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호-忠南函 衝突 事故
날짜
| 1967年 1月 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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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間
| 21時 54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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位置
| 慶尙南道
창원군
千假面
加德島
西쪽 1.6
km
海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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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因
| 忠南函와 한일호의 共同 過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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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果
| 한일호 沈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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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亡者
| 93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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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호-忠南函 衝突 事故
(韓一號忠南艦衝突事故)는
1967年
1月 14日
21時 54分頃
慶尙南道
창원군
千假面
(現
釜山廣域市
江西區
加德島桐
)
加德島
西쪽 1.6
km
海上에서
麗水港
을 出發하여
釜山港
으로 가던 定期 旅客船
한일호
가 機智로 復歸하던
鎭海 海軍基地
所屬 驅逐艦
忠南函
과 衝突, 沈沒하여 93名의 人命 被害를 낸 思考이다.
事故 經緯
[
編輯
]
- 諸元 比較
두 船舶의 諸元은 다음과 같다.
[1]
鮮明
|
函鐘
|
用度
|
톤수
|
魔力
|
速度
|
船長
|
船幅
|
仙靈
|
한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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機船
|
旅客船
|
140톤
|
150馬力
|
9노트
|
28 m
|
5 m
|
11年
|
忠南函
|
護衛驅逐艦
|
戰鬪艦
|
1,900톤
|
12,000馬力
|
20노트
|
91 m
|
11 m
|
3年 半
|
- 經過
鎭海 海軍基地
所屬으로
東海
警備 任務를 遂行하고 모기지로 復歸하던
忠南函
은 事故 當日 午後 9時 49分頃 時速 15~19노트 程度의 速度로 加德島 西쪽 海上을 지나고 있었다. 그 때 140度 方向에서 時速 10노트 程度의 速度로 南下하는 木造 旅客船 한일호를 發見, 衝突 危險을 感知한 뒤 旅客船에 危險을 알리는 警笛 信號를 보내고 推進力을 後方으로 돌려 急停車하며 航路 變更을 試圖하였으나 降屬하던 慣性의 힘 때문에 배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였다. 그리고 21時 54分頃 140톤級의 木造 旅客船 한일호는 뱃머리가 2,500톤級 軍艦 忠南함의 왼쪽 옆구리를 들이받고 半破되어 10分間 떠돌다가 그대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 事故로 한일호에 타고 있던 乘客 87名 가운데 12名이 救助되고 13名이 死亡, 62名이 失踪되었으며, 忠南함은 별다른 被害를 입지 않았다.
[2]
[3]
以後 初期 發表에서 集計되지 않은 搭乘客 數가 確認되고 失踪者의 屍身이 引揚되는 等 失踪 및 死亡者가 追加로 確認되어 最終 人命 被害者는 93名으로 集計되었다.
[4]
事故原因 및 論難
[
編輯
]
事故 原因
[
編輯
]
事故 初期
檢察
은 한일호와 忠南函 兩側에 모두 過失이 있는 것으로 推定하였으나,
[5]
한일호의 船體를 引揚한 後 水中檢證과 再檢證을 實施한 結果 事前에 變針 信號(奇跡)를 울리지 않았고, 不得已한 理由없이 한일호의 뱃머리를 가로지르려 했으며, 衝突을 避하기 위한 最善의 措置를 疏忽히 하는 等 忠南函側에 重過失이 있었고, 이로 因해 한일호는 미처 避할 틈도 없이 忠南함과 衝突했던 것으로 結論내렸다.
[6]
[7]
論難
[
編輯
]
1月 16日에는 事故 事實이 事故 後 10時間 늦게 發表되었고 事故 經緯도 釋然치 않으며, 大型 慘事라 國民의 關心이 크다는 報道가 있었다. 海軍當局에서 事故 經緯를 說明하였으나, 軍艦側의 果實에 對해 海運業界와 意見이 엇갈렸다.
[8]
沿岸 旅客船 船主들은 船體를 引揚하여 鑑定해 줄 것을 關係當局에 要求하였다.
[9]
1月 18日 釜山 地方海洋審判委員會에서는 忠南함이 30%, 한일호가 70%의 過失이 있으며, 船體 鑑定을 거쳐 最終 結論을 내리겠다고 發表하였다.
[10]
한일호의 乘客들이 甲板에서 救助를 要請하는데도 10餘 分동안 써치라이트만 비추고 構造를 하지 않은 點, 船舶이 많은 곳을 빠른 速度로 航海한 點 等의 忠南함의 過失이 指摘되기도 했다.
[11]
遺族들은 1月 17日 正確한 沈沒 經緯를 밝힐 것을 包含한 6個項의 要求 條件을 提示하면서 合同慰靈祭를 拒否하였다.
[12]
1月 19日 한일호가 引揚되었고,
[13]
釜山地檢은 引揚된 한일호를 押留하여 檢證하였다. 沈沒 視角을 알 수 있는 重要한 證據物인 時計가 引揚 後 사라졌으나, 檢察은 이미 찍어 둔 寫眞을 土臺로 事故의 原因이 忠南함에 있다는 結論을 내렸다.
[14]
救命 施設에 對한 點檢에서 한일호는 176個의 救命帶를 갖추어야 하나 實際로는 10個만 실었던 것이 드러났다.
[15]
5月 14日, 釜山地方海難審判委員會에서는 한일호가 海上衝突豫防法을 違反하였다고 裁決하였다.
[16]
裁判
[
編輯
]
3月 2日, 한일호 事件에 對한 첫 公判이 열렸다.
[17]
4月 3日, 한일호 乘客 遺族들은 政府를 相對로 民事 訴訟을 提起하였다.
[18]
遺族들의 訴訟은 總 70餘 件에 達하였다.
[19]
4月 24日 釜山地法大法廷에서 열린 한일호 事件에 對한 公判에서, 한일호의 甲板長과 操舵手에 各各 禁錮 2年을, 事務長에 禁錮 1年 6個月을 宣告하였다.
[20]
1967年 12月 鎭海艦隊司令部에서 열린 軍事裁判에서는, 忠南함은 規定을 따랐으며, 過失을 認定할 수 없다는 判決을 내렸다.
[21]
1970年
10月 1日
大法院
은 한일호 乘客 遺族들이
大韓民國 政府
를 相對로 낸 損害賠償 請求 訴訟에서 이 事件은 한일호와 忠南함의 共同 過失로 인한 것이라고 判決하였다.
[22]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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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事件을 搜査하던 過程에서 한일호의 엔진은
1953年
釜山
多大浦 앞바다에서 沈沒한
窓警護
의 것을 再生했다는 事實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23]
各州
[
編輯
]
- ↑
韓一號 및 忠南艦諸元
, 《東亞日報》, 1967.1.19
- ↑
零下(零下)10度(道)-悲劇(悲劇)의 바다는 咆哮(咆哮)만?
,
京鄕新聞
1967年 1月 16日子
- ↑
旅客船(旅客船)·海軍護衛驅逐艦(海軍護衛驅逐艦)衝突 近百名(謹白名) 死亡(死亡)한듯
東亞日報
1967年 1月 16日子
- ↑
補償金(補償金)23萬(만)원씩 韓一號沈沒(韓日湖沈沒)事件
,
東亞日報
1967年 2月 14日子
- ↑
韓一號慘事(한일호慘事) 두報告書(報告書)
東亞日報
1967年 1月 19日子
- ↑
"忠南艦(忠南函)李突然變針(突然變針)
東亞日報
1967年 1月 19日子
- ↑
『韓一號慘變(한일호慘變)』白書(白書)
,
東亞日報
1967年 1月 24日子
- ↑
엇갈린慘禍의 全貌
, 《東亞日報》, 1967.1.16
- ↑
"海軍主張못믿는다" 旅客船 船主들 船體鑑定乙促求
, 《東亞日報》, 1967.1.17
- ↑
忠南艦30%·韓一號70%
, 《東亞日報》, 1967.1.18
- ↑
"救助呼訴에 10分동안 照明燈만" 73艦을 重點調査
, 《경향신문》, 1967.1.18
- ↑
遺族會西決定 60具以上引揚前 合同慰靈祭拒否
, 《東亞日報》, 1967.1.18
- ↑
船體引揚에成功
, 《경향신문》, 1967.1.19
- ↑
事故原因 73艦에 있다
, 《경향신문》, 1967.1.21
- ↑
船舶救命施設 全面搜査着手
, 《경향신문》, 1967.1.21
- ↑
"韓日號過失" 衝突事件 海難審判委裁決
, 《東亞日報》, 1968.5.14
- ↑
韓一號事件첫公判
, 《東亞日報》, 1967.3.2
- ↑
韓一號遺族들 2千萬원賠償訴訟
, 《東亞日報》, 1967.4.3
- ↑
그事件 그사람 (1) 韓一?沈沒
, 《경향신문》, 1967.12.11
- ↑
禁錮2年을 宣告
, 《경향신문》, 1967.4.24
- ↑
軍裁서"海軍잘못없다"
, 《경향신문》, 1968.1.19
- ↑
大法(大法)徐判決 韓一號(한일호)沈沒事件 忠南艦(忠南函)에도過失(과실)
京鄕新聞
1970年 10月 1日子
- ↑
韓一號(한일호)엔징은 昌慶號再生(窓警護再生)한것
東亞日報
1967年 1月 20日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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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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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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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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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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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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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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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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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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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大韓民國 外 地域에서 發生한, 2人 以上 韓國人이 聯關된 事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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