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時代의 傳統 科學 技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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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傳統 科學 技術은 朝鮮 初에 이르러 한 段階 發展한다. 特히 民族的 天文學과 醫藥學에서 볼 수 있듯이 韓國의 獨特한 科學 技術을 만들었던 點을 큰 特性으로 指摘할 수 있을 것이다.

帝王의 天文學 [ 編輯 ]

高麗 를 滅하고 새로운 國家를 建設한 朝鮮 李成桂 는 個國 3年 뒤인 1395年 天象列次分野之圖 라는 天文圖를 製作했다. 이 天文圖에는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거의 大部分의 별 1467個를 大理石에 새겨 넣었다. 下段에 있는 說明文에 依하면 高句麗 때 있었던 天文圖가 戰爭 속에 江물에 빠져 遺失되었는데, 그 拓本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 새로이 測定해 고쳐 잡아 大理石에 새겼다는 것이다.

朝鮮 王朝가 登場하면서 古代 高句麗 의 天文圖가 새롭게 復活한 點에 對해 많은 學者들이 注目하고 있다. 이는 帝王의 學問으로서의 天文學을 내세워 새로 세운 國家의 正統性을 確立하고자 하는 太祖 의 努力의 産物이었다고 할 수 있다. 傳統 科學은 이렇게 時代的, 政治的 必要에 依해서 發展의 기틀을 마련해 나간 것이다.

世宗 時期의 燦爛한 科學 技術은 바로 이러한 歷史的 背景에서 誕生했다. 이 때의 科學技術은 天文學 은 勿論이고 數學 과 度量衡, 地理學 , 醫學 , 藥學 , 農學 等의 廣範圍한 分野에 걸쳐 刮目할만한 正果를 이루었다. 이 時期는 韓國 傳統 科學의 全盛期라 해도 過言이 아니다. 이 中 天文曆法의 成果는 1423年 에 세종대왕이 정인지 , 正初 , 김담 , 이순지 等에게 命하여 曆法의 綜合的인 整備를 圖謀한 以後 20餘年에 걸친 渾身의 努力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朝鮮 은 建國 後 曆法을 高麗 때 使用하던 大統曆을 그대로 이어 받아 使用했다. 大統曆은 元來 中國 明나라 의 曆法으로, 中國의 元나라 때 天文學者 郭守敬이 1281年 에 만든 優秀한 曆法 授時曆을 이름만 바꾼 것에 不過했다. 그런데 大統曆은 이미 授時曆을 만든지 200餘年이 지났기 때문에 誤差도 커졌을 분만 아니라, 天文 觀測과 計算의 基準이 中國의 首都 北京 이었다. 따라서 獨立된 國家를 建國한 朝鮮으로서는 獨自的인 曆法의 整備가 切實했다.

建國 以後 20年 間 獨自的인 曆法體系를 마련하려는 努力은 여러 가지 側面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曆法의 硏究와 그 計算에 必要한 數學 의 硏究가 活潑히 行해졌다. 이러한 바탕을 土臺로 1442年 에 비로소 《 칠정산내편 》과 《 칠정산외편 》이라는 曆法이 編纂되었다. 칠정산내편은 當時의 東洋에서 最新 曆法인 授時曆을 바탕으로 補完한 것이며, 칠정산외편은 當時 西洋에서 最新 曆法인 中東의 回回曆을 바탕으로 製作한 曆法이었다. 따라서 東西洋에서 가장 優秀한 曆法의 長點을 聚合해 이룩한 七政算은 15世紀 中葉 當時의 尖端曆法이었던 것이다.and so on~~

自擊漏 [ 編輯 ]

報漏閣 自擊漏

三國史記 에 依하면 新羅 에서 이미 781年 에 樓閣(漏刻)이라는 물時計를 만들어 時報(時報)를 했다는 記錄이 있듯이 물時計 는 오래前부터 國家 標準의 時計 役割을 해왔다. 그러나 古典的인 물時計는 그리 正確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물時計를 管理하는 데도 많은 機會費用이 所要되었다. 이에 世宗 蔣英實 에게 1434年 에 새로운 方式의 물時計의 製作할 것을 命하였는데, 蔣英實은 매우 精巧하고 複雜한 機械 裝置인 自動 時報 裝置를 갖춘 自擊漏 를 製作해 내었다. 이 自擊漏는 징과 種, 北을 利用해 時間을 소리로 알렸고, 아울러 每 時間마다 12地神의 人形을 利用해 時間을 알렸다 [1] .

自擊漏 가 完成되자 世宗 은 크게 기뻐하며, 報漏閣이라는 建物을 王의 執務室인 便殿에서 가까운 景福宮의 慶會樓 西北쪽에 짓고 自擊漏를 이 곳에 設置하였다. '觀象授時(觀象授時)'라는 表現에서 보듯이 天文을 管理하여 時間을 알려주는 것은 百姓들의 삶을 이끌어 가는 王의 義務이자 權利였다. 宮闕 속 깊은 곳 王의 執務室 가까이에 自擊漏를 設置한 해 正確한 時間을 百姓들에게 알렸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百姓들이 이 自擊漏의 時報를 들은 것은 아니었다. 勿論 自擊漏의 時報 소리를 멀리까지 傳해주는 '前루소(傳漏所)'와 같은 國家機關이 있기는 했지만, 試補의 不完全함을 完全히 解決할 수는 없었다. 自擊漏의 時報는 宮闕 內에 局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仰釜日晷 [ 編輯 ]

宮闕 밖의 百姓들을 위해서 仰釜日晷 라는 해時計가 1434年(世宗 16年)에 製作되었다. 傳統的으로 해時計는 平地에 視角의 눈금을 그려 넣고 그 위에 막대기를 세워서 막대기의 해 그림자가 비추는 視角의 눈금을 읽어 時間을 測定했다. 形態도 다양하게 變化하여 携帶用으로도 改良되었다.

綜合 觀測 器具 [ 編輯 ]

曆法의 整備를 위해서는 精密한 天文 觀測 活動은 當然히 必要하다고 할 수 있다. 世宗 은 여러 觀測 機器를 製作해 慶會樓 近處에 設置하도록 하였다. 그 中에 間의 (簡儀)는 象徵的인 渾天儀 를 使用하기 簡便하도록 實用的으로 改良한 綜合 觀測 器具이다. 이 簡儀를 利用하면 모든 天體들의 天球上에서의 位置를 測定할 수 있다. 아울러 太陽은 勿論이고, 별의 觀測을 利用해 時間도 잴 수 있다. 肝意義 크기는 約 6m로 慶會樓에 있는 7m의 石臺 위에 設置되었다. 世宗은 이 簡儀臺에서 每日 밤 5名의 天文 官員이 宿直하면서 天文現象을 觀測하도록 하였다. 慶會樓에 있는 이 簡儀를 大簡儀라고 하는데, 이것을 더욱 簡便하게 改良하여 작은 規模로 縮小하여 移動性을 높인 것을 小簡儀라고 한다.

測雨器와 手票 [ 編輯 ]

測雨器 手票 는 모두 降雨量을 測定하는 器具로 天文曆法이 完成 段階에 접어든 1441年 頃에 製作되었다. 測雨器는 구리로 만든 둥근 圓筒에 降雨를 받아 그 量을 測定하는 器具로, 그 原理는 매우 單純하다. 그러나 人類의 歷史에서 降雨量을 定量的으로 測定한 最初의 事件으로 그 歷史的 意義는 매우 크다. 世宗은 測雨器를 製作한 後 漢城 과 監營所在地, 大都市 地域에 普及하고, 1年間 降雨量을 測定하여 每年 初에 中央政府에 報告하도록 하였다. 現在 朝鮮王朝實錄 에 記錄되어 있는 朝鮮 時代의 降雨量 記錄은 世界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貴重한 氣象學 記錄임이 分明하다.

手票 는 漢江과 淸溪川 便에 設置해 비가 온 後 河川의 水位를 測定하는 器具였다 그 形態는 六角의 돌기둥에 눈금을 새겨 넣었는데, 測雨器와 마찬가지로 가뭄과 洪水에 賢明하게 對處하기 위한 努力의 一環이었음을 알 수 있다.

世宗 代에 製作된 測雨器 手票 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18世紀에 製作된 것들이 現存해 世宗大 것을 推定해 볼 수는 있다.

地理學 [ 編輯 ]

婚日康里歷代國道指導

高麗 時代에 政治社會的으로 큰 影響을 미쳤던 風水地理論 朝鮮 의 建國過程에도 적지 않은 影響을 미쳤다. 例를 들어, 1394年 朝鮮의 首都를 새로 定하는 問題를 解決하기 위하여 政府機關 內에 陰陽算定도감을 設置하고 重要하게 論議를 벌였다. 하지만 大體的으로 風水地理說은 朝鮮 中期 以後 儒敎 思想을 强化 되면서 그 影響力이 弱해져 갔다. 太宗 은 似而非 地理圖讖書들을 분서할 것을 命할 程度였다. 이와 같이 國家風水의 比重은 漸次 줄어갔지만, 個人이 明堂자리를 求하는 陰宅風水의 比重은 反對로 커져만 갔다

國家風水가 漸次 사라진 反面, 地理學 朝鮮 建國 以後 刮目할 만한 發展을 이루었다. 1402年 김사형 , 李茂, 이회 等이 製作한 朝鮮 最初의 世界 地圖인 ‘ 婚日康里歷代國道指導 ’는 이러한 事實을 實證的으로 보여준다. 이 地圖는 中國 과 朝鮮을 지나치게 크게 그린 點에서 客觀性을 缺如하고 있긴 하지만, 西洋 地名이 100餘個, 아프리카 地名이 30個 以上 나타나고 있는 等 東아시아 地域을 벗어난 地域에 對한 새로운 地理學 知識들을 朝鮮의 知識人들이 지니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2]

朝鮮 電氣에 그려진 韓國의 地圖는 1463年 에 鄭陟과 양성지 가 그린 東國地圖 가 있지만, 現傳하지 아니한다. 때문에 地圖의 內容을 알 수는 없지만, 記錄에 依하면 40年 가까운 期間에 걸쳐 全國을 實測하는 等 科學的 努力을 기울여 製作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科學的 實測에 依한 指導 製作 技法은 朝鮮 後期에까지 그대로 傳해졌다.

한便, 朝鮮 電氣 동안에는 參事官들이 朝鮮 八道의 各 地域을 돌아다니면서 얻은 各種 地理學的 知識 情報들이 地理誌에 실렸다. 新撰八道地理志, 世宗實錄地理志, 八道地理志 等이 이 當時에 集成된 地理誌이다. 이 時期에 製作된 여러 種類의 地理誌는 1481年 에 完成된 東國輿地勝覽 으로 綜合되었다.

醫藥學 [ 編輯 ]

韓國은 三國 時代부터 中國의 醫書와 醫學理論을 受容해왔으며, 高麗 時代에는 代의 醫學이 大擧 收容되었다. 그런데 高麗 後期에 이르면 中國의 醫學 理論과 處方에서 벗어난 우리의 體質과 風土에 맞는 醫藥學이 登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高麗 高宗代에 編纂된 鄕藥救急方 은 180餘種의 韓國産 藥材에 對한 情報를 담고 있는 等, 中國의 處方 理論에서 벗어나는 獨自的인 醫藥學이 登場하는 電氣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高麗 말 鄕約(鄕藥)의 登場은 朝鮮 에 이르러 더욱 展開되어 世宗 臺에 絶頂을 이루었다. 1433年 에 703種의 韓國産 香藥材를 利用한 處方을 한데 모은 鄕藥集成方 이 編纂되었다. 또한, 醫學 理論의 側面에서 高麗時代에는 代의 醫學 理論이 導入되었지만 朝鮮에 와서는 代의 醫學 理論이 積極的으로 收容되는 等, 보다 다양한 醫學 理論이 導入되어 當時 朝鮮 醫學界는 혼란스러울 程度였다. 1443年 부터 3年에 걸쳐 365卷이나 되는 巨大한 分量으로 編纂된 醫方類聚 는 이와 같이 複雜 다양한 醫惡 理論을 集大成하는 醫書였다.

하지만 이 醫方類聚는 너무나 分量이 많아 成宗 臺에 이르러서야 一部가 刊行되는 데 그쳤다. 따라서 醫學 理論을 百科事典式으로 整理해 놓기는 했으나 醫學敎育이나 臨床實習에서 參照하기에는 매우 不便했다. 이러한 問題點은 許浚 東醫寶鑑 의 完成으로 解決되었다. 東醫寶鑑 25卷은 東아시아의 醫書 中에서도 卓越한 것으로 인정받을 程度로 體系的인 醫書이다. 特히, 冊이름에서 ‘同意(東醫)’라는 表現을 使用할 程度로, 中國 醫學 理論에서 벗어나 우리의 體質과 風土에 맞는, 우리의 香藥材를 利用한 治療에 强調를 둔 民族的인 性向이 强한 醫書라는 點은 注目할 만하다.

技術의 發展 [ 編輯 ]

朝鮮 時代에는 技術을 賤視하는 儒敎 理念이 支配 理念으로 定着해 가면서 以前 時代에 비해 그 發展이 緩慢하게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火藥술이나 印刷術은 比較的 高麗의 技術을 繼承하여 발전시킨 모습이 나타난다.

火藥 [ 編輯 ]

重火器로 武裝한 거북船 : 忠武公全書 에 실려 있는 全羅左水營 거북船 그림이다.

韓半島에서 火藥 을 처음으로 製造할 수 있게 된 것은 14世紀 末 최무선 에 依해서였다. 그 以前에는 中國으로부터 火藥 과 兵器를 들여와 不足하나마 쓸 수밖에 없었다. 火藥의 製造技術은 中國 政府機關에서 極祕事項으로 取扱하여 他 國家에 絶對 傳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倭寇 의 잦은 侵略으로 南部 地域이 荒廢化되고, 及其也는 西海岸을 따라 漢城 近處까지 攻擊當하는 地境에 이르자, 崔茂宣은 火藥武器를 利用해 倭寇를 물리칠 생각을 하게 되었다. 中國에서는 고작해야 불꽃놀이에 利用되던 火藥을 崔茂宣은 武器로 活用하기로 決心한 것이다.

이에 최무선 은 刻苦의 努力 끝에 中國人 二元의 도움으로 火藥 製造의 祕法을 익히고 1377年 政府 內에 ' 火㷁都監 '이라는 火藥 製造를 擔當하는 國家機關을 設置하여 火藥 의 製造와 火藥 武器의 開發 等을 推進하기 始作했다. 一旦 어렵게 火氣를 開發했고, 戰線에도 火砲를 設置하는 等의 成果를 얻었다. 畫布, 卽 大砲를 裝着한 高麗의 軍船은 그 威力이 대단하여 그야말로 無敵 陷穽이었고 倭寇 는 殲滅되었다.

그런데 최무선 이 開發한 火藥 의 製造 過程에 對한 內容은 傳하는 바가 없어 잘 알 수 없으며, 그의 아들 최해산 에 依해서 火藥 製造의 祕法은 繼承되었다. 朝鮮 時代에 들어서도 火藥의 製造와 武器의 開發은 繼續 이어졌다. 世宗 臺에 編纂된 '總統登錄'이라는 冊이 朝鮮에 들어와 發展된 火藥의 製造와 武器 開發의 內容을 담았을 것으로 期待되지만 아쉽게도 現傳하지 아니하여 그 實相을 把握할 수는 없다. 以後 이장손 飛擊震天雷 변이중 의 貨車 等이 可恐할 威力이었다는 記錄이 남아있을 뿐이다.

朝鮮 火藥 武器가 다시 威力을 立證한 것은 壬辰倭亂 때였다. 1592年 에 勃發한 戰爭에서 倭軍 이 在來式 小銃으로 武裝하고 칼과 활로 武裝한 朝鮮의 軍隊를 陸地에서 百戰百勝할 때, 海戰에서의 狀況은 判異하게 달랐다. 거북船에 大砲를 裝着하고 日本의 電線들을 壞滅시키면서 乘勝長驅했던 것이다. 結局, 日本이 陸地에서의 큰 前科에도 不拘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可恐할 威力의 大砲를 裝着한 거북船이 包含된 ‘朝鮮의 無敵艦隊’ 때문에 海軍이 壞滅되었기 때문이었다 [3] .

<印刷技術> 世界 最高 水準을 자랑하던 高麗 의 印刷 技術은 朝鮮 開國 以後에도 繼承되어 發展되었다. 그것은 朝鮮이 建國 直後인 1415年 에 國營 製紙 工場인 '鑄字所'를 設置한 데서 잘 드러난다. 이 鑄字所에는 200名 程度의 職員이 雇用되어 종이를 大量으로 生産했다. 그만큼 國家政策的으로 書籍의 印刷를 大量으로 한 것이다.

1377年 直指心體要節 에서 나타난 高麗 의 金屬 活字 技術은 朝鮮 癸未字 ( 1403年 )로 이어져 繼承되었다. 고작해야 書籍 20部 程度의 印刷에 그쳤던 高麗의 金屬 活字 技術은 朝鮮 時代에 들어와 大量 印刷가 可能한 技術的 發展을 이루었다. 癸未字로 復活한 朝鮮의 金屬 活字 印刷術은 다시 世宗 代의 庚子字 ( 1420年 )와 甲寅字 ( 1434年 )로 더욱 發展되었다. 國營 印刷所라 할 수 있는 鑄字所에서 찍어낸 甲寅字는 20餘 萬자의 靑銅活字였다. 이 甲寅字로 짠 活版으로는 하루에 40餘張을 印刷할 수 있는 程度였다. 甲寅字로 印刷한 世宗代의 科學書籍人 《 칠정산내편 》과 《 칠정산외편 》 等은 現在 過去 모습 그대로 奎章閣 에 所藏되어 있다. 그 保管의 狀態와 아름다운 活字體는 보는 이로 하여금 感歎을 자아내게 한다.

韓國은 世界에 자랑할 만한 韓國의 歷史 記錄인 朝鮮王朝實錄 을 遺産으로 갖고 있다. 朝鮮王朝實錄은 記錄 文化의 精髓로 評價받는 書籍이며, 高麗 以後 繼承된 質 좋은 종이의 製造와 金屬 活字의 印刷 技術이 어우러져 낳은 所重한 印刷 遺産인 것이다.

建築 [ 編輯 ]

都邑에 時前 建物들이 鍾路 와 隣接해서는 通路 마당 이 있는 單層, 重層 이었고 鍾路 안쪽 地域에서는 重定型의 一部 斷層에 建築物이었다. [4]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우리 별자리 : 안상현, 현암사
  • 天文類抄 : 김수길ㆍ윤상철 驛, 대유학당

註解 및 引用資料 [ 編輯 ]

  1. 우리의 科學文化財, 韓國科學史學會, 서해문집, 1997
  2. 우리 옛地圖와 그 아름다움, 한영우 外 2人, 효형출판, 2002
  3. 거북船, 김재근, 정우사, 1992
  4. 整數인; 한동수 (2022年 2月). “20世紀 初 漢城府 鍾路 周邊 時前 建物의 空間構造와 特徵” . 《建築歷史硏究》 (韓國建築歷史學會) 31 (1): 7?17. doi : 10.7738/JAH.2022.31.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