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선 (190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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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선
李能善
出生 1902年 11月 30日 或은 1902年 7月 2日
朝鮮 京城府 鍾路區 수은동 32番地
死亡 1963年 3月 29日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삼청동
死因 -
居住地 大韓帝國 時代
* 京城府 鍾路區 수은동 32番地
* 京畿道 抱川市 일동면 기산리 圓筒마을
日帝 時代
* 京城府 鍾路區 수은동
* 黃海道 長淵郡 장연읍
* 黃海道 해주군 해州邑
* 京城府 鍾路區 팔판동 151番地
光復 以後
* 京城府 鍾路區 팔판동 151番地
* 서울 鍾路區 팔판동
* 서울 鍾路區 삼청동
性別 男性
本館 雨季 (羽溪)
別稱 者(字) : 敬白(景百), 雅號 : 未詳, 日本式 이름 : 하타니 露地(羽溪能二)
學歷 배재學堂
경성고등보통학교
日本 도요大學
經歷 每日申報 本社 記者
每日申報 廣告 父 記者
每日申報 發行人
每日申報 海州 支局長 兼 黃海道 特派員
海州新聞 記者 兼 特派員
現代日報 理事
現代日報 厚生局長
現代日報 常務理事
京城府 鍾路區 팔判定 財務課長
京城府 종로구 八瓣鄭會長
서울市 鍾路區 팔판동 洞會長
職業 記者, 特派員, 言論人, 作家, 隨筆家, 廣告인, 出版人, 言論人(言論社 幹部), 企業人, 社會運動家, 公務員
父母 親 아버지 李在汀
친 本어머니 高聲李氏 이름不明(1898年 死亡)
친 生母 安東金氏 이름不明(1912年 死亡)
친 庶母 1名 이름不明(1912年 死亡)
친 庶母 1名(1912年에 들어왔으나 物議를 빚음)
양 아버지 이재영(實際 5寸 아저씨)
量 本어머니 全州李氏 이름 不明
養어머니 풍양曺氏(1917年에는 生存해 있었음)
配偶者 2名(淸州 韓氏, 이름 未詳)
子女 딸 이원순, 아들 이원상(李源翔, 아들 이원익(李源翊) 딸 이원희, 아들 이원민(李源敏) 딸 이원애, 아들 이원태(李源泰, 初等學校 敎師 ), 아들 李源榮(李源榮)
親戚 兄 이흥선, 동생 異樣船, 親할아버지 이유녕 , 養할아버지 兼 從祖父 이우녕

이능선(李能善, 1902年 11月 30日 或은 7月 2日 ~ 1963年 3月 29日 )은 日帝 强占期 記者 , 作家이자 隨筆家, 言論人, 잡지 同人, 出版人, 企業人이며, 大韓民國 의 企業人, 言論人, 社會 活動家이다. 1947年 1月 30日 서울 鍾路區 팔판동 洞會長 (洞會長, 洞事務所 洞長)에 選出되고, 10月 1日 팔판동 洞會長에 再選되었다. 者(字)는 敬白(景百), 本貫은 雨季 (羽溪)이다. 1920年 부터 1937年 4月 16日 까지 每日申報 新聞 記者였다. 1943年 서울 鍾路區 팔判定 經濟課長, 不銃대, 팔判定 銃대(洞事務所 洞長)을 지냈다. 京城府 鍾路(現, 서울 鍾路) 出身.

1919年 作家 박영희 의 同人誌 《 新靑年 》의 同人, 筆陣으로, 1922年 雜誌 《 白鳥 》의 同人으로 參與했다. 1920年 부터 每日申報 廣告部 記者 가 되어 1920年 臺에 每日申報 廣告部 記者, 警성지국 記者로 在職했으며 1925年 잡지 臣民 》의 筆陣으로 參與했다. 1926年 9月 1日 김을한 , 정인익, 최삼우 等과 雜誌 《 文藝時代 (文藝時代)》를 創刊했으나 1927年 1月 廢刊했다.

1924年 1月 1日 부터 1927年 1月 17日 每日申報 本社 發行人이었고, 매일신보사 廣告部 記者, 매일신보사 서울支局 記者 等으로 活動했다.

1935年 ~ 1937年 每日申報 黃海道 特派員 (特派員) 兼 해주지국장을 歷任했다. 또한 每日申報 社 黃海道 남천支局長을 兼職했고, 그해 11月 18日 부터 朝鮮新聞 의 地方紙 海州新聞社 特派員 을 兼職했다. 企業人으로 活動하다가 1943年 京城府 鍾路區 팔判定 回 財務部長, 鄭 不銃대, 情 銃대 等을 歷任했다.

解放 後 獨立促成國民會 總務部長, 大韓靑年團 敎導局 副局長, 現代日報社 常務理事, 厚生局長, 大韓獨立靑年團 總務部長 等을 歷任했다. 1947年 1月 30日 서울市 鍾路區 팔판동 洞會 張에 選出되고 그해 10月 1日 再選됐다. 삼청國民學校 後援會의 理事로도 活動했다. 日本式 이름은 하타니 露地(羽溪能二)이다.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이능선은 1902年 (光武 6年) 11月 30日 京城府 鍾路 수은동 에거 태어났으며, 高祖父는 老人職으로 嘉善大夫 同志 中樞副使 를 지낸 이원석(李元錫)이고, 曾祖父는 正三品 通政大夫 祕書院 勝(贈 正三品 通政大夫 ?書院丞)에 追贈된 이현송(李顯松)이고, 生 祖父는 이문 學館 돈녕부 道政 을 지낸 이유녕 (李裕寧)이며 生父는 仁川府尹 兼 仁川 監理使 , 度支部 協辦 을 歷任한 官僚 李在汀 (李在正)이고 生母는 安東金氏(安東金氏)로 김인석(金仁奭)의 딸이다. 養아버지는 이재영(李在永)이다.

이름은 稜線이고 字(字)는 敬白(景百)이다. 一部 記錄에는 假名 與否, 活字 誤脫字 與否는 알 수 없으나 이능수(李能?)라는 이름으로도 나타난다. 雅號는 失傳되어 알 수 없다. 筆名은 따로 使用하지 않고 本名으로 寄稿했다. 一說에는 그의 生日이 7月 2日 이라는 說도 있다.

그밖에 族譜에 실리지 못한 生家의 庶母, 生父 李在汀의 첩 2名이 더 있었다. 生父 李在汀의 첩 1名은 1912年 에 死亡했고, 다른 1名은 1912年 그의 生母 安東金氏와 첩 庶母가 連續으로 死亡하자, 前男便의 아들을 데리고 再婚해서 온 徐某였다.

順調 때의 朝鮮通信使 의 隨行員으로 日本 을 다녀온 泰和 이현상 (太華 李顯相)은 曾祖父 이현송과 8寸 間이었다. 친 兄弟로는 兄 이흥선(李興善), 동생 異樣船(李亮善)이 있고, 4名의 누이가 있었다.

本家 親同生 異樣船은 行跡이 傳하지 않으며, 本家 친 兄 이흥선은 1927年 무렵 京畿道 시흥군 北面 신길리(後日의 서울特別市 永登浦區 신길동 )의 球場(區長)을 歷任했다. [1] [2] 兄 이흥선은 1949年 무렵까지도 生存해 있었다. 1949年 9月 27日 9月 28日 白凡 金九 (白凡 金九)는 그와 그의 兄 이흥선에게 4字 揮毫를 써서 주었는데, 金九 가 金昌洙라는 이름으로 仁川 監理署 監獄에 갇혔을 때 그의 生父 李在汀 이 裁判官으로 裁判한 因緣으로 推定된다.

4名의 누이는 파평尹氏 윤시현(尹時鉉)에게 出嫁한 누이, 문화류氏 類內命(柳來明)에게 出嫁한 누이, 咸安조氏 조창규(趙昌奎)에게 出嫁한 누이, 그밖에 이름, 行跡이 傳하지 않는 누이 1名이 있다. 族譜 上에는 3名의 누이만이 실렸지만 1912年 그의 生母와 庶母가 連이어 죽고, 生父 李在汀이 들인 寡婦가 7男妹를 驅迫했다는 것이 新聞 뉴스에 報道됐다.

그는 子女가 없이 일찍 죽은 그의 5寸 堂叔 이재영(李在永)의 養子로 入養했다. 경안驛 察訪 이상우 (李商雨)의 9代孫으로, 이상우_ 이영구의 養子가 되어 京畿道 城南 에서 영평 으로 왔다. 7代祖 이상우 (李商雨)가 먼 親族 이영구(李永久)의 養子가 되어 京畿道 廣州郡 낙생면 대장리 아랫장토리 또는 대장리 벌말(後日의 京畿道 城南市 盆唐區 大庄洞 아랫장토리部落, 벌말部落)에서 京畿道 영평군 李東勉 장암리(後日의 京畿道 抱川市 李東勉 장암리)로 移住해 왔다. 以後 그의 家計는 抱川市 일동면 기산리, 유동리, 길명리 一帶에 살게 되었다. 稜線의 祖父 이유녕 (李裕寧)李 京畿道 抱川市 일동면 기산리 또는 유동리에서 京城府 鍾路區 수은동 으로 理事 해 왔다.

養아버지이자 5寸 堂叔 이재영(李在永)은 本部인 全州李氏(全州李氏)와 死別하고 뒤에 풍양曺氏(豊壤趙氏)와 再婚했으나, 再婚한 夫人에게서도 아들을 얻지 못했다. 堂叔母이자 養아버지 이재영의 첫 夫人 全州李氏는 임영군(臨瀛君)의 後孫이라 하는데, 世宗大王 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 이구의 後孫인지 소현세자 家門의 養子로 들어와 事後 임영군(臨瀛君)에 追贈된 임영군 이의저(臨寧君 李義著)의 後孫인지 不分明하다.

養아버지 兼 5寸 堂叔 이재영의 두番째 夫人으로, 그의 養어머니 兼 堂叔母人 풍양曺氏는 1917年 그의 집안 族譜 編纂 무렵까지는 生存해 있었다. 量 할아버지이자 從祖父 이우녕(李祐寧)은 그의 親할아버지 이유녕 (李裕寧)의 親兄이다.

夫人 淸州韓氏는 漣川 縣監 , 內禁衛 腸, 海州 郡守 를 지낸 죽농(竹農) 한형리 (韓炯履)의 딸로, 祖父는 한용기(韓用基), 曾祖父는 한託喩(韓?裕), 高祖父는 坪陵도 察訪 (平陵道察訪)을 지낸 한석모(韓碩?)이며, 兵曹判書 腸道公 한치의 (章悼公 韓致義)의 後孫이다. 親庭어머니는 務安朴氏(務安朴氏)로 學生 박지훈(朴志勳)의 딸이다.

初期 活動 [ 編輯 ]

初期 行跡은 알려진 것이 없다. 1912年 生母 安東金氏와 그 해 徐某 1名이 連이어 死亡했다. 生母 安東金氏는 楊州郡 진접면 금곡리(後日의 南楊州市 진접읍 금곡리) 앞山 庚坐(庚坐)에 賣場됐고, 生家 親兄 이흥선의 夫人 권용철(權用哲)의 딸 安東權氏(安東權氏)의 墓所도 隣近에 있다. 그는 京畿道 抱川郡 일동면 유동리에 있는 養어머니의 집에서 成長하다 뒤에 京城府 로 올라와 修學했다. 養어머니 풍양曺氏는 1917年 當時에는 生存해 있었다. 後日 京城府 鍾路區 수은동 에 살다가 京城府 鍾路區 팔판동 151番地로 移住했으며, 한때 黃海道 長淵郡 에 居住하다가 1945年 以後에는 서울特別市 鍾路區 팔판동 에서 居住하였다.

交流하던 人物로는 作家 懷月(懷月) 박영희 (朴英熙), 記者 김을한 (金乙漢) 等이 있었다.

배재學堂 에 入學했는데 卒業인지 修了인지 與否는 確認되지 않는다. 1917年 以前 淸州韓氏, 韓確 의 長男 한치인 의 14代孫 한형리의 셋째 딸과 婚姻했으며, 1917年 當時에는 이미 婚姻 狀態였다. 1917年에 編纂된 그의 집안 族譜에 夫人 韓氏가 실렸다.

배재學堂 을 거쳐, 1917年 경성고등보통학교 에 入學했다. 1919年 1月 同人誌 〈 新靑年 新?年〉의 發刊에 參與했다. 1919年 1月 以後 박영희 , 최승일, 나도향 , 이능선 等 배재 出身 同窓 들은 同人誌 『新靑年』( 1919.1.20 ~ 1921.7.15 , 通卷 6 號) 을 發刊 하고 있었다. [3] 1919年 當時 그는 경성고등보통학교 3學年에 在學 中이었다.

1920年 부터 每日申報 廣告部 記者로 勤務했다. [4] 1920年 日本 도쿄 에 遊學, 도요大學 (東洋大?)을 入學했다. 日本 留學 中 1921年 5月 雜誌 〈 新靑年 新?年〉順文藝革新號(純文藝革新號)가 나오자 그 同人(同人)은 최승일(崔承一), 나도향 (羅稻香), 박영희 (朴英熙), 이능선(李能善), 利弘(李虹) 等이었으며, 費用은 최승일이 擔當했다 한다. [5] [6] [7] [8] 도요大學 修了 後 歸國했으며, 每日申報 에 入社, 每日申報 本社 記者, 廣告部 記者 로 在職하였다. 每日申報 本社 記者로 在職하며 同人誌 活動에도 參與했다.

記者 生活과 同人誌 同人 活動 [ 編輯 ]

1920年 박영희 의 雜誌 《 新靑年 》의 同人 으로 參與했다. [9] 1920年 6月 以後 배재 同窓인 박영희 , 최승일 , 나도향 等과 同人誌 申請年을 發刊했다. [10] 1922年 최승일(崔承一(秋谷)), 나경손(羅慶孫(彬 또는 稻香), 박영희(朴英熙), 利弘(李虹) 等과 함께 잡지 白鳥 (白潮)의 同人으로 參與했다. [11]

1923年 9月 3日 黃海道 殷栗郡 장연면 직전리(後日의 黃海南道 長淵郡 장연읍 ) 직전리 敎會 禮拜堂 奉獻에 建築義捐金 5원을 寄附하였다. [12] 1923年 當時 京城府 鍾路區 수은동 82番地에 居住中이었다. 1923年 9月 12日 當時 京城府 中區 房山頂 (芳山町) 82番地 洪덕후(洪德厚)가 그의 집 및 그의 집 玄美떡 만드는 器具를 自身의 것인 양 虛僞로 龍山區 대도동 김자선(金子善)에게 罵倒한 것이 東亞日報 에 報道되었다. [13]

1924年 1月 1日 每日申報 發行人이 되어 1927年 1月 17日 每日申報 休刊 前까지 發行人으로 在任했다. 1927年 1月 18日 每日申報는 하루 休刊하고 그를 解任학고 發行人을 김정선으로 交替했다. 發行人職 解任 事由는 新聞에 公知하지 않아 알 수 없다.

1925年 박영희 , 나도향 , 최승일 , 현진건 等과 함께 《白虹 (白虹)》 雜誌 發行을 推進. 懇談會를 열었으나 [14] , 失敗하였다.

1925年 5月 10日 에 創刊한 雜誌 《 臣民 》의 筆陣으로 參與했다. 1926年 1月 30日 每日新聞 社에서 朝鮮文(한글) 新聞社 廣告部원이 모여서 組織한 新聞 社교협회 의 出帆과 組織에 每日申報 記者 資格으로 參與, 社교협회 庶務에 選任되었다. [15] [16] [17] 廣告的 技術 공유와 上空系의 振興策을 硏究할 目的으로 組織했다. [18]

1926年 김을한 (金乙漢), 최삼우(崔三愚) 等과 함께 朝鮮文藝協會 (朝鮮文藝協會)의 同人의 한 사람으로 參與했다. [19] 朝鮮文藝協會 同人 中 김을한, 최삼우 等과 雜誌 文藝時代 創刊을 準備했다. [19]

1926年 映畫同好會에 會員 加入, 그해 6月 27日 朝鮮 시네마 上映作 映畫 籠中鳥의 映畫評을 올렸다. [20] [21]

1926年 7月 1日 잡지 臣民 第15號에 日本 遊學談을 실은 "六年前의 녀름"을 寄稿했고 [22] , 9月 1日 臣民 第17號에는 "情死問題批評-第三者로는 몰을 日"이라는 글을 寄稿했다. [23] 9月 25日 鍾路區 1정목 63番地에서 김을한 , 정인익(鄭寅翼), 최삼우(崔三愚) 等과 잡지 文藝時代 (文藝時代)를 創刊, 筆陣으로 參與했다. [24] 9月 30日 文藝時代社 事務所를 鍾路1정목 63番地로 옮기고, 11月 1日 雜誌 文藝時代를 創刊號를 準備했다. 同時에 80名의 筆陣을 모으고, 雜文, 隨筆, 創作 等 作品 公募를 하였다. [25] 그러나 文藝時代 1927年 1月 廢刊되었다.

1928年 3月 12日 午後 4時에 京城日報 社 主催 庭球部臘會에 參加, 윤명길(尹命吉)과 같은 組로 出戰 日本人 천곡(淺谷), 火도(和島) 팀과 相對, 2對 1로 敗하였다. [26] 1928年 9月 5日 까지 每日申報 社에서 水害義捐金을 募金할 때, 50錢의 誠金을 냈다. [27] 이때에는 每日申報 警성지국(每日申報 京城支局) 記者 였다. [28] 每日申報 本社 廣告部에서 每日申報 京城支局으로 發令된 時點은 記錄이 없다.

1929年 6月 10日 每日申報 에소 主催하는 端午臺運動會에 施賞部 委員(施賞部 委員)으로 參與했다. [29]

1931年 6月 9日 午後 4時부터 京城日報 에서 主催하는 本社 테니스 大會에 參加, 記者 정관용(鄭寬容)과 한 팀이 되어 고영한(高永翰), 박형래(朴衡來) 팀을 2對 1로 꺾었다. 그러나 最終 優勝에서 떨어졌다. [30] 大會 商品은 미즈하타 히데오(水畑秀藏), 每日申報 미츠코詩地點(三越支店), 정자야(丁子屋), 麒麟빌(キリンビ ?ル), 삿포로 麥酒 (サッポロビ?ル), 鏡城運動구상회(京城運動具商會) 等으로부터 多數의 協贊, 商品 寄贈이 있었다. [30] 1931年 7月 27日 一部 新聞社가 統合을 推進, 假稱 帶同合一步 推進時 r廣告部 部員으로 推薦되었다. [31]

每日申報 海州支局長 兼 黃海道特派員, 海州新聞 特派員 在職 [ 編輯 ]

1935年 10月 1日 매일신보사 司令(辭令) 때 寺院(社員)에서 每日申報 社 黃海道 特派通信員 (特派通信員) 兼 매일신보사 해주지국장으로 昇進 發令되었다. [32] 같은 10月 1日 每日申報 남천支局長을 兼職하였다. [33] [34] 海州支局은 해주군 해州邑 中東에 있었고 해주군 延白郡 甕津郡 을 管轄했고 [33] [34] , 남천支局은 平山郡 寶算面 信男千里에 있었으며 平山郡 金川郡 新溪郡 谷山郡 遂安郡 을 管轄했다. [33] [34] 11月 18日 午後 6時 每日申報 海州支局長 兼 特派員으로, 朝鮮新聞 社의 新任祝賀 披露宴에 參席했다. 이날 그는 海州新聞(海州新聞) 特派員에 任命되었다. [35]

12月 1日 每日申報 社 鉛白支局이 分局, 延白郡 鉛白邑 內에 設置되면서 延白郡 地域 取材 業務는 새로 鉛白支局長에 任命된 전세명(全世明)에게 넘겼다. [36] [37]

1935年 에는 黃海道 長淵郡 에 居住했는데, 그의 집에 放火한 長淵郡 속달면 태탄리 이성근(李成根, 黨 16歲)李 逮捕되었다. [38] 이성근은 13件의 竊盜行爲를 한 것이 함께 確認되었다. [38] 이성근이 그의 집에 放火 한 原因은 新聞에 報道되지 않아 알려진 것이 없다.

1936年 3月 6日 ~ 3月 7日 兩日間 每日申報 本社 主催 地方特派員 會議에 參席했다. [39] 3月 6日 , 3月 7日 每日申報 社 姊妹誌 京城日報 社에서 열린 매일신보사 各 道 特派, 支局長 會議에 海州地域 代表로 參席했다. [40] 이때 그는 京城府 간동(諫洞) 109番地에 宿所를 마련했다. [41]

1936年 8月 31日 부터 가 내려 9月 3日 午後 6時까지 優良 120mm였고, 海州邑城 , 淸風學院(淸風學院)李 流失되고, 平山郡 (平山郡), 남천視 (南川市)의 집 3千戶가 遺失되자, 黃海道 特派員 資格으로 直接 現場을 訪問, 取材하였다. [42] 1936年 9月 黃海道 에 臺 水害가 發生하자 9月 6日 海州新聞記者團에서 每日申報 支局, 中央, 朝鮮, 동아日報 支局 局員이 모여 水害救濟를 討議할 때 交涉委員의 한 사람으로 參與, 水害救濟金을 9月 25日 까지 募集하기로 決意했다. [43]

1936年 가을 黃海道 地域의 長期 가뭄 으로 限해 (旱害)가 發生, 2萬 6千 情報 (町步)의 農地 가 荒廢化되고 그해 9月 黃海道 內에 暴雨 가 發生했다. [44] 그해 10月 15日 부터 10月 19日 까지 그는 海州支局 記者 최철기(崔基哲) 等과 함께 가뭄 被害 農家를 訪問, 慰問 및 現場 踏査를 했다. [44] 10月 15日 甕津郡 矯正面 (交井面) 一帶, 16日 黃海道 延白郡 , 17日 信川郡 , 18日 安岳郡 安岳面 一帶, 10月 19日 黃州郡 一帶를 訪問했다. [44]

1937年 2月 15日 午前 10時, 2月 16日 午前 10時 每日申報 社 副社長이 主管하는 每日申報 社 特派員 會議에 黃海道 地域 特派員 資格으로 參席했다. [45] 1937年 4月 6日 매일신보사 黃海道特派通信員 兼 해주지국장을 辭職하고, 매일신보사에서 議員退社하였다. [46] 退社 事由는 알 수 없다. 海州新聞 亦是 辭職한 것으로 推定되나, 海州新聞 辭職 時點은 記錄에 나타나지 않는다.

八瓣停會 經濟部長, 不銃대, 情 銃대 勤務 [ 編輯 ]

以後 政局物産株式會社(正國物?株式會社) 代表理事 社長, 男性貿易株式會社(南星貿易株式會社) 取締役으로 活動했다.

創氏改名令 以後 日本式 이름 하타니 露地(羽溪能二)로 個亡하였다. 改名 時點은 알려진 것이 없다. 1942年 著書 《南陽對官 (南洋大觀)》을 刊行할 當時에는 本名을 使用하고있었다.

1942年 9月 13日 著書 《南陽對官 (南洋大觀)》을 漢城圖書株式會社에서 印刷, 京城 杏林書館 에서 發行했다. 이때 그는 京城府 팔判定 85番地에 居住하고 있었다.

1943年 3月 14日 午前 11時 삼청公立國民學校 (三淸公立國民學校) 校內에서 開催된 學父兄會에서 삼청公立國民學校 後援會 驛員(役員)을 選出할 때, 그는 後援會 理事의 한 사람으로 選出되었다. [47] 이때는 日本式 創氏改名人 하타니 露地(羽溪能二)라는 이름을 썼다.

1943年 3月 19日 , 4月 1日 에 新設 發足하는 팔判定 停會 (町會)의 銃대 및 驛員을 選出할 때 팔判定 經濟部長에 選出되었다. [48] 그해 7月 1日 八瓣停會 不銃대 兼 總務課長 히라노 모리테루(平野盛暉)이 辭職하자 會計課長 유종현(柳宗鉉)李 팔判定 不銃대 兼 會計驛員이 되고 [49] 不銃대 유종현이 副總大職을 辭任하자 그해 그가 八瓣停會 不銃대 兼 總務課長職에 任命되었다.

12月 15日 八瓣停會 銃대 兼 總務部長 쓰기야마 準에이(杉山潤永)가 辭任하자, 八瓣停會에서 열린 總會에서 停會 不銃대 兼 經濟部長人 그를 八瓣停會 銃대로 選出했다. [50]

光復 直後 [ 編輯 ]

1945年 3月 29日 京城府 鍾路區 貫徹情 9番地에 있던 木材伐採業, 製炭業, 林業副産物을 取扱하는 會社 帶同産業株式會社(大同?業株式會社)에 日本人 淸水案敏, 松村吉泰 等과 共同 取締役으로 選任되었다. [51] 當時 그는 京城府 鍾路區 팔判定 151番地에 居住 中이었다. [52] 이 會社는 存立期限 20年 期限을 두고 設立한 會社였다.

光復 後 獨立促成中央回 에 參與하고, 大韓靑年團 에도 加入하여 活動했다. 光復 以後에는 1949年 무렵 서울 종로구 팔判定 151番地에 居住 中이었다.

1946年 서울 鍾路區 황금동 에서 現代日報 가 創立되자, 그는 現代日報 社 常務理事(現代日報社 常務理事)가 되었다. 現代日報는 1946年 9月 6日 廢刊되었으나, 1947年 1月 29日 서상천이 引受하여 다시 發行했다.

1947年 1月 30日 서울市 종로구 팔판동 洞會 腸(八判洞 洞會長)에 選出되었다. [53] 1947年 10月 1日 서울市 종로구 팔판동 洞會 腸(八判洞 洞會長)에 當選 [54] , 再選하였다.

1947年 9月 4日 韓國農民總聯盟 中央委員會 召集에 參與, 같은 날 韓國農民總聯盟 厚生部長(韓國農民總聯盟 厚生部長)에 選任되었다. [55] 1947年 10月 15日 現代日報 社 厚生局長 資格으로 現代日報 總務局長 박세동(朴世東), 産業局長 송한용(宋漢容) 等과 京畿道 抱川 을 訪問, 大韓獨立靑年團 抱川지단 結成式에 參席하였다. [56]

1947年 11月 9日 서울 삼청國民學校 에서 열린 大韓獨立靑年團 北岳지단 支團長(北岳支團 支團長)에 選任되었다. [57] 11月 13日 獨立促成國民會 의 北岳지단 支團長(北岳支團 支團長)에 任命되었다. [58] 12月 30日 大韓獨立靑年團 企劃委員(大韓獨立靑年團 企劃委員 [59] ), 12月 31日 大韓獨立靑年團 總務部長(大韓獨立靑年團 總務部長)에 選任되었다. [60]

生涯 後半 [ 編輯 ]

1948年 3月 3日 現代日報 社 厚生局長에서 現代日報社 常務理事(現代日報社 常務理事)가 되었다. [61] 1948年 12月 19日 에는 大韓靑年團 敎導局 副局長에 選出되었다. [62] 現代日報社를 退社한 時點은 記錄에 나타나지 않는다. 1949年 大寒毒廳 總務部長으로 選出되었다. [63] 1948年 9月 兄 이흥선과 김기승 의 집을 訪問했다가 白凡 金九 를 만나 그로부터 親筆 揮毫 1點을 各各 받았다.

以後 서울特別市 司法保護委員(司法保護委員), 삼청國民學校 後援會 常務理事(三淸國民學校後援會 常務理事)로도 活動했다.

1950年 6.25 戰爭 이 發生하자 避難, 忠淸南道 를 거쳐 釜山 으로 갔다. 1952年 3月 3日 避難民 團體인 忠南類 避難 總本部 副會長(忠南留避難總本部 副會長)에 選出되었다. [64] 休戰 後 다시 서울로 上京, 1955年 까지 鍾路區 팔판동 洞會長으로 在職했고, 삼청國民學校 後援會 常務理事로 活動했다. 以後의 行跡은 未詳이다. 1963年 3月 29日 死亡했다.

事後 [ 編輯 ]

事後 아들 原狀(源翔), 원익(源翊) 等이 연이어 젊은 나이에 夭折하였다. 넷째 아들 이원태(李源泰)는 初等學校 敎師 로 在職하였다. 다섯째 아들 李源榮은 企業人으로 大韓航空 , 韓進 에서 勤務했다.

그의 屍身은 京畿道 抱川市 일동면 流動2里 圓筒(圓通) 마을 部落 뒷山 東北쪽 丑坐(丑坐)에 埋藏되고, 1967年 夫人 淸州韓氏가 死亡하여 그의 墓所 옆에 合葬되었다. 그가 後援하던 삼청國民學校는 1969年 11月 28日附로 廢校, 學生들은 서울재동國民學校(서울재동初)로 轉出되었다.

그의 墓所 近處 抱川市 일동면 유동리 圓筒(圓通) 部落 뒷山 巽坐(巽坐)에는 할아버지 이유녕 의 墓所가 所在海 있다.

著書 [ 編輯 ]

  • 《南陽對官 (南洋大觀)》 (京城 杏林書院, 1942)

寄稿文 [ 編輯 ]

  • 六年前의 녀름
  • 情死問題批評-第三者로는 몰을 日
  • 廣告 다운 廣告

學歷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 친 祖父 : 이유녕(李裕寧)
  • 量 祖父 : 이우녕(李祐寧), 親祖父 이유녕의 親兄
  • 親 아버지 : 李在汀 (李在正 1846年 ? 1845年 ? ~ 1919年 ), 號(號)는 芸草(雲樵), 동강(東岡)
  • 친 어머니(아버지의 本部인) : 高聲李氏(固城李氏, 1845年 2月 5日 ~ 1898年 2月 21日 ), 이人兼(李寅謙)의 딸
  • 친 어머니(生母) : 安東金氏(安東金氏, 1865年 1月 18日 ~ 1912年 10月 6日 ), 김인석(金仁奭)의 딸
    • 친 兄 : 이흥선(李興善, 1898年 10月 3日 ~ ?)
    • 兄嫂 : 安東權氏( 1898年 11月 3日 ~ 1967年 8月 17日 ), 兵士 권용철(權用哲)의 딸
    • 친 동생 : 異樣船(李亮善, 1905年 6月 25日 ~ ?)
    • 누이 : 이름 未詳
    • 妹夫 : 윤시현(尹時鉉), 파평尹氏
    • 누이 : 이름 未詳
    • 妹夫 : 類內命(柳來明), 문화류氏
    • 누이 : 이름 未詳
    • 妹夫 : 조창규(趙昌奎), 咸安조氏
    • 누이 : 이름 未詳, 生年, 沒年 未詳
  • 친 庶母 : 이름 未詳( 1912年 死亡)
  • 친 庶母 : 이름 未詳, 本男便 事後 1912年 에 本男便의 아들 1名 데리고 再婚했으나 그의 本生家 兄弟 姊妹 6名을 驅迫, 虐待한 일로 1914年 物議를 빚음



  • 後妻 : 이름 未詳(? ~ ?)


기타 [ 編輯 ]

1948年 9月 白凡 金九 가 이능선과 그의 兄 이흥선에게 膳物한 親筆 揮毫는 다음과 같다. "이능선 稅制 停止 光復祖國(光復祖國) 1948年 9月 28日", "이흥선 稅制 雅亭 忠孝傳家(忠孝傳家), 1948年 9月 27日" 이는 各各 빛을 본 우리나라라는 뜻과, 忠誠과 孝道를 家風으로 傳하라, 或은 忠孝를 집안 代代로 傳하라는 뜻이다.

關聯 項目 [ 編輯 ]

各州 [ 編輯 ]

  1. 文鎭國 篇, 『朝鮮全道 面職員錄』, 文鎭堂, 1927, 46~50쪽.
  2. 始興市社 3卷, 始興의 近現代 154페이지
  3. 김춘식, 《美的 近代性 과 同人誌 文壇》 (소명출판, 2003) 202페이지
  4. 鄭鎭奭, 《言論朝鮮總督府》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236페이지
  5. 金允植, 《韓國現代詩論批判》 (一志社, 1986) 248페이지
  6. 金允植, 《韓國現代詩論批判》 (一志社, 1975) 200페이지
  7. 現代文學社, 《月刊詩文學 4號》 (現代文學社, 1974) 98페이지
  8. 이명재, 《植民地時代 의 韓國文學》 (중앙大學校 出版部, 1991) 341페이지
  9. 박종화, 《歷史는 흐르는데 淸算은 말이 없네 (月灘朴鍾和回顧錄)》, (三更出版社,1979) 425페이지
  10. 이어령, 《새 資料 調?를 通한 韓國作家 傅記?究》 (梨花女子大學校 韓國語文學?究所, 1975) 155페이지
  11. 思想繫辭, 《思想界 7卷》 (思想繫辭, 1958) 275페이지
  12. "禮拜堂建築義捐", 1923年 9月 3日子 東亞日報 4面 社會
  13. "남의 物件을 헛문서로 팔어먹은자", 동아일보 1923.09.12日子 3面, 社會面
  14. 박종화, 《歷史는 흐르는데 淸算은 말이 없네 (月灘朴鍾和回顧錄)》, (三更出版社, 1979) 425페이지
  15. "社교협회 組織, 朝鮮文新聞社 廣告部원으로", 時代日報 1926年 2月 1日子 2面 8段
  16. "社交協會創立 各社 廣告部員이 商工界 振興을 꾀하야", 동아일보 1926年 2月 1日子 2面 9段 社會面
  17. "社交協會 創立", 조선일보 1926年 2月 1日子 2面 1段 社會面
  18. "各社廣?部의 社交協會 本社會議室에셔 創立總會를 開催", 每日申報 1926年 2月 1日子 2面 8~9段
  19. "文藝時代社 作品募集", 每日申報 1926年 9月 30日 3面 6段
  20. "[籠中鳥] 朝鮮 基네魔 作品", 1926年 6月 27日子 東亞日報 5面 生活/文化
  21. 이효인, 《韓國映畫歷史講義 1》 (理論課實踐, 1992) 47페이지
  22. "六年前의 녀름" 臣民 第15號 113~116
  23. "情死問題批評-第三者로는 몰을 日", 臣民 第17號 85~86
  24. "文藝時代 創刊 ?備", 동아일보 1926年 9月 25日子 2面 9段 社會
  25. "文藝時代社 作品募集", 每日申報 1926年 9月 30日 3面 5~6段
  26. "本社庭球納會", 京城日報 1928年 10月 13日子 7面 9段
  27. "水害義捐金 五日까지", 每日申報 1928年 9月 6日子 2面 7段
  28. "水害義捐金 五日까지", 每日申報 1928年 9月 6日子 2面 7段
  29. "滿都人氣를 集中한 端午大運動會豫報", 每日申報 1929年 6月 10日子 2面 3~5段
  30. "本社コ?ト開き" 京城日報 1931年 6月 12日 3面 8~9段
  31. 잡지 동광 第29號(1931年 12月 27日), "新聞戰線總動員, 「大合同日報」의 幹部公選, 萬一 朝鮮文 3新聞이 다 解消하고 一大理想 新聞이 出現한다면"
  32. "本社辭令", 每日申報 1935年 10月 28日子, 朝刊 2面 11段
  33. "社告", 每日申報 1935年 10月 30日 4面 13段
  34. "社告", 每日申報 1935年 11月 1日 4面 13段
  35. "李支局長披露宴", 朝鮮新聞 1935年 11月 13日 4面 11段
  36. "謹告", 每日申報 1935年 12月 3日 4面 13段
  37. "謹告", 每日申報 1935年 12月 4日 4面 13段
  38. "?盜, 放火少年에게 體刑七年을 求刑", 朝鮮日報 1935年 10月 26日子 3面 5~6段 社會面
  39. "本社特派員會議 六, 七兩日間", 每日申報 1936年03月07日 夕刊 1面 7~8段
  40. "每申支局長會議更に飛躍の準備整ふ", 京城日報 1936年 3月 8日 7面 8段
  41. "本社特派員會議 六, 七兩日間", 每日申報 1936年03月07日 夕刊 1面 8段
  42. "黃海道에 豪雨 내려 到處에 水害續出 優良 百二十『미리』에 이르고", 每日申報 1936年 9月 4日, 7面 9段
  43. "救濟聲連日昻騰", 每日申報 1936年 9月 13日 3面 5段
  44. "本報 海州特派員 旱害地 慰問行脚", 每日申報 1936年 10月 15日 5面 11段~12段
  45. "本社特派員會議", 每日申報 1937年 2月 16日 2面 7~9段
  46. "本社辭令", 每日申報 1937年 5月 2日子 夕刊, 1面 9段
  47. "三淸公立國民學校後援會を設立", 京城日報 1943年 3月 15日 3面 6段
  48. "八判町役員", 京城日報 1943年 3月 19日 夕刊 2面 7段
  49. "八判町副總代に柳宗鉉氏", 京城日報 1943年 7月 11日 朝刊 4面 6段
  50. "八判町會總代に羽溪氏", 京城日報 1943年 12月 15日 4面 7段
  51. "商業登記", 朝鮮總督府 官報 第5442號 昭和20年 03月 29日字, 7面 1段
  52. "商業登記", 朝鮮總督府 官報 第5442號 昭和20年 03月 29日字, 7面 1段
  53. "人事", 現代日報 1947年 1月 30日 1面 10段
  54. "當選된 서울 各 洞會長 ②", 朝鮮日報 1947年 10月 3日子 2面 4段, 社會面
  55. "韓國農民總聯盟四日中央委員會開催→規約修正、任員補選", 現代日報 1947年 9月 6日 1面 5段
  56. "抱川小感 金風蕭瑟한 三八線→凄凉한 멜노디가 波動", 現代日報 1947年 10月 18日, 2面 5段
  57. "獨靑北岳支團 徐相天天生臨席下 結成式盛大擧行", 現代日報 1947年 11月 11日子 2面 1段
  58. "人事消息", 現代日報 1947年 11月 13日 1面 9段
  59. "獨靑幹部改編", 民衆日報 1947年 12月 30日 1面 5段
  60. "獨靑幹部 改編", 조선중앙일보 1947年 12月 31日子 2面 6段
  61. "本社辭令", 現代日報 1948年 3月 3日子 1面 9段
  62. 獨立新聞 1949年 1月 8日子
  63. "?年運動半世紀 (38) 大韓獨立靑年團 [5]", 京鄕新聞 1987.07.29 9面 6段 生活/文化
  64. "人事", 釜山日報 1952年 3月 3日子

關聯 書籍 [ 編輯 ]

  • 李能善, 《南陽對官 (南洋大觀)》 (京城 杏林書院, 1942)
  • 內外弘報社, 《大韓民國人士錄 人事錄》 (內外弘報社, 1950) 118페이지
  • 김영식, 言論人巴人金東煥硏究 : 新聞記者?雜誌人 1卷》 (新星出版社, 2000)
  • 김윤식·金炫, 〈韓國文學史 : 影幀組에서 4·19에 이르는 韓國文學史 6 - 個人과 民族의 發見〉, 문학사상사, 《문학과지성 - 通卷 12號 (1973年 여름號)》 (문학사상사, 1973) pp.162
  • 이어령, 《새 資料 調?를 通한 韓國作家 傅記?究》 (梨花女子大學校 韓國語文學?究所, 1975) 155페이지, 160페이지
  • 鄭鎭奭, 《言論朝鮮總督府》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 寬勳클럽, 《韓國言論年表》 (관훈클럽, 1979) 355페이지
  • 檀國大學校 附設 東洋學硏究所, 《口碑文學 關聯 資料집 韓國語·日本語 雜誌便 2 (東洋學總署 17輯)》 (민속원, 2007)

參考 資料 [ 編輯 ]

前任
유종현
第3代 서울 鍾路區 팔判定 不銃대
1943年 7月 1日 ~ 1943年 12月 14日
前任
쓰기야마 準에이
第2代 서울 鍾路區 팔判定 銃대
1943年 12月 14日 ~ 1945年 9月 2日
後任
(美 軍政 駐屯)
서울 鍾路區 팔판동 洞會長
1947年 1月 30日 ~ 1947年 10月 1日
後任
이능선
前任
이능선
서울 鍾路區 팔판동 洞會長
1947年 10月 1日 ~ 1955年 5月 8日
後任
김관우 ( 태화동 腸)
(八判洞이 태화동 에 倂合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