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응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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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응대군
永膺大君
朝鮮 世宗의 王子
이름
이염(李琰)
別號 永興大軍(永興大君) · 逆양대군(歷陽大君)
시호 卿孝(敬孝)
身上情報
出生日 1434年 6月 1日 ( 1434-06-01 ) (陽曆)
死亡日 1467年 3月 16日 ( 1467-03-16 ) (32歲) (陽曆)
父親 世宗
母親 소헌왕후 沈氏
配偶者 대방夫婦인 여산 宋氏
春城夫婦인 海州 鄭氏
軟性夫婦인 沿岸 金氏
子女 1男 3女
길안현주 · 청풍군 · 이모진 · 조덕온의 妻
陵墓 영응대군墓
京畿道 始興市 군자동 산70

영응대군 (永膺大君, 1434年 6月 1日 ( 陰曆 4月 15日 ) ~ 1467年 3月 16日 ( 陰曆 2月 2日 ) )은 朝鮮 의 王族이며 世宗 의 15남이며 敵8남이다. 어머니는 소헌왕후 이다. 文宗 世祖 의 막내 男동생이다. 世宗이 계양군 과 더불어 가장 아끼고 사랑한 子息이었으며 文宗 世祖 또한 寵愛하였다.

生涯 [ 編輯 ]

誕生과 大君時節 [ 編輯 ]

이름은 (琰)이며, 1434年 (世宗 16年) 4月 15日, 世宗 의 열다섯番째 아들이자, 소헌왕후 의 여덟째 아들로 태어났다. [1]

世宗과 소헌왕후에게는 막내 아들이며 世宗이 自身의 아들 中 가장 사랑하였는데, 實際로 《 世宗實錄 》과 《 端宗實錄 》, 《 世祖實錄 》 等에서 영응대군과 關聯한 記事에는 '매우 사랑하여(甚愛)', '가장 사랑하여(最鍾愛 · 鍾愛)', '사랑하는 아들(愛子)', '寵愛하여(寵愛)' 等의 表現이 登場하며, 世宗 스스로도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라 매우 사랑한다고 言及하기도 하였다. [2]

世宗은 다른 王子들과 달리 영응대군에게만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恒常 곁에 두고 食事를 하였다. [3]

1441年 (世宗 23年), 永興大軍 (永興大君)에 封해졌으며, 1447年 (世宗 29年) 逆양대군 (歷陽大君)으로, 다시 영응대군 (永膺大君)으로 開封되었다.

 
賃金이 坪姜鋧 (平康縣) 老벌(蘆伐)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世子( 文宗 )가 활과 화살을 가지고 수레 앞에 서 있는데,
짐승이 앞을 지나가므로 쏘니 살에 맞아 거꾸러졌다.
여러 大君(大君)들도 모두 이리저리 달리면서 활을 쏘았다.
이때 永興大軍(永興大君) 이염(李琰)李 나이 바야흐로 아홉 살인데,
임금이 그를 대단히 사랑하여 萬若 쫓기다 지친 짐승이 엎드려 있으면,
가던 年(輦)을 멈추게 하고서 사람을 시켜 鹽의 말을 그리로 몰게 하여 쏘게 하였다.
律評(栗平)에서 사냥하고 再송평 (裁松平)에 머물렀다.
 
? 《 世宗實錄 》 95卷,
世宗 24年(1442年 名 正統(正統) 7年) 3月 7日 (무진)

1445年 (世宗 27年) 4月 21日, 송복원(宋復元)의 딸 대방夫婦인 宋氏 (帶方府夫人 宋氏)와 婚姻하였다. [4]

 
永興大軍(永興大君) 이염(李琰)李 行 通禮門 判官 송복원(宋復元)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賃金이 大軍을 사랑하여 모든 보내는 物品을 여러 아들과 달리한 것은 다 記錄할 수 없다.

? 《 世宗實錄 》 108卷,
世宗 27年(1445年 名 正統(正統) 10年) 4月 21日 (甲子)


世宗 은 靈應大軍의 집을 營建하는 問題에 對해 議論하였는데, 안국방의 民家를 헐어 靈應大軍의 집을 지어주라 하였다.

1449年 (世宗 31年), 世宗은 靈應大軍의 아내인 대방夫婦인 宋氏 에게 病이 있자 廢하여 내쫓았다. 以後 영응대군은 參判 정충경의 딸 春城府夫人을 맞아들였다. [5]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李 죽은 府尹(府尹) 정충경(鄭忠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임금이 이염(李琰)을 사랑하기를 여러 아들 中에 特別히 달리 하여,
여러 萬金의 珍貴한 寶物을 上司(賞賜)하였다.
? 《 世宗實錄 》 124卷,
世宗 31年(1449年 名 正統(正統) 14年) 6月 26日 (甲戌)

1450年 (世宗 32年), 世宗 은 當時 王世子였던 文宗 과 首陽大君( 世祖 )을 불러 儒敎를 내리며 本人 死後에도 兄弟間의 友愛를 敦篤히 할 것을 命하며 영응대군을 잘 보살펴 줄 것을 付託하였다. [6] 世宗은 病勢가 심해지자 靈應大軍의 집으로 耳語하였으며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7]

1453年 (端宗 1年), 영응대군은 첫番째 아내인 대방夫婦인 宋氏 를 그리워하여 서로 몰래 만났는데, 이에 春城夫婦인 鄭氏를 내치고 宋氏와 再結合하였다. [8]

世祖 를 支持하여 世祖 卽位 後 많은 寵愛를 받았으며 王室 宗親으로 各種 行事와 宴會에 參席하였다.

死亡 [ 編輯 ]

1467年 (世祖 13年) 2月 2日 졸하였다. [9] 世祖는 매우 슬퍼하며 飮食을 먹지 않았으며 [10] , 禮曹에 命하여 葬禮를 厚하게 치를것을 前知하였다. 영응대군墓 京畿道 始興市 군자동 에 있다.

영응대군 이염의 졸기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李 卒(卒)하였다.
廉(琰)은 世宗 (世宗)의 여덟째 아들로서,
겨우 말을 할 줄 알 적에 어린아이를 彫刻하여 만든 華燭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初[燭]가 타면 반드시 (秒에 彫刻한) 어린아이에게 미치게 될 것이니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니,
世宗이 이를 크게 奇特하게 여겼다.
처음에 永興大軍(永興大君)에 봉하였다가 뒤에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고쳤다.
世宗이 매우 사랑하여 일찍이 廉(琰)을 世祖 (世祖)에게 付託하였으므로,
世祖가 보살펴 주기를 여러 아우들보다 特別히 하였다.
殮이 일찍이 病이 드니, 世祖가 매우 念慮하여 무릇 病이 나을 수 있는 것은 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고,
中士(中使)의 往來가 길에 끊이지 아니하였다.
念은 타고난 資質이 旬後(醇厚)하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며, 音律(音律)에 밝았다.
世宗이 일찍이 內帑庫의 珍貴한 寶物을 廉에게 모두 주려고 하다가 이를 하지 못하고 훙(薨)하였으므로,
文宗 (文宗)이 卽位하고 얼마 있다가 內帑庫의 寶物을 내려 주어 그 집으로 다 가져갔다.
이로써 漁夫(御府)의 代代로 傳해 내려오던 寶貨(寶貨)가 모두 廉에게로 돌아가니, 그 財物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자못 儉素하고 節約하여 奢侈를 일삼지 아니하고, 입시하여서도 謙恭(謙恭)하고 根脚(謹恪)하여
조금도 過失이 있지 아니하므로, 世祖가 매우 重히 여기었다.
世宗 이 일찍이 송복원(宋復元)의 딸을 擇하여 配匹로 삼았는데,
宋氏(宋氏)가 病이 있어서 世宗이 命하여 그를 버리게 하고 정충경(鄭忠敬)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게 하였다.
世宗이 昇遐하자, 殮이 宋氏를 그리워하여 鄭氏를 내쫓고 宋氏와 다시 合하여 살았다.
처음에 軍部(君父)의 命令 때문에 宋氏를 버렸고,
鄭氏는 또한 버릴 만한 罪가 없는데도 사랑과 미움으로 내쫓고 받아들였으므로
當時의 議論들이 이것을 短點으로 삼았다.
諡號를 卿孝(敬孝)라 하였으니,
밤낮으로 警戒한 것을 警(敬)이라 하고, 道德을 지키고 어기지 아니하는 것을 孝(孝)라 한다.
側室(側室)에 아들 하나가 있다.


家族 關係 [ 編輯 ]

直系 祖上 [ 編輯 ]

  • 祖父 : 太宗 (太宗, 1367~1422)
  • 조某 : 원경왕후 閔氏(元敬王后 閔氏, 1365~1420)
    • 아버지  : 世宗 (世宗, 1397~1450)
  • 外祖父 : 晴天府院君(靑川府院君) 深穩 (沈溫, 1375~1418)
  • 外祖母 : 삼한국大夫人(三韓國大夫人) 순흥 安氏 (順興 安氏, ?~1444)
    • 어머니  : 소헌왕후 沈氏(昭憲王后 沈氏, 1395~1446)

夫人과 孫자녀 [ 編輯 ]

各州 [ 編輯 ]

  1. 世宗實錄 》 64卷, 世宗 16年(1434年 名 선덕(宣德) 9年) 4月 15日 (壬戌)
    王子가 誕生하니, 바로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이다.
  2. 世宗實錄 》 122卷, 世宗 30年(1448年 名 正統(正統) 13年) 12月 14日 (病人)
    "영응대군은 늦게 낳은 아들이라, 親히 길러서 매우 사랑하여 ···" (中略)
  3. 영응대군 神道碑
  4. 世宗實錄 》 108卷, 世宗 27年(1445年 名 正統(正統) 10年) 4月 21日 (甲子)
    永興大軍 이염이 行 通禮門 判官 송복원의 딸에게 장가들다
  5. 世宗實錄 》 124卷, 世宗 31年(1449年 名 正統(正統) 14年) 6月 26日 (甲戌)
    영응대군 이염이 죽은 府尹 정충경의 딸에게 장가들다
  6. 世祖實錄 》 1卷, 叢書
    世宗이 文宗과 世祖에게 儒敎를 傳하다
    庚午年(1450年) 正月에 世宗 文宗 (文宗)과 世祖 (世祖)를 불러 儒敎(遺敎)를 傳하니, 그 儒敎에,

    "나라를 가진 者는 滅亡을 隱諱(隱諱)하지 않으며, 삶을 가진 者는 죽음을 隱諱하지 않는다.

    내 이제 너희 두 사람에게 말하거니와,

    大抵 臣下들이란 임금이 죽는 그 날로 卽時 그 兄弟들의 허물을 攻擊하는 法이다.

    내가 죽는 날에는 너희 兄弟의 허물을 말하는 者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너희는 모름지기 내 말을 잊지 말고 恒常 親愛하는 마음을 간직한다면 사람들이 능히 離間질하지 못할 것이다.

    萬若 不得已 하게, 비록 罪를 주더라도 再三(再三) 생각하고 그 人情과 道理를 익히 헤아려서 속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 옳을 것이다.

    내가 처음 卽位하였을 때, 효령대군 (孝寧大君) 等을 攻擊하는 者가 많았는데, 내가 아니었다면 능히 保全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응대군(永膺大君)이 恒常 내 곁에서 밥을 먹었는데, 이는 그 所重함이 飮食먹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때 世宗의 病이 오랫동안 持續되어 每事를 반드시 世祖에게 命하였기 때문에 恒常 對內(大內)에 있었는데, 世祖가 5日間을 飮食을 먹지 않다가 世宗이 回復됨을 보고서야 비로소 飮食을 먹었다.

  7. 世宗實錄 》 127卷, 世宗 32年(1450年 名 경태(景泰) 1年) 2月 17日 (壬辰)
    賃金이 영응대군 집 桐別宮에서 훙하다
  8. 端宗實錄 》 9卷, 端宗 1年(1453年 名 경태(景泰) 4年) 11月 28日 (競進)
    李朝에 電池하여 春城 夫婦인 鄭氏에게 封爵한 辭令狀을 거두게 하다
    처음에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李 上護軍(上護軍) 송복원(宋復元)의 딸( 대방夫婦인 宋氏 )에게 장가들어 夫人을 삼았었는데, 夫人이 病이 있게 되자, 世宗 이 이를 廢하고 다시 參判(參判) 정충경(鄭忠敬)의 딸에게 장가를 들였다.

    그러나 영응대군 念은 宋氏를 잊지 못하여 宋氏와 潛通(潛通)하고 두 딸을 낳았기 때문에, 鄭氏를 廢黜하고 宋氏를 다시 봉하여 夫人(夫人)으로 삼았다.

  9. 世祖實錄 》 41卷, 世祖 13年(1467年 名 聖火(成化) 3年) 2月 2日 (戊戌)
    영응대군 이염의 졸기
  10. 世祖實錄 》 41卷, 世祖 13年(1467年 名 聖火(成化) 3年) 2月 5日 (新築)
    賃金이 靈應大軍의 죽음으로 인해 飮食을 廢하다
    賃金이 영응대군 이염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飮食을 廢하였으므로, 政府(政府)와 宗親(宗親) · 勳戚(勳戚)의 代身(大臣)들이 여러 番 飮食을 들기를 請하였으나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