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이 (學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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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이 (程?, 1033年 ~ 1107年 )는 中國 宋나라 道學 의 代表的인 學者의 한 사람이다. 兄 名도(明道) 정호 와 더불어 性理學 陽明學 源流의 한 사람이다.

字는 정숙(正叔). 兄인 明渡보다 1年 늦게 河南(河南, 現在의 허난省 에 屬함)에서 出生하여 利川先生(伊川先生)으로 呼稱되었다.

生涯 [ 編輯 ]

情이

송학 (宋學)의 先驅者 好安定 (胡安定)을 통하여 大學(大學)에서 배우고, 서經國子監(西京國子監)의 敎授에 서임되었으나 辭退하였고, 後에 숭前傳說서(崇政殿說書)에 拔擢되었다. 이때 많은 文士들은 政府部內에 있는 蘇東坡 를 따르면서 利川의 學問은 迂遠(迂遠)하다 하여 排除했다. 여기에서 所謂 樂觸(洛蜀)의 黨爭이 생겨 利川은 逐出되었다. 徽宗 皇帝 때가 되어서야 겨우 復官(復官)되어 警査(京師)에 돌아왔다. 利川의 學問에서 가장 重要한 것은 逆賊 論理(易的論理)의 展開로서의 形而上的人 事由이다. 卽 利川은 《 (易)》의 “1音(一陰) 1陽(一陽), 이것을 도(道)라고 한다”에 道(道)라는 것은 ‘陰陽(陰陽)으로 되는 所以人 것’ 卽 陰陽(陰陽)李 開合(開合)하는 沼이라고 한다. ‘所以(所以)’라고 하는 것은 ‘까닭’이며 ‘理由’이며 ‘原因’이다. 따라서 1音(一陰) 1陽(一陽)과 도(道)는 理論的으로 相異한 것이다. 現象이 1音(一陰)하고 1陽(一陽)하여 生成·變化·消滅(生成變化消滅)하는 그 原因·理由가 道(道)이다. 더욱이 陰陽과 도는 어제 陰陽이 있고 오늘 道가 있다고 하는 論理가 아니고, 도는 陰陽에 卽(卽)하고 陰陽은 道에 處하여 있다고 하는 形而上下(形而上下)의 關係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 思考方式은 1信(一身)의 마음(心)은 곧 天地(天地)의 마음(心)이고, 1물(一物)의 이(理)가 곧 萬物(萬物)의 이(理)라고 하는 얼핏 보면 名도(明道)의 論理와 같은 兄(型)으로 展開되는 것 같다. 그러나 明度가 ‘性卽氣(性卽氣), 基卽成(氣卽性)’이라 한 데 反하여 그는 性卽理(性卽理)라고 하면서 性卽氣(性卽氣)의 說은 取하지 않았다. 또 二千은 實踐을 重視하면서 居敬窮理(居敬窮理:마음을 純一하게 하여 오로지 自己의 本來 城에 順應하는 것에서 事物의 理致를 窮究한다), 格物致知(格物致知:事事物物에 卽하여 그 이를 窮究하여 지(知)를 明確히 한다)를 說破하였다. 利川의 思想은 南宋 走者 에게 받아들여져서 展開되었다.

著書 [ 編輯 ]

《利川逆轉(伊川易傳)》 [ 編輯 ]

序文에 原簿(元符) 2年 正月이라고 記錄되어 있어서 1099年 에 完成된 것이라고 斟酌된다. 그러나 弟子인 양시 (楊時, 1053∼1135)에 依하면, 이것은 未完成인 채로 文人에게 보인 것이며 얼마 後 散佚된 것을 九山이 蒐集하여 交合하였다고 한다. 이 著書는 驛(易)의 上京·하경·斷電(彖傳)·上典(象傳) 및 文言便(文言篇)을 解釋하였을 뿐이며, 繫辭(繫辭)·說卦(說卦)·잡卦(雜卦)의 祭典(諸傳)에는 州(註)가 없다. 이렇게 된 것은 王弼 의 譯註(易註)를 模倣했기 때문이라는 說도 있으나, 楊口山(양시의 號)의 말과 같이 未完成 作品이라는 것이 妥當하다고 《4古典서 銃목體요(四庫全書總目提要)》(《 四庫全書 》의 內容 解說書)는 記述하고 있다. 어떻든 王弼의 譯註를 採用한 利川이 驛(易)을 論理的으로 解釋한 것은 當然한 것이다. 그에 依하면 驛의 道理는 至極히 微妙하고 驛이 나타내는 上(象)도 至極히 분명하나, 體用(體用)은 一圓(一源)하며 玄美(顯微)는 無肝(無間)한 것이라 한다. 體用一圓(體用一源), 顯微無間(顯微無間)이라는 것은 무릇 存在하는 것(現象·易象)과 그것의 存在의 方式(道·易理)과는 分離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物件이 있으면 거기에 物件의 理致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이, 兩者가 相卽(相卽)하여 있음을 보이는 意味깊은 말이다. 朱子의 《譯本의(易本義)》가 그 自身이 말한 바와 같이 매우 不滿足했던 것에 비해서 《利川逆轉》은 週(註)가 缺如된 部分도 있으나 宋代(宋代) 易學의 正統을 確保하고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