 內容의 記事를 읽은 것이다. 地下調査室에서 拷問한 뒤 中央合同訊問센터 內 禮拜堂에 데리고 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罪를 悔改하라는 强要된 儀式까지 치르게 했다는 衝擊的인 主張이었다.

    北韓으로 傳單을 날려 보내는 일을 하는 脫北者 이민복 對北風船團長은 韓國 定着 初期 禁壓(禁壓)을 무릅쓰고 脫北者 人權運動에 投身했다. ‘人間쓰레기’ 같은 辱說은 基本이고 棍棒과 주먹질로 때리다 못해 性的 侮辱과 劫迫으로 歸順者를 괴롭혔다는 主張과 關聯, 韓國 政府의 非人間性에 對해 처음으로 問題 提起에 나선 것이다. 中央合同訊問센터에서 苛酷行爲를 當했다고 主張한 여러 脫北者가 訴訟을 進行했지만 敗訴한 것으로 傳해진다.

    中央合同訊問센터는 지난해 ‘脫北者 間諜’ 事件으로 世間의 注目을 받았다. 서울市 公務員으로 일하던 中 間諜 嫌疑로 拘束 起訴됐다가 無罪判決을 받은 유우성 事件의 出發點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유우성의 동생 有가려는 法院에서 “달曆 없는 獨房에서 辯護人 接見도 遮斷된 채 懷柔와 脅迫, 暴行을 當해 오빠가 間諜이라고 虛僞自白을 했다”고 暴露했고 司法府는 ‘유우성의 女同生에 對한 辯護人 接見 및 書信 傳達 申請을 不許한 國家情報院 處分은 違法하다’고 判示했다.

    國精院은 以後 中央合同訊問센터의 名稱을 ‘北韓離脫住民保護센터’로 바꿨으며 言論에 關聯 施設을 公開했다. 人權侵害 誤解를 없애겠다면서 調査室을 開放形으로 바꾸기로 했으며, 法律專門家를 ‘人權保護館’으로 임명하는 制度를 新設했다. 유우성은 1審과 2審에서 無罪를 宣告받았고 事件은 現在 大法院에 繫留 中이다.

    둘 이룰 수 없는 꿈

    나는 非武裝地帶에 駐屯한 북한군에서 心理戰을 擔當했다. 休戰線 南쪽에서 넘어오는 對北 放送을 制壓하고, 傳單을 收去해 消却하는 業務도 맡았다. 그때 對北 擴聲器 放送과 傳單을 통해 알게 된 人物이 있는데 ‘世界一周’를 꿈꾸며 休戰線을 넘어간 北韓 軍人이었다. 自由를 찾아 남으로 내려가 自身의 꿈을 이뤘다는 文句와 웃는 얼굴이 박힌 傳單은 오랫동안 나의 腦裏에 남아 있었다.

    韓國에 온 後 멋도 모르고 旅券을 申請했다. 굳이 가고 싶은 나라가 있는 건 아니었으나 發給된 旅券을 통해 자유로운 몸임을 確認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旅券 發給이 許可되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脫北者가 一般 國民과 다른 待遇를 받은 것이다. 當時에는 外交部와 警察뿐 아니라 國精院의 許諾을 받아야 旅券을 發給받았는데 그것도 複數旅券이 아닌 單數旅券만 許容됐다. 여러 脫北者와 團體들이 旅券 發給 制限이 ‘差別行爲’라며 抗議 示威에 나서고 訴訟을 提起한 德分에 旅券 發給 基準은 緩和됐다.

    마침내 나도 複數旅券을 發給받았다. 첫 旅行 國家를 苦心하다가 中國으로 가기로 했다. 休戰線을 넘어온 나로서는 周邊 脫北者들이 귀 아프게 얘기한 中國이 어떤 나라인지 궁금했다. 마침 中國語를 能熟하게 驅使하는 親舊가 가이드를 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가려니 두려움이 앞섰다.

    모든 脫北者는 하나圓에서 定着 敎育을 받는데, 住民登錄上 韓國의 첫 居住地가 하나원이 位置한 京畿 안성시가 돼 住民登錄番號가 男子는 125, 女子는 225로 始作됐다. 中國 政府는 住民登錄番號 뒷자리를 보고 脫北者를 識別해 비자 發給 等을 拒否하곤 했으며, 中國 公安이 脫北者를 붙잡아 北韓에 넘긴다는 洶洶한 所聞도 나돌았다. 脫北者들과 住民登錄番號 뒷자리의 첫 세 자리가 같은 安城市民들도 한동안 애꿎은 被害를 보았다.

    2009年에 와서야 ‘北韓 離脫住民 保護·定着支援法’ 改正案이 通過돼 하나院의 所在地를 基準으로 住民登錄番號를 附與받은 이는 한 次例에 限해 訂正할 수 있게 됐고 以後 入國한 脫北者들도 北韓이나 中國이 脫北 事實을 推定할 수 없게끔 125, 225로 뒷자리가 始作하지 않는 番號를 附與받게 됐다.

    그後 많이도 돌아다녔다. 旅行, 세미나, 招請訪問, 語學硏修 等으로 與圈에 訪問 圖章이 빼곡히 찍혔다. 電子與圈이 새로 나왔다고 해 再發給을 申請했는데, 單 3日 만에 새 與圈이 나왔다. 그러나 정작 ‘世界一周’를 하고 싶어 休戰線을 넘어온 先輩 歸順者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南쪽 땅을 밟았지만 삶은 힘겨웠고 世界一周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그는 오래前 人跡이 드문 깊은 山골로 들어갔다. 한 言論媒體가 ‘眞正한 自由를 찾아 외딴 山골로 들어갔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本人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萬事에는 明暗이 있는 法이다.

    셋 “우리는 3等市民?”

    脫北者 1號 博士인 안찬일 世界北韓硏究센터 所長은 “脫北者는 資本主義 社會에 와서 한 番은 詐欺를 當하는 게 敎科書”라고 말했다. 筆者의 經驗이나 周邊 脫北者를 봤을 때 句句節節 맞는 말이다. 사기당하지 않고, 傷處받지 않고 適應한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韓國 社會에 첫발을 내디딘 後 내가 갖게 된 얼마 안 되는 定着金을 詐欺 친 사람은 韓國人이고, 生計費이던 基礎生活受給費를 가로채간 사람은 같은 脫北者다.

    北韓에서 굶어본 적 없던 나는 정작 韓國에 와서 굶는 苦痛을 經驗했고, 살아남고자 朝鮮族 同胞보다 더 어수룩하다는 말을 들어가며 食堂에 어렵게 就職했다. 日食집에서 온갖 어려운 일을 도맡아 했다. 韓國에서 태어난 사람이 8時間 일할 때 12時間 일했다. 月給은 그들보다 50萬 원 적었다. 나는 그때 工夫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15年 現在 脫北者가 2萬8000名을 넘어섰다. 내가 脫北한 10年 前에 비해 事情이 나아졌을까.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脫北者 調査 資料에 따르면 脫北者의 犯罪 被害率은 24.3%로 韓國에서 태어난 사람의 犯罪 被害率 4.3%의 5倍가 넘고 詐欺 被害率도 韓國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43倍에 達해 脫北者 5名 中 1名꼴로 詐欺를 當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統一部와 南北하나財團이 調査해 發表한 資料는 “脫北者들이 週當 平均 勤勞時間은 韓國에서 태어난 사람에 비해 더 많은데도 月 平均所得은 76萬 원 程度 더 적다”고 밝힌다. 脫北者 失業率이 全體 國民 失業率보다 4倍 넘게 높고 自殺率度 3倍가 넘는다는 統計도 있다. 脫北者 5名 中 1名은 韓國에 와서 自殺을 생각하거나 試圖한 적이 있다고 答했다. 失業은 貧困과 배고픔을 의미하고 自殺은 삶과의 斷絶을 뜻한다. 狀況이 더 惡化한 것이다.

    나는 國會와 여러 大企業에서 勤務했다. 學部 卒業狀을 들고 企業에 就職하려 할 때 番番이 挫折했다. 大企業→中堅企業→中小企業으로 下向해 支援했건만 書類審査조차 通過하지 못했다. 밑져야 本錢이라 생각하고 自己紹介書 等에서 脫北者의 痕跡을 깨끗이 지우고 支援했더니 그제야 줄줄이 合格通知가 날아왔다.

    民主主義의 成就를 자랑하고 統一의 主體가 되겠다고 나선 韓國 社會에서 脫北者는 아직까지도 朱紅글씨와 같은 꼬리票를 달고 산다. 朝鮮族 同胞를 흔히 ‘二等市民’으로 取扱한다. 그들에 對한 差別과 冷冷한 視線이 存在하는 事實을 누구도 否認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脫北者는 어떤가. 一部 脫北者가 朝鮮族 同胞로 行世하는 것을 種種 봐왔다. 朝鮮族 同胞面 就業이 되지만 脫北者라고 身分을 밝히면 不利益을 當한다는 것이다. 住民登錄證을 받았지만 市民으로서의 權利를 享有하지 못하면서 ‘三等市民’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脫北者는 軍隊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 一部 脫北者는 祖國이 自身들을 ‘潛在的인 敵’으로 여긴다고 수군댄다.

    넷 政治的 歸順 → 目的刑 脫北

    脫冷戰 以後 本格化한 脫北 住民의 韓國 入國은 性格과 類型을 조금씩 달리하면서 이어진다. 體制 競爭 時期에는 ‘政治的 歸順’이 많았다. 休戰線을 통해 軍人이 넘어오거나 海外 北韓公館의 駐在員이 脫北했다. 1990年代 中盤부터 始作된 北韓의 經濟難은 ‘生存型 脫北’을 낳았고 이는 먼저 入國한 脫北者가 家族, 親知, 親舊를 데려오는 ‘連繫型 脫北’으로 進化했다. 最近에는 엘리트와 比較的 젊은 世代 中心의 ‘目的刑 脫北’으로 擴大됐다.

    南과 北이 體制 競爭을 하던 時期의 歸順者는 北韓 體制와 比較해 韓國 體制의 優越性을 確認해주는 存在로서 政治的 價値를 인정받았지만, 只今은 脫北者가 他者化와 無價値化의 對象이 되고 있다. 政治的 利用 價値는 高位層 出身이거나 旣得權 脫北者에게만 限定된다.

    脫北者 大部分은 資本主義 競爭社會에 발을 디디는 瞬間 ‘糊口之策’과 ‘個人의 責任’ ‘無限競爭’이라는 射線에 선다. 異質的 制度에서 살아온 脫北者에게 生疏한 資本主義에 適應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고, 社會는 더 많은 挑戰과 努力을 要求한다. 韓國 社會에서 成功한 脫北者도 있지만 全體에 비하면 少數다. 劣敗感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다섯 과녁을 못 맞히는 弓手

    脫北者를 統一의 마중물, 統一의 試金石, 統一의 架橋, 統一의 디딤돌, 統一韓國의 리트머스 試驗紙, 統一人材, 統一資産, 統一未來, 統一主役, 統一일꾼이라고 명명하는 一部의 호들갑을 보면 韓國 社會가 脫北者의 重要性은 分明히 認知하는 듯하다. 하지만 과녁을 못 맞히는 弓手처럼 딱 거기까지다. 韓國 社會에서 脫北者의 本모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烙印 效果, 三等國民, 아웃사이더, 差別, 排除, 不適應, 葛藤의 씨앗, 周邊人, 少數者, 居留民, 非國民, 脫남入北과 같은 用語에 內部的 打者들의 삶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러한 表現은 脫北者에 對한 韓國 社會의 認識과 態度의 現住所이면서 反映이다.

    여섯 ‘脫北民’으로 稱하라!

    認識의 二重性과 態度의 多重星만큼이나 脫北者를 가리키는 名稱도 다양하다. 歸順者, 歸順勇士로 불린 時期가 있는가 하면, 歸順同胞를 거쳐 最近에는 脫北者, 北韓離脫住民, 새터民으로 呼稱된다. 社會에서는 亡命者, 脫北難民, 脫北同胞, 移住民, 定着民, 北向民 等 數十 가지의 呼稱이 亂舞하는데, 狀況에 따라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奇現象이 벌어진다. 只今껏 제대로 定立된 用語조차 마련되지 못한 것은 政策의 肥效率性이 持續된다는 事實을 傍證한다.

    政府가 公式的으로 명명한 것은 정작 脫北者 本人들이 터부視한다. 1997年부터 法律的 用語로 北韓離脫住民이라는 公式 名稱을 附與했고 2005年부터는 새터民으로 부르기로 했지만 脫北者들은 시큰둥한 反應을 넘어 冷淡하기까지 했다. 異物感을 느낀 21個 脫北者 團體가 모여 ‘새터民 名稱 使用 拒否’를 決議한 後 主務 部處인 統一部에 抗議했다. 다른 NGO도 加勢해 政府를 壓迫했다. 及其也 最近에는 脫北者들이 스스로 ‘脫北民’이란 用語를 定立해 脫北者 社會에서 喚起하고 있으며, 韓國 社會 一部에서도 脫北民이라는 用語를 엉거주춤 받아들이는 模樣새다.

    일곱 “나 돌아갈래”… 脫南入北

    목숨을 걸고 찾아온 韓國 社會를 등지고 떠나는 脫北者가 늘고 있다. 正確한 數字는 알 수 없지만 一角에서는 脫남(脫南)했거나 떠났다가 되돌아온 사람이 5000名에 達하는 것으로 推算한다.

    韓國 社會가 統一의 모델로 벤치마킹하려는 獨逸과 比較하면 差異가 確然하다. 1989年 베를린 障壁이 崩壞될 때까지 東獨에서 西獨으로 넘어온 脫出者는 350萬 名에 達한다. 二重 3國行을 擇한 이는 極少數인데, 우리는 3萬 名도 안 되는 脫北者中 相當數가 제3국행을 選擇한다. 甚至於 北韓으로 돌아간 脫남入北(脫南入北)자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韓國에 定着한 脫北者가 北韓이 ‘曺國’이라면서 돌려보내달라고 公公然하게 送還을 要求하는 일도 있다.

    北韓으로 되돌아간 사람들은 20~60代의 다양한 年齡帶에 걸쳐 있다. 家族을 모두 데리고 ‘再入北’하는 事例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北韓으로 간 ‘再入北’字 中 여러 名이 平壤에서 記者會見을 했는데 그것을 꼼꼼하게 觀察하면서 나는 몇 가지 特異點을 發見했다. 北韓 體制에 유리하게끔 設計된 强要된 記者會見이겠지만 이들이 共通으로 激昂한 部分이 있었다. 韓國은 冷靜하고 差別이 甚한 데다 失業과 二分法, 排他性이 蔓延한 社會, 다시 말해 ‘人間 生地獄’이었다고 말하는 部分이다.

    이 같은 말을 하며 그들의 感情이 激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記者會見의 모든 內容이 單純히 살아남기 위한 演出은 아니라고 느꼈다. 脫北者인 나도 그들의 모습에 多少 衝擊을 받았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平壤에서 침을 튀기며 ‘南朝鮮’을 辱하던 脫北者 中 一部가 또다시 再脫北해 서울로 온 것이다.

    여덟 묵직한 괴로움

    요즘 다시 바람이 분다. ‘脫남’하는 脫北者들이 한때는 東유럽으로, 한때는 西歐圈으로 가더니 最近에는 다시 北유럽 사민主義 國家들로 발길을 돌린다. 個中에는 韓國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事情이 如意치 않아 國際 미아로 떠도는 이도 적지 않다. 나와 비슷한 時期에 韓國에 와서 大學을 마치고 家庭을 이룬 切親한 親舊는 요즘 別말 없이 짐을 싸고 있다. 最近에는 K大를 卒業하고 반듯한 職場에서 勤務하던 같은 故鄕 出身의 兄이 두 딸을 데리고 忽然히 사라졌다. 幸여 北韓으로 간 게 아닐까 그와 가깝게 지내던 親舊들이 수군거리지만 나는 안다. 어디로 갔든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리란 事實을. 하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寂寞함과 쓸쓸함은 이곳에 남은 사람들이 지고 가야 할 묵직한 괴로움이다.

    아홉 “北韓 住民 마음 얻어야”

    2014年 統一大박論에 이어 올해에도 政府를 비롯한 우리 社會 곳곳에서 統一 論議가 繼續된다. 올해는 光復·分斷 70周年을 맞이한 해이기도 하다. 여기저기서 統一을 떠들지만 具體的 方法을 提示하거나 實質的으로 準備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統一을 얘기하면서도 어떻게 統一할 것인지가 不明確하다. 具體的으로 어떻게 統一을 準備하는지도 당최 알 수 없다.

    ‘韓國 社會가 健康해야 統一된 나라도 健康하다’는 말에 共感한다. 統一을 위해서는 北韓 住民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그들은 脫北 後 韓國에 定着한 故鄕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統一 後 自身이 받을 大宇와 삶의 質을 가늠할 것이다.

    韓國에서 사는 脫北者의 現實은 暗澹하다. 政府의 定着 支援과 社會의 包容力, 脫北者의 適應 態度는 且置하더라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2萬8000名의 脫北者도 품지 못하는 大韓民國이 2400萬 北韓 住民과의 統一을 堪當할 수 있느냐는 點이다. 統一의 마중물로, 統一大박의 試金石으로, 南北共同體의 리트머스 試驗紙로 불리는 脫北者가 只今 韓國 社會에서 겪는 일에서 우리는 敎訓을 얻어야 한다. 統一은 책임지는 者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熱 分斷이 낳은 또 한 名의 ‘遭難者’

    메르스 擴散으로 社會가 어수선할 때 休戰線을 통해 北韓軍이 歸順했다는 速報가 떴다. 뭔가 不吉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루가 가기도 前에 北韓軍 歸順者에 對한 냄비 같은 뉴스가 言論 媒體를 뒤덮더니 ‘呼出歸順’ ‘노크歸順’ 때처럼 ‘待機歸順’ ‘宿泊歸順’ ‘1泊2日 歸順’이라는 用語가 登場하고 言論은 政府와 國防部를 壓迫했다. 먼저 休戰線을 넘어온 나로서는 尋常치 않은 雰圍氣를 直感했다.

    歸順 이튿날 ‘咸興에서 200km 걸어서 歸順한 兵士’라는 題目과 함께 親切하게도 歸順動機와 所屬部隊, 補職과 故鄕, 키와 몸무게, 經路와 歸順 時 제스처까지 낱낱이 公開됐다.

    脫北者의 身邊 및 情報 保護를 最優先해야 할 國防部와 言論이 責務를 버리고 또다시 힘없는 脫北者를 犧牲羊으로 삼는 非倫理的 行態를 한瞬間의 망설임도 없이 보여준 것이다. 自由를 찾아왔지만 平生 苦痛과 罪責感 속에서 살아야 할 어린 歸順者는 現在進行形인 韓半島 分斷이 낳은 또 한 名의 遭難者이자 私生兒다.

    ● 주승현 最年少 脫北人 博士다. 34歲. 연세대 政治外交學科를 卒業하고 같은 大學 大學院에서 碩·博士 學位를 받았다. 現在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 諮問委員, 統一部 統一敎育院 및 명지대 政治外交學科 講師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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