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裕貞 (小說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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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裕貞
作家 情報
出生 1908年 2月 12日 ( 1908-02-12 )
大韓帝國 江原道 春川郡 신남면 증리
死亡 1937年 3月 29日 ( 1937-03-29 ) (29歲)
日帝 强占期 京畿道 廣州郡 중부면 上산곡리
國籍 大韓帝國
職業 小說家 , 隨筆家 , 是認
經歷 江原道 春川 금병의숙(錦屛義塾) 敎師
筆名 假名은 金나이 (金羅伊)
장르 小說, 隨筆, 詩
父母 김춘식(簿)
靑松 沈氏 夫人(某)
兄弟 김유근(兄)
김유영(누나)
親知 김익찬(할아버지)
金映洙(조카)
웹사이트 金裕貞 文學村

金裕貞 (金裕貞, 1908年 2月 12日 ( 陰曆 1月 11日 ) ~ 1937年 3月 29日 )은 日帝 强占期 朝鮮 小說家 이다.

大韓帝國 江原道 春川郡 신남면 증리 에서 出生하여 지난날 한때 大韓帝國 漢城府 鍾路房 敦寧界 니洞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다. 1937年 3月 29日 을 期하여 日帝 强占期 朝鮮 京畿道 廣州郡 중부면 上산곡리 에서 肺結核 으로 夭折했다.

生涯 [ 編輯 ]

家計 [ 編輯 ]

金裕貞의 本貫은 청풍 (淸風)으로 族譜에는 朝鮮 顯宗 의 王妃 名聲 王后 의 親庭 아버지로 王의 丈人이었던 金佑明의 넷째 孫子 도택(道澤)을 金裕貞의 先祖로 적고 있다. 할아버지 翊贊(益贊, 1845年 ~ 1909年)은 者를 自營(士英)이라 했으며, 1891年 에 增廣試 進士試에 及第하여 [1] 통 사랑 行의 禁府都事를 지냈다. [2] 翊贊의 아들인 春植(春植), 卽 金裕貞의 아버지는 者를 윤주(允周)라 하였는데, 1894年 에 式年試 進士試에 及第하여 [3] , 私馬座 賃金 部主事(司馬座任禁府主事), 禮式 部主事 [4] , 宮內 附議管을 歷任하였다. [5]

出生地 [ 編輯 ]

金裕貞의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靑松 沈氏 사이에서 2男 6女의 일곱째로 태어났다.

金裕貞의 故鄕은 실레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只今의 京春線 新南驛( 2004年 金裕貞驛 으로 變更)이 있는 이 곳은 金裕貞 의 先代 집안이 몇 代에 걸쳐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기도 했다. 흔히 金裕貞의 出生地를 春川 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金裕貞의 셋째 누나였던 김유경은 金裕貞의 出生地가 서울 眞骨 (只今의 鍾路區 운니동)이었다고 證言하고 있으며, 現在 실레마을의 住民들 가운데 金裕貞 春川 에서 태어났음을 證言하는 사람은 없다. 전상국 은 代代로 春川 의 실레마을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金裕貞의 先代가 春川 義兵이 잇따라 蜂起하던 舊韓末 庚戌國恥 때 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食率들을 그 곳으로 이주시켰고 金裕貞도 이 무렵에 태어났을 可能性을 提起하였다.(혹은 日本 의 財産 沒收를 避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

한便 金裕貞 本人은 自身의 故鄕을 春川 으로 생각하여, 〈五月의 山골作이〉라는 隨筆에서 "나의 故鄕은 저 江原道 山골이다. 春川邑 에서 한 20里假量 山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닷는 조고마한 마을이다. 앞뒤 左右에 굵찍굵찍한 山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친 안윽한 마을이다. 그 山에 묻친 模樣이 마치 옴푹한 떡시루 같아 하야 洞名을 실레라 부른다.(중략)주위가 이렇게 詩的이니만치 그들의 生活도 어데인가 詩的이다.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하는 그들을 對하면 마치 딴 世上 사람을 보는 듯하다."고 적고 있다.

幼年期 [ 編輯 ]

金裕貞의 어머니는 金裕貞을 낳은 뒤 딸 하나를 더 낳고, 그가 일곱 살이 되던 1915年 3月 18日에 그만 病으로 世上을 떠났으며, 아버지도 2年 뒤 5月 23日에 世上을 떠났다. 아버지가 죽은 뒤 집안 살림을 도맡게 된 兄 金逌根은 집안에 女子들을 끌어들이는 等 放蕩한 짓을 일삼아서 家勢는 기울었고, 眞骨 에서 관철동 으로, 다시 숭인동 , 관훈동 , 淸津 洞 等으로 옮겨 다니게 되었고 그때마다 집의 規模도 줄어들었다.(이러한 김유근 의 모습은 後날 金裕貞 自身의 短篇小說 〈 〉에 한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16年 부터 1919年 봄까지 金裕貞은 4年 동안 이웃 글房에 다니며 《 千字文 》, 《계몽편》, 《 痛感 》 等을 배우고, 붓글씨를 익혔다. 滿 12歲에 에울입월초등학교 이듬해 3學年으로 越班한 뒤에 4學年으로 卒業할 程度로 그의 成績은 優秀한 便이었으며, 1923年 4月 9日에는 京城 휘문高等普通學校 (5年制)에 검정으로 入學하였다. 휘문고보에 入學하면서 金裕貞은 이름을 暫時 나이(羅伊)로 바꾸었다가 3學年 때 다시 本來 이름으로 되돌렸다. 숭인동 80番地로 다시 移徙하였는데, 휘문고보에서 安懷南 (新小說 《 禽獸會議錄 》의 著者 안국선 의 아들)과 親하게 지냈으며, 野球 · 蹴球 · 스케이팅 · 拳鬪 · 誘導 等의 스포츠와 小說 읽기, 映畫 鑑賞, 바이올린 演奏 等 다양한 趣味活動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運動場에서 投砲丸 을 가슴에 맞고도 끄떡하지 않을 程度였던 그는 校內에 하모니카 서클을 만들기도 했으며, 3學年 때 몸이 좋지 않아 1年 休學하고 집에서 쉴 즈음, 當時 團成社 開館記念 行事에서 壇上에 올라 하모니카 獨走를 하기도 했다.

靑年期 [ 編輯 ]

金裕貞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兄 金逌根은 마침내 서울에서 家産을 모두 蕩盡하고, 아내와 子息들도 남겨둔 채로 春川 실레마을로 落鄕해 버렸다. 兄으로부터의 生活費와 學費 補助를 받지 못하게 된 金裕貞은 봉익동에서 赤十字 病院 醫師 일을 하던 三寸집에 暫時 머무르다 곧 누나들과 兄嫂의 집을 轉轉했고 이때부터 經濟的 어려움을 겪기 始作했다. 特히 휘문高普 在學 時節부터 痔疾 을 앓게 된 金裕貞은 三寸의 도움으로 手術을 받게 된 뒤에도 肋膜炎 이나 肺結核 等의 病이 連續的으로 發生하여, 親舊 안회남에게 "가슴이 뜨끔뜨끔 아프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21歲 때 휘문高普 를 卒業(第21回)韓 金裕貞은 이듬해인 1930年 4月 6日에 京城 연희전문학교 文科에 入學했으나 두 달 만인 6月 24日 에 學校에서 除籍당하고 中退하고 만다. 除籍 思惟에 對해서는 退學者 名單에만 記錄이 있을 뿐 詳細한 記錄이 없지만, 大體로 授業 日數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을 可能性이 指摘된다.

휘문高普 를 卒業하던 해에 金裕貞은 4살 年上의 妓生 박록주 를 보고 한눈에 반해 짝사랑하게 되었는데, 밤새워 便紙를 써서 보내는가 하면 血書를 써서 傳하기도 하고, 膳物도 보냈지만 番番이 되돌아왔으며, 直接 찾아가 求愛하기도 하고 박록주가 나가는 妖精 앞에서 밤새워 기다렸다가 人力車에 탄 그女를 끌어내려 죽이겠다고 脅迫까지 했다. 2年 가까이 持續된 金裕貞의 病的인 짝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괴로워하던 金裕貞은 어느 날 갑자기 兄 金逌根이 있는 故鄕 春川 으로 내려갔다. 앞서 김유근에게 病 治療와 生活費를 要求했지만 거절당한 狀況에서 마침 둘째 누이의 同居男이었던 妹兄 鄭氏의 부추김을 받아, 집안의 남은 財産까지 蕩盡하고 있는 兄 김유근을 相對로 財産 分配 訴訟을 내기 위한 落鄕이었지만, 春川 에서 金裕貞 은 故鄕의 淳朴한 情趣와 가난한 當時 農民들의 삶을 直接 體驗할 機會를 갖게 되었다.

브나로드 運動 [ 編輯 ]

春川 에서 金裕貞은 自身보다 나이가 많은 들甁이(이리저리 떠돌며 술을 파는 女子)들을 찾아다니며 술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大學 工夫에 對한 未練으로 1931年 다시 上京한 金裕貞 京城 보성전문학교 에 入學했지만 그곳에서도 곧 退學하고 말았고, 妹兄 鄭氏의 周旋으로 病도 休養할 兼 忠淸道 의 어느 鑛業所 現場監督으로 내려가게 되지만, 이곳에서조차 鑛夫들과 어울려 每日 술만 먹다가 結局 健康만 더 惡化된 채 서너 달 만에 故鄕 실레마을로 돌아왔는데, 이곳에서의 經驗은 後날 그의 小說 〈 金 따는 콩밭 〉, 〈 노다지 〉, 〈 〉 等의 모티브가 되었다.

故鄕에서 1930年 부터 1932年 까지, 1年 7個月을 머무르면서 金裕貞은 마을 靑年들을 모아 農牛會 와 婦人會 等을 組織하고, 故鄕집 언덕받이에 움幕을 짓고 옛날 自身의 마름집 아들이었던 조명희나 조카 金映洙(김유근의 아들) 等과 뜻을 함께 하여 『 東亞日報 』의 農村啓蒙運動 敎育敎材로 夜學을 여는 等 本格的인 農村啓蒙運動을 벌였다. 춘천문화방송 에서 金裕貞의 誕生 100周年을 記念하여 製作한 다큐멘터리 에 依하면, 金裕貞은 民衆 들을 사랑하여, 名門집안의 子孫인 自身보다 身分이 낮은 小作人 들에게도 尊待말을 하였다고 한다. 金裕貞이 組織한 農牛會는 뒤에 '금병의숙'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簡易學校로서 認可를 받은 뒤 學生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只今엔 그곳에 面에서 運營하는 마을會館이 서있고 그 옆에 金裕貞의 뜻을 기리는 紀跡碑가 세워져 있다. 放送通信大學校 國語國文學科 4學年 2學期 文學踏査 形式 授業인 《國文學練習》에 依하면, 金裕貞 作家가 農村啓蒙運動 을 한 살레마을에서는 살레 社會福祉館을 運營함으로써 貧困 과 貧困한 父母의 無知로 인해 배움 에서 疏外된 가난한 農民 들의 子女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金裕貞 作家의 뜻을 이어받고 있다.

1932年 6月 15日에 金裕貞은 自身의 첫 作品인 〈 심청 〉을 脫稿하였다(이 作品은 4年 뒤인 1936年 조선중앙일보사 發刊 『中央』誌에 發表되었다).

한便 金逌根은 故鄕 春川 에서도 家産을 完全히 整理한 뒤, 그곳에 있던 祖上의 무덤까지 파서 火葬해버렸다. 兄으로부터 '淸算된 金額의 1/30' 만큼의 돈을 얻은 金裕貞은 1933年 다시 서울로 올라와, 둘째 누나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이때 金裕貞은 肋膜炎이 惡化된 狀態였고 病院에서는 肺結核 診斷까지 받게 되었다. 여기에 當時 工場일로 겨우 生計를 維持하던 누나의 히스테리 症勢에 그 누나에게 얹혀 사는 乾達이나 다름없는 妹兄 鄭氏에 對한 미움까지 겹쳤는데, 이것은 後날 金裕貞의 文學世界에도 적지 않게 影響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文壇 生活 [ 編輯 ]

이미 短篇 小說 ' 소낙비 '로 1935年 朝鮮日報 》에 當選되기 2年 前에, 金裕貞은 〈 山골 나그네 〉라는 小說을 개벽사의 文藝誌 『第一線』에 發表하였다. 이 〈 山골 나그네 〉는 金裕貞이 春川에 있을 때, 팔미천에서 沐浴을 하고 돌아오다 길가 오幕살이에 살던 돌쇠라는 사람의 집에서, 돌쇠어멈으로부터 그 집에 며칠 머물다 逃亡친 어떤 들甁이 女子에 對하여 들은 이야기를 土臺로 지은 것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에 〈總角과 맹꽁이〉(『新女性』 9月號), 〈흙을 등지고〉 等을 發表했지만, 이들 小說은 그렇게 좋은 反應을 얻어내지는 못하던 次에 1934年 말에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東亞日報』等 세 個의 新聞社에 나란히 小說을 應募하였고 그 가운데 『朝鮮日報』에 應募했던 〈소낙비〉는 1等, 『조선중앙일보』에 應募했던 〈 노다지 〉가 佳作으로 當選되면서 비로소 文壇 活動을 始作하게 된 것이다.

登壇한 해에 金裕貞은 自身의 生에 代表作이라 불릴 作品 大部分을 發表하였다. 〈 金 따는 콩밭 〉 · 〈 〉 · 〈 〉 · 〈 만무방 〉 · 〈 山골 〉 · 〈 〉 · 〈 봄봄 〉 · 〈 안해 〉 等의 短篇 10篇과 隨筆 3篇이 그가 登壇한 바로 그 해에 쏟아져 나왔는데, 春川에서 보고 느꼈던 故鄕의 情趣와 農民들의 困窮한 生活, 그 自身의 個人的인 不幸에서 體驗한 感想 等이 그의 小說의 主要 모티프였다. 文壇에 이름을 올린 金裕貞과 切親했던 文友(文友)로는 휘문高普 때부터의 同窓이었던 安懷南 말고도, 사직동의 妹兄집에 살 때부터 앞뒷집에 살며 金裕貞의 生活에 物心兩面으로 도움을 주었던 이석훈度 있었고, 이석훈의 紹介로 具仁會 에 加入한 뒤에 알게 된 以上 (李箱)도 있었다. 1947年 에 똑같이 〈남생이〉라는 作品으로 『朝鮮日報』에 登壇한 玄德(玄德)도 金裕貞의 文友였다.

1934年 에 金裕貞은 사직동에서 혜화동으로 移徙하였고, 누나의 집에서 食客살이를 始作했다. 金裕貞에게는 無數히 많은 原稿 請託이 쏟아져 들어왔고, 金裕貞 自身도 藥값을 벌기 위해 請託이 오는 대로 글을 썼지만 그나마도 돈이 생기면 술값으로 써버리기 일쑤였다. 《女性》이라는 雜誌에 自身이 寄稿했던 〈어떠한 夫人을 맞이할까〉라는 글과 나란히 실린 박봉자 (詩人 박용철 의 女同生)의 글을 읽게 된 金裕貞은 다시 얼굴도 모르는 박봉자라는 女人을 向해 無慮 31統에 達하는 求愛의 便紙를 썼지만, 答狀은 한 桶도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얼마 뒤 金裕貞 自身도 잘 알고 지낸 評論家 김환태 와 박봉자가 約婚을 했으며 곧바로 結婚했다는 悲劇的인 消息만 듣게 되었다.

죽음 [ 編輯 ]

1936年 가을부터 겨울까지 金裕貞은 兄嫂가 사는 單칸 貰房에 함께 살며 肺結核이 더욱 惡化되어 苦生하였다. 京畿道 光州 에 있는 다섯째 妹兄 유세준(다섯째 누나인 김유흥의 男便)의 집으로 내려가면서도 自身의 조카 김진수를 데리고 갈 程度로 조카에 對한 愛情을 쏟았던 金裕貞은 죽기 11日 前인 3月 18日 에 房안에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놓고 글을 썼는데, 親舊 安懷南 앞으로 남긴 〈必勝展〉이라는 題目의 이 글에서 金裕貞은 最後의 瞬間까지도 삶에 對한 意志를 놓지 않고 있다.

必勝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自由롭지 못하다. 밤에는 不眠症으로 하여 괴로운 時間을 怨望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猛烈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道理를 채리지 않으면 이 몸을 일으키기 어렵겠다.
必勝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只今 나는 病魔와 最後 談判이라 興敗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時急히 必要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必勝아.
내가 돈 百원을 만들어볼 作定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助力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探偵小說을 飜譯하여 보고 싶다. 그 外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中 아주 大衆化되고 興味 있는 걸로 限둬 卷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日 以內로 飜譯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허거든 네가 積極 周旋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必勝아.
勿論 이것이 無理임을 잘 안다. 無理를 하면 病을 더친다. 그러나 그 病을 위하여 엎집어 無理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于先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軍을 들여, 殺母蛇 구렁이를 十餘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必勝아.
나는 只今 막다른 골목에 맞딱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依支하여 光明을 찾게 하여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事情이다. 반가운 消息 傳해다우.

1937年 3月 29日 아침 6時 30分에 金裕貞은 숨을 거두었다. 死因은 肺結核 . (享年 29歲)

金裕貞의 遺骸는 家族에 依해 光州에서 서울 西大門 밖의 홍제동 火葬터(現在의 서울고은초등학교 敷地, 現在 火葬場은 辟除로 移轉)로 옮겨져 火葬되었다.

主要 作品 [ 編輯 ]

作品 特徵 [ 編輯 ]

金裕貞의 小說은 人間에 對한 薰薰한 사랑을 藝術的으로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는 데 妙味가 있다. 많은 사람을 한 끈에 꿸 수 있는 사랑, 그들의 마음과 마음을 서로 따뜻하게 이어주는 사랑을 우리의 傳統的인 民衆藝術의 솜씨로 흥미롭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民衆에 對한 사랑에 뿌리를 둔 民衆 的 性格의 文學이라고 해서, 그의 作品들이 한갓 通俗的 興味나 低級한 喜劇性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金裕貞의 小說 들은 흔히 人物들의 어리석음이나 無知함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一面에서 그것은 바로 그들 自身의 가난하고 悲慘한 實際 삶과 이어져 津한 슬픔을 배어나게 하는, 말하자면 諧謔과 悲哀를 同伴하는 特徵을 지니고 있다. [6]

影響받음 [ 編輯 ]

少年 時節 金裕貞은 바이런 詩集을 늘 갖고 다녔다. 自身의 조카에게는 《 罪와 벌 》, 〈 가난한 사람들 〉, 〈 귀여운 女人 〉, 〈 外套 〉같은 러시아 作家의 作品들과 《 마리아와 광대 》, 《 紅唐무 》, 《 아Q정전 》같은 作品을 勸했다. [7]

作家가 된 金裕貞은 讀書設問調査에서 感銘깊게 읽은 作品으로 《 洪吉童傳 》과 제임스 조이스 의 《 율리시스 》를 들었다. 《洪吉童傳》은 人類 社會에 큰 役割을 가져오기에 藝術的 價値를 가진 作品이지만, 에밀 졸라 의 《 나나 》는 讀者를 졸게 하고 《율리시스》는 하품을 하게 한다고 評하기도 했다. 具仁會 會員인 조용만에 依하면 金裕貞은 이광수 이효석 뿐만 아니라 로렌스 , 맨스필드 의 作品을 좋아했다. 또한 같은 具仁會 會員인 이태준 에 對해서는 어떤 競爭意識 같은 것을 느꼈다. 그 外에도 金裕貞은 니체 의 超鱗屑, 맬서스 의 《 人九론 》, 크로폿킨 의 《 相互扶助論 》, 마르크스 의 《 資本論 》과 같은 社會科學 書籍들도 言及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讀書는 廣範圍한 部分에 걸쳐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그의 作品 創作에 影響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7]

金裕貞文學村 [ 編輯 ]

金裕貞文學村 은 小說家 金裕貞의 思想과 文學을 기리기 위해 生家를 復元하고 展示館을 지어 2002年 8月 6日에 設立한 文學觀으로 춘천시가 2002年 8月 一般市民들에게 金裕貞의 삶과 文學을 조금 더 가까이 紹介하기 위해 設立되었다.

家族 關係 [ 編輯 ]

  • 아버지 : 김춘식(金春植, 1874年 [8] ~ 1915年), 자는 윤주(允周), 1894年 式年試 進士試 及第 [9] , 禮式部注射 [10] , 宮內府衣冠 歷任 [11]
  • 어머니 : 靑松 沈氏(靑松沈氏, 1870年 ~ 1915年) [12]
  • 兄 : 김유근
  • 누이 : 김유영

人間 關係 [ 編輯 ]

  • 安懷南 (安懷南) : 휘문高普 時節부터 알고 지낸 親舊였다.
  • 이석훈 (李石薰) :안회남의 紹介로 알게 된 親舊였다. 金裕貞이 사직동의 妹兄 집에서 살 때 앞뒷집에서 살면서 惟政의 性格이나 家庭環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金裕貞을 自身이 나가는 放送局에 出演시키는 等 金裕貞의 生活을 돕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써주었으며, 小說家 以上을 소개시켜 준 사람이다. 韓國 戰爭 때 拉北되었다.
  • 以上 (李箱) : 小說家이자 詩人. 金裕貞에게 같이 同伴自殺하자고 勸誘하였으나 그는 이 提案을 拒絶하였다. [13] 1937年 3月 29日 金裕貞이 以上보다 한 달 먼저 病으로 死亡하였다.
  • 玄德 (玄德) : 童話作家. 金裕貞이 昌信洞 , 新堂洞 , 효제동으로 貰房살이를 轉轉할 때, 惡化되는 病을 고치고 술도 끊게 해줄 생각으로 정릉 골짜기의 어느 庵子에 있을 때부터 그를 찾아와 慰勞해 주었던 文友였으며, 金裕貞이 病이 惡化되어 서울을 떠나 京畿道 光州 로 갈 때도 車部까지 電送해 주었고 金裕貞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안회남에게 알려준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金裕貞이 生前에 執筆하던 〈豆泡戰〉을 다 마치지 못하고 숨을 거둔 뒤, 未完으로 끝난 〈두圃田〉의 뒷部分을 完成시킨 人物이기도 하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김익찬의 眞사放牧,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1_038878&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Archived 2014年 2月 24日 - 웨이백 머신
  2. 김춘식의 進士試放牧 中 家族事項 敍述,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40410&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Archived 2014年 2月 24日 - 웨이백 머신
  3. 김춘식의 眞사放牧,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40410&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Archived 2014年 2月 24日 - 웨이백 머신
  4. 日省錄 光武 4年, http://e-kyujanggak.snu.ac.kr/YDG/ILS_CONTVIEW.jsp?ptype=class&subtype=ils&lclass=year&mclass=1900&year=1900&month=10&day=29&kingname=%EA%B4%91%EB%AC%B4
  5. 日省錄 光武 6年, http://e-kyujanggak.snu.ac.kr/YDG/ILS_CONTVIEW.jsp?ptype=class&subtype=ils&lclass=year&mclass=1900&year=1902&month=6&day=24&kingname=%EA%B4%91%EB%AC%B4
  6. 出處: 金裕貞 小說의 民衆的 性格(이선영)<冬柏꽃>
  7. 유인순. 《金裕貞을 찾아가는 길》. 솔과학. 57쪽.  
  8. 김춘식의 眞사放牧,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40410&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Archived 2014年 2月 24日 - 웨이백 머신
  9. 김춘식의 眞사放牧,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40410&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Archived 2014年 2月 24日 - 웨이백 머신
  10. 日省錄 光武 4年, http://e-kyujanggak.snu.ac.kr/YDG/ILS_CONTVIEW.jsp?ptype=class&subtype=ils&lclass=year&mclass=1900&year=1900&month=10&day=29&kingname=%EA%B4%91%EB%AC%B4
  11. 日省錄 光武 6年, http://e-kyujanggak.snu.ac.kr/YDG/ILS_CONTVIEW.jsp?ptype=class&subtype=ils&lclass=year&mclass=1900&year=1902&month=6&day=24&kingname=%EA%B4%91%EB%AC%B4
  12. “金裕貞 誕生 100周年 - <4> 金裕貞과 어머니 靑松 沈氏” . 2009年 1月 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7月 10日에 確認함 .  
  13. “保管된 寫本” . 2022年 7月 2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2年 3月 26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