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1946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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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金南柱
作家 情報
出生 1946年 10月 16日
美 軍政 朝鮮 全羅南道 海南郡 삼산면 봉학리
死亡 1994年 2月 13日 ( 1994-02-13 ) (47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國籍 大韓民國
言語 韓國語
職業 是認 , 作家 , 社會運動家
學歷 전남대학교 英語英文學科 中退
活動期間 1969年 ~ 1994年
장르 詩文學 , 小說 , 飜譯
受賞 申東曄創作基金 , 단재상 ,
윤상원賞 , 民族藝術賞
父母 김봉수(簿), 문일님(某)
配偶者 박광숙
子女 김토일(아들)
웹사이트 김남주 作家 팬 카페

김남주 (金南柱, 1946年 10月 16日 ~ 1994年 2月 13日 )는 大韓民國 의 詩人, 市民· 社會 運動家 이다. 維新을 反對하는 言論인 「喊聲」(뒤에 「告發」 로 改稱)을 發刊하였고 인혁당 事件 , 남민전 事件 으로 投獄되었으며, 民靑學聯 事件 의 關聯者로 指目되어 苦楚를 겪었다. 1980年 남민전 事件 組織員으로 懲役 15年을 宣告받고 收監되었다가 1988年 刑 執行 停止로 釋放되었고, 1993年 2月 文民 政府 出帆 以後 大統領의 特別 指示로 赦免 復權되었다.

그는 '詩人'이 아닌 '전사'라고 自稱하기도 했다. [1]

生涯 [ 編輯 ]

學歷 [ 編輯 ]

學生運動 時節 [ 編輯 ]

김남주는 全羅南道 海南郡 삼산면 봉학리에서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문일님의 次男으로 태어났다.

海南中學校를 卒業하고 光州제일고등학교 에 入學했으나 入試 爲主의 劃一的인 敎育 政策을 批判하고 反撥하여 高等學校 2學年 때 自退했다. 1969年 檢定考試에 合格하고 그 해 전남대학교 英語英文學科에서 修學했다. 전남대 在學 時節에 3選改憲 維新憲法 을 反對하는 學生 運動을 積極으로 主導하기 始作하였다. 1972年 10月 初 維新 憲法이 宣布되자 그는 以降과 함께 大韓民國 最初로 維新을 反對하는 新聞인 「喊聲」을 發刊하였다. 以後 어렵게 「喊聲」을 運營하다가 1973年 에 題號를 「告發」로 改稱하여 發刊하였다. 그 해 「告發」을 全國에 配布하려다가 警察의 不審檢問에 걸려 反共法 違反 嫌疑로 拘束되었다.

1973年 國家保安法 嫌疑로 服役하고 전남대학교 에서 제적당했다. 8個月間 服役한 後 海南으로 歸鄕해 農事일을 하였다. 1974年 〈鎭魂歌〉와 〈잿더미〉를 爲始해 時 7篇을 《 창작과비평 》 여름號에 發表하여 文學 活動을 始作하였다. 이런 文學 活動 以外에도 全南과 光州에서 民主化 運動을 活潑히 主導하였다.

社會運動 [ 編輯 ]

1975年 '緊急措置 9號'가 宣布되자, 그는 '詩'와 '돌멩이를 든 데모대'로는 大韓民國 社會 支配階級의 壁을 깰 수 없다고 判斷하고 '鐵의 組織'을 結成하기로 計劃 [1] , 光州 에서 社會과학책을 專門으로 파는 書店인 카프카를 열었으나 經營難으로 1年만에 門을 닫았다. [1]

1977年 海南에서 韓國基督敎農民會의 母體가 된 海南農民會議 組織하여 結成에 參與하였다. 그 뒤 같은 해, 光州 로 가서 황석영 과 함께 民衆文化硏究所를 열고 活動하다가 思想性 問題로 手配받았다.

1978年 手配를 避해 上京하여 南朝鮮民族解放戰線準備委員會 에 加入하였다. [1]

1978年 在野 活動 同志인 박광숙과 婚姻하였다.

投獄과 文學 活動 [ 編輯 ]

1980年 남민전 事件 으로 懲役 15年을 다시 宣告받고 服役하던 中 1984年 첫 詩集인 《鎭魂歌》를 出刊하였다. 1984年 收監 中 發刊된 첫 詩集 《鎭魂歌》는 그가 監獄에 있을 때 牛乳팩에 날카롭게 간 齒솔대로 눌러 써서 지은 詩와 散文을 面會客들을 利用해 監獄 밖으로 몰래 내보낸 것들이었다.

數年에 걸친 文人들의 救命 運動과 서울 올림픽 을 앞두고 世界 곳곳의 文人들이 그의 釋放을 促求하는 決議文과 書翰을 政府에 發送하였으나 全斗煥 政府는 拒否했다. 1987年 6月 抗爭 다음 해 노태우 政府 出帆 以後 1988年 12月, 刑 執行 停止를 處分받고 9年 3個月 만에 釋放되었다. 民族文學作家會議 의 常任 理事를 맡으면서 活潑한 文學 活動과 社會 參與 活動을 竝行하였다. 創作 以外에도 프란츠 파농 , 파블로 네루다 等의 外國의 社會 發展과 變化를 追求하는 文學을 飜譯해 紹介하기도 하였다.

그는 獄中에서도 詩와 隨筆을 繼續 썼으며, 便紙와 書信을 보내 靑年 運動家들을 督勵하였다. 김남주는 獄中 書信에서 日本語 를 배워서 社會科學 書籍을 많이 읽을 것을 勸하기도 했다. [2]

그는 戰士 詩人, 革命 詩人 [2] 으로도 알려졌는데 그가 '詩人'이 아닌 '전사 [1] '라고 自稱하였다.

釋放과 他界 [ 編輯 ]

1989年 그는 10年 넘게 自身의 獄바라지를 한 남민전 同志 박광숙과 正式으로 結婚式을 올렸다. 1990年 民族文學作家會議 民族文學硏究所腸이 되었으나 1992年 膵臟癌 으로 健康이 惡化하여 辭退하였다.

1993年 2月 軍事獨裁 政權이 崩壞되고 金永三 大統領의 文民 政府 出帆 直後 大統領 金永三 의 特別 指示로 赦免되어 復權되었다. 그러나 收監에 따른 後遺症과 過勞로 말미암아 健康이 惡化되어 1994年 初 光化門 隣近의 한 病院에 入院하였고, 結局 그해 2月 13日 膵臟癌을 이겨 내지 못하고 別世했다. 事後 光州 北區 망월동 5.18 墓域에 安葬되었다.

事後 [ 編輯 ]

2000年 그의 詩에 曲을 붙인 안치환 의 憲政 앨범 《Remember》가 發賣되었다. 같은 해 5月 光州 中外公園에 〈노래〉가 새겨진 是非가 除幕되었다.

2006年 行政府에서 民主化運動 關聯者로 認定받았다.

作品性 [ 編輯 ]

그의 詩는 强烈과 戰鬪하는 듯한 이미지가 主潮를 이루며, 悠長하면서도 强烈한 呼吸으로 反外勢와 分斷 克服, 光州民主化運動과 勞動 問題를 爲始한 現實에 있는 矛盾을 叱咤하고 참다운 길을 積極으로 摸索하였다. [1]

是認 略歷 [ 編輯 ]

1974年 창작과비평 》에 〈잿더미〉를 爲始해 時 7篇을 發表하며 文壇에 나왔다. 1991年 第9回 「 申東曄創作基金 」, 1992年 第6回 「단재상」文學部門上, 1993年 第3回 「윤상원賞」, 1994年 第4回 「民族藝術賞」을 受賞했다.

著書와 曆書 [ 編輯 ]

詩集 [ 編輯 ]

  • 《鎭魂歌》(廳舍, 1984)
  • 《나의 칼 나의 피》(忍冬, 1987)
  • 《曺國은 하나다》(남풍, 1988)
  • 《率直히 말하자》(풀빛, 1989)
  • 《思想의 居處》(창작과비평사, 1991)
  • 《이 좋은 世上에》(한길사, 1992)
  •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작과비평사, 1995) ISBN

詩選集 [ 編輯 ]

  • 《虐殺》(한마당, 1988)
  • 《사랑의 武器》(창작과비평사, 1989)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미래사, 1991)
  • 《꽃 속에 피가 흐른다》(창비, 2004) ISBN   9788936461140 - 2008年 國防部 指定 不穩書籍

飜譯書 [ 編輯 ]

  • 프란츠 파농《自己의 땅에서 유배당한 者들》(廳舍, 1978)
  • 하이네·브레히트·네루다《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남풍, 1988)
  • 하이네《아타 트롤》(창작과비평사, 1991)

미디어 [ 編輯 ]

1999年 4月 1日에 放送된 《 이것이 人生이다 》에서 차광수 氏 役割의 主人公이다.

家族 [ 編輯 ]

遺族으로 남민전 同志인 夫人 박광숙과 아들 土日 軍이 있다.

各州 [ 編輯 ]

  1. 김남주:Daum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新女性의 明暗, 히라쓰카 라이初 한겨레 21 2006年 第592號

같이 보기 [ 編輯 ]

關聯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