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히데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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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 히데야스/마쓰다이라 히데야스
結城 秀康/松平 秀康
유키 히데야스상(슌코쿠도 주산, 시손소장) 사진은 그것을 도쿄대학 사료편찬소가 모사한 것
유키 히데야스上(슌코쿠도 珠算, 時손所長) 寫眞은 그것을 도쿄대학 史料編纂所가 模寫한 것
도모에
도모에
第1代 에치젠 기타노쇼番
1601年 ~ 1607年
無事 情報
時代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 에도 時代 電氣
出生 덴쇼 2年 陰曆 2月 8日 ( 1574年 3月 1日 )
死亡 게이初 12年 陰曆 4月 8日 ( 1607年 6月 2日 )
改名 基이마루(義伊丸), 誤記마루(於義丸)
→ 하시바 히데야스(羽柴秀康)
→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 히데土毛(秀朝) → 히데야스(秀康)
→ 마쓰다이라 히데야스(松平秀康)
別名 에치젠쿄(越前卿), 에치젠 姑母(越前?門), 에치젠 사이쇼(越前宰相), 유키 쇼쇼(結城少?)
幕府 에도 幕府
시모社 유키番 週 → 에치젠 기타노쇼番
主君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官位 種5爲하 地主 미카와 老카미
種4爲하 社코노에곤쇼쇼
種3位 곤推拿곤
情3位
情2位
氏族 도쿠가와氏 하시바氏 유키氏 에치젠 마쓰다이라 家門
父母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어머니: 오만老伽陀 (於万の方, 나加味 요시히데 永見吉英의 딸)
養父: 도요토미 히데요시 , 유키 하루土毛 (結城晴朝)
兄弟姊妹 兄: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동생: 도쿠가와 히데타다 , 마쓰다이라 다다요시 , 다케다 노부요시 ,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 도쿠가와 요시나오 , 도쿠가와 料理老父 , 도쿠가와 料理後社
配偶者 情實: 쓰루코 (鶴子, 유키 하루土毛 의 養女, 에도 시게미치 의 딸)
子女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 다다마사 , 記事히메 (喜佐?, 모리 히데나리 의 情實), 나오마사 , 나오모토 , 나오요시

유키 히데야스/마쓰다이라 히데야스 ( 日本語 : 結城 秀康 ゆうき ひでやす [ * ] , 松平 秀康 まつだいら ひでやす [ * ] , 덴쇼 2年 陰曆 2月 8日 ( 1574年 3月 1日 ) ~ 게이初 12年 陰曆 4月 8日 ( 1607年 6月 2日 ))는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부터 에도 時代 初期까지의 다이묘 이다. 에치젠 후쿠이番 의 招待 번주를 지냈다.

一生 [ 編輯 ]

出生 [ 編輯 ]

덴쇼 2年( 1574年 ) 2月 8日,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次男으로 陶土美國 하마마쓰 에서 出生하였다. 그러나 當時 이에야스의 거成人 하마마쓰性 이 아닌 星河 敷知郡의 右部미촌(宇布見村)에서 태어났다. 生母는 미카와 出身으로 池鯉?明神을 모신 支流 神社(知立神社)의 샤닌(社人)이었던 나加味 요시히데 (永見吉英)의 딸이자 이에야스의 側室人 오만老伽陀(於万の方, 兆쇼인長勝院)이다.

오만은 元來 이에야스의 情實 쓰키야마逃奴 의 侍女로, 傲慢이 히데야스를 妊娠하자 쓰키야마逃奴의 憤怒를 두려워한 이에야스가 重臣 혼다 시게쓰구 에게 보내 아이를 낳게 하였다. [1] 히데야스는 미나모토盧 노리料理 의 後孫으로 當時 右部美 마을에 居住하며 이마가와 氏(今川氏) 時節부터 現地의 對官(代官)이나 하마나 湖水(浜名湖) 周邊의 船舶과 軍糧米 業務를 맡았던 榮州 나카무라 마사요시 (中村正吉)의 邸宅에서 태어났는데, 이 때 父親 이에야스가 나카무라 마사요시의 집에 直接 심은 소나무 「히데야스의 배내옷 무덤」(秀康の胞衣塚)李 現存하는 마사요시의 邸宅(建築物은 에도 初期에 세워짐) 境內에 남아 있다. [2] 이러한 因緣으로 에도 幕府 以後 歷代 후쿠이番 (福井藩) 번주들은 산킨코다이 (?勤交代) 때마다 나카무라 家門에서 待接받는 慣例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히데야스는 雙둥이로 태어났다는 說도 傳해지고 있다. [3] 兒名은 誤記마루 (於義丸)이다. [4]

不幸한 柳少年期 [ 編輯 ]

어린 傲氣마루는 이에야스의 미움을 받아 萬3歲 때까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고, 異服兄 노부야스 (信康)가 誤記마루를 가엾게 여겨 아들로 認定하도록 이에야스를 說得하였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히데야스를 冷待한 理由에 對해서는 이에야스의 正室로 노부야스의 生母이기도 한 쓰키야마逃奴 (築山殿)를 두려워해서였다고도 하고, 雙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에도 初期인 間에이(?永) 11年( 1634年 )에 編纂된 『나카무라가 어유서서』(中村家御由?書)에는 「혼다 社쿠社에몬(本多作左衛門)이 이에야스에게 仔細한 狀況을 말씀드린 바, 이에야스는 무언가를 생각해두던 것이 있어 따르기 어렵다 하시니」라고만 적혀 있고, 이를 硏究한 日本의 鄕土史學者 誤구스 가즈마사 (小楠和正)는 다케다 가쓰料理 (武田勝?)와의 戰鬪와 直面해 있었던 이에야스로써는 히데야스를 하마마쓰性 (浜松城)으로 데려올 機會도 대면할 機會도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推定하고 있다.

덴쇼 (天正) 7年(1579年) 다케다 가쓰料理와의 內通 疑惑으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의 命令으로 兄 노부야스가 割腹 自決한다(최근에는 노부야스가 이에야스와 對立하고 있었기에 割腹하게 된 것이라는 說도 提起되었다). 때문에 一旦 이에야스의 次男이던 히데야스가 집안의 家督을 이을 뻔 했으나, 덴쇼 12年( 1584年 ) 고마키·나가쿠테 戰鬪 뒤에 이에야스와 하시바 히데요시 (羽柴秀吉)의 和親 條件으로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에게 보내져서 그의 養子(兼 人質)가 되었고, 이에야스의 後繼者로는 異腹同生인 나가마쓰(長松, 後날의 도쿠가와 히데타다 )가 되었다. 애初에 生母의 身分이 히데타다 쪽이 더 높았고, 노부야스가 自決한 뒤에 태어난 만큼 히데타다가 後繼者로 擧論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시바와 도요토미, 그리고 유키 [ 編輯 ]

오사카로 보내지는 히데야스의 遂行은 賦役(傅役) 오구리 다이로쿠(小栗大六, 오구리 시게쿠니小栗重?)와 小成(小姓) 이시카와 가쓰値요(石川勝千代, 이시카와 야스카즈石川康勝) ? 혼다 센치요(本多仙千代, 혼다 나리시게本多成重)가 맡았으며, 이에야스로부터 겐지 傳來의 檢 「도지기리」(童子切)와 채倍(采配)를 前별로 받았다고 한다. 덴쇼 12年( 1584年 ) 12月 12日 하시바 히데요시의 兩者로써 「하시바 미카와老카미 히데야스」(羽柴三河守秀康)라 稱하였다.

덴쇼 15年( 1587年 ) 규슈 征伐 不젠 이와視老成 攻擊의 先鋒으로써 첫 出陣한 後 休暇國 平定前에도 여러 次例 功을 세워 히데요시의 稱讚을 들었다. 덴쇼 16年( 1588年 ) 도요토미 性(豊臣姓)을 下賜받았으며, 덴쇼 18年( 1590年 ) 誤다와라 平定 (小田原平定)에 이어 덴쇼 20年/ 分路쿠 元年( 1592年 ) 勃發한 壬辰倭亂 에도 參加하였다.

그러나 덴쇼 17年( 1589年 ) 히데요시의 親아들 쓰루마쓰 가 태어나고 히데야스는 生後 4個月밖에 되지 않은 쓰루마쓰를 도요토미의 後繼者라 指名하였으며, 다른 養子들과 마찬가지로 히데야스도 유키 하루土毛 (結城晴朝)의 兩者 兼 조카사위로 내보내졌다. 유키 氏는 시모쓰케국 의 슈고(守護)를 지낸 적도 있는 名門 다이묘 家門이었는데, 히데야스의 親아버지인 이에야스가 덴쇼 18年( 1590年 ) 親아버지 이에야스가 元來의 領地에서 간토 一圓의 옛 好調 氏의 領地로 前鋒되어 240萬 席을 얻었고, 히데야스는 간토 平定의 功勞者였던 이에야스의 공으로 領地가 늘어나면서 北部 간토의 다이묘였던 유키氏(結城氏)의 壻養子(?養子)가 된 것으로 보인다. 히데야스가 유키 하루土毛의 兩者 兼 조카사위가 되는 데에는 구로다 요시타카 (?田孝高)의 周旋도 있었으며, 以後 히데야스는 유키 家門의 家督에 유키 집안 所有의 領地 11萬 1千 石島 이어받았다. 또한 다시금 하시바 姓(羽柴姓)을 받았고, 棺위를 합쳐 하시바 유키 所長(羽柴結城少?)이라 불렸다.

에치젠 이봉에서 死亡까지 [ 編輯 ]

養父였던 히데요시가 죽고 게이初 5年(1600年) 세키가하라 戰鬪 의 前哨戰이 될 아이즈 征伐(?津征伐)에 參戰하였다. 우에스기 가게카쓰 (上杉景勝)에 呼應하는 形態로 이시다 미쓰나리 (石田三成)가 擧兵하고, 이에야스는 오야마 平定(小山評定)을 열어 다른 武將들과 함께 西쪽으로 갈 것을 決定한다. 이때 이에야스에게 있어 本隊는 이에야스 自身이 이끌고 도카이道 (東海道)에서, 그리고 別動隊를 히데타다가 이끌고 주산도(中山道, 逃散度 東山道)로 進軍하기로 하였으며, 히데야스는 우쓰노미야(宇都宮)에 머무르며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막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戰鬪 以後 히데야스는 이에야스로부터 시모社 유키性(下?結城) 10萬 1千 席에서 에치젠 (越前) 其他勞組(北庄) 68萬 으로 領地가 加症되어 二峯된다. 유키 집안을 代代로 섬긴 家臣들 가운데는 에치젠으로 利鋒되기를 拒否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때문에 이러한 에치젠 이봉은 最終的으로는 재지 有力者들의 재지 離脫을 强制하는 機能도 있었기에 그 結果 히데야스는 自身의 權力에 있어서 舊勢力이라 할 수 있는 유키 氏의 입김으로부터 穩全히 벗어날 수 있었다. 게이初 9年( 1604年 )에는 히데야스 自身의 本來 姓氏인 마쓰다이라氏(松平氏)로의 復歸하는 것도 許諾받았다는 飼料도 存在한다.

게이初 10年( 1605年 ) 곤주나곤(?中納言)李 되었다. 게이初 11年( 1606年 ) 9月 21日에 교토 후시미性 (伏見城)의 有收去(留守居)를 命받았으나, 病을 얻어 職務 遂行이 어려웠기에 게이初 12年( 1607年 ) 3月 1日에 에치젠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대로 尹4月 8日에 死亡하였다. 享年 34歲였다.

히데야스의 사인은 『黨待機』(?代記)에 「日?唐瘡相煩、其上?成」라고 되어 있어 梅毒 이 아니었나 推定되고 있다. 또한 梅毒이 直接的인 死因이 아니라 梅毒에 依한 衰弱症이 原因이 되어 死亡했다는 指摘도 있다. 한便 마나世 겐사쿠(曲直?玄朔)의 『醫學천정기』(??天正記)에는 「越前宰相殿、瀉利??熱?咽??五令ニ加滑」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難治病도 複合的으로 히데야스의 죽음에 作用하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유키 家門의 보리社(菩提寺)로 曹洞宗(曹洞宗) 寺刹인 효현社(孝?寺)에서 化粧되어 誡命은 효현사전전삼품황문취모월산대거사(孝?寺殿前三品?門吹毛月珊大居士)라 推戶하였으나, 도쿠가와 집안이나 마쓰다이라 집안이 歸依해 있던 淨土宗(?土宗)의 葬禮 節次를 따르지 않은 것을 이에야스가 恨歎했기에 교토 지온人(知恩院)의 萬예(??) 大使를 불러 새로 운정사(運正寺)를 짓고 그곳에 옮겨 모시고 誡命도 정광원전전삼암도위운정대거사 (?光院殿前森巖道慰運正大居士)라 하였다.

에치젠 68萬 席은 嫡男 다다나오 (忠直)가 이었다.

直系 家計 [ 編輯 ]

에피소드 [ 編輯 ]

  • 當代 武裝 中에서도 最高의 技倆을 지닌 武裝 中 한 名으로 인정받았고, 뛰어난 舞踊科 剛直한 性格, 큰 體軀를 지니고 있었다고 傳해진다.
  • 히데요시의 人質로 지내던 時節, 후시미(伏見)의 馬房에서 乘馬 練習을 하던 途中 히데요시의 銃身 中 한 名이 히데야스에게 다가와 魔術을 겨룬다는 名目 下에 말머리를 나란히 하였다. 히데야스는 "나의 許諾 없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달린 것은 無禮"라고 主張하며 銃身을 베어 죽였다. 이를 傳해들은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에게 罰을 내리라는 周邊의 要請을 默殺하고 "나의 養子에게 疏忽히 對한 것은 곧 내게 無禮를 犯한 것과 같다. 히데야스의 行動은 옳다"며 오히려 稱讚하였다고 한다. [5]
  • 동생 히데打多義 쇼군 就任 祝賀 잔치 자리에 參席했을 때 우에스기 가게카쓰와의 자리 讓步 逸話가 傳해지고 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쇼군의 兄인 히데야스의 身分을 勘案해 히데야스에게 윗자리를 讓步했으나, 히데야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公式的으로는 自身과 같은 곤노주나곤의 地位이며 더욱이 自身보다 빨리 任命되어 先輩의 立場이므로 윗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主張하며 禮를 갖추었다고 한다. 結局 히데打多義 仲裁로 히데야스가 윗자리를 차지했지만 이를 본 사람들은 히데야스의 例와 謙遜함에 感歎하였다고 한다. [6]
  • 銃砲를 所持한 채로 에도 로 向하던 中, 우스이 고개(?氷峠)의 檢問所에서 에도에 入城하는 다이묘들은 銃砲를 所持해서는 안 되는 것이 原則이며, 히데야스 또한 例外는 아니라는 理由로 制止를 當한 적이 있었다. 도쿠가와 家門 內에서도 쇼군의 兄이라는 理由로 특별한 待遇를 받고 있었던 히데야스는 이 같은 處事에 激忿하여 官吏들을 聲討하며 手下에게 官吏들의 處斷을 命令하였고, 놀란 官吏들은 에도로 逃亡쳤다. 이를 傳해들은 히데타다는 히데야스를 處分할 수는 없고 但只 히데야스의 손에 官吏들이 殺害당하지 않은 것이 多幸이라며 事態를 收拾하였다. [7]
  • 異腹同生 히데타다가 쇼군 을 이어받았을 때 후시미性 에 있던 히데야스는 이즈모노 오쿠니 이치자(出雲阿?一座)를 후시미 城으로 불러들여 誤쿠니의 가부키 를 絶讚한 뒤에 「天下에는 몇千, 몇萬을 헤아리는 女子가 있지만, 天下에 第一가는 女子를 꼽자면 이 女子일 것이다. 나는 天下 第一의 男子가 되지 못하였으니, 저 女子보다도 못한 내가 부끄럽도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自身을 유키 家門의 조카사위가 되도록 中間에서 周旋해 준 구로다 요시타카와의 사이가 매우 좋아서 후시미에 있을 때에도 사흘에 한 番은 요시타카의 邸宅에 묵었다는 記錄이 남아있다.

參考 文獻 [ 編輯 ]

  • 하시모토 마사노부「유키 히데야스에 關하여」『국학원잡지』67권 4號, 國學院大學, 1966年, 80-89쪽.
  • 이치무라 다카오「게이初 다이묘의 歷史的 位置 - 流寓키 히데야스를 中心으로 -」「地方史 硏究」181號, 1983年.
  • 미야모토 요시키 『알려지지 않은 「徭稅이 日記」』 KK 베스트셀러 1993年.
  • 미야모토 요시키「이에야스가 준 아이들에게의 便紙」『歷史讀本』38卷 19號, 1993年
  • 구로다 모토키 「유키 히데야스 文書의 기초적 硏究」 「코마者와 私學」48號, 1995年, NAID   110007003041 .
  • 구스盧키 가즈마사 『유키 히데야스의 硏究』에치젠 마쓰다이라 가 마쓰다이라 무네노리, 2006年
  • 후쿠이市立 鄕土 歷史 博物館便 『번주 유키 히데야스』 후쿠이市立 鄕土 歷史 博物館, 2007年. NCID   BA84021448 .

登場 作品 [ 編輯 ]

小說 [ 編輯 ]

  • 시키자와 이쿠루 『유키 히데야스』학습연구사 <各켄 M文庫>, 2005年 ISBN   4-05-901175-4
  • 고이즈미 슌이치로 『後쿠세키가하라』 학습연구사
  • 야마다 後打로 『라요의 히데야스』
  • 아즈獅子와 카나메 '에치젠 宰相 히데야스', 문예춘추사, 2011年
  • 其他者와 아키 <天下脫會>, 下出西方神社, 2019年

게임 [ 編輯 ]

  • 新 키無샤 DAWN OF DREAMS(캡콘) 主人公으로 登場.

作品 [ 編輯 ]

各州 [ 編輯 ]

  1. 혼다 시게쓰구가 히데야스의 出生과 養育을 擔當하게 된 데에는 여러 說이 있다. 첫째는 오만의 妊娠을 알게 된 쓰키야마逃奴가 激怒하여 傲慢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것을 혼다 시게쓰구가 偶然히 發見하여 제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다는 설, 둘째는 쓰키야마逃奴의 火를 두려워한 傲慢이 親戚인 혼다 한에몬(本多半右衛門)의 집으로 도망쳐 오자 혼다 한에몬이 다시 혼다 시게쓰구에게 알려 혼다 시게쓰구가 傲慢을 책임지게 되었다는 說, 셋째는 이에야스가 오만에게 혼다 시게쓰구의 집으로 가서 아이를 낳으라고 命令하였으나 傲慢은 이를 拒否하고 親戚이자 한때 이에야스의 侍女였던 혼다 限에몬의 백某에게로 가 아이를 낳았다는 說 等이다. 「에치젠 家電(越前家?)」.
  2. “하마마쓰視/重要文化財 나카무라가 邸宅” . 2011年 9月 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9月 14日에 確認함 .  
  3. 當代에는 둘 以上을 낳는 것은 짐승들에게나 있는 일이라고 하여 雙둥이를 輕視하는 風潮가 있었는데, 一角에서는 히데야스가 父親 이에야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히데야스가 雙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主張하기도 한다. 나머지 한 名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었다고 하나 一說에 따르면 나加味 사다치카 (永見貞愛)라는 人物이 바로 이 히데야스의 또다른 雙둥이 兄弟라고도 한다. 『바쿠후 父女 系譜(柳?婦女?系)』 第 1卷 속軍書類鐘完成回(?群書類?完成?).
  4. 一說에 따르면 히데야스가 동자개 (빠가사리, 日本語로는 機器ギギ)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5. 『도쿠가와 第家計譜(?川諸家系譜)』, 속軍書類鐘完成回(?群書類?完成?), 1992年.
  6. 『도쿠가와 第家計譜(?川諸家系譜)』, 속軍書類鐘完成回(?群書類?完成?), 1992年.
  7. 『후쿠이 現事(福井?史)』 統社便 3
  8. 「오쿠보 加硫서(大久保家留書)」.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유키 하루土毛
第18代 시모社 유키氏 堂主
1590年 ~ 1604年
後任
마쓰다이라 나오모토
유키性 星州 (유키 家門)
1590年 ~ 1601年
後任
幕部令( 미즈노 街쓰나가 )
第1代 후쿠이番 번주 (유키 家門)
1601年 ~ 1607年
後任
마쓰다이라 다다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