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진 英雄 (映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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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英雄
監督 박종원
脚本 장현수
박종원
各色 노효정
製作 도동환
原作
李文烈
出演 홍경인
固定일
태민영
최민식
新舊
撮影 정광석
編輯 이경자
音樂 송병준
製作社 帶同興業
開封일
  • 1992年 8月 15日  ( 1992-08-15 ) (大韓民國)
時間 119分
國家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言語 韓國語

" 우리들의 일그러진 英雄 "( - 英雄)은 李文烈 의 小說 " 우리들의 일그러진 英雄 "을 原作으로 製作된 1992年作 大韓民國 映畫다. 監督은 박종원 , 製作은 명필름 에서 맡았으며 固定일 , 태민영 , 홍경인 等의 兒役과 新舊 , 최민식 等의 俳優가 主演을 맡았다. 1992年 8月 15日 全體 觀覽可로 開封하였다.

映畫는 小說의 基本 줄거리를 基盤으로 삼고 있으나 具體的인 描寫는 조금씩 다르며, 마지막 結末 亦是 조금 다르다. 全般的으로는 主人公 '한병태'가 國民學校 擔任이었던 崔 先生님의 葬禮式에 찾아가면서 30年 前 이야기를 回想하는 額子 構造 를 띄고 있다. 1959年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시골 國民學校로 轉學온 5學年 한병태는 急裝 嚴石臺가 先生 노릇을 하며 班 全體를 嚴格히 統率하고, 그 裏面에서는 온갖 不正을 저지르는 同時에 班 아이들은 아무런 抵抗 없이 卑屈하게 따르는 모습을 目擊한다. 이에 한병태는 나름대로의 手段을 動員해 抵抗해 보지만 崔 先生님의 安逸한 認識과 繼續되는 報復에 結局 抛棄한 채 엄석對에게 屈從하고 2人者가 된다.

이듬해 봄 서울에서 赴任해 온 金 先生님이 擔任을 맡게 되고, 崔 先生과는 달리 銳利한 性格이었던 金 先生은 試驗時間 不正을 捕捉해 班 아이들 앞에서 加減없이 處罰한다. 하염없이 무너진 嚴石臺 앞에서 班 아이들은 態勢를 轉換하여 그間 嚴石臺가 저지른 惡行을 告發하며 스스럼없이 非難하고, 이를 참지 못한 엄석隊는 어디론가 도망쳐 蹤跡을 감춘다. 30年 뒤 葬禮式에서 한병태는 이날 嚴石臺가 葬禮式에 찾아온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지만, 그곳에는 엄석代를 따르던 同窓들만이 와서 서로를 詰難하기에 바빴다. 그땐 정의로워 보였던 金 先生님마저 이제는 國會議員이 되어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고 虛無感을 지우지 못하던 한병태는 成功을 의미하는 건지 아닌지 알 道理가 없는 嚴石臺 名醫의 調和 두 臺가 들어오는 것만을 確認한 채 喪家집을 떠난다.

이 映畫는 開封 當時 큰 好評을 받았으며, 1992年 몬트리올 映畫祭 最優秀製作上, 靑龍映畫賞 最優秀作品, 백상藝術大賞 映畫部門 對象과 作品賞 外 4個 部門을 受賞하였다. 하지만 興行에는 그리 成功하지 못했다.

登場人物 [ 編輯 ]

줄거리 [ 編輯 ]

한병태의 轉學과 葛藤 [ 編輯 ]

1992年 . 會社를 그만두고 語學院에서 석달 째 英語敎師 生活을 이어가던 한병태( 태민영 分). 國民學校 同窓과의 술자리에서 偶然히 5學年 때 擔任先生님이었던 崔 先生님( 新舊 分)李 돌아가셨다는 말을 傳해듣는다. 또 같은 班이었던 '엄석對'도 葬禮式場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섬짓 놀란다. 喪家집으로 向하는 汽車 안에서 한병태는 30年 前의 "외롭고 힘들었던 싸움"을 回想한다.

때는 1959年 가을. 잘 나가는 公務員이었던 아버지가 江原道 郡廳 總務課長으로 左遷되면서 온 家族이 시골로 移徙를 가게 되었고, 12살의 한병태( 固定일 分)도 서울의 名門 國民學校에서 시골의 작은 國民學校로 轉學을 가게 된다. 병태는 擔任 先生님인 崔 先生님의 紹介를 받아 5學年 2班 敎室에 처음 발을 들인다. 暫時 崔 先生이 自習을 하라며 나간 사이, 班 級長을 맡고 있는 엄석對( 홍경인 分)가 自身을 부르자 서울에서처럼 別般 아닌 級長이라 여기고 퉁명스레 대꾸했다가, 體育班長으로부터 强制로 이끌려 앞에 선다. 엄석隊는 병태에게 自己 任意로 反 자리를 指定해 준다. 그리고는 싸우는 아이들을 仲裁하고 直接 體罰까지 내리며 先生님 없이도 代身 統率하는 모습을 보인다. 級長이 先生 노릇을 하고 온 班 아이들이 順順히 따르는 모습을 異常하게 여긴 한병태는 下校길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김영팔이라는 親舊에게 嚴石臺가 어떤 아인지를 물었으나 별다른 解答을 듣지 못한다. 그날 밤 서울을 떠날 때 女子애가 건네줬던 '리버티'(Liberty, 自由 )라고 새겨진 美國 記念 銀貨를 꺼내보며 그리움을 애써 달랜다. 그런 병태에게 술에 醉한 아버지는 "심부름꾼 되기 싫다고 不平 不滿만 하지 말고, 너도 그런 힘 있는 急裝 될 생각하라"는 핀잔을 준다.

다음날 點心 時間, 아이들이 모여 도시락을 여는 사이 몇몇 아이들이 엄석對에게 과일이나 鷄卵 等을 한두個씩 바친다. 거기에 임만순이 한병태에게 오늘은 네가 急裝 물 떠오는 當番이라고 하자, 한병태는 級長은 손이 없냐면서 先生님도 아닌데 그러지들 말라고 대꾸한다. 雰圍氣가 險惡해지고 及其也 한병태가 그럼 先生님께 그게 옳은 것인지 여쭈겠다고 하자 嚴石臺가 나서 됐다고 말한다. 以後 科目이 바뀌었는데 한병태만 傳해듣지 못해 罰則을 받고, 學級 時間에 學級 建議함을 만들자는 한병태의 提案에 모두가 反對를 하고, 바닥 淸掃를 하던 한병태에게 누가 쌓아놓은 椅子를 넘어뜨려 맞게 하는 等, 嚴石臺가 直接的으로 괴롭히진 않지만 繼續해서 不利益을 받는 狀況이 이어진다. 이에 어떻게 抵抗할지 苦悶하던 한병태는 作心하여 돼지貯金筒을 깨고, 다음 날 서커스를 보러가는 엄석對 무리에 끼지 못한 아이들을 包攝해 劇場 구경을 시켜주고 中國집 짜장면 을 쏘며 高級 鉛筆을 膳物하는 等 懷柔에 나선다. 그러나 劇場에 갔던 일이 全部 告發당하고 膳物한 鉛筆도 엄석臺의 손에 들어간 것을 본 한병태는 驚愕한다. 머지 않아 劇場에 몰래 간 일로 6學年 先導部 兄들에게 끌려가 集團 暴行을 當하지만, 嚴石臺가 나타나 挽留하고 先生님에게도 알리지 않는 祕密로 하겠다며 선뜻 容恕한다. 또 다시 自尊心을 구긴 한병태는 서울에서는 그나마 自身있던 性的으로 엄석代를 누르기로 맘먹고 밤늦게 工夫에 熱中한다. 이틑날 自信있게 試驗에 나서지만 試驗 結果는 嚴石臺가 1等인 反面 한병태는 11等으로 드러나면서 믿었던 性的 競爭에서마저 지게 되어 깊은 絶望感에 빠진다.

分明 엄석代를 이길 수 있을 方法이 있을 거라 생각하던 한병태는 어느날 嚴石臺가 윤병조가 가져온 라이터 를 보고 좋다며 만져보다 自身을 의식해 도로 돌려주는 것을 目擊한다. 그리고 下校길에 兵曹로부터 그 라이터를 다시 뺏겼다는 말을 듣고, 崔 先生님께 가서 席代가 兵曹의 라이터를 가져갔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 事實을 안 엄석隊는 兵曹에게 라이터를 미리 돌려준 뒤, 理由를 묻는 先生님께 집에 아무도 없대서 불장난이라도 하는 걸 막기 위해 '맡겨둔' 것이라고 말한다. 猝地에 告者질쟁이로 몰린 한병태는 마지막으로 嚴石臺가 없는 사이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眞實을 分明 알 수 있을 것이라고 先生님께 主張하고, 先生님은 그 말에 따라 엄석代를 敎務室에 가도록 指示한 뒤 [1] 아이들에게 쪽紙를 나눠주며 엄석臺의 나쁜 짓을 적으라고 한다. 그런데 아무도 적지 않자 崔 先生님은 말을 바꾸어 누구의 잘못이든 적으라며 말을 바꾼다. 그날 밤 崔 先生이 쪽紙 結果를 確認하고 病胎를 불러, 石臺가 나쁘다는 사람은 한병태人 反面 너에 對한 暴露는 수도 없다며, 工夫도 指導力도 1等인 嚴石臺가 大體 뭐가 問題냐고 魂내자 한병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屈服과 '革命' [ 編輯 ]

以後 한병태는 悲慘한 處地에 빠진다. 點心 時間에 누군가 씌운 覆面 때문에 아이들에게 集團 毆打를 當하고, 그로 인해 授業 時間에 늦게 들어왔단 理由로 罰을 받고, 化粧室 淸掃 罰을 받던 中 女先生이 있는 門 사이로 몰래 훔쳐봤다는 陋名까지 덮어씌게 된다. 優等 轉學生에서 猝地에 問題兒가 되어버린 한병태는 괜히 엄마에게 서울로 돌아가자며 떼를 쓰고 동생에게 火풀이하지만 現實은 現實일 뿐이었다. 겨울이 되고부터는 엄석大와 차라리 親하게 지내고 싶다는 懷疑感과 同時에, 엄석臺의 權威가 想像超越할 만큼 堅固하다는 것까지 確認하면서 [2] 엄석對에게 조금씩 屈服하는 日常에도 익숙해져 간다. 그러던 어느날 奬學士의 巡視로 學校 大淸掃를 하게 되자 엄석隊는 崔 先生으로부터 淸掃 檢査 任務를 맡게 된다. 淸掃가 大綱 마무리되자 아이들을 모두 통과시키고 내기 蹴球를 하도록 해주지만, 琉璃窓 淸掃를 맡은 한병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끝까지 탈락시킨다. 蹴球가 끝날 때까지 한병태가 敎室에 혼자 남아 엎드려 있는 걸 본 엄석隊는 이제 돌아가도 좋다고 말한다.

이 일을 契機로 抵抗心이 完全히 허물어진 한병태는 只今까지 이어온 싸움을 스스로 끊고, 엄석代를 찾아가 비싼 펜을 膳物하며 屈服한다. 班 아이들과의 싸움 對決로 엄석臺로부터 序列 2位로 認定을 받고, 아이들을 統率하는 役割까지 나선다. 美術 時間에는 엄석臺의 그림을 스스로 代身 그려가기까지 하며 忠誠을 보인다. 이런 變節의 모습을 지켜본 김영팔은 한병태에게 더 以上 같이 안 논다며 距離를 둔다. [3]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期末考査 때 嚴石臺가 좋은 成績이 나올 수 있도록 各自 自身의 1等 試驗紙와 이름을 바꿔치기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暫時 先生님께 이 일을 일러바칠까하는 告發도 하지만 斷念하고, 오히려 엄석臺의 勸誘로 逸脫의 한마당에 어울리게 된다. 그곳에서 한병태는 리버티 銀貨를 모닥불 속에 던져넣고, "權力의 단맛에 흠뻑 取하며 그해 겨울을 그렇게 흘려보내"게 된다.

해가 바뀌고 1960年 봄, 서울에서 새로 赴任해 온 김정원 先生님( 최민식 分)李 6學年 2班의 擔任先生님이 된다. 金 先生은 授業 첫날 아이들 앞에서 "工夫 못하는 건 容恕해도 거짓말은 容恕 못한다"며 眞實과 自由를 强調한다. 이어진 새學期 級長選擧에서 班 아이들이 全部 엄석代를 推薦한 것을 보고 疑訝하게 여긴다. 뿐만 아니라 全校 1等이라던 嚴石臺가 數學 時間에 漆板에 쓴 問題를 못 풀고 쩔쩔매는 모습, 敎室 淸掃 檢査를 級長인 嚴石臺가 任意로 處理하는 모습에 疑問을 품고 다른 先生님들에게 묻지만, 엄석隊는 알아서 다 잘하는 1等 模範生이라는 稱讚만 돌아올 뿐이었다. 새로운 變化에 危機感을 느낀 엄석隊는 部下들을 거세게 渴求高, 一齊考査 날에도 如前히 다른 아이들과 試驗紙를 바꿔치기하는 不正을 敢行한다.

그러나 金 先生은 嚴石臺가 恒常 1等을 席卷하는 反面, 나머지 班 아이들은 한병태를 除外하곤 全部 全校 10等 바깥이란 事實에 疑懼心을 품고, 決定的으로 試驗紙에 이름을 지우고 고쳐 쓴 痕跡을 發見한다. 金 先生은 엄석代를 敎壇 위에 엎드리게 한 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假借없이 매를 加한다.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는 척하던 엄석臺度 結局엔 罪悚하다며 처음으로 잘못을 認定한다. 이어서 金 先生은 엄석大와 試驗紙를 바꿔치기한 아이들도 매를 加하고, 나머지 班 아이들에게 엄석臺의 지난 不正과 惡行들을 한名씩 次例대로 모두 밝하라고 한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는 姿勢로 實吐하던 아이들은 갈수록 自信있게 惡行을 告發하더니 거듭대는 雰圍氣에 휩쓸려 엄석代를 向해 "저 개새끼 순 나쁜 개새끼에요"라며 非難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自己 次例가 된 한병태는 自身은 잘 모른다고 얼버무린다. 김영팔은 한瞬間에 態勢 轉換을 한 아이들에게 도리어 "너희들도 나빠"라는 一鍼을 街하고는 울음을 터뜨린다. 金 先生은 班 아이들이 그間 卑怯하게 살아온 罪를 물어 모두 冊床에 올라가게 한 뒤 매를 때리고, 急裝 再選擧를 하게 한다. 選擧 過程에서 無秩序하고 시끌벅적하게 會議를 進行하는 아이들 [4] 을 보며 金 先生은 흐뭇한 表情을 짓는다. 한便 엄석隊는 自身을 비꼬는 發言 [5] 이 나오자 憤을 참지 못하고 갑자기 일어나 아이들에게 "잘 해봐, 이 개새끼들아!"라 외치고는 뒷門으로 뛰쳐나간다. 嚴石臺가 逃亡간 그날 邑內에는 李承晩 政權 3·15 不正選擧 에 抗議하는 示威가 벌어지고, 그날 밤에는 누군가 敎室로 들어와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여 잔뜩 태워버린다. 以後로는 엄석臺의 行方은 所聞만 茂盛한 채 아무도 몰랐고, 學校 生活은 제자리를 되찾아 石臺에 對한 記憶은 稀微해져갔다는 병태의 내레이션과 함께 回想이 끝난다.

喪家집 에필로그 [ 編輯 ]

다시 1992年 現在. 崔 先生님 喪家집에 찾아온 한병태는 그곳 상자리에서 손수 殘業을 돕고 있는 김영팔과 만난다. 둘은 서로 變한 게 없다며 語塞한 人事를 건넨다. 그리고 다른 同窓生들과도 만나는데, 엄석對에게 충성하던 體育部長은 택시 運轉士가 되어 있었고, 嚴石臺가 마실 물을 떠오라던 임만순은 어엿한 會長에 돈 많은 富者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엄석臺의 行方에 對해서는 財閥이 되었다는 等, 홍콩의 組暴이 되었다는 等 온갖 假說만 내세울 뿐 正確히는 모르고 있으면서, 오히려 서로 嚴石臺 猝富 노릇이나 했다면서 詰難하기에 바쁜 모습을 보인다. 한便 嚴石臺 體制를 무너뜨린 張本人이 된 金 先生님도 어느새 國會議員 이 되어 喪家집에 찾아오는데, 사람들과 人事하며 굽신거리더니 돌아가신 崔 先生님은 正말 훌륭하신 先生님이었다며 치켜세운다. 이에 임만순은 "出世가 뭔지 變해도 너무 變했다"는 評을 내리고, 自己는 돈만 붙었을 뿐 變한 게 없다는 말을 한다. 이어 한병태에게 집앞 술집에 갔다오자고 勸誘하지만 한병태는 괜찮다고 하고 임만순은 體育部長 무리와 어울려 자리를 뜬다. 그 渦中에 體育部長은 嚴石臺가 오면 傳해달라는 付託을 남기고 떠난다.

밤이 깊어지고 둘이 남은 한병태와 조영팔은 아직도 嚴石臺가 오질 않은 걸 보면 안 올 作定이라는 말을 나눈다. 그때 집 大門을 통해 調和 두 個가 들어오는데 그곳에 '엄석對'라는 이름 석 字가 쓰여져 있었다. 그러나 끝내 엄석隊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이른 새벽 한병태는 大門을 나선다. 그리고는 "한 다발의 꽃으로는 그의 成功과 失敗를 斟酌할 수 없었다"지만, 내가 사는 오늘은 如前히 그때의 5學年 2班 같고 그렇다면 엄석隊는 어디선가 또 다른 級長의 모습으로 주무르고 있을 것이라면서 그의 그늘에 벗어날 수 있을지 率直히 確信할 수 없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映畫가 끝난다.

各州 [ 編輯 ]

  1. 알고 보니 崔 先生은 엄석對에게 數學 試驗 採點을 맡기고 있었다.
  2. 이를 눈으로 確認하게 되는 決定的 事件으로, 中學生과 엄석代價 鐵길에 누워 膽力 試驗을 하는데 먼저 겁먹은 中學生이 도망치고, 試驗에서 眞 中學生이 엄석對에게 忠誠 盟誓를 하는 것을 目擊한다.
  3. 겉으로 說明되는 바로는 轉學 初盤에 한병태에게 自己가 아끼던 彈皮 를 膳物해 주었는데, 이제 다시 돌려달라고 했지만 잃어버렸다는 말에 失望하고 絶交한 것으로 드러난다.
  4. "그놈이 그놈이니까 아무나 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意見도 登場한다.
  5. 書記를 누구로 할지에 對한 意見이 제대로 나오질 않자 "서기를 任意로 選出하겠다"는 臨時議長의 말에 "네가 무슨 엄석臺냐"는 發言이 나온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