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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기 中央公務員敎育院長|新東亞

윤은기 中央公務員敎育院長

小說家 · 아프리카 紀行文 · 실버放送 MC

  • 入力 2011-03-25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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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隱退는 없다!’

    윤은기 중앙공무원교육원장

    윤은기<br>●1951年 忠南 唐津 出生<br>●충남고, 고려대 心理學科, 仁荷大 經營學 博士<br>●서울科學綜合大學院 總長<br>●‘하트 經營’ ‘스마트 經營’ 等

    ‘살아 있는 限 永遠한 現役이다!’

    나는 20代부터 正말 일福이 많은 사람이다. 늘 일이 따라 다니고 가는 곳마다 해야 할 일이 새로 생긴다. 어쩌면 일을 자꾸 만드는지도 모른다.

    大學校를 卒業하고 空軍將校로 軍 服務를 할 때는 所謂 때부터 副官生活을 했다. 飛行團長 副官, 韓美聯合司 情報參謀部長 副官, 空軍本部作戰參謀部長 副官을 했으니 남보다 한 時間 前에 出勤해야 하고 夜勤과 週末勤務를 하는 게 茶飯事였다. 게다가 秋夕, 설날, 年末年始,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은 오히려 일이 더 많았다. 내가 모시던 將軍은 實力과 人品이 出衆한 분이어서 나는 이런 일福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겼다.

    ‘避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도 이때부터 내 座右銘으로 삼았다. 5個月 訓鍊받고 任官한 後 單 하루도 빠짐없이 萬 4年間을 이렇게 일服 속에 보냈다.



    그 後 綜合貿易商社 勤務 5年을 거쳐 1983年부터 經營컨설턴트의 길로 들어섰고 1988年부터 放送을 始作해 KBS, SBS, MBN 等에서 十數 年을 放送에 沒頭했다. 特히 KBS 第1라디오 ‘生放送 오늘’을 中心으로 一日 生放送 時事프로그램만 10年 以上을 進行했다. 이때도 名節이나 특별한 記念日에는 特輯放送 等으로 더 바빴다. 남이 休暇를 갈 때도 나는 늘 生放送에 매달려 있었다.

    그 後 서울科學綜合大學院 大學校(aSSIST)에서 副總長과 總長을 하면서 亦是 낮 밤 없이 일을 했다. 新設 大學校라서 일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國內 最初로 레저經營MBA, 産業保安MBA 課程을 開設하고 ‘持續經營CEO課程’‘氣候變化리더십過程’‘綠色成長리더십過程’ 等 差別化된 最高經營者過程을 통해 各 分野 리더와 最高經營者 1000餘 名이 參與하는 知識經營커뮤니티를 만드는 벅찬 일을 해왔다.

    지난해에는 民間人으로는 最初로 61年의 歷史를 지닌 中央公務員敎育院의 院長으로 發令을 받아 公務員敎育의 根本的인 革新課題를 遂行하고 있다. 中央公務員敎育院은 우리나라 國家公務員의 모든 敎育을 責任지는 重要한 任務를 맡고 있는 곳이다. 任命 初期에는 時間이 아까워서 아예 敎育院 內의 宿所에서 隨時로 宿泊하면서 일을 했고 高位公職者들이 參與하는 國家戰略세미나를 新設해 一年 내내 每週 土曜日은 이들과 함께 講義와 討論으로 보냈다.

    이처럼 平生 일이 많은 것을 보고 아내는 分明히 八字所關이라고 말한다. 아내가 八字所關이라고 斷定하는 데는 숨은 뜻이 있는 듯하다. 結婚 後 數十 年을 經營컨설턴트, 産業講師, 著述家, 골프칼럼니스트, 放送人, 大學總長, 公務員 等 다양한 職業을 갖고 社會活動을 하고 있으니 當然히 집에서 家族과 보내는 時間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늘 이게 不滿이다. 家族의 生日에도 生放送을 해야 하고 크리스마스에도 生放送을 했다. 집안 祭祀날에도 講義를 해야 했고 아이가 아파서 한밤中에 病院으로 달려갈 때도 짬짬이 마감에 걸린 原稿를 作成해야 했다.

    아무리 늦게 자도 새벽 5時나 5時半頃에는 일어나서 原稿를 쓰거나 冊을 보거나 여러 가지 構想을 한다. 20代 以後에는 늘 이렇게 지냈다. 겉으로는 南 눈에 내 人生이 順坦하게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아내는 내가 ‘白鳥의 물길질’을 하느라고 苦生해온 것을 잘 알고 있다. 겉보기와는 달리 물 밑에서는 수많은 물길질로 발가락이 부르튼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아내의 愛情 어린 잔소리도 歲月이 가면서 달라지고 있다. 젊어서는 ‘함께 놀러가자!’ ‘오늘은 家族과 함께’라는 말을 많이 했고 나이가 좀 들어서는 ‘일할 땐 일하고 쉴 때는 쉬자!’라는 말을 많이 하더니 요즘은 ‘健康이 最優先이니 일 좀 줄여라’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때마다 나는 ‘나에게 隱退는 없다’ ‘나는 살아 있는 限 永遠한 現役!’이라는 말로 對應하고 있다.

    特히 요즘은 平均 壽命이 늘고 老人들의 健康狀態가 좋아지면서 人生 後半戰의 活動이 더욱 重要해졌다. 내 生涯에 꼭 하고 싶은 일을 定하고 미리 準備하는 것은 이 時代를 살아가는 壯年 以上의 사람들에게는 꼭 必要한 生活目標이고 즐거운 生涯設計가 아닐 수 없다. 勿論 내가 꼭 해보고 싶은 일은 이미 定해 놓았다. 이 일들을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힘이 솟는다.

    첫째, 小說家로 데뷔하자

    靑少年 時節 나의 꿈은 小說家가 되는 거였다. 政治도, 經濟도 暗鬱했던 時節에 나는 닥치는 대로 冊을 읽었는데 小說 속에는 그야말로 큰 宇宙가 들어 있었다. 사랑, 希望, 自由, 豐饒, 眞理, 勸善懲惡, 運命, 容恕, 自費….

    戰爭 以後 荒廢한 社會를 살아가는 나에게 小說이 보여주는 理想鄕은 너무나 달콤했고 마침내 나는 小說家가 되겠다는 決心을 했다. 내가 高麗大學校 心理學科에 入學한 것도 心理學者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小說家가 되려면 人間의 마음과 行動을 硏究하는 學問인 心理學이 꼭 必要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大學에 다닐 때 내 冊가방 속에는 늘 心理學冊과 小說冊이 半半씩 들어 있었다.

    이청준 先生의 小說集 ‘별을 보여 드립니다’나 카프카, 카뮈, 그레이엄 그린의 冊들이 젊은 時節 내 가슴을 充電해주었다.

    小說家가 되겠다는 꿈을 이제껏 놓아본 적이 없다. 特別히 기쁜 일이 생기거나 正말 힘든 일이 닥치면 ‘이건 모두 앞으로 내 作品의 素材가 되겠지!’라 생각했고 世上의 誘惑에 맞닥칠 때도 ‘내가 只今 흔들리면 좋은 作家는 될 수 없다. 作家 精神의 根本은 깨끗한 靈魂이다!’라고 마음을 다지며 살아왔다.

    數年 前 서울藝術綜合學校 總長을 지내신 이강숙 先生님이 나이 일흔에 小說家로 데뷔하셨다. ‘빈병교향곡’이란 自傳的 小說인데 이 冊을 이 先生님에게서 直接 膳物로 받고 興奮을 감추지 못했던 記憶이 있다.

    70歲에 小說家로 데뷔하시는 분이 있으니 如前히 나에게도 希望이 있다고 興奮했다. 그러나 그날 單숨에 그 冊을 읽으면서 興奮은 가라앉고 깊은 挫折感을 함께 느꼈다.

    ‘나도 果然 이렇게 훌륭한 小說을 쓸 수 있을까!’

    ‘빈병교향곡’은 첫 番째 小說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平生 小說을 써온 圓熟한 作家의 名作 같은 完成度를 지니고 있었기에 나는 크게 唐慌했던 것이다.

    누구나 靑少年期에는 꿈을 갖는다. 이 꿈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고 죽기 前에 이 꿈을 實現하는 사람은 正말 幸福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職業을 가진 사람으로 불려왔지만 내 마지막 職業은 ‘小說家’이기를 꿈꾸고 있다.

    나는 小說家의 꿈을 實現하기 위해 요즘 ‘客主’의 作家 김주영 先生님을 한 달에 한두 番씩 만나고 있다. 이분에게는 내가 첫 番째 小說을 내면 評論을 써달라는 付託까지 해놓았다. 몇 番씩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小說家가 되려는 나의 剛한 意志와 꿈을 알고 계신다.

    70歲가 되기 前에 첫 番째 小說冊을 내는 일, 이게 내가 꼭 해보고 싶은 일의 最優先 課題다. 틈만 나면 메모와 想像으로 習作을 하는 일도 未來의 꿈을 키워가는 幸福한 作業이다.

    둘째, 아프리카 紀行文 쓰기

    3年 前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를 旅行한 적이 있다. 南아共의 케이프타운, 탄자니아의 세랭게티, 나미비아 奧地까지 다녀왔다. 氣候變化와 綠色成長過程을 開設하기 前에 물 不足 國家의 現場을 한 番 다녀와야겠다는 게 旅行의 名分이었다.

    旅行報告書 兼 紀行文을 쓰려고 잔뜩 벼르고 갔는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마침 내가 肺炎에 걸려 엄청난 苦生을 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奧地의 텐트型 宿所에서 高熱로 呻吟하면서 旅行을 하느라 나뿐만 아니라 아내까지 큰 苦生을 했다.

    아프리카는 人類의 過去, 現在, 未來가 混合된 곳이다. 絶望의 歷史가 있고 希望의 未來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素朴한 人心이 있고 光大한 自然이 있는 곳이다. 人類의 神祕와 自然의 神祕를 가진 곳이기도 하다. 平生 한두 番 다녀오기 힘든 곳을 가서 高熱의 눈으로 보았던 아프리카의 夢幻的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健康할 때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를 다시 旅行하고 싶고 이番에는 꼭 ‘아프리카 紀行文’을 써서 冊으로 내고 싶은 懇切한 所望이 있다. 요즘 나는 아프리카에 關한 講義도 쫓아 다니고 아프리카 關聯 冊도 熱心히 보고 있다.

    셋째, 실버放送局 開局과 MC가 되자

    내가 살아오면서 正말 불꽃처럼 猛烈하게 일했던 時節이 放送 MC를 했던 때일 것이다. KBS 時事프로그램 ‘生放送 오늘’ MC를 비롯해 ‘CBS 윤은기의 情報時代’, TBS ‘윤은기의 굿모닝 서울’, EBS ‘職業의 世界’, MBN ‘알기 쉬운 經濟이야기’ 等 數十 個의 프로그램을 進行해왔다.

    1990年代 末 外換危機 때에는 MBC ‘新裝開業 大作戰’이라는 프로그램을 申東曄氏와 함께 進行하면서 亡해가는 店鋪의 回生을 위한 特別放送을 하기도 했다. 多樣한 프로그램의 放送MC를 十數 年間 한 經驗과 心理學 專攻, 經營컨설턴트 經驗, 大學總長과 公務員敎育院長 經驗 等을 살려서 公職 隱退 後에는 실버放送의 MC를 해보고 싶은 欲心이 있다. 先進國에는 老人을 위한 專用放送도 있고 老人相談을 위한 放送프로그램이 많이 있는데 아직 우리나라에선 導入되고 있지 않다. 高齡社會로 急速히 進入하는 우리나라에서 老人問題는 큰 社會問題로 다가오고 있다.

    放送 進行料는 안 받아도 좋다. 生放送으로 老人분들과 함께 苦悶거리를 풀어보고 함께 慰安받고 기쁨을 나누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放送을 통한 社會奉仕活動을 하고 싶다. 旣存 放送局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좋고 아예 내가 인터넷放送局을 만들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放送人으로 살아왔고 이 經驗이 나에게 많은 機會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나는 이 經歷에 나의 力量을 담아서 社會奉仕를 하고 싶은 所望을 가지고 있다. 10餘 가지 職業을 가지고 世上을 猛烈하게 살아온 新參 小說家가 進行하는 실버放送에 對해 果然 聽取者는 어떤 反應을 보일까! 나는 未來의 꿈이 있어 幸福하고 오늘을 더 熱心히 살아가고 있으니 이 또한 幸福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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