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新聞協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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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立 [ 編輯 ]

1957年 6月 29日 全國 日刊新聞 代表 36名이 모여 ‘韓國日刊新聞發行人協會’를 創立하였다. 以後 1962年 10月 13日 ‘韓國新聞發行人協會’, 1966年 10月 13日 ‘韓國新聞協會’로 各各 名稱을 바꾸었다.

設立目的 [ 編輯 ]

‘言論의 健全한 發展 및 新聞 倫理 高揚과 日刊新聞·通信社 共同의 利益을 擁護하고 言論의 公益的 機能을 增大시키는 데 寄與함’을 目的으로 하고 있다.

主要 事業 [ 編輯 ]

① 企劃事業

? 各種 調査硏究事業(新聞 産業 發展戰略, 販賣廣告 先進化 方案 等)

? 新聞發展硏究所(新聞經營 全般의 未來政策 硏究와 中長期 戰略 樹立)


② 新聞廣告 디지털 電送시스템 事業

? 廣告데이터 디지털化, 處理過程 自動化

? 迅速, 正確, 安定的인 廣告電送 環境 造成

? 廣告파일의 印刷 適合有無 檢事, 電送 業務

? 新聞廣告 製作標準 硏究, 컬러 標準값 硏究


③ 新聞活用敎育(NIE) 事業

? NIE 韓國委員會 運營

? 新聞活用敎育 캠페인(패스포트 公募展)

? 進路探索 프로그램(新聞社 記者의 學校 訪問 講義)


④ 弘報事業

? 硏究叢書 시리즈 發行

? 情報 報告書 發刊

? 隔週刊 協會報 發行

? 웹 사이트 運營

? 新聞바로알기 캠페인 展開

? 新聞 博覽會(新聞弘報, 읽기文化, 進路探索)

? 新聞 弘報 活動(標語 公募/ 新聞 弘報 廣告製作)


⑤ 對外 協力增進 事業

? 세계신문협회(WAN) 總會 代表團 派遣

? 各種 國際會議 및 심포지엄 誘致·支援

? 南北 言論 交流

? 海外新聞協會와의 交流 세미나 및 提携


⑥ 後援 및 敎育事業

? 言論團體 支援(韓國語文記者協會 等)

? 會員社 職務遂行能力 向上 敎育

沿革 [ 編輯 ]

<新聞協會의 誕生>

韓國 近代 新聞의 뿌리는 獨立新聞이다. ‘新聞의 날’ 4月 7日은 1896年 徐載弼 先生이 ‘獨立新聞’을 創刊한 날이다. 1959年 韓國新聞協會 等 國內 言論界는 이를 기려 그날을 ‘新聞의 날’로 定했다. 日帝의 國權侵奪과 그에 對한 抵抗, 解放과 韓國戰爭, 産業化와 民主化 等 激浪의 近現代史를 거쳐 오는 동안 當代의 證人이며, 主役으로서의 役割을 擔當해온 新聞의 正體性을 强調하기 위한 記念日 指定이었다.

이에 앞서 1957年 6月 國內 日刊新聞의 發行人들은 ‘韓國日刊新聞發行人協會’를 設立했다. ‘韓國新聞協會’의 前身이었다.


<1950年代 左右對立과 經營難 打開>

1950年代 戰後 復舊가 進行되면서 情報에 對한 渴症이 커졌다. 自由黨 政權의 腐敗를 剔抉하고 民主主義를 守護해야 한다는 熱望도 높았던 時期였다. 1957年 6月 新聞協會 創立 當時 全國의 日刊 新聞社는 이미 43個社였다. 協會 出帆 後 가장 먼저 이뤄낸 일은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韓國通信協會’ 等 言論 諸 團體와 함께 ‘新聞倫理委員會’를 創設한 것이었다. 新聞協會는 이밖에 言論人의 資質 向上, 言論從事者 處遇 改善, 似而非 記者 根絶對策 等의 事業을 벌였다.


<1960年代 民主黨 政權-軍事政權-第3共和國 時期>

1960年代는 ‘軍事政權의 言論 統制’로 記錄되는 時期다. 5·16 쿠데타 一週日 後 發表된 言論統廢合으로 全國 日刊紙의 65%가 없어졌다. 1966年 技術의 進步와 함께 컬러新聞이 첫선을 보였다. 新聞協會는 1966年 編輯, 業務, 公務, 管理 等 4個 部門의 ‘韓國신문상’을 制定했다.


<1970年代 維新治下의 言論>

70年代 維新 治下에서 言論은 極甚한 統制에 시달린다. 記者들은 自由言論實踐運動을 펼쳤고, 政權은 前代未聞의 廣告彈壓, 記者 集團解雇, 投獄으로 맞섰다.

1971年 취리히에서 열린 國際新聞發行人協會(FIEJ) 總會에서 新聞協會가 滿場一致로 會員에 加入되었다. 先進 海外 言論界와의 交流는 韓國 言論의 發展을 圖謀하고, 韓國 言論의 實態를 世界에 알리는 役割을 했다.


<1980年代 言論統廢合과 言論基本法 制定>

80年代 新軍部는 言論 統廢合과 集團 解職의 칼을 또 빼들었다. 言論基本法과 報道指針이 國民의 입과 귀를 틀어막았다. 이러한 一連의 事態는 維新時代의 終末을 재촉했으며, 1987年 6月 드디어 民主化가 成就됐다. 新聞協會는 1985年 ‘新聞協會步’를 타블로이드 8面으로 創刊하고, 新聞協會 主催로 國際新聞發行人協會(FIEJ) 理事會를 서울에서 開催했다. 이 해에는 新聞活用敎育(NIE)을 活性化하기 위해 海外 各國 事例를 國內에 最初로 紹介하기도 하였다. 1989年 4月 7日 西大門 顯著公園에 徐載弼 博士 銅像 除幕式을 갖고, 8月 31日에는 徐載弼 先生의 殘餘 遺品 346點을 美國에서 引受하였다.


<1990年代~2000年代 自律競爭과 記者室 閉鎖>

90年代는 ‘많이 찍는’ 部數 競爭, ‘두껍게 찍는’ 增面 競爭이 暴發的으로 펼쳐졌다, 컴퓨터로 新聞을 製作하면서 납 活字는 退場했다. 1994年 新聞協會는 獨立新聞의 招待發行人 徐載弼 先生의 遺骸를 國內 奉還해 國立墓地에 安葬했다. 2000年代 初 無料新聞이 登場했다. 無限競爭의 時代였다. 新聞協會는 ‘新聞公正競爭委員會’를 發足하는 等 不公正, 過當 競爭으로 인한 弊害를 막기 위한 自淨努力을 기울였다.

디지털化와 함께 인터넷 포털이 急速히 뉴스 市場에 進入했고, 新聞이 애써 生産한 뉴스콘텐츠의 著作權料 問題와 뉴스의 가십化, 破片化, 黃色化 等 저널리즘 價値의 毁損이 言論界 核心主題로 떠올랐다.

이즈음 政府는 言論改革의 看板 아래 言論의 威信을 毁損하고 國民과 言論을 갈라놓으려는 試圖가 있었다. 言論을 對象으로 한 政府의 訴訟이 亂舞했으며 及其也 政府部處 記者室이 閉鎖되기까지 했다.

2005年 新聞協會는 世界의 1千 500餘 言論人이 參席한 가운데 ‘第58次 세계신문협회 서울總會’를 主催했다. 協會는 言論 諸 團體와 함께 2014年 ‘災難報道準則’을, 2016年 ‘選擧輿論調査報道準則’을 制定했다.


<只今 펼치고 있는 活動>

예나 只今이나 新聞協會의 가장 큰 關心事는 言論自由다. 新聞協會의 聲明이나 意見의 大部分은 言論自由와 關聯한 것이다. 新聞協會는 國際 交流와 連帶에도 힘쓰고 있다. 1971年부터 國際新聞發行人協會(現 세계신문협회)에 加入한 以後 每年 總會에 代表團을 派遣하는 等 世界 各國의 新聞 發行人들과의 交流를 展開해 오고 있다.

新聞協會는 30餘 年 前인 1985年 NIE, 卽 新聞活用敎育을 國內에 처음 紹介한데 이어 ‘읽기文化 祝祭’ 等 新聞 읽기를 活性化하는 다양한 事業을 펼치고 있다. 2014年 8月 ‘新聞發展硏究所’를 開所하여 新聞 産業 發展 等 會員社 共同利益 創出과 會員社 및 協會의 當面 懸案 政策 對應에 注力하고 있다. 新聞法制 및 政策 等의 硏究를 비롯하여 ‘國內外 미디어動向’ 配布 및 ‘新聞 産業 政策課題 案內書’를 發刊하고 있다. 最近 質 낮은 類似言論, 나아가 假짜뉴스로 인해 저널리즘 市場이 混濁해졌다. 新聞協會는 言論의 代表團體로서 責任感을 가지고 저널리즘 復元에 앞장서고 있다.

會員社 [ 編輯 ]

  • 한국신문협회는 全國의 日刊新聞 및 뉴스通信社 가운데 所定의 審査節次를 通過한 51個 新聞社, 2個 뉴스通信社가 會員社로 加入돼 있다. 傘下 機構로는 經營支援協議會·廣告協議會·技術協議會·基調協議會·出版協議會·販賣協議會 等 6個 協議會가 있다.

? [會員社 現況 (總 53個社)]

? 中央紙 (27個社): 京鄕新聞, 國民日報, 來日新聞, 對韓經濟, 東亞日報, 每日經濟, 머니투데이, 文化日報, 브릿지經濟, 서울經濟, 서울新聞, 世界日報, 스포츠서울, 스포츠조선, 아시아經濟, 아주經濟, 이데일리, 電子新聞, 조선일보, 中央日報, 코리아타임즈, 한겨레, 韓國經濟, 韓國日報, 헤럴드經濟, 뉴스1, 聯合뉴스

? 地方紙 (26個社): 江原道閔日報, 강원일보, 경기일보, 慶南新聞, 慶南日報, 慶北每日, 慶北道民日報, 慶北日報, 經常日報, 경인일보, 광주일보, 國際新聞, 大邱日報, 대전일보, 每日新聞, 釜山日報, 영남일보, 蔚山每日, 전라일보, 全北日報, 全北道民日報, 중도일보, 濟州信保, 中部每日, 중부일보, 忠淸투데이, 한라日報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