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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기다려주는 者|新東亞

아버지는 기다려주는 者

  • 이주향│ 수원대 敎授·哲學

    入力 2011-03-22 09: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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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기다려주는 자

    렘브란트가 그린 ‘蕩子의 歸還’은 失敗한 아들의 靈魂을 어루만져주는 아버지의 仁慈한 表情을 잘 捕捉하고 있다.

    “우리 아이가 願하는 大學에 가지 못했어요. 그 때문에 男便이 憂鬱하고, 아이와 말도 안 해요. 男便의 氣分을 慰勞할 수 있는 音樂 한 曲 申請합니다.”

    가끔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런 事緣을 傳하는 MC의 말이 흘러나왔다. 7080世代가 主로 듣는 프로그램이니 자연스럽긴 한데, 그 자연스러움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낮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親舊와 點心을 먹는데, 親舊가 ‘엄친아’였던 自身의 아들 얘기를 한다.

    “나름 工夫를 잘했잖아? 그런데 OO大學밖에 가지 못했어. 그랬더니 男便은 아들을 쳐다보려고도 안 해.”

    “너는?”



    親舊가 긴 한숨을 쉬며, 멋쩍게 웃으며 말한다.

    “한숨 나오지. 더구나 學父兄 모임에 가면 모두 如前히 엄친아를 둔 엄마들인데….”

    “거기 안 가면 되잖아!”

    “응?”

    내 씨 박힌 말에 親舊가 놀란다. 참 많다. 大入問題로 아들에게 失望하는 아버지가, 딸에게 失望하는 어머니가.

    子息에 對한 欲求不滿은 自己에 對한 不滿이다. “네가 내 아들인데 겨우 그 大學밖에 못 가다니” 하는 異常한 歎息으로 呪文을 거는 아버지가 힘이 있는데 아들이 어떻게 그 大學에서 人生의 밑거름이 될 精神의 糧食을 제대로 거둘 수 있겠는가. “네가 내 딸인데 겨우 그것밖에 안되다니” 하며 詛呪인 줄도 모르고 詛呪를 퍼붓는 어머니가 힘이 있는데 딸이 어떻게 氣盡脈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얼마나 工夫를 잘했는데 겨우 이곳, 여기라니’ 하며 自愧感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自己人生을 設計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現在의 自身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過去 대단했던 實力을 立證하는 것이 아니라 對策 없는 暴力에 當하는 것이다. “우리 집안에 너 같은 사람은 없다”는 殘忍한 말은 잘난 집안의 말이 아니라 콤플렉스의 말이다. 子息을 망치고 自身의 가장 所重한 存在들을 망치고 스스로를 망치는.

    나는 그런 學生을 많이 알고 있다. ‘無意識과 마음의 傷處’라는 科目을 開設하고 보니 왜 그렇게 傷處 입은 學生을 많이 만나게 되는지. 父母에게 認定받지 못해 氣가 죽어 있는 靑年들! 참 많은 靑年이 가장 가까운 父母에게서 참 많은 傷處를 받고 산다.

    授業時間에 늘 앞자리에 앉는 성실한 學生이 있었다. 授業을 眞摯하게 듣지만, 質問을 던지면 唐慌하며 고개를 숙이는 小心한 學生이었다. 先生을 오래 하다 보면 할 말이 없어 對答을 못하는 건지, 唐慌해서 論理를 構成하지 못하는 건지, 小心해서 自己를 보여주지 못하는 건지 알게 된다. 先生이 어떤 論理를 構成했을 때 어떻게 反應하는지는 또 다른 論理構成力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表情, 눈빛, 몸짓이 모두 言語다.

    그 誠實하고 小心한 學生이 學期 말에 내 硏究室을 찾았다. 노크 소리를 듣고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뜸을 들이더니 겨우 硏究室의 門을 빼꼼히 연 것이다. 아마 門 앞에서 몇 番이나 왔다갔다 하다가 어렵게 찾은 것이리라.

    그의 問題는 아버지였다. 大學에 入學한 지 2年 내내 아버지와 눈을 맞춰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의 山이었고 하늘이었던 아버지는, 子息이 願하는 大學에 들어가지 못하자 便하게 그를 보지 않았다. 말끝마다 이마에 내川(川)字를 그린 채 그를 對했다. 아버지가 願하는 大學에 가기 위해 編入을 準備했고, 休學을 했다. 編入도 제대로 되지 않자 아버지는 아예 대놓고 그를 無視했다. 뭘 해보겠다고 計劃을 말씀드리면 人相을 찡그리며 안 될 理由를 斷乎하게 들이댔다. 뭔가를 보여주기 前엔 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걱정과 짜증과 無視 속에서 氣가 꺾인 아들이 또 어떻게 뭔가를 보여줄 수 있겠는가.

    “어머니는?”

    어머니는 傍觀者였다. 어머니는 아들과 아버지를 仲裁하지 못했다. 아들에게 失望한 어머니도 말끝마다 걱정이고 말끝마다 한숨이었다. 함께 課外를 한 親舊들이 모두 名門大學에 간 것만 되새기는, 過去 志向的 어머니가 무슨 힘이 되겠는가. 그는 親하게 지내던 親舊와의 關係도 모두 끊겼다. 그렇게 2年을 보내고 나니 家庭은 얼음판이었다. 아버지가 그저 무서웠고, 어머니는 싫었다. 그러자 才氣潑剌하던 어릴 적 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됐다.

    子息에게 많은 것을 要求하는 父母가 많다. 왜 그것도 못하느냐고? 子息의 未來가 걱정되는 父母는 性急하고 攻擊的이다. 子息이 맘에 걸리는 父母는 이래라저래라 干涉하면서 子息이 期待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야단치는 것으로 사랑을 代身한다. 父母는 自身들의 人生에서 두려워했던 것을 子息들에게 禁止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父母는 子息에게서 自身이 禁止했던 것을 볼 것이다. 그런 父母는 意圖와 相關없이 暴力的인 父母다. 그런 父母 밑에서 子息들은 氣를 펴지 못한다. 氣를 펴지 못하고 주눅 든 아들이 아버지의 期待에 미치기 위해 努力할수록 스스로에게는 오히려 破壞的이다.

    아버지가 있어 幸福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있어 두려운 아들이 너무 많다. 어머니가 있어 便安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 때문에 對人關係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아이가 너무 많다. 그런 子息들은 自己 自身을 믿지 못하고 自己 自身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남을 두려워한다.

    아버지는 目標値를 定해놓고 따라오지 못하면 追放하는 構造調整의 首長이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엄친아의 이야기만 들고 오는 재미없는 이야기꾼이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子息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者여야 하고, 아버지는 子息들이 自己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者여야 한다. 自己의 期待에 못 미치는 子息을 보려 하지 않는 건 自身의 그림자를 보려 하지 않는 것이고, 自己보다 못한 子息을 理解하려 하지 않는 건 自己를 理解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갖춰야 할 가장 큰 能力은 기다려주는 것이다.

    나는 렘브란트가 그린 ‘蕩子의 歸還’에서 기다려주는 아버지의 原形을 보았다. 무엇보다도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진 아들의 靈魂을 만져주는 아버지가 疲勞에 지친 아들의 生 全體를 따뜻하게 데워내고 있는 그림이다. 아들에 對한 기다림으로 아예 눈이 먼 것 같은 無表情한 아버지의 따뜻한 손, 그 손에 몸을 맡긴 채 이제 平穩을 찾은 듯 무릎을 꿇고 앉은 蕩子, 蕩子의 해진 옷과 감출 수 없는 더러운 발바닥이 고된 彷徨의 痕跡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그림이다.

    알려졌듯 蕩子는 失敗한 아들이다. 아버지에게서 받을 遺産을 미리 받아가지고 나가 모두 蕩盡하고 빈털터리 거지로 돌아온 초라한 자다. 그러고 보면 失敗하지 않은 게 生의 目的은 아닌가 보다.

    아버지는 기다려주는 자
    李柱香

    1963年 서울 出生

    이화여대 法學科 卒業, 同 大學 哲學과 席·博士

    水原大 人文大 敎授(哲學)

    韓國哲學會 副會長, 韓國니체學會 副會長

    著書 : ‘사랑이, 내게로 왔다’ ‘이주향의 治癒하는 冊읽기’ ‘現代 言語·心理哲學의 爭點들’ ‘내 가슴에 달이 들어’ ‘그래도 나는 가볍게 살고 싶다’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等


    샤갈度 ‘蕩子의 歸還’을 잘 그렸지만 렘브란트의 그림이 훨씬 印象的인 것은 蕩子를 안아주는 아버지의 表情 때문이다. 아버지의 눈은 그리움이 켜켜이 쌓인 者의 눈이었다. 過去를 糾明하려 드는 冷靜하고 싸늘한 눈이 아니라 氣盡脈盡한 아들의 아픔 속으로 그저 스며들고자 하는 者의 포근한 눈! 그런 아버지가 있어야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있어야 自己 안의 눈물을 모두 吐해내고 새롭게 始作할 수 있지 않을까? 生의 意味는 自己 自身을 肯定하는 데서 온다. 自己 自身을 肯定하게 되기까지 生에는 지름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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