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 (軍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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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
李周一
出生地 일제강점기 日帝 强占期 咸鏡北道 鏡城郡
死亡地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本館 公州 (公州)
服務 滿洲國軍
大韓民國 陸軍
服務期間 1940年代 ~ 1945年 (滿洲國軍)
1946年 ~ 1963年(大韓民國 陸軍)
勤務 陸軍 第6師團
陸軍本部
國家再建最高會議
大韓올림픽委員會
大韓體育會
最終階級 滿洲國軍: 중위 中尉(中尉)
大韓民國軍: 大將(大將)
指揮 陸軍 第6師團長
陸軍本部 砲兵局 國葬
陸軍本部 作戰參謀部 部長
陸軍本部 企劃參謀部 部長
陸軍本部 管理參謀部 部長
國家再建最高會議 最高委員
國家再建最高會議 財政經濟委員長
國家再建最高會議 副議長
대한올림픽위원회 委員長
大韓體育會 會長
主要 參戰 太平洋 戰爭 , 韓國 戰爭
기타 履歷 民主黨 國防外交安保特報委員(1964年)
監査院 院長
韓國國民黨 顧問(1981年)
新民主공화당 拷問(1988年)
자민련 顧問(1995年)
국민회의 拷問(1996年)

이주일 (李周一, 1918年 11月 14日 [1] ~ 2002年 1月 28日 [2] )은 日帝强占期 大韓民國 의 軍人, 政治人이다. 朴正熙 , 金鍾泌 , 장도영 等과 함께 5·16 軍士 政變 을 主動하였으며, 軍事革命委員會 委員과 國家再建最高會議 第2代 副議長 等을 歷任하였고, 監査院 院長도 지냈다. 咸鏡北道 出身이다. 本貫은 公州 (公州).

生涯 [ 編輯 ]

咸鏡北道 鏡城郡 出身이다. 滿洲 神經軍官學校 日本陸軍士官學校 를 卒業하고 滿洲軍 將校로 服務했다. 이주일은 朴正熙 의 神經軍官學校 1年 先輩였으며, 光復 時點까지 滿洲軍 第8段에서 朴正熙, 申鉉濬 , 방원철 과 함께 勤務했다.

二週日이 中尉 階級에 있을 때 日本이 太平洋 戰爭 에서 敗亡하자 朴正熙와 함께 베이징 光復軍 을 거쳐 大韓民國으로 왔다.

1946年 朝鮮警備士官學校 ( 陸軍士官學校 의 前身)를 特別 7期에 入敎하여 4個月만에 卒業하고 陸軍 少尉로 任官했다.

1949年 朴正熙가 左翼 嫌疑로 逮捕되어 無期懲役을 宣告받았을 때, 이주일度 無期懲役을 求刑받았으나 無罪로 풀려났다. 裁判 記錄에 따르면, 當時 大尉이던 이週日은 朴正熙의 勸誘로 남로당 에 入黨했으며, 大韓民國 國軍 에 入隊할 때도 朴正熙의 周旋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3]

1950年 6月 韓國 戰爭 이 勃發하자 參戰하였으며, 第28聯隊長이 되었다.

1952年 10月 에는 第9步兵師團 正面으로 攻擊하기 위해 布陣한 中共軍 第38軍 隸下 113, 114 步兵師團의 豫備 部隊로 제112보병사단이 後方에 待機 中이었다. 이를 看破한 김종오 所長은 1952年 9月 22日 左側 前方의 395 高地에 임익순 大領의 第30步兵連帶, 右側 前方에는 김봉철 大領의 第29步兵連帶를 展開시키고 그에게도 連絡을 取해 제28보병연대를 豫備 部隊로 하여 有事時 양 連帶를 支援하도록 하였다. 以後 김종오 將軍 等과 함께 中共軍을 肉彈으로 對決하여 勝戰으로 이끌기도 하였다.

1961年 第2軍司令部 參謀長으로 5·16 軍士 政變 에 參與하였고, 軍政 時期 國家再建最高會議 財政經濟委員長과 副議長, 第3共和國 監査院長 等 要職을 거쳤다. 5ㆍ16에 加擔한 咸鏡道 出身 人士들은 反革命 事件을 통해 大部分 肅淸되었으나 이週日은 朴正熙 와의 오랜 親分關係 德에 肅淸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最高會議 委員으로 在職 中 1963年 12月 大韓民國 陸軍 大將 으로 1階級 特進과 同時에 豫編하였다.

第3共和國 이 出帆하고 國家再建最高會議가 解散되면서 그는 民主공화당 에 入黨하였으며, 監査院長을 지내기도 했다. 1980年 政界를 隱退한 以後에는 市民社會團體와 右翼 團體에서 活躍하였다.

事後 滿洲軍 將校 經歷으로 인해 2008年 發表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中 軍 部門에 包含되었다.

'解放 後 光復軍'과 朴正熙 祕密工作員설 [ 編輯 ]

朴正熙가 滿洲軍에 있을 當時 祕密裏에 光復軍 活動을 했다는 說이 있으나, 朴正熙와 함께 勤務했던 신현준이 光復軍의 存在 自體를 光復 後 베이징 으로 移動할 때까지 全혀 모르고 있었다. 步兵8段 時節 光復軍과 祕密裏에 關聯을 맺었다는 것은 事實無根이다"고 證言한 바 있다. 신현준의 證言은 朴正熙 祕密光復軍설 에 對한 重要한 反駁의 根據로 使用되고 있다. [4]

解放 直後 北京에는 光復軍 出身, 學徒兵 出身 等 수많은 朝鮮 靑年들이 集結하였다. 그 數字가 大略 400餘 名에 達했는데 滿洲軍 大尉 出身은 신현준과 中尉 出身의 朴正熙 前 大統領도 있었다. 臨時政府는 東北反사처(辦事處) 최용덕 處長을 보내 이들에게 臨時居處를 마련해주었다. 그러고는 이들을 臨時로 김학규 光復軍 3地帶長 麾下로 편입시켰다. 이때 신현준과 朴正熙는 滿洲軍 將校 經歷을 인정받아 3地帶 1大隊長과 2中隊長을 各各 맡았다. 이들은 모두 '解放 後 光復軍'이다. [5]

朴正熙처럼 高等敎育을 받은 日本軍 將校는 “(勢力 擴張을 위해) 日本軍 出身 朝鮮人들을 光復軍에 積極 編入한다”는 韓國獨立黨의 方針에 따라 光復軍에 積極 編入됐다. 염인호 서울市立大 敎授(私學)가 쓴 論文 ‘解放 後 韓國獨立黨의 中國 管內地方에서의 光復軍 확軍活動’을 보면, ‘朴正熙처럼 解放 以後 擴群된 兵士의 數는 베이징 1300餘名, 난징 800餘名, 상하이 1300餘名 等’인 것으로 나타난다. [6]

朴正熙가 所屬된 光復軍 部隊는 아마도 북평잠便紙對日 것으로 보이는데, 一部 證言에는 第3地帶 주평진大隊(駐平津大隊)라고도 한다. 坪陣이란 북평과 天眞에서 따온 말이다. 이 部隊의 大隊長은 朴正熙와 같이 勤務한 申鉉濬이었고 신현준은 光復軍의 存在를 解放 以前에는 알지 못했다고 回顧했다. 이 部隊는 實際 光復軍 部隊라기보다 解放이라는 急激한 狀況 變化에 따라 光復軍이 勢불리기 次元에서 部隊 名稱을 附與한 것으로, 事實上 一種의 捕虜收容部隊였다. 이들 部隊를 管理한 中國쪽 機關이 不로管理處(?虜管理處)인 것도 이를 證明한다. [7]

이게 朴正熙가 日帝 敗亡 以前에 光復軍 祕密要員이었다는 式으로 記述한 小說 <光復軍>(著者 朴盈滿)의 根據로 活用됐다. 그러나 이는 事實이 아니다. 證言者는 利用(李龍), 解放 前엔 이집용(李集龍)이었다. 間島特設帶에 對해 제대로 證言한 唯一한 사람이었다. 朴正熙·신현준이 光復軍 김학규 將軍에게서 “適當한 時期에 日本軍을 攻擊하라”는 命令을 받고 1945年 7月에 베이징에서 다시 鐵石部隊로 돌아오는 等 祕密光復軍이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8]

小說光復軍에 根據하여 많은 假짜 情報들이 流通되었다. 陸軍本部가 發刊한 '創軍戰士', 장창국이 出刊한 '陸士 卒業生'에도 登場한다.

‘滿洲에 있던 將校들은 그들대로의 地下組織이 있었다. 朴正熙, 申鉉濬, 이週日 等은 光復軍 第3地帶의 祕密 光復軍으로서 擧事 直前에 解放을 맞이했다.’ (陸軍本部 發刊 ‘創軍戰士’ 265쪽)

創軍戰士 말고도 朴正熙를 祕密 光復軍으로 描寫한 冊은 더 있다. 朴正熙 政權에서 合參議長, 國會議員을 지낸 장창국(前 合參議長, 작고)씨가 1984年 <陸士卒業生>이란 冊에서 '光復軍 祕密要員설'을 主張하면서 擴散되기 始作했다. 當時 張氏는 冊에서 "신태양樂劇團이 '鐵石部隊'로 慰問갔을 때 이 樂劇團의 雜役夫로 僞裝한 祕密光復軍 利用기가 朴正熙와 接觸, 그를 祕密光復軍으로 만들었다"고 썼다.

그러나 이는 모두 捏造된 것이다. 部隊長의 이름을 따 一名 '鐵石部隊'로 불린 이 部隊는 1939年 명월區에서 朝鮮人 獨立代代로 出發한 部隊로 朴正熙는 이 部隊에 간 적이 없다. 鐵石部隊 出身인 박창암(陸軍 准將 豫編, 작고)씨, 송석하(陸軍 所長 豫編, 작고)씨 等은 生前에 "朴正熙는 鐵石部隊 門前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證言한 바 있다.

또 '신태양 樂劇團' 丹粧을 지낸 作曲家 손목인(作故)氏는 生前에 "더러 軍隊 慰問度 갔지만 鐵石部隊는 들어본 일이 없고, 이용기라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證言했다. 또 團員이었던 歌手 新카나리아氏와 映畫俳優 黃海氏 等도 지난 97年 "이용기라는 이름은 記憶에 없다"고 證言한 바 있다.

朴正熙와 8段에 같이 勤務했던 방원철(陸軍大領 豫編, 작고)씨는 "8段 時節 演藝人이 部隊로 慰問온 적이 없었다"며 "朴正熙는 8段 赴任 以後 反碧山(單 本部 所在地)을 떠난 적이 單 한番도 없었다"고 證言했다. [9]

光復軍 出身인 張俊河는 1967年 大選에 맞추어 나온 小說 <光復軍>(著者 朴盈滿)에 激忿한다. 親日派 朴正熙 大統領을 祕密光復軍으로 遁甲시켰기 때문이었다. 1967年度 當時에 野黨 大統領 候補 尹潽善을 支持하며 全國을 돌아다니면서 줄기차게 批判한다. 고상만의 ‘중정이 記錄한 장준하’ 冊에도 그 이야기가 言及돼 있다. ‘只今 現在 一角에서 朴正熙 候補가 光復軍이라고 하면서 써놓은 冊이 있는데 이것은 全部 다 거짓말이다. 내가 光復軍이기 때문에 正確히 안다. 그는 當時에 滿洲에서 日本軍 將校로 있었다.’ 이같은 言及에 對해서 當時 中央情報部가 重要狀況 報告로 張俊河의 發言을 一一이 記錄했다. [10]

또 當時 情況을 比較的 잘 아는 김승곤 前 光復會長은 “박영만은 靑瓦臺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光復軍’을 썼는데, 內容을 훑어본 朴 大統領은 ‘내가 어디 光復軍이냐. 누가 이 따위 冊을 쓰라고 했냐’며 火를 냈고, 結局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巨創하게 準備한 出版記念會도 치르지 못했다”고 證言했다. [11]

小說 光復軍이 出刊될 當時 中央情報部에 勤務한 이종찬 前 國會議員의 證言이다. “이건 내가 實際로 겪은 것으로 1967~68年 中央情報部에 ‘<光復軍>(著者 朴盈滿) 冊을 모두 거둬들이라’는 指示가 내려왔다. 어렵게 冊을 收去해 봤더니 ‘朴正熙가 光復軍 活動을 했다’는 內容이었다. 朴 大統領이 그것을 읽고 ‘이런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 解放 後 김학규 光復軍 3支隊長이 滿洲에 있던 韓國 國籍 軍人을 모았다. 그때 暫時 區大將으로 士兵을 모아 훈련시킨 적이 있다. 이것은 解放 以後로 내가 장준하나 김준엽처럼 日帝때 獨立軍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冊을 거두어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12]

朴正熙가 '解放後 光復軍'이기는커녕 길거리를 徘徊하던 그를 逮捕해서 國內로 送還했다는 資料도 있다. 김홍신의 홈페이지 '朴正熙 光復軍編入은 虛僞捏造'에 따르면 光復軍 出身의 抗日鬪士 李在賢(이형진의 父親)은 북평 辦事處 主任(光復軍 少領/地域 司令官)이었다. 日帝가 敗亡하자 朴正熙가 屬한 滿洲軍 8段이 解體되고 베이징으로 나와 길거리를 徘徊하던 朴正熙를 잡아 들여 韓國으로 送還한 責任者가 李在賢이라고 한다. 當時 북평 辦事處의 任務는 再 中國同胞와 韓國 國籍의 日本軍들을 本國으로 送還하는 것이 任務였다. 日本軍 出身이 너무 많아 軍의 編制가 必要하여 申鉉濬 日本軍 大尉를 大隊長으로 이주일과 朴正熙 日本軍 中尉를 中隊長으로 하여 統率케 하고 本國으로 送還하였던 것뿐이다. 朴正熙가 光復軍 3地帶에 編入되었다는 主張은 틀렸다는 것이다. 이 內容은 前 情報院長人 이종찬 氏가 2004年 8月 26日 中央日報에 投稿한 글에 對한 反駁을 爲해 쓴 글이었다. [13]

學歷 [ 編輯 ]

略歷 [ 編輯 ]

  • 1954年 : 師團長
  • 1959年 : 軍事參謀長
  • 1961年 : 國家再建最高會議 財經委員長, 副議長
  • 1962年 : 大韓올림픽委員會 委員長 兼 大韓體育會 會長
  • 1963年 : 大將 豫編
  • 1964年 : 監査院長
  • 1974年 : 咸北奬學會 理事長
  • 1978年 : 財經軍人會 顧問
  • 1985年 : 大韓體育會 顧問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이주일” . 엠파스 人物情報. 2005年 9月 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3月 31日에 確認함 .  
  2. “淸白吏 이週日 前 監査院長 別世” . 서울新聞. 2002年 1月 31日. 23面面. 2016年 3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6月 14日에 確認함 .  
  3. “左翼嫌疑로 無期懲役... 再審서 '九死一生' - [實錄 '軍人 朴正熙'-親日과 左翼의 記錄 1] 1949年 軍事裁判” . 오마이뉴스. 2004年 8月 9日.  
  4. 한홍구 (2002年 10月 23日). “한홍구의 歷史이야기/ 機會主義 靑年 朴正熙! - 만주군관학교-光復軍-남로당-肅軍 協助, 陽地만을 좇은 그의 끝없는 변신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한겨레21.  
  5. “[正政黨淡]잘못된 獨立有功 褒賞 事例 셋” . 慶南道民一步. 2018年 10月 22日.  
  6. “‘ 짝퉁 光復軍 ’ 수두룩하다” . 한겨레21. 2005.06.24.  
  7. “機會主義 靑年 朴正熙!” . 한겨레21. 2002.10.23.  
  8. " 朝鮮人部隊 말만 믿고 入隊…民間인 虐殺說은 事實無根 " . 世界日報. 2006.08.08.  
  9. “中尉 進級 한달 뒤 日帝敗亡에 落膽 解放 이듬해 敗殘兵 몰골 歸國船 타” . 오마이뉴스. 2004.08.24.  
  10. " 朴正熙 祕密光復軍?…虛無孟浪한 小說 이야기 " . 노컷뉴스. 2015.10.23.  
  11. “滿洲軍 中尉 朴正熙, '祕密光復軍' 遁甲” . 世界日報. 2006.08.10.  
  12. “[원희복의 人物探究]臨政記念館建立委員長 李鍾贊 “李承晩부터 金元鳳까지 다 아우르겠다”” . 京鄕新聞. 2018.03.18.  
  13. “朴正熙 光復軍編入은 虛僞捏造” . 金洪信 홈페이지. 2004年 8月 29日. 2020年 9月 2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9年 9月 6日에 確認함 .  
  14. 反民族問題硏究所 (1994年 3月 1日). 〈白善燁 - 빨치산 討伐 指揮한 越南 反共 將校 (정해구)〉. 《淸算하지 못한 歷史 1》.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2-1 .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朴正熙
第2代 國家再建最高會議 副議長
1961年 7月 3日 ~ 1963年 12月 16日
後任
(廢止)
前任
김동하
第20代 大韓體育會 會長
1962年 1月 9日 ~ 1962年 12月 27日
後任
이효
前任
(職務代行) 임승설
第3代 監査院長
1964年 2月 19日 ~ 1968年 2月 18日
後任
이주일
前任
이주일
第4代 監査院長
1968年 2月 27日 ~ 1971年 6月 3日
後任
(職務代行) 이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