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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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
李資謙
朝鮮國公
身上情報
出生日 1050年
死亡日 1126年 12月 5日 (陰曆)
死亡地 全羅道 靈光 法聖浦
父親 二號
母親 桶醫국대부인 金氏
配偶者 弁韓국대부인 崔氏
子女 6男 4女
2女 문경태후 , 3女 廢妃 李氏 , 4女 廢妃 李氏

이자겸 (李資謙, 1050年 ~ 1127年 1月 19日 ( 1126年 陰曆 12月 5日 [1] ))은 高麗 時代 中期의 文臣이자 政治人, 攝政이자 詩人이었다. 權臣(權臣)이자 戚臣(戚臣)으로, 睿宗 人種 의 丈人인 同時에 人種의 外祖父이기도 하다. 睿宗 이 죽자 外孫子인 人種을 推戴하였으며, 王位를 簒奪하려던 王室의 親姻戚을 肅淸하였다. 外孫子인 人種이 卽位하자 自身의 두 딸이자 姨母가 되는 廢妃 李氏 , 廢妃 李氏 姊妹를 外孫子인 人種에게 시집보내 權力을 누렸으나 뒤에 人種을 毒殺하려다가 도리어 人種에 依해 除去되었다.

1126年 李資謙의 亂을 일으켜 反對派 人士들을 肅淸하고 權力을 掌握하였으나, 人種이 回游한 그의 査頓 척준경 [2] 等에 依해 除去되었다. 仁川 李氏 를 當代 最高의 門閥 貴族 家門으로 끌어올린 이자연 (李子淵)의 孫子이다. 全羅南道 靈光郡 에 流配되어 말린 生鮮을 먹고 그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이름을 붙인 것이 靈光 굴비 의 語源이 되었다. 作爲는 1122年 陰曆 10月에 漢陽공(漢陽公)으로 冊封되었다가 1124年 陰曆 7月 朝鮮國公(朝鮮國公)으로 進封되었다. 本貫은 仁川 (仁川)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出生과 家計 背景 [ 編輯 ]

李資謙은 開京 에서 高麗 文宗 의 丈人이며 門下侍中 을 지낸 이자연 의 孫子이자 尙書左僕射 二號 와 桶醫국대부인(通義國大夫人) 金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夫人은 海州 崔氏 로 亦是 門下侍中 을 歷任한 최사추 의 딸이다. 최사추는 海東孔子 崔沖 의 孫子이기도 했다. [ 編輯 ]

仁川李氏 집안은 나말여초 仁川 地方의 豪族勢力으로 이허겸 의 外孫女가 顯宗의 妃로 冊封되면서 頭角을 나타내기 始作했다. 이허겸은 安山 金氏 김은부 에게 自身의 딸을 시집보냈는데, 다시 김은부의 세 딸이 顯宗 의 王妃가 된 것이다. 또 그 두 딸의 아들들이 各各 德宗 , 定宗 , 文宗 이었다. [3] 다시 이자연이 세 名의 딸을 모두 文宗에게 媤집 보내고, 그 첫 딸 인예王后 李氏의 蘇生들인 純宗 腺腫 이 王位에 오르면서 仁川 李氏는 비로소 高麗 貴族 中에 가장 힘있는 外戚으로 發展했다. [4] 또한 順從과 禪宗의 王妃 여섯 名 中 네 名이 仁川李氏 出身일 程度로 外戚으로서의 地位도 굳히게 된다. [4] 그가 태어날 무렵에 그의 家計는 高麗의 권세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자연에게는 11名의 아들이 있었다. 그 中에는 戶部 郎中 을 지낸 二號 도 끼어 있었다. [4] 바로 여섯째 아들이 李資謙의 아버지인 二號 였다. 하지만 腺腫 이 어린 憲宗 에게 線위하여 王宿으로 있던 肅宗 에게 王位를 簒奪당하는 過程에서 이자연의 孫子인 이자의 (그의 四寸兄이기도 하다.)가 逐出되는 바람에 그의 家計는 沒落 危機를 맞이한다. [4] 그러나 奇跡的으로 勢力을 回復하게 된다. 崔沖 의 孫子인 丈人 최사추 는 當時의 輿論을 主導할 程度로 政治的 影響力이 큰 人物이었다. [5]

淫書와 官職 任用 初期 [ 編輯 ]

李資謙은 名門家에 태어난 德分에 淫書 로 벼슬길에 올랐고, 바로 闔門至厚 (閤門祗候)에 任命되었다. 아버지 이호는 自身의 딸을 文宗 의 맏아들 純宗 에게 시집보내 外戚의 班列에 오르게 된다. [4] 王妃의 오빠라는 理由로 그는 過去 試驗 을 通過하지 않은 그에게 [4] 要職이 맡겨졌다. 그러나 順從이 卽位한 지 3個月 만에 죽는 바람에 그다지 큰 影響力은 發揮하지 못하고, 오히려 順從의 王妃로 入宮한 장경궁주 가 純宗 事後에 奴婢와 姦通하다가 發覺되는 바람에 이자겸度 亦是 官職에서 쫓겨나는 等 順坦치 않은 時期를 보내게 된다. [4] 憲宗 在位 期間에 李資謙의 四寸인 이자의 가 桂林公(鷄林公)으로 불리던 肅宗 과 對立하다가 죽임을 當하기도 했다.

罷職된 後 李資謙은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自身의 둘째 딸(後날의 순덕王后 )을 睿宗 에게 시집보내면서 다시금 出世街道를 달린다. [4] 1107年 둘째 딸이 睿宗의 後宮으로 入闕하였다. 이는 當時 餘震 族 征伐에 따른 文臣들의 反撥이 深刻한 狀態에 이르자 睿宗은 李資謙의 딸과 婚姻하였다. [6] 李資謙은 최사추 의 사위였으며, 김인존(金仁存)의 妻男이었다. [6] 최사추 는 當時의 輿論을 主導할 程度로 政治的 影響力이 큰 人物이었다. [5] 김인존은 김상기 의 아들인데, 그들은 모두 睿宗代 餘震征伐에 反對한 것으로 有名하다. 따라서 睿宗이 李資謙의 딸과 婚姻한 것은 餘震征伐 反對 輿論을 撫摩시키기 위함이었다. [5]

1108年 , 後宮이던 둘째 딸이 睿宗의 비(妃)가 되고 이듬해 人種을 낳았으며, 以後로도 睿宗의 寵愛를 받으면서 出世街道를 달리기 始作했다. 參知政事 (參知政事), 尙書左僕射(尙書左僕射)를 거쳐 鄭2品 문하 平章事 로 昇進했고, 同時에 그의 아들들도 함께 昇進되었다. 그 뒤 開府儀同三司(開府儀同三司) 搜査도(守司徒) 中書侍郞(中書侍郞) 兼 桐 中서 문하 平章事 (同中書門下平章事) 等을 지내고, 小成群個國백(邵城郡開國伯)에 封爵되었다.

王位繼承前과 人種 擁立 [ 編輯 ]

睿宗 執權期間 中 그는 外孫子인 太子 害를 支持하였다. 그러나 예종대에 그의 政治的 影響力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睿宗은 徹底하게 中立政治를 具現하며 外戚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7] 李資謙은 當時 官僚들을 이끌고 있던 한안인 等과 보이지 않는 權力다툼을 벌이며 自身의 外孫子인 太子 區가 王位에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7]

睿宗의 죽음 當時 朝臣들은 나이 어린 太子보다는 王의 아우들 가운데 한 名에게 禪位하는 것이 나라의 安定을 圖謀하는 일이라고 判斷했다. [3] 하지만 睿宗은 自身의 맏아들 區에게 王位를 넘겨주고 싶었다. 이 過程에서 王의 아우들을 支持하는 勢力과 太子를 支持하는 勢力이 서로 論爭을 벌이며 派黨을 이루었다. 王의 아우를 王으로 세워야 한다고 主張한 勢力은 한안인 을 中心으로 한 地方 出身의 中央官僚들로서 安定을 希求하는 사람들이었고, 太子를 王으로 세워야 한다고 主張하는 勢力은 李資謙을 中心으로 形成된 外戚 및 그 周邊 사람들이었다. [3]

이들 두 勢力이 熾烈한 王位繼承 論爭을 벌이는 가운데 臨終을 맞이한 睿宗은 李資謙의 힘을 믿고 14歲의 어린 太子 區에게 王位를 넘겨주었다. [3] 睿宗은 李資謙을 불러 隨時로 어린 太子를 지켜달라고 付託하였고 李資謙은 誠心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자겸에게는 勢力이 없었지만 할아버지 이자연 이 꾸준히 投資했던 佛敎 僧侶 勢力이 있었다. 佛敎 勢力 亦是 儒敎 勢力에 對抗하기 위해 그의 同盟 提案을 받아들인다.

睿宗이 自身의 아들을 付託할 程度로 李資謙을 信任했던 것은 그가 自身의 丈人이라는 理由 때문만은 아니었다. [3] 오히려 睿宗이 믿었던 것은 仁川 李氏 집안이었다. [3]

政治 活動 [ 編輯 ]

人種의 卽位와 攝政 [ 編輯 ]

1122年 睿宗의 病이 危重해지자 하늘에 快癒를 빌었으며, 名山大刹을 訪問했으나 效驗이 없었다. 睿宗 腫瘍 으로 病席에 눕게 되어 한달만에 죽게 된다. [7] 그는 敏捷하게 宮闕을 掌握하고 外孫 人種 을 擁立한다. 睿宗이 昇遐한 後 王位를 노리는 睿宗의 아우들을 沮止하고 유조(遺詔 : 임금이 世上을 떠나며 내리는 調書)에 따라 人種을 登極시키는 데 貢獻했다.

어린 人種이 王位를 이으면서 李資謙은 絶對權力을 차지하게 된다. [7] 李資謙의 힘에 依支하여 王位에 오른 人種은 情事를 모두 그에게 내맡기다시피 했으며, 李資謙은 그 機會를 놓지치 않고 權力을 獨食하기 위해 政敵 除去作業에 着手했다. [7] 한便 한안인 문공인 (初名 문공美) 等은 睿宗의 동생인 대방공 報 (帶方公 甫)를 내세워 王位를 簒奪하려고 하였다. [5] 한안인은 睿宗이 重用한 人物로서 李資謙과 政治的으로 同一한 路線을 걸었으나, 그가 人種을 擁立하자 反撥했던 것이다. 그들의 計劃은 事前에 發覺되어 한안인은 죽음을 當했으며 대방공 保와 문공인 等 60餘 人은 流配되었다. [5]

人種을 推戴한 功勞로 攘竊匿名功臣(亮節翼命功臣)에 책록되고 中書令 (中書令) 兼 영 문하 尙書都省社(領門下尙書都省事)에 任命되어 判吏部事(判吏部事)와 判兵部事(判兵部事), 書經有數社(西京留守事)를 겸하였으며, 食邑 8千 號와 式實封 2千戶를 下賜받았다. 夫人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해지는 한便 여러 아들들의 官職도 昇級되어 그의 一門은 權力을 掌握하게 되었다.

宗室, 한안인 等과의 對立 [ 編輯 ]

1122年 12月 莫强한 勢力을 가진 人種 의 작은아버지 대방공(帶方公) 王補(王?)와 한안인·문공인(文公仁) 等이 逆謀를 꾀하였다는 名目을 내세워, 대방공 王補의 家族과 側近들을 肅淸, 除去하고 그 一黨 50餘名을 殺害 또는 流配보냈다.

李資謙의 靜寂은 크게 두 部類였다. 첫째는 睿宗 의 아우 王補로 대표되는 宗室 勢力이었고, 둘째는 한안인 으로 대표되는 地方 出身 官僚 勢力이었다. [7] 李資謙은 新進 官僚를 代表하는 人物인 한안인 과 衝突하게 되었는데, 한안인은 李資謙이 照會에 잘 나오지 않고 主要 國事를 집에서 處理한다고 批判하고, 人種에게 아뢰어 實權이 없는 名譽職으로 任命케 하려고 했다. 또한 李資謙이 최遺跡 (崔惟迪)을 給事中(給事中)으로 임명하자 장응추 (張應樞)가 이를 祕密裏에 所聞을 낸다. 後에 한안인은 장응추의 말만 듣고 최遺跡이 李資謙에게 奴婢를 賂物로 바쳐 官職을 얻었다고 非難하였다.

王補 를 비롯한 睿宗의 아우들은 德宗, 腺腫, 肅宗의 先例에 따라 어린 太子 代身 自身들 中의 한 名이 王位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안인 勢力 亦是 外戚 李資謙에게 權力이 集中되는 것을 念慮하여 從實勢力의 생각에 同意하고 있었다. [7] 이들은 人種 卽位 後 李資謙이 權力을 獨占하게 되자 못마땅한 態度로 一貫하며 그를 批判하기 始作했고, 이를 지켜본 李資謙은 王補와 한안인 勢力을 同時에 除去하는 길을 摸索한다. [7]

事件의 發端은 한안인이 李資謙의 獨斷的인 處事를 誹謗하면서 始作된다. 한안인은 李資謙이 나라의 最高 宰相으로 있으면서 定社를 모두 제집에서 處決하는 傲慢한 態度를 보이며 照會에도 參席하지 않는다고 誹謗했다. 또 李資謙이 최遺跡을 給事中으로 임명하자, 한안인은 內給事中으로 있던 長興秋에게서 최遺跡이 李資謙에게 奴婢 20名을 賂物로 주고 給事中 벼슬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이를 事實인 것처럼 空席에서 發表해버렸다. [7] 그러나 李資謙이 是非를 가리길 請하자 부끄러워하면서 한동안 朝廷에 나오지 않았다.

한안인이 蟄居하자 한때 그와 함께 睿宗의 寵愛를 받던 문공美 와 그의 四寸 아우 정극영 , 妹夫 知御史臺事社 이영 等이 자주 한안인을 訪問하였다. [7] 이를 지켜본 최홍재 라는 人物이 李資謙을 찾아가 한안인과 문공美가 朋黨을 맺고 逆謀를 꾸미고 있다고 말한다. [8] 최홍재는 睿宗時節부터 한안인, 문공美 두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 機會에 李資謙의 힘을 利用하여 그들을 除去하고자 했던 것이다. [8] 一部 王制들은 人種이 어린 點을 利用해 政變을 祈禱하려 했고 마침 靜寂을 除去하고 政局을 掌握하려던 李資謙에게 好材가 되었다.

때마침 지난날의 일로 한안인에게 怏心을 품고 있었던 太醫(太醫) 최사전 (崔思全)李 한안인이 自身을 따르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것을 두고 한안인이 陰謀를 꾸민다고 李資謙에게 謀陷하였는데, 한안인이 人種 의 卽位를 못마땅히 여기던 點과 王制들의 卽位에 同調했던 點을 눈여겨 본 李資謙은 이를 빌미삼아 대방공(帶方公) 王補 를 推戴하려는 逆謀에 加擔했다는 理由로 한안인을 除去한다.

이어 한안인은 昇州郡 감물度 로 귀양보내졌다가 途中에 李資謙의 心腹들에 依해 順天 앞바다에 던져져 죽었으며, 대방공 王報道 귀양길에 올랐다. [8] 그리고 문공美, 이영 , 정극영 等 자주 만났던 人物들과 兄 한眼中 , 동생 한영륜, 從弟 韓忠, 妻弟 임존, 사위 李霆 等 連累者 50餘 名이 流配되었고, 이들과 親分이 있는 數百 名의 官僚들이 罷職되거나 流配되었다. [8] 또한 그와 關聯된 사람들을 모두 귀양보내거나 벼슬에서 罷免, 解任 等으로 내쫓아 權力 基盤을 鞏固히 하였다.

金나라와의 事大 關係 [ 編輯 ]

1115年 建國한 後 날로 强盛해지고 있던 金나라 1125年 遼나라 를 멸망시키자, 高麗에서는 1126年 陰曆 3月 金나라와 君臣關係를 맺는 일에 對해 論議하게 되었다. 金나라에서는 이미 1117年 使臣을 보내 金나라 皇帝가 高麗 王의 兄이라 自處한 적이 있었고, 高麗에서도 金나라君의 勝利를 祝賀하는 使節을 보냈으나 事大外交는 하지 않았으며, 千里長城 의 城壁을 석 字 더 쌓는 等 萬一의 事態에 對備하고 있었다.

이때 朝廷의 大臣들은 金나라를 上國으로 받드는 것은 勿論, 國交를 맺는 것 조차 극렬히 反對했으며 甚至於 그 使臣을 죽이자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李資謙은 척준경 과 함께 金나라가 强盛하므로 섬기지 않을 수 없다고 主張하였다. 當時에는 李資謙 等이 大闕을 불태우고 反對派를 肅淸하였기 때문에 李資謙의 말에 反對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陰曆 4月 金나라에 使臣을 보내어 君臣關係를 맺게 되었다.

權力 掌握 [ 編輯 ]

攝政과 越權 行爲 [ 編輯 ]

人種이 登極한 後 李資謙이 自身의 外祖父라는 理由로 특별한 禮遇를 하고자 했으며 1122年 陰曆 10月에는 漢陽공으로 冊封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滿足하지 못한 李資謙은 自身의 影響力을 行使하여 1124年 陰曆 7月 朝鮮國公으로 높여 冊封하도록 만들었다. 李資謙은 自身의 威勢가 드높아지고 人種이 어린 것을 利用하여 攝政役割을 遂行하였으나, 任意로 國事를 自身의 집에서 處理할 때가 많았는데, 사사로운 請託이 들어오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안인, 최距離 等의 批判을 받았다. 이들이 사라진 뒤에도 臣下들은 이를 못마땅히 여겼다.

한안인 을 除去한 李資謙은 政治權力을 獨占하였다. [5] 또한 王位를 노리는 王宿들까지 除去했다. 그러나 逆謀에 加擔하지 않은 反對派들도 肅淸하여 調整을 掌握한다. 李資謙은 權力을 더욱 擴大하기 위해 自身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次例로 王과 結婚시켜 王妃로 삼게 하였다. [7] 當時의 官吏들에게 政治權力이 이자겸 1人에게 集中되는 現象은 默過할 수 없는 일이었다. [5] 儒學者 들은 이를 非難하였지만 高麗에서는 新羅 時代부터 이어진 近親婚 이 있었고, 儒敎 勢力의 非難에 그는 近親婚의 傳統을 내세워 問題가 없다고 反駁하였다.

그는 셋째 딸과 넷째 딸을 人種 의 비로 들였는가 하면 崇德部(崇德府)라는 部를 設置하였다. [5] 그러나 高麗에서의 부는 王子나 王妃에게만 設置하는 것이다. 따라서 管理가 部를 設置했을 境遇 그의 地位는 王子나 王妃와 다를 바 없었다. [5] 또한 親族들을 要職에 配置하고 賣官賣職하여 財産을 蓄積하였으며, 스스로를 國共으로 自處하면서 自身의 等級을 王太子와 對等하게 보고 生日을 仁壽節 理라 하여 全國에서 祝賀文을 올리도록 했다. [7] 그는 睿宗 때에 食邑을 下賜받았는데, 그는 한때 朝廷의 許諾 없이 사사로이 自身에게 附與된 食邑의 主婦(注簿)인 小細聽(蘇世淸)을 宋나라 에 보내어 表(表)를 올리고 土産物을 바쳐서 論難을 惹起하였으며, 스스로 持軍國師(知軍國事)라 自稱하기도 하였다.

腐敗 行爲 [ 編輯 ]

當時 그의 子息들까지도 競爭的으로 큰 집을 新築하여 開京 距離에 그들의 집이 나란히 隣接하게 되었다. [5] 그러나 껄끄러울 것이 없어진 그의 子弟들은 腐敗 行爲를 일삼아 問題가 되었다.

李資謙의 아들들과 親戚들도 朝廷의 要職을 차지하고 다른 사람의 財産을 强制로 빼앗는 等 橫暴를 부렸으며, 特히 出嫁한 막내아들인 僧侶 議長(義莊)은 敎宗 法階(法階) 中 다섯 番째 자리인 首座(首座)에 任命되어 宗敎界에도 影響力을 갖게 되었다. 한便 다른 家門에서 王妃가 排出될 境遇 外戚 勢力이 自身에게 障礙가 될 것을 憂慮하여 1124年 에는 셋째 딸을, 이듬해에 넷째 딸을 人種에게 시집보내 王妃로 삼게 했는데, 어떤 이는 이를 두고 曹操 後漢 獻帝 에게 딸을 시집보낸 것에 빗대기도 했다 [9] .

高麗史 는 當時 그들이 이 같은 財産 蓄積을 '그 勢力이 더욱 氣高萬丈해져서 賂物이 公公然히 오가며 四方에서 飮食 膳物 等이 들어와 恒常 數萬 斤의 고기가 썩어났다. 百姓들의 土地를 强奪하고 自己 집 종들을 앞세워 남의 수레를 掠奪해다가 自身의 物資를 輸送했으므로 百姓들은 모두 수레를 때려부수고 牛馬를 끌고 다니는 바람에 모든 길이 소요스러웠다'고 表現하고 있다. [5] 御史臺 等의 言官들은 李資謙의 越權行爲를 批判했고 人種 은 李資謙의 除去를 決心한다.

人種의 李資謙 除去 試圖 [ 編輯 ]

1124年 陰曆 1月 母親喪을 當해 表面的으로는 官職에서 물러났으나, 實際로는 최홍재가 自身을 해칠 것을 憂慮하여 欲知島 로 귀양보내는 等 如前히 權勢를 부렸다. 그해 陰曆 5月에는 調書에 이름을 쓰지 않고 頃으로 부르지 않게 하는 特惠를 받았으며, 李資謙의 집은 議親宮 崇德部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李資謙을 따르던 박승중은 朝廷에서 李資謙의 生日을 仁壽節로 부르자고 하였는데, 生日에 절을 붙이는 것은 元來 國王과 太子에게만 限定된 것이었으므로 김부식 의 反撥에 부딪혀 霧散되었다. 그러나 박승중은 사사로이 仁壽節이라 불렀는데, 나중에는 이자겸 本人도 自身의 生日을 두고 仁壽節이라 稱했으며, 太子와 같은 禮遇를 받았다.

自身의 野心을 실현시켜 가던 李資謙은 사사로이 宋나라 에 崇德部 官員을 使臣으로 보내 自身을 持軍國師(知軍國事 : 國事를 處理하는 職責)로 稱했으며, 人種에게도 持軍國師로 冊封해 달라고 要求했다.

李資謙은 스스로 持軍國師가 되고 싶어 王에게 自己 집으로 와서 冊書를 授與해줄 것을 要請했고, 任命式 날짜까지 强壓的으로 指定하였다. [10] 任命 時期와 場所까지 스스로 定하여 强壓的으로 要求하게 된다. 持軍國師는 한마디로 王의 權限을 가지고 自己가 攝政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要求는 大臣들의 强力한 反對로 霧散되었다. 그리고 人種의 側近들을 中心으로 李資謙을 除去해야 한다는 輿論이 높아갔다. [10] 더구나 李資謙이 直接 自身의 집에 와서 職責에 임명해줄 것을 强要한 것을 두고 王의 人事權을 侵害했다고 생각한 人種 은 憤怒했다. 끝내 李資謙의 所望대로 되지는 못했으나, 이 일 때문에 仁宗은 李資謙을 除去할 뜻을 굳히게 되었다.

人種 에게 李資謙을 除去해야 한다고 奏請한 사람은 內侍 金瓚 안보린 이었다. [10] 그들은 人種에게 累次에 걸쳐 李資謙을 除去해야 한다고 懇請하여 同意를 얻은 뒤 東知樞密院事 지녹연 (智祿延)을 包攝하여 王命이라며 李資謙을 逮捕할 것을 付託한다. [10]

1126年 陰曆 2月, 人種의 側近인 內侍至厚(內侍祗侯) 金瓚 과 內侍祿仕(內侍綠事) 안보린 (安甫麟)李 東知樞密院事 지녹연에게 이자겸·척준경 等을 誅殺할 것을 謀議하고 人種 에게 이를 상주하자 人種은 同意한다. 그러자 지녹연은 바로 上將軍 (上將軍) 汚濁 (吳卓)과 大將軍(大將軍) 卷數 (權秀), 將軍(將軍) 고석 (高碩) 等을 隱密히 불러 李資謙을 逮捕하도록 計劃을 세운다.

이들 武將들은 兵權을 쥐고 있던 척준경 과 그의 동생 척준신 을 매우 싫어했던 사람들이었다. [10] 拓俊京은 예종대에 여진 征伐戰爭에서 尹瓘 을 도와 많은 功을 세운 人物로 李資謙과는 사돈지간이었다. [10] 그런데 李資謙이 權力을 獨食하면서 척준경 亦是 權座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拓俊京의 아우 척준신은 汚濁, 卷數의 部下 將帥로 있다가 兄의 背景에 힘입어 그들의 上官인 兵部 相서 에 올라 있었다. [10] 따라서 이를 못마땅해 하고 있던 武將들은 拓俊京과 遵信을 除去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그때 마침 지녹연이 李資謙을 逮捕해 달라는 付託을 했던 것이다. [10] 뜻밖의 狀況에 놀란 李資謙은 大臣들을 自身의 집에 불러모으고 對策을 論議했으나 마땅한 解決策을 찾지 못했다.

李資謙의 난 은 李資謙이 먼저 亂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人種 과 그의 側近 官吏들이 軍隊를 動員하여 李資謙 除去를 祈禱했던 것이다. [11]

李資謙의 反擊 [ 編輯 ]

한便 李資謙 除去 作業을 隱密히 推進하고 있던 人種 內侍 金瓚 을 元老 김인존 平章事 履修 에게 보내 그들의 意見을 聽取하도록 한다. [10] 김인존과 履修는 人種의 이자겸 逮捕 計劃에 對해 原則的으로는 當然하다고 말했지만 現實的으로는 힘의 弱勢로 오히려 그들 勢力에게 當할 것이라고 忠告했다. [10] 그럼에도 不拘하고 仁宗은 李資謙을 逮捕하도록 命令했다. [10]

1126年 2月 25日 어둠이 내릴 무렵 人種의 命을 받은 최탁과 汚濁, 그리고 卷數 等이 軍士를 이끌고 宮闕로 進入한다. 지녹연 , 上將軍 汚濁 , 大將軍 卷數 , 將軍 고석 等은 더불어 擧沙하여 大闕을 掌握하여 拓俊京의 아우인 兵部 相서(兵部尙書) 척준신 과 拓俊京의 아들인 內侍 척順 (拓純)을 죽이고 屍體를 闕 밖에 버렸다. 이와 함께, 祗候 김정분, 錄事 電氣商, 崔瑩 等도 함께 除去하였다. 그러나 內職기두 學問이 城壁을 타고 넘어가 中郞將 지호 를 통하여 李資謙에게 이 事件을 報告하였다. [12]

최탁 等의 攻擊 消息을 接한 李資謙은 척준경 으로 하여금 自身의 아들 議長이 거느리고 온 玄化寺의 僧侶 3百餘 名을 이끌고 宮城을 包圍하도록 命하였다. [11] 李資謙과 척준경, 李資謙의 아들 이지미 等은 事態를 接하고 처음엔 매우 唐慌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急히 側近勢力으로 構成된 朝廷 百官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解決策을 謀議한 끝에 拓俊京의 말에 따라 反擊을 加하기로 했다. 拓俊京은 시랑 최식, 祗候 이후진, 錄事 윤한 等에게 數十 名의 軍士를 이끌고 가서 宮城門을 열라고 指示했다. [12] 이미 議長이 거느린 僧侶 3百名이 開京 王宮에 到着해 있었고 이들과 함께 宮闕을 攻略한다.

拓俊京의 命令을 받은 所長들은 宮城에 到着하자 자물쇠를 부수고 城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高喊을 지르며 叛軍들에게 降伏을 慫慂했다. [12] 그러나 宮城兵力은 그들의 數字가 많은 줄 알고 門을 걸어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12] 2月 26日 아침 李資謙은 拓俊京을 直接 派遣했다. 拓俊京은 비로소 自身의 동생 척遵信과 아들 척順의 屍體를 發見하고 復讐를 다짐했다. [12] 그는 軍卒을 불러모아 최탁 等이 叛亂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宮城을 包圍할 것을 命令했다. 여기에 僧侶 議長이 이끄는 獻花社 僧兵 3百餘 名도 加勢했다. [12] 結局 척준경 軍士는 王宮을 掌握했고 人種은 武裝解除를 命했지만 兵士들은 듣지 않는다.

宮闕 掌樂課 人種의 讓位 事態 [ 編輯 ]

李資謙과 査頓인 척준경이 앞장서서 軍士를 이끌고 大闕을 攻擊했으며, 出嫁한 아들 議長(義莊)도 玄化寺(玄化寺)의 中 3百 名을 이끌고 이자겸, 척준경이 이끌고 온 軍士들과 合勢하였다. 李資謙의 軍士가 宮闕을 掌握하자 李資謙은 人種 에게 亂을 일으킨 者들을 내놓을 것을 要求했다. 그러나 人種은 듣지 않았다.

宮闕을 掌握한 李資謙은 闔門至厚 최학欄과 都兵馬使 錄事 小億을 宮門 밖까지 보내서 人種에게 多分히 脅迫調로 宮中에서 變亂을 일으킨 者들을 내보내지 않으면 宮中이 危險해질 것이라고 傳했다. [13] 하지만 人種이 要求를 들어주지 않자 李資謙은 拓俊京과 協議하여 宮城 攻擊을 命令했다. [13] 拓俊京에게 攻擊을 指示했으나 軍士가 들어가지 못했고, 이에 拓俊京은 畫工으로 攻擊한다.

拓俊京에게 宮城兵力이 모두 制壓되었을 때 宮闕 內部는 完全히 戰爭터와 같았다. [13] 바로 宮闕에 入城한 李資謙은 人種을 面對하였다. 事態가 終結되자 李資謙은 宮城 勢力에 協力한 사람들은 모두 處斷하고, 그의 家族들과 親戚들도 죽이거나 流配시켰다. [13] 이에 仁宗은 李資謙이 自身까지도 害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王位를 넘겨주겠다는 詔書를 내렸다. 하지만 李資謙은 臺諫과 朝廷 大臣들의 公論이 두려워 機會를 엿보다가 그의 再從兄 履修가 李資謙을 꾸짖으며 臣下로서 그 같은 王의 調書를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13] 일이라고 호통을 치자 王位에 對한 欲心을 되삼켰다.

李資謙이 王位를 노린다는 消息이 들려오자 窮地에 몰린 仁宗은 李資謙에게 王位를 물려주겠다는 調書를 보냈는데, 이공수 (李公壽)가 公開的으로 反對한 데다가 輿論을 의식하여 本心을 숨기고 調書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가 入闕하자 人種은 恐怖에 질려서 그를 歡待하였다. 바로 이자겸에게도 卽位를 請하는 推戴가 있었으나 言官들과 學者들의 視線을 의식하여 斷乎하게 拒絶하였으며, 또한 李資謙의 6寸 兄弟間으로 그의 跋扈를 平素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공수와 東京 出身 貴族官僚人 김부식 等의 反對로 讓位 輿論은 沮止되었다. 그러나 人種의 讓位 調書는 그에게 王權 簒奪 疑惑을 안겨주었다.

結局 宮城은 陷落되었는데 李資謙은 國王에게는 어떠한 制裁 措置를 取하지 않은 채 自身을 죽이려 했던 최탁 , 汚濁 等만을 除去함으로써 事件을 마무리지었다. [11]

執權, 척준경과의 葛藤 [ 編輯 ]

마침내 척준경 이 밤에 大闕을 불태웠기 때문에 人種은 불을 避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人種을 따라 나온 거사 側 人物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李資謙은 擧事에 加擔한 者들의 집을 불태우고 家族들을 奴婢로 삼았다. 이 일로 인해 宮闕의 大部分이 불타고 많은 軍士가 죽었으며, 過去 施行을 撤回할 程度로 餘波가 컸다.

執權한 李資謙은 門下侍中을 代身하여 調整을 掌握하였다. 李資謙은 죽임을 當한 自派 人物들에게 벼슬을 追贈하고 拓俊京 等 手下들의 벼슬을 높이는 한便 人種을 自身의 집으로 옮겨오게 한 다음 一擧手一投足을 監視하고 自身이 國事를 處理하였다. 더욱 氣高萬丈해진 李資謙은 文武 百官이 人種에게 절을 올리는 것을 같이 받기도 했으며, 圖讖說 中 하나인 十八子득국(十八子得國 : 十八子(十八子) 姓氏, 곧 이(李)氏가 나라를 얻음)을 믿고 人種을 毒殺하려 했으나 둘째 王妃가 된 넷째 딸이 몰래 人種을 돕는 바람에 失敗했다.

李資謙은 王과 같은 權限으로 行動하면서, 人種 을 自身의 舍宅인 中興擇 書院에 軟禁해버리고 모든 情事를 自身이 主管하며 決濟했다. [14] 그러나 人種은 다시금 李資謙을 逐出하기 위해 內醫院 최사전 과 謀議하고 拓俊京과 李資謙을 離間질시키기로 作定한다. [14] 그런데 李資謙의 아들 이지언 은 척준경이 宮城에 활을 쏘고 불을 지른 事實을 非難하였다. 그러한 때에 國王은 拓俊京에게 사람을 보내어 李資謙을 除去하여 功을 세울 것을 慫慂했다. [11]

그때 마침 李資謙의 아들 이지언의 執事가 拓俊京의 執事와 是非가 붙는 事件이 發生했다. [14] 어떤 일로 싸움을 벌인 그들은 서로 相對方의 上典을 辱하는 地境에 이르렀다. [14] 이지언의 執事가 火김에 '너희 上典은 임금이 있는 자리에 대고 활을 쏘고 宮中에 불을 질렀으니 그 罪는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이고, 너도 마땅히 官奴로 글려가야 될 터인데 敢히 네놈이 나를 辱해! [14] " 이 말이 곧 拓俊京의 귀에 들어갔고 拓俊京은 李資謙의 집으로 달려가서 따지며 衣冠을 벗어 던져버렸다. [14] 척준경 側의 不滿이 심해지고 이자겸 側에서는 謝過를 拒否하자 人種은 사람을 보내 이들의 葛藤을 부채질했다.

難處한 立場이 된 李資謙은 이지미와 이공의를 보내 和解를 要請했으나 拓俊京은 辱지거리를 쏟아놓으며 隱退하여 故鄕으로 돌아가겠다고 公言했다. [14] 이 일이 있은 後 人種은 復舊된 연경궁 으로 옮겨갔고, 이자겸度 연경궁 南쪽에 居處를 마련하여 지내면서 北便 담을 뚫어 宮闕과 통하도록 하였다. 또한 軍器庫에 있던 甲옷과 兵仗器를 모두 가져다가 自身의 집에 두었다. [15]

人種 毒殺 未遂 [ 編輯 ]

仁宗은 李資謙을 除去하기 위해 그를 軍事力으로 뒷받침하는 척준경 을 懷柔했는데, 때마침 李資謙의 셋째 아들인 이지언 의 종이 拓俊京을 辱하는 바람에 火가 난 拓俊京은 李資謙과 距離를 두기 始作했다.

그는 다시 圖讖說에서 由來된 破字占(破字占)을 믿고 있었는데, 그것에 따르면 '十八子가 王이 된다'고 하였다. [15] 그런데 自身의 姓氏인 이(李)字를 分解하면 十八子가 된다고 말하면서 自身이 王이 된다는 것을 疑心하지 않았다. [15] 그래서 王位를 簒奪하기 위해 毒이 든 떡을 王에게 올렸다. 하지만 떡 속에 毒이 들어 있다는 事實을 알고 있던 그의 넷째 딸인 王妃에 依해 失敗하고 말았다. 그女는 隱密히 떡 속에 毒이 들어 있음을 王에게 알렸고, 人種은 그 事實 與否를 把握하기 위해 까마귀 에게 떡을 던져 주었다. 그랬더니 떡을 먹은 까마귀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15]

李資謙은 또 毒藥을 보내 王妃더러 王에게 먹이라고 했는데, 딸인 王妃가 그릇을 들고 가다가 故意로 넘어져서 毒藥을 엎질러버리기도 하였다. [15] 李資謙이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않고 王을 毒殺하려고 하자 이 消息을 들은 拓俊京은 드디어 王에게 忠誠을 하겠다는 決定을 내린다. [15] 王의 親書를 받은 拓俊京은 人種이 危險에 處해 있음을 感知하고 將校 7名과 官奴 20餘 名을 引率하려 宮闕로 向했다. 그때 이들은 武器가 없어 목冊나무를 몽둥이 삼아 뽑아든 채로 달려가고 있었다. [15] 宦官 弔意의 印度로 그들이 宮으로 들어가자 巡檢도령 正硫黃이 軍事 1百餘 名을 이끌고 軍器監으로 들어가서 甲옷과 兵器를 꺼내 나누어주고 연경궁으로 向했다. 이때 拓俊京은 李資謙의 受荷人 소경 유원식을 만났는데, 그가 李資謙에게 알릴 것을 念慮한 弔意는 유원식을 殺害하였다.

沒落과 죽음 [ 編輯 ]

結局 척준경 은 人種에게 忠誠을 盟誓하는 글을 바치고, 1126年 陰曆 5月 김향 (金珦)·이공수와 더불어 大闕로 들어가 李資謙의 軍士들을 制壓한 다음 李資謙을 불러냈다.

그러나 都城에 척준경이 到着한 줄을 생각하지 못하고 政事를 보고 있었다.그 사이에 拓俊京은 人種을 安全한 軍器監에 데려다 놓고 手下들로 하여금 護衛하도록 한 다음 乘船 강후玄을 派遣하여 李資謙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16] 大勢가 기울었음을 안 李資謙은 素服 차림으로 人種 앞에 나왔으며, 곧 靈光 으로 流配되었다.

李資謙의 아들 이지미는 軍事 叛亂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고 兵力 1百餘 名을 이끌고 光化門에 到着했으나 門이 굳게 닫혀 들어가지 못했다. [16] 그래서 이자덕, 金仁圭 等과 함께 事態를 把握하기 위해 兵部로 갔다. 그때까지도 李資謙이 逮捕된 줄을 모르고 있었다. [16] 그러나 그날 저녁 모두 逮捕되었다.

李資謙은 그의 妻 崔氏와 아들 이지윤 等과 함께 榮光에 流配되었다. [16] 이들 以外에도 李資謙의 두 딸이 闕에서 쫓겨났고, 이지미는 協奏로, 이공의는 進度로, 이지언은 巨濟로 各各 流配되었으며 側近 30名과 私奴婢 90名도 各地에 流配되었다. [16] 李資謙의 다른 子息들과 部下들, 協力者들 亦是 귀양 보내졌으며 王妃의 자리에 있던 두 딸은 闕에서 쫓겨났다. [17] 그러나 李資謙이 어린 人種을 毒殺하려 할 때 넷째 딸은 人種을 살렸으므로 그女를 厚待하였다. 李資謙이 沒落한 事實을 안 百姓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李資謙은 그해 陰曆 12月 에 流配地인 全羅南道 靈光 法聖浦 에서 등瘡 으로 死亡했다.

事後 [ 編輯 ]

仁宗은 1129年 [18] 李資謙의 아내 崔氏를 불러들였으며, 다시 변한국 大夫人에 봉하고, 血緣을 생각하는 뜻에서 1136年 李資謙에게 檢校 太史(檢校太師) 漢陽공으로 追贈하였다. 1145年(人種 23年) 여름 4月에 이자겸(李資謙)의 아들들에게 糧穀 6百 席(碩)을 하사하였다. 高麗 後期에 性理學者 들이 執權하고, 朝鮮 建國 以後 《 高麗史 》,《 高麗史節要 》가 編纂되면서 그는 逆賊으로 斷罪되어 그의 詩文과 作品은 모두 燒却되었고 京畿道에 묻혔다.

評價와 批判 [ 編輯 ]

徐兢 [ 編輯 ]

1123年 , 宋나라 의 使臣 一行으로 高麗에 온 徐兢 (徐兢)은 自身의 著書인 《 高麗圖經 》에서 李資謙을 두고 王位 簒奪 陰謀를 막아내었고, 어진 이를 좋아하며, 權力을 잡았으면서도 王室을 尊重했다고 記錄했다. 또한 兵力 陽性을 重要하게 여겨, 軍人들을 優待하였다고 한다. 反面, 李資謙이 利得을 좇고 드넓은 땅을 所有하여 다른 이들이 醜하게 여겼다는 點 또한 記錄하였다.

批判 [ 編輯 ]

그가 1126年 政變을 일으켜 權力을 掌握한 點과 이때 그가 人種에게 兩位를 强要했다는 主張도 提起되어 批判의 對象이 되어 왔다.

官職 歷任 [ 編輯 ]

李資謙이 거친 벼슬을 年代順으로 羅列하면 다음과 같다 [19] .

鳶島 官職
鳶島 未詳 淫書로 官職에 오름. 以後 闔門至厚(閤門祗候)에 任命되었으나 女同生의 姦通으로 벼슬에서 쫓겨남.
1108年 둘째 딸을 睿宗에게 시집보낼 때 給事中(給事中)의 자리에 있었음.
1110年 陰曆 12月 殿中監(殿中監) 東知樞密院事(同知樞密院事)에 任命됨.
1111年 陰曆 3月 御史大夫(御史大夫)가 됨.
1112年 陰曆 2月 參知政事(參知政事)에, 陰曆 9月 수사공 兵部尙書 判三司事(守司空兵部尙書判三司事)에 任命됨.
1113年 陰曆 3月 尙書左僕射(尙書左僕射)에, 陰曆 12月 檢校 사도 주국(檢校司徒柱國)으로 任命됨.
1114年 陰曆 12月 搜査도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兼 書經有數社(守司徒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兼西京留守使)로 任命됨.
1115年 陰曆 6月 翊成功臣(翼聖功臣) 稱號를 받고 受胎位(守太尉)가 됨.
1116年 陰曆 3月 판유수사(判留守事)로, 陰曆 6月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兵部事(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兵部事)로 任命됨.
1118年 陰曆 3月 判尙書吏部事(判尙書吏部事)에 任命됨.
1119年 陰曆 6月 同德功臣(同德功臣) 稱號를 더하고, 三重大匡(三重大匡)이 됨.
1121年 陰曆 4月 秋成佐理功臣(推誠佐理功臣) 稱號를 더하고, 小聖君 個國백(邵城郡開國伯)에 封해짐.
1122年 陰曆 5月 人種이 卽位한 後 協募案社功臣(協謀安社功臣) 稱號를 받고, 受胎社 中書令(守太師中書令)에 任命되고,

塑性後(邵城侯)로 爵位가 올랐으며, 陰曆 10月 漢陽공으로 冊封됨.

1123年 陰曆 8月 判書經由搜査(判西京留守事)에 任命됨.
1124年 陰曆 7月 攘竊匿名功臣(亮節翼命功臣) 稱號를 더하고,

領門下尙書都省社 판이병부 書經有數社(亮節翼命功臣領門下尙書都省事判吏兵部西京留守事)에 任命되었으며,

朝鮮國公으로 冊封됨. 以後 人種에게 强壓的으로 要求하여 持軍國師로 冊封받으려 했으나 失敗함.

1126年 全羅南道 靈光郡 法聖浦로 流配됨. 그해 12月 死亡
1136年 人種이 詔書를 내려 赦免復權하고, 夫人 崔氏를 開京 으로 불러들임. 그해 檢校太史 漢陽공으로 追贈함.
1145年 人種이 여름 4月에 이자겸(李資謙)의 아들들에게 糧穀 6百 席(碩)을 하사함.

血緣 關係 [ 編輯 ]

王室 [ 編輯 ]

  • 장경궁주 (長慶宮主) 李氏 : 李資謙의 女同生. 純宗에게 시집갔으나 順從이 昇遐한 後 弓弩와 姦通하여 闕에서 쫓겨났다.
  • 순덕王后 (聞慶왕태후)(文敬太后) 李氏 : 李資謙의 둘째 딸. 睿宗의 王妃.
  • 연덕궁주 (延德宮主) : 李資謙의 셋째 딸로 人種의 王妃이다.
  • 復唱原州 (福昌院主) : 李資謙의 넷째 딸로 人種의 王妃이다. 넷째 딸은 李資謙이 人種을 毒殺하려 했을 때 그것을 沮止하기도 했다. 둘 모두 李資謙이 沒落한 後 王妃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나 人種이나 毅宗, 明宗 等으로부터 厚한 待接을 받았다.
  • 純宗  : 妹夫
  • 睿宗 , 人種  : 사위
  • 私宿王后 (사숙태후) 李氏 : 李資謙의 四寸. 工部尙書 이석의 딸로, 禪宗의 王妃이며 1年間 아들 憲宗을 攝政하다가 이자의의 亂 等으로 물러난다.

家族 [ 編輯 ]

  • 祖父 : 이자연 (李子淵, 1002~1061)
  • 조某 : 桂林국대부인 金氏(鷄林國大夫人 金氏)
    • 아버지 : 二號 (李顥)
    • 어머니 : 桶醫局 代父인(通義國大夫人) 金氏
      • 동생 : 이자량 (李資諒)
      • 否認 : 변한국 大夫人(卞韓國大夫人) 或은 조선국 代父인(朝鮮國大夫人) 崔氏, 中書令 최사추 (崔思諏)의 딸
        • 長男 : 이지미(李之美)
        • 次男 : 이공의(李公儀)
        • 3男 : 이지언(李之彦)
        • 4男 : 이지보(李之甫)
        • 5男 : 이지윤(李之允)
        • 6男 : 이지원(李之元), 척준경 의 사위
        • 7男 : 議長(義莊)
        • 長女 : 朴孝廉(朴孝廉)에게 下架
        • 次女 : 순덕王后 (順德王后, 1094 ~ 1118) : 睿宗 의 王妃
        • 3女 : 연덕궁주 (延德宮主, ? ~ 1139) : 人種 의 王妃
        • 4女 : 復唱原州 (福昌院主, ? ~ 1195) : 人種의 王妃
      • 査頓 : 척준경 (아들 이지원의 丈人)

기타 [ 編輯 ]

李資謙의 心腹으로서 軍事力을 掌握하고 있던 척준경 이 이자겸으로부터 등을 돌린 까닭은, 이지언의 그에 對한 非難보다는, 人種 이 李資謙을 外面한 데 있었다. [11] 李資謙의 權力의 源泉은 國王이었는데, 國王이 그를 外面한 狀況에서 그가 權力을 維持하지 못할 것이라는 確信을 척준경 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1]

後日 人種 은 李資謙과 그의 妻를 追贈하여 그에 對한 追慕의 情을 두터이 했으며, 그의 아들들에게 穀食 600席을 하사하기도 했다. [11] 이러한 事實들은 모두 李資謙이 김부식 이나 이제현 의 主張과는 달리 人種 의 後見人이었음을 알려주는 具體的인 證據 [20] 이기도 하다.

靈光 굴비 [ 編輯 ]

그 當時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던 조기의 한 種類에 그는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1126年 (人種 4年) 5月 亂을 일으킨 李資謙을 靈光 法聖浦로 귀양을 보냈고, 李資謙은 그 해 12月 法聖浦에서 숨을 거뒀다. [1] 그는 海風에 말린 조기과의 生鮮을 먹어보고, 그 맛이 좋자 임금에게 膳物로 進上하면서 絶對 '自身의 뜻을 굽히지(屈) 않겠다(非)'는 뜻으로 조기의 一種인 한 물고기에 '굴비'(屈非)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傳해진다. 이때부터 굴비 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1] [21]

그는 굴비를 다른 이름으로 石魚 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이 當時는 조기를 소금으로 절여 土窟에다 한 마리씩 돌로 눌러 놓았다가 하룻밤 지내고 꺼내 말렸기 때문에 '石魚'라고도 불렀다는 것이다.

參考 文獻 [ 編輯 ]

各州 [ 編輯 ]

  1. 靈光 ‘굴비’ 이름 붙여진 事緣을 찾아서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中央日報 2009年 12月 22日
  2. 亦是 李資謙의 亂에 同調하였다. 그도 李資謙이 除去된 뒤 政界에서 추방당한다.
  3.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43페이지
  4.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44페이지
  5. 김당택,《우리 韓國史:政治史中心의 새로운 韓國通史》(푸른역사, 2006) 136페이지
  6. 김당택,《우리 韓國史:政治史中心의 새로운 韓國通史》(푸른역사, 2006) 135페이지
  7.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45페이지
  8.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46페이지
  9. 東史綱目 》 8卷 1125年 部分에 崔氏(崔氏)의 글로 記錄되어 있다.
  10.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47페이지
  11. 김당택,《우리 韓國史:政治史中心의 새로운 韓國通史》(푸른역사, 2006) 137페이지
  12.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48페이지
  13.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49페이지
  14.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50페이지
  15.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51페이지
  16.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52페이지
  17. 그러나 왕태후의 女同生이고 廢妃였으므로 王族에 準하는 禮遇를 했다.
  18. 高麗史 》 이자겸 列傳에는 李資謙이 죽고 3年이 지나 그 夫人 崔氏를 불러들였다고 記錄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르면 1129年에 있었던 일이 된다. 그러나 《 高麗史節要 》에서는 1128年 의 일로 나와 있으므로 若干의 差異가 있다. 여기서는 《高麗史》의 記錄을 따랐다.
  19. 參考文獻에 記錄된 官職名 中 가장 仔細히 記錄된 것을 실었다.
  20. 김당택,《우리 韓國史:政治史中心의 새로운 韓國通史》(푸른역사, 2006) 138페이지
  21. “高麗 李資謙의 屈非 vs 七疝바다의 울음소리 - 光州 KBS” . 2005年 1月 2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7月 2日에 確認함 .  
  22. 1963年 北韓 社會科學 古典硏究所 編纂, 大韓民國 아름出版社 펴냄.
  23. 徐兢 지음, 民族文化推進會 옮김, 서해문집 펴냄.
  24. 韓國古典飜譯院 Archived 2013年 8月 17日 - 웨이백 머신 에서 內容을 參考함.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貴族社會의 童謠〉"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