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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體性 잃고 統一 抛棄 中國 影響力 脫皮가 關鍵|新東亞

正體性 잃고 統一 抛棄 中國 影響力 脫皮가 關鍵

몽골 分斷에서 韓半島를 본다

  • 이정훈 編輯委員 | hoon@donga.com

    入力 2015-08-19 17: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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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칭기즈 칸으로 일어났다 누르하치에 휘둘려
    • 몽골 人口 1%가 每年 韓國 長期 滯留
    • 中國은 싫다, 그러나 中國 없인 살 수 없다
    • ‘칭기즈 칸은 中國 將帥’ 北方工程에 無對應
    정체성 잃고 통일 포기 중국 영향력 탈피가 관건
    칭기즈 칸 空港에 내려 入國 審査를 받는데 出入國 擔當官이 英語로 뭔가를 더 적으라고 했다. 入國書類 記入欄에 다 적었기에, “뭘 더 쓰라는 것이냐”라며 버텼더니 電話番號를 적으란다. “호텔 이름은 이미 적었다. 電話番號까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더니 “다른 電話番號라도 적으라”고 했다. “다른 게 무엇이냐”고 했더니, 뭐라 對答하는데 周邊이 시끄러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왓(what), 왓?”을 서너 番 反復했더니, 韓國語로 “몽골에 있는 親舊 분 電話番號라도 적으시라고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趁卽에 韓國語로 할 것이지. 몽골에는 韓國語를 驅使하는 사람이 많다. 就業과 學業 等으로 韓國에 滯留하는 몽골人이 3萬 名이 넘기 때문이다. 韓流의 影響으로 몽골 高等學校와 大學校에선 2000名 程度가 每年 韓國語를 工夫한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活用할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몽골은 國土 面積이 韓國(南韓)의15.6배에 達하지만 人口는 훨씬 적다. 지난 3月 300萬 名을 넘어섰다. 몽골 政府는 300萬째 誕生한 것으로 推定되는 아이의 父母에게 아파트를 提供하며 ‘마(魔)의 300萬’ 突破를 自祝했다. 經濟成長을 이루려 할 때는 産兒制限政策을 펴는 것이 普遍的인데, 몽골은 人口 增加에 重點을 둔다. 적은 人口 탓에 시달린 歷史의 아픔 때문이리라. 몽골 政府는 500萬 名은 돼야 ‘從屬(從屬)’을 招來하는 低成長에서 脫出해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붉은 英雄‘ 울란바토르

    울란바토르는 서울과 베이징(北京)처럼 깊은 歷史를 가진 首都가 아니다. 따라서 展示用으로 만들어놓은 게르를 除外하곤 몽골을 象徵하는 文化財를 보기 어렵다. 井州(定住)文化가 아니어서 遺跡이 많이 남지 않은 탓이리라. 그렇다고 해도 首都라면 어느 程度 遺跡이 있게 마련인데 울란바토르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몽골人은 1911年 辛亥革命으로 淸나라가 무너졌을 때 請으로부터 獨立했다고 본다. 그러나 國際社會는 몽골人이 共産 政府를 세운 1921年 獨立한 것으로 본다. 이는 우리가 1945年 8月 15日을 獨立(光復), 1948年 8月 15日을 政府 樹立으로 나눠 보는 것과 비슷한 理致다. 政府 樹立 3年 뒤인 1924年 首都로 定한 곳이 울란바토르다. 그前까지 울란바토르는 니슬렐후레로 불렸다.

    몽골은 多民族 國家인데 多數는 ‘할하 몽골人’이 차지한다. 그래서 國號도 ‘몽골’로 삼았다. 할하 몽골人은 1636年 니슬렐후레에 라마佛敎의 中心 寺院인 ‘다 후레’를 짓고 宗敎 行事를 이어왔다. 宗敎 中心地를 首都로 삼은 것이다. 政治나 經濟 中心地가 아닌 宗敎 中心地를 首都로 삼은 데는 피맺힌 몽골의 歷史가 얽혀 있다.

    울란바토르는 몽골語로 ‘붉은 英雄’이란 뜻이다. 1992年 몽골은 民主共和國으로 變身했다. 그런데도 共産主義 냄새가 폴폴 나는 울란바토르를 首都 이름으로 維持하는 것은 그들의 歷史意識 때문이다. 사람들은 몽골이 러시아에 이어 世界에서 두 番째로 共産化됐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中國과 부대끼며 살아온 몽골은 지난 世紀 初 갑작스럽게 蘇聯(共産 러시아)을 만나며 한瞬間에 中國과 離別했다. 先祖가 만들어준 몽골 文字를 버리고 러시아의 키릴 文字를 導入할 만큼 親蘇 路線을 걸었다. 理由는 中國이 진저리나게 싫어서였다.

    몽골人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質問 中 하나가 “칭기즈 칸은 中國人이냐, 몽골人이냐”다. 이 質問을 받으면 그들은 핏대부터 올린다. 韓國의 反日(反日)感情 以上으로 몽골人은 中國을 싫어하고 無視하려 한다. 그러나 過去의 韓國이 日本에 그러했듯이, 몽골은 中國에 단단히 멱살을 잡혔다. 이것이 苦悶이기에 몽골은 只今 美國 韓國 日本 等에 기대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恒常 붐비는 몽-中 鐵道

    울란바토르에서 出發하는 鐵道는 베이징과 모스크바로 連結된다. 두 鐵道 가운데 붐비는 쪽은 어디일까. 過去에는 몽-러 鐵道였는지 몰라도 只今은 絶對的으로 몽-中 鐵道다. 울란바토르에는 全體 몽골人의 45%인 130餘萬 名이 산다. 몽골은 消費財 産業이 發展하지 못했다. 따라서 많은 生必品을 輸入하는데, 그 核心 루트가 몽-中 鐵道다.

    베이징에서 出發한 列車는 1泊2日 만에 울란바토르로 들어오는데, 이 列車에 生必品이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모스크바를 떠나 울란바토르로 오는 汽車는 그렇지 않다. 理由는 러시아 쪽엔 이렇다 할 港口가 없고, 生産되는 物品도 적기 때문이다. 反面 中國은 世界로 열린 港口를 많이 가졌고 ‘世界의 工場’인지라, 몽골이 要求로 하는 生必品을 無限定 供給할 수 있다.

    정체성 잃고 통일 포기 중국 영향력 탈피가 관건
    베이징發 鐵道에 어느 나라 物品이 많이 실릴지는 ‘價格’李 決定한다. 몽골은 經濟力이 弱하기에 싼 製品을 選好한다. 따라서 中國産 低價品이 가장 많이 실리고, 이어 高級品으로 認識된 ‘메이드 인 코리아’ 物品이 실린다. 中國은 몽골山 地下資源이 必要하다. 그러하니 生必品을 싣고 온 베이징發 貨車는 몽골에서 地下資源을 가득 싣고 돌아간다. 그래서 몽-中 路線은 恒常 북적인다.

    現實이 이러하니 몽골은 中國과의 關係를 끊지 못한다. 베이징發 列車가 하루라도 들어오지 않으면 울란바토르 市場에서 品貴 現象과 사재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건만 몽골人의 對中 自主意識은 도도하기 그지없다.

    이는 歷史의 必然이기도 하다. 그렇게 싫어하는 中國을 大國으로 만들어준 것이 몽골人과 몽골人의 親舊이자 怨讐이기도 한 滿洲人이기 때문이다. 몽골人과 滿洲人은 베이징을 中國의 首都로 만들어줬다.

    12世紀 金(金)나라를 세운 女眞族이 中國 大陸에 있던 송(宋)나라를 攻擊해 南쪽으로 밀어냈다. 南쪽으로 밀려간 宋나라를 ‘南宋(南宋)’이라고 한다. 그러한 金나라를 칭기즈 칸의 몽골이 무너뜨렸다. 몽골은 南宋도 攻擊해 멸망시켰다. 그때 儒敎에 젖었던 南宋人이 決死抗戰했다.

    그런 까닭에 中國을 統治하게 된 몽골은 南宋人을 强하게 差別했다. 몽골人이 最高이고, 西洋人처럼 눈瞳子에 色깔이 있어 色目人(色目人)으로 부르는 中央아시아人이 두 番째, 세 番째는 양쯔江 以北에 있던 韓人(漢人), 마지막이 南宋人을 가리키는 男인(南人)이었다.

    베이징은 高大에도 重要 都市로 여겨졌지만, 心臟部는 아니었다. 그때의 中國 中心部는 洛陽(洛陽)과 長安(長安)이 있는 中院(中原) 地域이었다. 春秋戰國時代 베이징은 ‘桂’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契는 全國7雄이던 年(燕)나라가 首都로 삼았기에 ‘連境(燕京)’으로 불리기도 했다.

    베이징을 首都로 만들어주다

    그리고 1000餘 年이 지나 베이징이 注目받게 됐다. 933年 요(遼)나라를 세운 거란족이 베이징 地域을 ‘南京(南京)’으로 명명한 것. 5景 制度를 維持한 遼나라는 只今 內몽골自治區의 파림좌기를 ‘상경’으로 부르며 首都로 삼았다. 上京에서 보면 南쪽에 있기에, 베이징을 南京(南京)으로 부른 것이다.

    1125年 女眞族의 金나라가 遼나라를 멸망시키며 베이징 地域을 차지한 뒤엔 ‘中道(中都)’로 바꿔 불렀다. 金나라 亦是 5景 制度를 運用했다. 金나라는 그들이 일어난 黑龍江省 牙城(阿城)詩를 ‘상경’으로 부르며 首都로 삼았다가 後代에 中道로 遷都했다. 베이징은 金나라 時節 部(副)首都였다가 首都가 된 것. 그러한 베이징을 完璧한 首都로 올려준 것이 원나라다.

    元나라를 세우기 前 몽골族은 울란바토르 南西쪽 350餘 ㎞ 떨어진 곳에 있는 카라코룸을 首都로 삼았다. 이 때문에 실크로드를 따라온 마르코 폴로도 카라코룸에 長期間 머물렀다. 몽골帝國 卽, ‘大몽골’은 칭기즈 칸(1代)-오코타이(2代)-狗肉(3代)-몽케(4代)를 ‘大칸(大汗)’으로 부르며 이어지다, 5代가 들어설 時點에서 쿠빌라이와 그의 동생인 아릭부케(‘아리크 不카’로도 부른다) 勢力으로 나뉘었다.

    몽골은 ‘말자(末子, 막내아들)相續’ 制度를 維持했기에, 아릭부케가 正統을 있게 됐다. 兄인 쿠빌라이는 이를 認定하지 못하겠다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勢力이 弱해진 아릭부케는 1264年 降伏했다. 勝利한 쿠빌라이는 1267年 중都城(城)을 불태우고, 그 北쪽에 새 城을 만들어 ‘大道(大都)’로 명명하고 首都로 삼았다.

    1271年 그는 國號를 大몽골에서 ‘隊員(大元)’으로 바꿨다. 그에 따라 中心도 카라코룸에서 베이징(大道)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원을 名(明)李 무너뜨렸다. 名은 南쪽에서 일어났기에 只今의 난징(南京)을 ‘南京’으로 부르며 首都로 삼았다가, 3代 皇帝인 永樂帝 때 大道를 ‘北京(北京)’으로 고쳐 부르며 遷都했다.

    그러한 命을 滿洲族이 세운 靑(淸)李 붕괴시켰다. 선양(瀋陽) 隣近에서 일어난 請은 랴오양(遼陽)을 ‘東京(東京)’으로 부르며 首都로 삼았다가 北京으로 遷都했다. 이러하니 베이징은 滿洲族(금, 靑)과 몽골族(怨)李 首都로 만들어줬다고 해도 決코 過言이 아니다.

    中國 歷史上 가장 큰 領土를 經營한 元나라는 11代 皇帝(大칸)인 順帝(順帝)가 나라를 이끌던 1367年 叛亂을 일으킨 한족(漢族) 朱元璋 勢力으로부터 거센 攻擊을 받았다. 견디지 못한 順帝 勢力은 大道를 버리고 只今의 內몽골 自治區 커스커텅기(克什克騰旗)인 應唱部(應昌府)로 首都를 옮겼다. 社가(史家)들은 그때부터 中國 歷史는 朱元璋이 만든 名(明)나라가 主導한 것으로 본다. 응倡夫로 遷都한 원을 아웃사이더로 報告 ‘北元(北元)’으로 부른다.

    카라코룸으로 間 奇皇后의 아들

    그러한 順帝의 여러 夫人 中 한 名이 高麗人 기황후였다. 둘 사이에는 ‘아유시리다라’란 아들이 있었다. 1370年 순제가 죽자 아유시리다라가 皇帝(小宗, 昭宗)가 됐다. 小宗은 카라코룸으로 首都를 옮기고, 1372年 侵入해온 明나라 君을 大破했다. 1378年 小宗이 死亡하자 배다른 동생인 土구스 테무르가 王位를 이었는데, 그는 明나라 軍隊의 攻擊에 맞서 싸우다 被殺됐다. 그의 죽음으로 北元은 더욱 衰落했다.

    그러한 北원을 代替한 것이 ‘몽골의 四寸’ 格인 ‘오이라트’ 勢力이었다. 오이라트는 ‘숲 속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瘠薄한 서(西)몽골과 바이칼호 隣近에서 살아왔다. 그러한 오이라트를 칭기즈 칸의 큰아들 措置가 征服했기에, 措置의 後孫들이 오이라트의 칸(왕)李 되었다. 그러나 居住는 하지 않는 形式上의 支配였다. 實權은 軍 司令官이라는 뜻을 가진 오이라트의 部族長 ‘타이시’가 行使했다.

    오이라트가 浮刻될 무렵 名의 指導者가 永樂帝였다. 南京에 있던 首都를 北京으로 옮긴 永樂帝는 먼저 베트남을 치고 1410~1424年 사이 5次例에 걸쳐 고비 沙漠까지 進擊했다. 이 攻擊으로 카라코룸이 焦土化됐다. 몽골人들은 永樂帝의 攻擊으로 카라코룸이 歷史의 舞臺에서 사라졌다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興味롭게도 몽골의 歷史書는 永樂帝를 元 順帝의 아들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오이라트가 ‘타이시’인 에센을 中心으로 크게 일어나, 1449年 ‘偉大한 報復’을 했다. 明나라의 正統제가 只今의 산시(山西)省 다퉁(大同)까지 進擊해 誤字, 그곳을 襲擊해 정통제를 사로잡은 것. 明나라는 토목보(土木堡)로 부르던 곳에서 이 事件을 當했기에, 이를 ‘토목보地變(土木堡之變)’으로 적는다. 中國 處地에서 토목보地變은 相當히 猖披한 事件이기에 中國 司書들은 이 일을 詳細히 敍述하지 않는다.

    困難해진 明나라는 정통제의 異腹同生을 새 皇帝(경태제)로 내세워 危機를 克服하려 했다. 1452年 에센은 허울만 남은 北元의 타이슨 大칸을 殺害하고 北元의 大칸에 올랐다. 그러나 1454年 에센이 部下에게 살해당하면서 北元은 大칸을 내지 못하는 大混亂에 빠져들었다. 이 混亂은 1475年 칭기즈 칸의 핏줄을 이어받은 萬도르가 大칸에 登極하면서 解消됐다.

    萬도르 大칸의 否認(皇妃)李 몽골 歷史에서 有名한 女傑(女傑)인 ‘만투하이’다. 萬도르는 만투하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在位 3年 만인 1478年 死亡했다. 唯一하게 남은 칭기즈 칸의 핏줄은 만도르의 姻戚인 여섯 살 少年 ‘다얀’이었다. 칭기즈 칸의 핏줄이라는 正統性을 내세워 다얀을 大칸으로 올렸다.

    北元의 女傑 만투하이

    그때 만투하이는 31歲였다. 만투하이는 兩者 뻘인 다얀을 키우며 垂簾聽政을 하다 42歲가 된 1481年, 17歲의 다얀과 結婚했다. 25年 年上의 나이 差異를 克服하고 事實上의 養子와 結婚해 다시 皇妃가 된 것. 만투하이는 다얀과의 사이에서 일곱 男妹를 낳아 칭기즈 칸 血脈을 부활시켰다. 만투하이는 다얀에게 ‘몽골帝國 復活’을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이 때문에 北元은 오이라트를 물리치고 다시 草原의 敗者가 되었다.

    만투하이가 復活시킨 北元은 다얀-만투하이의 孫子인 알탄 大칸 時節인 1550年(庚戌年) 名의 首都인 北京을 包圍했다. 中國은 이 敗北를 ‘庚戌의 便(庚戌之變)’으로 부르며 부끄러워한다.

    1592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名은 參戰했다. 軍事學의 重要한 命題 가운데 하나가 ‘두 個의 電線을 갖지 말라’이다. 限定된 國力을 分散하지 말라는 뜻인데, 明은 이를 어겼다. 朝鮮 戰線과 北元 戰線을 同時에 運用한 것이다.

    그러한 때 搖動(滿洲)에서 누르하치가 일어났다. 1559年生인 그는 20代 中後半人 1586年쯤 反명(反明) 路線을 分明히 하며 親命(親明) 路線을 따르는 滿洲族을 攻擊해 統合에 나섰다. 그러나 名은 北元 및 왜와의 戰爭에 餘念이 없었기에, ‘第3의 敵’에 神經을 쓰지 않았다. 壬辰倭亂이 끝난 1599年 누르하치는 學者들로 하여금 몽골 文字를 土臺로 滿洲 글字를 만들게 했다. 名과 다른 길을 간다는 意志를 더욱 分明히 한 것이다. 1601年엔 機動部隊 ‘8期(八旗)’의 前身인 ‘4機(四旗)’를 만들었다.

    1604年 北元에서 다얀-만투하이의 7歲 손인 릭段이 大칸에 卽位했다. 릭團은 라마佛敎를 받아들여 몽골人을 하나로 묶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누르하치의 힘과 運이 어디까지 뻗칠지 正確히 豫測하지 못했다. 누르하치의 興起를 본 北元에서는 反명(反明) 路線을 걷는 누르하치와 손잡을 것인지를 놓고 論爭이 일었는데, 릭團은 拒絶했다. 그러자 北元은 親(親)-反(反) 누르하치波로 나뉘어 內亂에 들어갔다.

    1612年, 東部 몽골에 있는 親누르하치 部族이 누르하치 勢力과 同盟을 맺었다. 1616年 누르하치는 金나라를 잇는다며 ‘後金’을 建國하고 明나라에 對해서는 일곱 가지 怨恨人 ‘7對한(七大恨)’을 發表하는 것으로 宣戰布告를 했다. 그리고 1618年부터 搖動에 있는 明나라 軍을 攻擊했다.

    壬辰倭亂 參戰 以後 國力이 弱해진 名은 ‘最後의 한 手’를 使用했다. 몽골 勢力이 친-반 누르하치로 나눠진 것에 注目해, 反누르하치의 先鋒인 릭團 大칸에 接近해 每年 數萬 兩의 銀貨를 준다는 條件으로 同盟을 맺기로 한 것. 元帥와의 同盟이 決定的인 失手가 된다는 것을 릭團 大칸은 全혀 豫測하지 못했다. 1618年 릭團은 明나라 軍을 攻擊하는 누르하치 軍을 攻擊했다가 大敗했다.

    明과 同盟 맺은 北元

    報復에 나선 明나라는 1619年 4個 方面으로 누르하치 軍을 攻擊했다가 ‘사르後’라는 곳에서 大敗했다(사르후 戰鬪). 그러자 릭團을 따르던 몇 안 되는 몽골 部族들이 親누르하치派 쪽으로 離脫했다.

    親누르하치派의 主張은 호르친部였다. 호르친부는 칭기즈 칸의 동생 하사르의 後孫이다. 1624年 호르친部를 筆頭로 親누르하치의 몽골部族이 後金처럼 8期(몽골8機)를 만들어 대명(對明) 戰線에 參戰한다는 決定을 내렸다. 이 消息을 들은 릭團은 이들을 攻擊했으나 後金의 逆襲을 받아 大敗했다.

    1626年 누르하치가 죽자 大權을 잡은 홍타이지는 이듬해(1627) 親命路線을 固執하는 朝鮮을 攻擊해 굴복시켰다(정묘호란). 그러자 릭團 밑에 있던 몽골部族들이 大擧 릭團에 叛亂을 일으켰다. 견디지 못한 릭團은 1631年 다시 호르친部 等을 攻擊했으나 또 失敗했다.

    勢力을 더욱 鞏固히 한 親누르하치 勢力은 1632年 홍타이지 軍과 함께 릭團을 攻擊했다. 이를 막아내지 못한 릭團은 請해(靑海)성 地域으로 逃走해 죽고(1634), 그의 아들 에制이가 뒤를 이었다. 1636年 國號를 ‘靑’으로 바꾼 홍타이지는 朝鮮을 다시 攻擊해 降伏시키고(병자호란), 한 달 뒤 에制이를 攻擊해 降伏시키고 隊員 帝國의 玉璽와 大칸 地位를 받아냈다.

    칭기즈 칸 帝國이 사라진 것이다. 그餘勢를 몰아 李自成의 亂으로 이미 皇室이 무너진 名을 攻擊해 北京度 占領했다(1644년). 大陸을 席卷한 淸나라는 그들에 協助限 몽골族과는 婚姻을 하며 좋은 關係를 維持했으나, 그렇지 않은 몽골族(北元 勢力)은 徹底히 彈壓했다. 호르친附議 脫退로 孕胎된 몽골族의 分割이 可視化된 것이다.

    淸나라는 칭기즈 칸 直系는 모두 죽였다. 그렇게 北원이 무너질 때(1636) 칭기즈 칸 精神을 잇고자 하는 할하 몽골人들이 ‘니슬렐후레’에 라마佛敎의 中心寺院人 ‘다 후레’를 짓고 宗敎 行事를 하기 始作했다. 몽골의 復興을 비는 작은 努力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할하 몽골人을 거센 氣質을 가진 오이라트 族의 一派인 중가르 族이 輕蔑했다. 갈단 칸(왕)을 中心으로 일어난 중가르族은 請에 屈服한 할하 몽골人과 淸을 攻擊했다. 중가르 軍은 시베리아에 있는 러시아의 都市들을 襲擊하고 火藥 技術者들을 잡아와 火砲武器를 만들게 한 다음 이것을 들고 淸나라 軍隊와 싸웠다.

    淸나라도 總力을 기울였다. 80餘 年間 繼續된 이 戰爭은 1758年 乾隆帝가 이끄는 淸나라의 勝利로 幕을 내렸다. 淸나라는 중가르를 4個 不足으로 나눠 서로 싸우게 함으로써 몽골族의 再建을 막았다. 몽골族은 더 以上 나라를 갖지 못했다. 一部 중가르人들이 볼가江 下流까지 도망쳐 ‘칼묵’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나 러시아에 屈服해 支配를 받게 됐다.

    몽골의 레닌과 스탈린

    1911年 쑨원이 辛亥革命을 일으키자 비로소 몽골人들은 獨立을 摸索했다. 하지만 그들 힘만으로는 不足했기에 1917年 共産革命을 일으킨 러시아에 기댔다. 그때 큰 役割을 한 이가 수흐바타르와 초이發散이다.

    遊牧民의 아들로 태어난 數흐바타르는 逆轉(驛傳)馬車의 馬夫를 하다, 辛亥革命으로 몽골이 獨立하자 軍에 들어가 機關銃 部隊 小隊長을 했다. 除隊한 뒤에는 政府 印刷所의 植字工(植字工)을 하다 러시아 共産革命이 일어나자, 1920年 초이發散과 함께 몽골 人民黨을 만들어 政府를 세우기 위한 鬪爭에 들어갔다. 1921年 그는 人民義勇軍을 이끌고 公算 러시아軍과 함께 中國軍을 물리치고 니슬렐후레(울란바토르)에 人民政府를 세웠다. 人民政府에서 (1921年 7月 10日) 國防部 長官을 하다 30歲(1929年)에 죽었다.

    초이發散이 그 뒤를 이었다. 초이發散은 共産主義者답게 宗敎를 彈壓했다. 라마佛敎 司祭와 信者 3萬 名 以上을 殺害하고 社員을 破壞했다. 그러한 惡行과 獨裁에도 不拘하고 그는 蘇聯과 協力해 몽골을 占領하고자 하는 日本軍을 물리친 功이 있다(1939년 할힌골 戰鬪 勝利. 日本은 ‘노몬한 事件’이라고 한다). 몽골에서는 夭折한 數흐바타르를 레닌, 長期 執權을 한 초이發散을 스탈린에 比喩하는 이가 많다.

    수흐바타르가 人民政府를 세운 몽골은 反누르하치-北元 系列의 據點이 있던 곳이다. 中國이 ‘외몽골’로 부르는 只今의 몽골 共和國 地域이다. 호르친部 같은 親누르하치 勢力은 참여시키지 않았다. 淸나라에 協助해 몽골을 攻擊한 호르친部 等은 辛亥革命에도 不拘하고 獨立할 뜻이 없었다. 이들이 살아온 곳이 바로 ‘內몽골’이다.

    1932年 滿洲國을 세운 日本은 1936年 內몽골度 차지할 생각으로 內몽골을 ‘몽强國(蒙疆國)’으로 만들어 中國으로부터 독립시켰다. 그러나 1945年 敗戰하면서 中國에 돌려주었다.

    하지만 數흐바타르와 초이發散에 依해 獨立한 몽골은 中國에 ‘返還’되지 않았다. 蘇聯은 第2次 世界大戰이 끝나기 直前, ‘8月 暴風作戰’으로 滿洲國과 몽强國을 接受해 中國에 넘겨줬으니, 中國은 蘇聯이 認定한 몽골 獨立에 異議를 提起할 수 없었다.

    이를 再確認하기 위해 1946年 초이發散은 國民投票를 實施해 中國으로부터 獨立하는 것이 몽골人의 뜻이라는 것을 再確認했다. 中國 共産黨은 이를 認定했으나, 國民黨은 認定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中國과 臺灣은 몽골에 對해 다른 態度를 取한다. 中國은 政府가 내는 地圖에 몽골을 外國으로 그린다. 그러나 臺灣 政府가 發行하는 地圖는 몽골을 內몽골自治區와 함께 收復해야 할 中國으로 描寫한다.

    共産 中國으로부터 獨立을 認定받은 초이發散은 한때 內몽골과의 統合을 推進했다. 하지만 中國 共産政府가 强力히 反撥하자 바로 抛棄했다. 이것이 몽골人들이, 몽골 國籍을 가진 몽골人과 中國 國籍을 가진 內몽골仁으로 나눠진 來歷이다.

    內몽골自治區의 面積은 (外)몽골의 90% 남짓이다. 몽골은 平均高度가 海拔 1500m이지만 內몽골은 1000m 程度다. 비는 內몽골에 더 많이 온다. 이 때문에 人口는 300萬 臺 2380萬으로 內몽골이 훨씬 많다. 自然 條件이 더 좋은 곳에 사는 몽골人들은 中國人이 되고, 칭기즈 칸의 精神을 잇자는 獨立派는 瘠薄한 땅에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몽골人은 內몽골人을 中國人보다 더 싫어한다. 反對의 理由로 內몽골印度 몽골人을 無視한다.

    둘은 같은 言語를 쓰지만 文字는 다르다. 內몽골人은 固有의 몽골 文字로 表記하나, 몽골人은 러시아 키릴文字로 적는다. 몽골은 中國과 거의 來往夏至 않고 지내다가 1992年 民主化하면서 ‘中國+內몽골’을 만나게 됐다. 開放의 結果는 ‘中國에 對한 從屬’이었다. 그러자 自信感을 가진 內몽골人들도 몽골을 찾게 되었다. 歷史的인 感情을 의식한 탓인지 그들은 中國人 가이드를 내세워 說明을 듣는다고 한다.

    ‘李承晩’은 있으나 ‘朴正熙’가 없다

    몽골은 發展을 하고 싶은데 技術者가 없으니, 人件費가 싼 中國 技術者를 불러들인다. 그런데 몽골人들은 中國 技術者 밑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中國 技術者의 指示를 받아 허드렛일을 하는 것은 北韓에서 온 勞動者들의 몫이 됐다. 現在 몽골에는 北韓 勤勞者 2000名 程度가 일한다. 從屬을 甘受하며 開放을 했는데 技術과 資本이 쌓이지 않는 것이 바로 몽골의 苦悶이다.

    몽골에는 ‘李承晩(수흐바타르와 초이發散)’은 있었으나, ‘朴正熙’가 없는 것이다. 反面 우리에게는 大帝國을 만들 ‘칭기즈 칸’이 없었다. 韓國은 獨立 後 開發獨裁를 거쳐 民主化 時代로 進入했으나, 몽골은 開發獨裁 없이 바로 民主化 時代로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몽골은 中國이 그랬던 것처럼 ‘朴正熙’를 매우 궁금해한다. 全體 人口의 1%가 넘는 3萬 名 以上이 韓國에 오게 된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3萬餘 名은 100% 勞動年齡層이고 家長이 大部分이라 몽골 經濟에 寄與하는 比重이 높다. 몽골人은 戰爭을 치르고 世界 4大强國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高速成長을 하고 民主化까지 이룬 大韓民國의 成功 祕法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記者는 몽골이 몽골과 內몽골로 永遠히 갈라서게 된 理由가 궁금했다.

    어떤 指導者를 내세우느냐, 그가 어떤 選擇을 하느냐에 따라 國家의 運命은 뒤바뀐다. 只今 內몽골은 深刻한 中國火의 길로 들어섰다. 自治區의 2380萬 人口 가운데 몽골人은 17%度 되지 않는 400萬 名에 不過하기 때문이다. 內몽골人은 몽골語보다 中國語를 쓰는 것을 더 便하게 여길 程度다.

    內몽골人보다 더 深刻하게 正體性을 잃은 것이 淸나라를 세운 滿洲族이다. 滿洲族은 1068萬 名이나 살지만, 滿洲語를 하는 이는 찾기 힘들다. 그런데도 中國은 몽골人과 滿洲人의 復活을 두려워한다. 中國이 東北工程을 하는 理由는 우리 歷史인 古朝鮮과 高句麗의 歷史뿐 아니라 金과 請을 세운 滿洲人의 歷史를 吸收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몽골의 歷史를 吸入하기 위해 ‘北方(北方)公正’을 한다. 北方公正의 骨子는 ‘內몽골人이 中國人이니, 몽골의 歷史도 中國史’라는 것이다. 따라서 칭기즈 칸을 中國에 屬한 偉大한 將帥로 그려놓는다. 그러나 몽골에는 北方工程을 反駁하는 學者가 없다.

    깊어가는 몽골의 苦悶

    여름철 한-몽 航空便은 매우 붐빈다. 韓國에서는 울란바토르에서 한몫 잡아보려는 이들과 草原에서 말을 타고 밤에는 쏟아지는 별을 보고자 하는 觀光客이 밀려들어가고, 몽골에서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이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交流者 가운데 몽골 事例에 비추어 韓半島 統一을 생각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우리도 몽골-內몽골人처럼 永久 分斷의 길을 걷는 건 아닐까.

    來年 몽골은 아시아·유럽 頂上會議(ASEM)를 開催한다. 獨立 以後 最大의 國際行事를 열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새 空港을 짓고 있다. 이 空港과 울란바토르를 잇는 最初의 高速道路도 닦고 있다. 韓國이 서울올림픽으로 先進國에 進入했듯, ASEM 頂上會議를 契機로 몽골은 從屬을 끊어내고 高速成長을 할 것인가. 北方工程을 무너뜨리고 內몽골과 統一하는 大長程에 나설 것인가. 歸國하는 밤 飛行機를 타기 위해 다시 찾은 칭기즈 칸 空港은 ‘世界를 征服한 大칸’ 칭기즈 칸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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