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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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식 (張憲植, 1869年 陰曆 9月 21日 ~ 1950年 陽曆 8月 20日 )은 大韓帝國 末期부터 日帝强占期 동안 官僚를 지냈다. 京畿道 龍仁 出身. [1] 本貫은 忍冬 (仁同), 號는 취운(翠雲)이다. 日本式 創氏名은 其他 하리마(張間憲植)이다.

1895年 日本 館婢 留學生에 選拔되어 1903年까지 日本에 留學하며 게이오 義塾 의 보통과와 高等科 過程, 도쿄 大學校 法科大學 法學科에서 修學했으며, 日本 司法省과 요코하마港 地方裁判所의 事務見習, 大藏省의 事務見習으로 在職했다. 歸國 後 宮內府 注射로 任用되어 學部에서 勤務하다가 漢城府尹을 歷任했다. 1910年 10月 韓日 倂合 條約 以後 總督府 高等官에 任用되어 平安南道 參與官, 1917年 忠淸北道 長官(道知事)으로 昇進한 뒤 忠淸北道 屠場官, 朝鮮總督府 事務官, 總督府 官房실 契員, 1924年 全羅南道 知事 等을 歷任했다. 1926年부터 中樞院 參議에 選出되어 連任한 뒤 1945年 5月 李王職 長官에 任命되어 美軍政 駐屯 直後 11月 까지 在職했다.

解放 後 皇室 物品 橫領嫌疑로 告訴되었으며, 1949年 反民特委에 親日嫌疑字로 自首, 搜査를 받다가 病保釋으로 풀려났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初期 活動 [ 編輯 ]

1869年 陰曆 9月 21日 龍仁郡 현내면 (縣內面)에서 性急(成汲)의 아들로 태어났다. 一說에는 1868年 生 說도 있다. 어려서는 漢文(漢文)을 受學하다가 18歲 되던 해 鏡城으로 올라와 漢城府 中서(中署) 수진방 全東(壽進坊 ?洞) 13通 11號로 住所를 옮겼다. 1935年 무렵 平安南道 평양부 로 移徙했다가 다시 京城府 가회동(嘉會洞) 4番地로 住所를 옮기고, 定着하였다.

1895年 官費 日本 留學生으로 選拔되어 그해 3月 日本 으로 건너가 게이오義塾 普通科에서 修學했다. 當時 近代化 作業의 一環으로 뽑아 보낸 館婢 日本 留學生들은 日帝의 韓半島 强點 以後 다양한 部門의 專門家이자 親日派로 活動하게 되는데, 장헌식度 그런 人物들 中 하나였다.

日本 留學 生活 [ 編輯 ]

1896年 7月 25日 게이오義塾(慶應義塾) 普通科를 卒業하고, 게이오 義塾 高等科에 들어갔다. 當時 게이오義塾은 朝鮮人 留學生이 急增함에 따라 朝鮮人 特別 高等科를 設置하였다. 1897年 4月 25日 게이오義塾 高等科를 卒業하였다. 1897年 5月 부터 12月 까지 그는 日本 司法省 行政事務級裁判所 竝設 검사국 見習事務員이 되었다. 그는 게醫오의숙 을 卒業하고 司法 部門의 近代 文物을 배우기 위해 日本 사법성의 裁判所 檢査部에서 見習 事務員으로 일했고, 1898年 1月 부터 10月 까지는 日本 교토부 가나가와縣 요코하마港 地方裁判所(神奈川縣 橫濱港地方裁判所) 檢事局의 見習事務員으로 在職했다.

見習事務員으로 在職하면서 그는 도쿄 帝國大學 에 進學, 1898年 10月 도쿄 帝國大學 법과대學校 法科에서 行政法 을 專攻하며 行政法 專門家로 日本 大藏省 總務局에서 見習 勤務했다. 1902年 7月 11日 도쿄 帝國大學 법과대學校 法科를 卒業하였다. 1902年 10月 21日 도쿄 帝國大學 의 大學院에 進學했으나 1903年 3月 中退하였다. 1902年 11月 그는 日本 도쿄에 있는 大藏省 總務局 事務見習 兼 事務囑託이 되었다, 같은 달 그는 大藏省 事務見習 通信社(大藏省 事務見習通信事)로 發令되어 1903年 3月 까지 勤務했다.

歸國과 官僚 生活 [ 編輯 ]

8年間의 留學 生活을 마치고 1903年 3月 學部의 訓令으로 歸國한 뒤로는 大韓帝國의 宮內府 에서 注射로 官職을 始作했다. 1904年 6月 24日 宮內府 어홍원(宮內府 御供院) 會計課(會計課) 서기가 되고 같은헤 8月 宮內府 어홍원 注射(宮內府 御供院 主事), 10月 宮內府 帝室制度整理局 祕書官(帝室制度整釐局?書官)을 거쳐 1905年 7月 13日 日本 視察 隨行員의 한사람으로 選拔되어 日本을 다녀왔다.

1905年 에는 官立漢城外國語學校 (外國語學校)의 校長, 1905年 10月 18日 歸國과 同時에 6품으로 陞六하고, 12月 20日 學部參書官 主任官 4等 7級(學部參書官敍奏任官四等七級)에 任命되고, 12月 27日 부터는관립외국어학교장(外國語學校長)을 兼職하였다. 1906年 10月 24日 學部 編輯局 事務臨時代辯(學部編輯局長事務臨時代辦), 1907年 3月 學部 編輯局長(編輯局長)을 거쳐 1907年 5月 부터는 官立 한성사범학교 (漢城師範學校) 校長을 兼任하였다.

1907年 7月 한성부윤 (漢城府尹)으로 赴任했다. 그해 10月 漢城府民會(漢成府民會)李 되어 1911年 까지 在任했다. 1907年 (光武 10年) 7月 高宗 이 强制로 退位하였을 때는 勳3等 八卦章 을 받았고, 1907年 10月 漢城府民會 設立에 參與하였다. 1908年 3月 1日 衛生回(衛生會) 會長에 選出되고, 같은 날 興士團 에 評議員으로 加入했으나 곧 脫退하였다. 한성부윤 으로 勤務할 때인 1909年 安重根 이토 히로부미 를 狙擊·殺害하자 이토 追悼會를 여러 次例 여는 等 韓日 倂合 條約 締結 以前부터 積極的인 親日派로 活動했다.

日帝 强占期 活動 [ 編輯 ]

日帝 强占期 初盤 [ 編輯 ]

1910年 10月 2日 韓日 倂合 條約 締結 後에는 朝鮮總督府 에서 그를 平安南道 招待 參與官 高等官 3等(平安南道 參與官 高等官三等)에 임명하였고, 1910年 12月 27日 種5位(從五位)로 昇級한 뒤 1912年 8月 1日 日韓倂合記念章, 1915年 11月 10日 大禮記念章(大禮記念章)을 授與받았다. 1916年 3月 31日 鄭5位(正五位)로 昇級하였다. 以後 勳3等(勳三等), 1917年 6月 12日 忠淸北道 長官(道知事) 高等官 2等(忠淸北道 長官 高等官二等)으로 昇進한 뒤 道長官이 道知事로 官職 名稱이 바뀌자 그대로 忠淸北道知事 로 留任되었다. 1920年 7月 31日 勳2等(勳二等)에 올라 서보장(瑞?章)을 下賜받고 1920年 9月 27日 高等官 1等(高等官一等)에 올랐다. 1920年 6月 24日 淸州靑年會 發足에 參與하였다.

1921年 2月 12日 朝鮮總督府 事務官(朝鮮總督府 事務官)李 되고, 3月 10日 種4位(從四位)로 昇級하였다. 1921年 3月 18日 朝鮮總督府 總督官房실(總督官房室) 行政官이 되었다. 1921年 3月 20日 勅任事務官(勅任事務官) 民情視察館(民情視察官)에 任命되어 4月 7日부터 6月 19日 平安南道 , 平安北道 一帶를 民情視察하였고, 10月 16日 부터 12月 27日 까지는 民情視察官으로 咸鏡南道 咸鏡北道 를 民政視察을 다녀왔다. 이때 그는 寬容 車輛이 주어졌지만 拒否하고, 自費 負擔으로 列車 와 버스, 택시 等 大衆交通으로 視察을 다녔다. 그는 歸還 後 總督府 經理課에 旅費 請求를 하지 않았다. 1922年 2月 15日 에는 全羅南道 3月 5日 부터는 全羅北道 를 視察하고, 같은 달 중앙고보 卒業式, 寶城高普 卒業式에 朝鮮總督 을 代身하여 參席, 談話文을 朗讀했다. 7月 에는 江原道 를 視察다닌 뒤 7月 22日 歸還하였다. 9月 4日 에는 黃海道 水害現場을 視察하고 돌아왔다.

1923年 11月 25日 에는 滿洲 의 朝鮮人 同胞가 設立한 대성중학교 에 奬學金으로 써 달라고 金 40원을 寄託하였다. [2] 12月 27日 에는 京城圖書館 에 圖書購入費 1百 원을 寄附하였다.

1924年 12月 1日 에는 全羅南道 知事로 赴任하였다. 그는 退勤 後에는 普通의 農軍들과 같이 植樹(植樹)와 盆栽 가꾸기 自身의 土地에서 논農事와 밭農事를 하였다.

장헌식은 도 參與官, 道知事를 지낸 官僚 가운데서도 1921年 總督府의 總督官房 勤務 事務官(民政視察 事務官)을 맡는 等 總督府와 特히 癒着된 行步를 보였다. 3·1 運動 後 新設된 이 職責은 獨立 運動에 對한 監視와 彈壓이 主目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1921年 2月 朝鮮總督府 事務官 (朝鮮總督府 事務官)으로 轉任되고, 高等官 1等(高等官一等)에 敍任었다. 1921年 3月 18日 總督府 總督 官房室에 發令되었다.

日帝 强占期 中盤 [ 編輯 ]

1923年 간토 大地震 以後 社會主義 思想이 널리 퍼지고 勞動 運動이 活潑해지자 이를 彈壓하기 위해 設立된 親日 資本家 團體인 동민회 에 加擔했으며, 日帝 末期 總督府 學務局과 密着하여 또다른 親日 團體 對話同盟 結成을 操縱했다는 證言이 있다. [4] 1924年 12月 1日 全羅南道知事 로 赴任하였다. 全南 知事職에서 물러난 1926年부터 1945年까지 中樞院 勅任參議를 7回에 걸쳐 重任하였다. [1]

1926年 5月 1日 情4位(正四位)로 昇級했지만 1926年 8月 14日 스스로 依願免官(依願免官)하였다. 바로 朝鮮總督府 忠州원 參議 勅任官待遇(中樞院參議 勅任官待遇)에 選拔되었다. 1926年 9月 13日 種3位(從三位)로 昇給하고, 1928年 11月 16日 다시 大禮記念章(大禮記念章)을 받았다. 1927年 4月 6日에는 韓食(寒食)日을 記念하여 社會團體에 5원을 寄附하였다.

1927年부터 女性의 就職과 職業訓鍊을 目的으로 朝鮮女子職業社(朝鮮女子職業社) 設立이 推進되자 創立準備위원으로 參與하고, 1928年 1月 15日 朝鮮女子職業社가 出帆하자 創立發起人으로 參與하고, 朝鮮女子職業社 顧問에 委囑되었다. 1928年 朝鮮繡散會(朝鮮水?會) 評議員에 選出되었다. 1928年 6月 16日 朝鮮臨時敎育審議委員會 創立에 參與하고 臨時敎育審議委員會 委員에 委囑되었다. 1931年 2月 14日 京城府 의 都市開發計劃 諮問委員會人 京城都市計劃硏究會 委員이 되고, 곧 都市計劃硏究會 幹事에 被選되었다. 1933年 8月 14日 中樞院 參議 任期滿了가 되자 8月 15日 勅任官 大宇人 中樞院 勅任參議에 選任되었다.

日帝 强占期 中盤 [ 編輯 ]

1926年 朝鮮總督府 中樞院 參議에 選出되었다. 1931年 5月 25日 朝鮮佛敎團 (佛敎團) 理事에 選出되고 [5] , 12月 17日 朝鮮水産協會 共同 副會長의 1名으로 選出되었다. [6] 1932年 2月 5日 朝鮮敎育協會 (朝鮮敎育協會) 副會長에 選出되었다.

그는 社會活動과 朝鮮總督府에서 主管하는 各種 모임, 行事에 꾸준히 參席했는데 1932年 5月 27일日子 日記에서 김윤정 , 이항구 , 장헌식 等은 춤을 추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는 內容을 自身의 日記에 남겼다. 그해 9月 3日에는 京城府尹 主催下 社會福祉士驛에 參席하여 踏査를 하였다. 1932年 8月 16日 朝鮮總督府 中樞院 參議에 再選出되었다.

1930年 淸州 에 開校 豫定인 淸州商業高等學校(淸州商業高等學校)의 建立과 個校에 關聯하여 建立, 施設費用이 不足하여 個校가 遲延되었다. 그는 學校 開校費用을 負擔하고 自身의 土地를 寄贈하였다. 1935年 淸州上告는 私立 學校로 個校가 確定되고, 淸州 市民 代表 방인혁(?寅赫), 民營은(閔泳殷) 等은 2月 20日 그를 찾아가 校長에 就任해줄 것을 付託하여 承諾했다. 1935年 3月 1日 淸州商業高等學校(淸州商業高等學校) 校長에 就任하고 그해 5月 7日 開校式과 入學式을 擧行하였다. 1935年 9月 27日 京城都市計劃硏究會 總會에서 執行委員으로 被選되었다.

1935年 11月 27日 金泉의 金泉高等普通學校의 設立者 최송설당 記念 銅像을 建立할 때 3원을 寄附하였다.

1935年 總督府가 編纂한 《朝鮮功勞者명감》에 朝鮮人 功勞者 353名 中 한 名으로 收錄되어 있다. [7] [8] 1935年 8月 14日 任期滿了로 參議職에서 물러났으나 特別히 中樞院 參議에 再任命되었다.

장헌식은 官職에서 退任한 뒤로도 日本의 戰爭을 支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37年에는 各地에 時局講演을 다녔다. 滿洲事變 以後 日本軍을 後援한 活動을 인정받아 1937年 日本 陸軍大臣 名醫의 表彰을 받은 바 있고, [1]

中日戰爭, 太平洋戰爭 때 活動 [ 編輯 ]

37年 8月 21日에는 愛國금차會員으로 參與하였다. 中日 戰爭 勃發 以後로는 時局講演班에 加擔하여 戰爭 支援 演說을 하기도 했다. 1938年 親日 團體인 國民精神總動員 朝鮮聯盟 에 發起人으로 參加한 뒤 1941年 國民總力 朝鮮聯盟 朝鮮 臨戰 保國團 에도 加擔했다. 이때는 이미 70代의 老軀였으나, 學兵 支援을 督勵한다며 全國에서 講演 活動을 벌이기도 했다. 1938年 8月 16日 朝鮮總督府 勅任官待遇 參議에 任命되었다.

1941年 國民總力朝鮮聯盟(國民總力朝鮮聯盟) 評議員이 되고,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李 出帆할 때 創立發起人이자 會員으로 參與하였다. 1940年 1月 25日 유도회 (儒道會) 京城府 支部 副會長에 選出되었다. 1944年 1月 다시 國民總力朝鮮聯盟 評議員이 되었다.

1926年 부터 1945年 光復 時點까지 19年 동안 朝鮮總督府 中樞院 의 參議를 지냈으며, 1945年 5月 李王職 長官으로 官職에 復歸해 있었다. 光復 當時 그는 李王職 長官이었고, 11月 8日 舊皇室事務廳이 設置될 때까지 繼續 在職하였다.

解放 以後 [ 編輯 ]

美軍政期 活動 [ 編輯 ]

1945年 9月 2日 美軍政 駐屯과 同時에 美軍政 諮問委員의 한 사람이 되었다. 當時 그는 李王職 長官이었다. 李王職長官職은 11月 8日 辭退하였다. 이때 舊王宮 의 物品을 流用했다는 疑惑으로 搜査받았다. 그를 搜査한 것이 解放 以後의 첫 搜査, 裁判으로 記錄된다.

1946年 1月 3日 李王職 財産 關聯 公金橫領 嫌疑로 逮捕되었다. 그는 이때까지도 出國하지 못한 日本 人 李王職 會計課長 사이토 齒로(齋藤治?)와 함께 逮捕, 西大門刑務所 에 投獄되었다. [9] 그는 反省의 幾微가 없었고, 過去 日本 政治下에서 있었지만 그래도 高官大爵으로 있었는데 어찌하겠느냐고 對應하였다. 檢察官들은 憤怒했고 傍聽席을 憤怒하게 했다. [9] 1月 3日 서울 西大門刑務所 에 收監되었다. 1月 16日 保釋金 을 내고 保釋出監하였다. [10]

1946年 3月 15日 公金橫領 및 公文書 僞造 嫌疑로 서울地方法院 에서 懲役 6個月型을 言渡받은 뒤, 投獄됐다가 執行猶豫를 받고 풀려났다. 다시 美軍政 諮問官으로 復職하였다.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後 [ 編輯 ]

1948年 8月 15日 政府 樹立과 同時에 官職에서 물러나 京畿道 龍仁 의 自宅으로 돌아갔다.

1949年 1月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에 逮捕令이 떨어지자 自首하였으며, 反民特委 調査官들이 오자 淡淡하게 代價를 치르는 것이라며, 孫子며느리에게 뒷일을 付託한다 하고 出頭하였다. 以後 調査에 順順히 應하여 拘束 搜査를 받았으며 痔疾 (痔疾)로 苦生하였으나 病保釋은 拒絶하였다. 以後 그는 별다른 處罰을 받지 않고 1949年 2月 22日 痔疾 로 因해 釋放된 뒤 不拘束 問招를 받아 反民特委에 다녀가며 訪問調査를 받았다. 3月 9日 反民特委로부터 寶石이 可能하다는 通知를 받았지만 寶石을 拒絶했다. 같은 날 反民特委로부터 不拘束 起訴 處分을 받았다.

1949年 4月 20日 保釋 금을 내고 釋放되었다. [11]

1950年 8月 20日 에 死亡했는데, 一說에는 朝鮮人民軍 에 殺害되었다는 說이 있다.

事後 [ 編輯 ]

官僚 在職 中 朝鮮總督府 로부터 性品이 溫和하고 學識이 豐富한 人物이라는 評을 들었는데, 雜誌 大陸自由評論 事業人物號 第8號의 人物紹介欄에 收錄돼 있다.

2002年 民族正氣를 세우는 國會議員모임 光復會 와 함께 選定한 親日派 708人 名單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에서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하기 위해 整理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모두 包含되었다.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으며 婦人인 임정재 도 親日 女性 團體인 愛國금차回 에서 活動했다.

家族 關係 [ 編輯 ]

1917年 當時 그는 本妻와의 사이에 2男 3女를 두었다 한다. 當時 長女 장홍식은 成年으로 漢城銀行 職員이었으며, 아들 장홍식은 當時 14歲로 平壤中學校 에 在學中이었다. [12] 그의 딸들 中 한名은 민대식의 아들과 結婚하였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反民族問題硏究所 (1993年 2月 1日). 〈장헌식 : 中樞院 勅任參議를 20年 間 歷任한 日帝의 忠犬 (장세윤)〉. 《親日派 99人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  
  • 임종국 (1991年 2月 1日). 〈「穴의 漏」의 李人稙은 韓日合邦의 主役〉. 《實錄 親日派》.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 서울: 돌베개. ISBN   8971990368 .  
  • 김윤정, 《朝鮮總督府 中樞院 硏究》 (京仁文化史, 2011)

各州 [ 編輯 ]

  1. 임종국 (1991年 2月 1日). 《實錄 親日派》.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 서울: 돌베개. 85~86쪽쪽. ISBN   8971990368 .  
  2. "大成中學寄金 寄附人士 芳名錄", 동아일보 1923.11.25. 5面, 社會面
  3. 反民族問題硏究所 (1993年 2月 1日). 〈장헌식 : 中樞院 勅任參議를 20年 間 歷任한 日帝의 忠犬 (장세윤)〉. 《親日派 99人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 이 職責은 3·1 運動 後 韓國人들을 監視하고 民心의 動向을 偵探하기 위해 總督 사이토 마고로(齋藤實)가 特設한 職責으로 一種의 特務遙遠이라 할 수 있었다.  
  4. 日帝 末期 總督府 學務局과 密着하여~ : 反民特委 조병상 公判調書 (第1回) 中 조병상의 手記 (1949).
  5. "佛敎團役員", 朝鮮新聞 1931年 5月 25日子 2面 8段
  6. "水産會役員改選", 每日申報 1931年 12月17日子 8面 1段
  7. 성강현 (2004年 3月 18日). “‘朝鮮功勞者명감’親日 朝鮮人 3百53名 記錄 - 現役 國會議員 2002年 發表한 親日名單 日치 相當數” . 日曜示唆. 2008年 6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3月 6日에 確認함 .  
  8. 성강현 (2004年 3月 18日). “3百53名 中 2百56名 名單” . 日曜示唆. 2008年 6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3月 6日에 確認함 .  
  9. "전 李王職 長官인 張憲植 收監命令", 自由新聞 1946年 1月 3日子, 2面 10段
  10. "張憲植 保釋出監", 自由新聞 1946年 1月 16日子, 2面 5段
  11. "30餘 名의 反民被疑者들, 寶石 等으로 釋放", 연합신문 1949年 4月 23日子
  12. "新道長官의 家庭, 膝下에 子女 5男妹", 每日申報 1917年 6月15日子 3面 2段
前任
원응상
第3代 全羅南道 知事
1924年 12月 1日 ~ 1926年 8月 14日
後任
석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