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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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윤 (朴錫胤, 1898年 10月 26日 ~ 1950年 10月 20日 )은 日帝强占期 의 言論人 兼 工作員이자 滿洲國 官僚로, 滿洲 에서 活動했던 日本 帝國 의 情報, 諜報工作 組織인 民生團 을 組織한 것으로 有名하다. 최남선 의 妹夫였다.

解放 直後에는 總督府에 勤務 中이던 學校 後輩 최하영 等의 推薦과 朝鮮總督府 엔도 류사쿠 政務總監의 付託으로, 9月 2日 美 軍政 駐屯 때까지 治安 混亂을 收拾하는 役割을 맡았다.

生涯 [ 編輯 ]

全羅南道 潭陽 出身이며 本籍地는 京城府 鍾路이다. 최남선 의 女同生인 최설경과 結婚했다. 朝鮮總督府 와 密着하여 獨立 運動家들에게 轉向 工作을 벌이는 일로 日帝에 賦役하기 始作했다. 3·1 運動 直後 김준연 轉向을 꾀했다가 失敗했으며, 以後 朝鮮總督府의 後援으로 도쿄 帝國大學 을 卒業하고 英國 케임브리지 大學校 에 留學했다. 歸國 後 《 時代日報 》 政治部長과 《 每日申報 》 副社長을 지내며, 言論을 통해 朝鮮總督府에 積極 協力했다.

日帝의 滿洲 侵略 以後 朝鮮人과 中國人들이 自然스럽게 抗日 聯合 戰線을 形成하는 形局이 되자, 朝鮮人과 中國人을 離間하며 獨立 運動을 妨害하기 위한 密偵 組織 民生團 創團의 必要性이 擡頭되었다. 박석윤은 1932年 2月 5日 , 동민회 조병상 을 비롯하여 김동한 等 親日 人物들을 끌어들이고, 天道敎 人士들까지 糾合하여 肝도 에서 民生團을 創團했다. 團長은 軍人 出身의 박두영 이 맡았다. 이 組織은 結局 中國 共産黨 의 誤判을 불러와 民生團 事件 으로 朝鮮人 獨立 運動家 數百餘 名이 殺傷당하는 事態를 가져왔다.

박석윤은 民生團의 後身인 間島協調會 에도 參加하여 密偵 組織을 管理했으며, 管制 組織인 滿洲國 協和回 에 加擔하여 宣撫 工作을 指導했다. 滿洲國 이 樹立되자 滿洲國 外交部의 公務院으로 任命되어 海外에서 外交的인 獨立 運動을 벌이는 李承晩 等의 動靜을 日帝에 報告하는 等의 密偵 活動을 繼續했다. 이렇게 쌓은 功을 認定받아 滿洲國의 폴란드 바르샤바 駐在 總領事職까지 맡게 되었다. 1939年 아돌프 히틀러 總統이 이끌던 나치 獨逸 이 폴란드를 侵攻 하게 되자 박석윤은 滿洲國으로 歸國했다. 間島協調會에서 武裝 抗爭을 벌이는 獨立 運動家들을 相對로 한 歸順 工作에 從事했다.

1940年 滿洲國 政府로부터 勳4位 경운장(景雲章)을 받았으며, 1941年 滿洲國 國務院 總務廳 參事官 兼 外務國 參事官, 1942年 滿洲國 國務院 總務廳 外交部 參事官 等을 歷任했다. 1940年 東南地球特別工作後援會 總務를 歷任하는 동안 日帝의 抗日 武裝 勢力 彈壓과 歸順 工作에 積極 加擔했고, 1942年 滿洲國協和回 中央本部 委員을 지냈다. 光復 直後에는 朝鮮總督府 가 行政權을 여운형 에게 引受하도록 하였을 때, 呂運亨의 代理人으로서 朝鮮總督府와 交涉하는 役割을 맡았다.

1945年 8月 10日 日本 敗戰 消息이 傳達되자 京城 朝鮮總督府 는 唐慌했고 政務總監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는 8月11日 아침 總督府 農林國 官房農商課長 최하영(崔夏永)을 불러 治安權 引受 適任者를 推薦해달라 要請했다. 최하영 은 박석윤을 推薦했고, 1945年 8月 16日 부터 9月 2日 美軍政 駐屯時까지 總督府 警務局長과 함께 治安을 擔當하였다. 그러나 美軍의 介入으로 建準에 治安權 引受는 다시 取消되었고, 그는 니시히로 다다오 (西廣忠雄)를 補助하는 役割로 轉落하였다.

1946年 3月 平安南道 平壤 에 到着한 뒤 持病인 高血壓 動脈硬化 를 治療하기 위해 陽德溫泉으로 療養을 갔다고 傳해진다. 1946年 7月 平安南道 陽德郡 에서 '親日分子' 嫌疑로 逮捕되었으며 3日 동안 陽德保安所에 拘留되었다가 病保釋으로 釋放되었다. 1947年 2月 24日 平壤 人民敎化所에 拘留된 뒤 檢察소의 審問을 받았고 같은 해 4月 19日 最高裁判所에 起訴되었다.

1948年 1月 22日 平安南道裁判所에서 '親日反逆者' 嫌疑로 死刑을 宣告받았다. 박석윤은 1948年 3月 6日 1審 判決에 不服하여 最高裁判所에 上疏했지만 棄却되었고 1948年 6月 9日 死刑이 確定되었다. 平壤 刑務所에 投獄되었다가 1950年 10月 19日 大韓民國 國軍 平壤 에 入城하자, 朝鮮人民軍 에 依해 처형당했다.

事後 [ 編輯 ]

2002年 民族正氣를 세우는 國會議員모임 이 選定한 親日派 708人 名單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整理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 모두 包含되었다.

金日成 의 回顧錄 《 世紀와 더불어 》에는 박석윤의 履歷이 詳細히 실려 있으며, 그의 最後와 關聯하여 "(光復 後 身分을 감추고) 숨어살다가 摘發되어 民族反逆者로서 峻嚴한 審判을 받았다"고 밝혔다. [1]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金日成 (1992). 〈第1部 抗日革命便, 第10張 自主의 信念을 안고 - 1. 사나운 회오리〉. 《世紀와 더불어》. 平壤: 조선로동당出版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