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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年 臥薪嘗膽은 鍛鍊의 時間”… 弱者 同行 외치는 ‘勝負師 吳世勳’[황형준의 法廷冒瀆]|東亞日報

“10年 臥薪嘗膽은 鍛鍊의 時間”… 弱者 同行 외치는 ‘勝負師 吳世勳’[황형준의 法廷冒瀆]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7月 13日 14時 00分


코멘트
서울시 제공
서울市 提供


2019年 노벨 文學賞을 受賞한 劇作家 페터 한트케의 戱曲 ‘觀客冒瀆’. 十數 年 前에 본 이 演劇을 떠올린 건 讀者들과 疏通하는 方法 때문입니다. 神聖한 觀客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演劇의 旣存 文法과 秩序에 抵抗했든, 虛僞를 깨려 했든 冒瀆(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現在 法曹팀長을 맡고 있는 筆者는 政治部와 社會部에서 10年 넘게 國會와 靑瓦臺, 法院·檢察, 警察 等을 取材했습니다. 이 코너의 門牌에는 法曹界(法)와 政治權(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脈絡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意味를 담았습니다. 가끔 冒瀆度 하겠습니다.
本格的으로 工夫한 지 3年 만에 司法試驗을 通過했다. 環境 專門 辯護士에서 TV 放送 進行者로, 國會議員으로 變身한 뒤 45歲 最年少 서울市長이라는 記錄을 達成했다. 30, 40代에 一種의 퀀텀 점프를 한 것이었다. 훤칠한 키에 貴公子 같은, 好感 가는 外貌로 特히 女心을 사로잡았다. 出世 街道를 달리며 萬人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成功한 人生’이었다.

吳世勳 서울市長(以下 吳世勳)의 政治 人生만 놓고 보면 2000年부터 2010年까지 ‘前半戰’엔 乘勝長驅했다. 그러나 ‘後半戰’이 始作된 2011年부터 2021年까진 挫折이 이어졌다. 겨울은 길었다. 한 番 KO敗 해도 打擊이 큰 데 세 番의 選擧에서 떨어졌다. 서울 鍾路, 서울 廣津乙 國會議員 選擧와 黨 代表 選擧에서 잇따라 敗北한 것이다. 周邊에 이른바 ‘側近’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始作했다. 그도 한番쯤은 花鬪 用語인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말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래도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남들은 안 될 거라고 했지만 2021年 10年 만에 다시 서울市長 補闕選擧에 挑戰해 3線 서울市長이 됐고 이듬해 地方選擧에서 4線 서울市長이 됐다.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政治 空白 10年 동안 臥薪嘗膽(臥薪嘗膽)하며 再跳躍을 위해 工夫했고 反省했고 스스로를 鍛鍊했다. 그 10年이 決코 ‘잃어버린 10年’이 아니었다. 自身을 담금질하는 時間이었다.

“제 政治的인 運命에 對해서 어떤 確信 같은 게 있는 便이었다. 그래서 選擧에 떨어져도 그렇게 큰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이건 어느 目標를 向해 가는 過程이다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또 工夫했네’, ‘나를 다듬는, 나를 鍛鍊하는 訓鍊하는 期間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10年 동안 뭐가 第一 힘들었냐는 質問을 받으면 나는 한 番도 힘들었다고 答辯한 적이 없다. 나는 繼續 充滿한 生活을 했기 때문이다. 甚至於 鍾路 選擧에서 떨어지는 날, 廣津乙에서 떨어지는 날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取材 메모 中 -
그는 只今 延長戰을 뛰고 있다. 前半戰에서의 得點과 後半戰에서의 失點을 넘어 이제 延長戰에서 마지막 勝負를 기다리고 있다.

● “工夫해야 가난 이겨낼 수 있다” 敎育熱 높았던 어머니

1995년 당시 오세훈 시장 가족의 모습. 동아일보DB
1995年 當時 吳世勳 市長 家族의 모습. 東亞日報DB
吳世勳은 1961年 1月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中小建設會社를 다녔고 아버지 月給만으로 不足했기에 어머니는 方席과 베갯잇 等을 만드는 手藝店을 하셨다. 아버지 月給이 몇 달씩 遲滯돼서 며칠 라면이나 싸라기 밥만 먹으며 지낸 적도 있고 姨母님 宅에 돈 꾸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잡아준 택시에서 내려 걸어온 적도 있었다. 택시費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늘 “세훈아, 工夫해야 이 가난을 이긴다”고 强調했다. 어머니는 初等學校 4學年 때 先生님으로부터 “세훈이가 몸이 弱하니 特別히 神經을 쓰시라”는 말을 듣고 1年 내내 된醬찌개와 밥을 담은 錚盤을 褓따리에 싸서 學校까지 갖다줄 程度로 아들을 챙겼다. 어머니의 敎育熱 德分인지 그는 初等學校(當時 國民學校) 때부터 工夫를 잘했고 6年 내내 班長을 놓치지 않았다.

學窓 時節 그의 別名은 日本語로 젓가락인 ‘와리바시’, 키가 커서 冊床에 엎드려 잘 때 새우처럼 등이 굽어진다는 意味의 ‘잠새우’ 等이었다. 高校 時節 그의 키는 180cm에 55kg으로 마른 體軀였다.

1979年 한국외대에 入學했다가 2學年 때 고려대 法大에 編入學했다. 이 過程엔 當時 고려대 文科大를 다니고 있던 夫人 송현옥 세종대 映畫藝術學科 敎授의 影響이 컸다. 宋 敎授의 오빠인 송상호 경희대 經營大學院 敎授가 디스크로 學校를 1年 쉰 뒤 吳世勳과 같은 班이 되면서 세 사람은 高2 때 함께 課外를 하게 됐다. 課外는 今方 깨졌지만 두 사람은 高3 때 入試學院에서 다시 만났고 以後 고려대에서 有名 커플이 됐다. 吳世勳은 아내가 市場에서 국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이 程度라면 이 親舊와 結婚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가 考試 工夫를 하게 된 契機는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다니던 會社의 會長님은 어머니의 姨母夫였다. 選對 會長이 돌아가신 뒤 그에게 外五寸 堂叔이 되는 그 아들이 會長이 됐는데 大學生 때 집안 어른들끼리 對話를 나누는 것을 듣고 熱心히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考試 工夫를 始作했다고 한다.

“어느 날 집안의 어른들끼리 對話를 나누는 것을 듣던 中 아버님이 會社에서 손아래 동생뻘인 會長님께 깍듯하게 例를 갖추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只今 생각하면 當然할 것 같은 그 말이 當時에는 왜 그렇게도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絶對로 샐러리맨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는 考試 工夫를 始作했다.”
-오세훈, ‘가끔은 辯護士도 울고 싶다’, 1995年-
그는 考試生 時節에 하루 14時間 앉아 끈氣 있게 工夫를 했다. 大學院 1年 때 1次 試驗을 붙었고 2次 試驗은 같은 해 바로 붙었다. 時間 끌면 패스를 못 한다는 생각으로 熱心히 工夫했다. 1984年 第26回 司法試驗에 合格한 것.

오랫동안 앉아 있던 탓에 엉덩이에 난 腫氣가 甚해져 2時間 넘게 手術을 받기도 했고 只今도 흉터가 남게 됐다. 吳世勳은 司法試驗에 붙은 直後인 1985年 結婚했다.

硏修院을 卒業한 뒤 辯護士 生活을 하며 環境 分野에 눈을 떴다. 1993年 仁川 부평구의 한 아파트 住民들이 日照權 問題로 大企業과 訴訟을 準備한다고 찾아왔다. 日照權에 對한 判例가 없어 스스로 日本 等 海外 判例를 손수 飜譯해 裁判部에 提出했다. 結局 裁判部는 大企業에 賠償金을 支給하라고 判決했고 이 事件은 大韓民國 最初로 憲法上 日照權을 環境權으로 認定받은 判例가 됐다. 이 過程에서 環境運動聯合(當時 公害追放運動聯合)을 알게 됐고 市民相談室長과 法律委員長 兼 常任執行委員을 지내며 環境辯護士로 活躍했다.

“環境運動聯合을 갔는데 衝擊을 받았다. 나는 初任 辯護士라도 먹고살 만했는데 環境運動聯合의 젊은 活動家들이라는 게 大部分 20代인데, 그때 會社員들이 받는 月給의 한 半이나 3分의 1을 活動費라는 名目으로 받고 事實上 自願奉仕를 했다. 그런 市民團體 活動을 報告書 ‘이 사람들이 이렇게 自己 젊은 時節을 犧牲하면서 熱情的으로 하는구나’ 感動을 해서 그 사람들을 돕기 始作한 것이다. 하다 보니 運動家들과 親해지게 되고 熱心히 돕다 보니 여러 職責을 맡게 됐다.”
- 取材 메모 中 -


● TV 프로그램 進行者로 人氣 누리다 政治權 進出
2002년 3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와 오세훈 시장. 동아일보DB
2002年 3月 이회창 當時 한나라당 總裁와 吳世勳 市長. 東亞日報DB
그는 以後 MBC의 法律相談 프로그램인 ‘吳辯護士, 배辯護士’를 進行하면서 人氣를 누렸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等 各種 時事 프로그램의 進行도 맡았다. 正裝 等 TV 廣告모델이 돼 달라는 要請도 들어왔다.

認知度가 높아지자 政治權에서 ‘콜’을 받았다. 그도 “社會에 寄與하기 위해 現實政治에 參與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當時 김대중 大統領의 迎入 提案도 받았지만 그는 이회창 總裁의 提案을 受容해 한나라당에 入黨하며 保守 政治의 길을 選擇했다. 基本的으로 國家는 人間의 自律과 動機附與를 重視하는 政策 原理로 運營돼야 한다는 信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定義하는 保守는 이렇다.

“報酬는 ‘물’ 같은 것이다. 每日 아침 일어나 마시는 물 한 盞에 특별한 感興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保守는 겉보기에 대단한 理念이나 以上이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속을 仔細히 들여다보면 個人의 挑戰과 國家의 發展을 可能하게 한 根本理念인 自由와 競爭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中略) 保守 右派는 歷史의 底流임과 同時에 現實이다. 재미없고 지루하지만 失手가 적어 施行錯誤를 最少化할 수 있고 實用的이다.”
- 吳世勳, ‘未來’, 2019年 -
反面 進步는 톡 쏘는 시원함과 淸凉感이 있는 ‘사이다’였다. 變化와 革新을 追求하기에 가슴 뛰고 재미있고 興味津津하다. 그러나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失手가 잦고 挫折과 誤謬가 頻繁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2000年 16代 總選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入黨한 그는 서울 江南乙 地域區에서 當選됐다. 黨 副代辯人, 靑年委員長, 이회창 大選 候補의 祕書室 副室長을 맡는 等 黨 初選으로서 比重 있는 役割을 했다. 自身의 關心 및 專門 分野인 國會 環境勞動委員會에서 活動했다.

● 少壯派로 活動하며 不出馬 宣言… 政治改革法案人 ‘吳世勳法’ 主導
2004년 1월 오세훈 시장이 불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04年 1月 吳世勳 市場이 不出馬를 宣言하고 있다. 東亞日報DB
國會議員이 됐지만 그는 至毒한 마음苦生을 했다. 힘없는 政治 初年生에게 隨時로 주어지는 役割이 ‘小銃手’ 驛이기 때문이다. 그는 相對 黨 所屬 國會 副議長의 날치기 法案 通過를 막기 위해 自宅 앞에 動員됐을 때 限없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中學校 2學年이던 둘째 딸이 先生님으로부터 “政治人은 모두 쓸어서 韓江에 처넣어야 할 族屬들”이라는 말을 듣고 제 房에 와서 틀어박혀 울었던 일도 있었다. 딸이 아빠를 猖披해한다는 게 그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以後 그는 마음을 다시 먹었다.

“詩人 폴 발레리가 말했던 것처럼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切迫함이 내게 또 다른 勇氣를 불러일으켰다. 當時 나를 支配하던 가장 큰 생각은, 1人 보스를 中心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牌거리 政治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1人 보스 中心의 政治가 地域主義의 深化를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또 그 集團을 維持하기 위한 莫大한 資金 所要가 政治 腐敗를 낳는 原因이 되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先決課題는 政治資金 시스템의 革命的 變化라는 確信이 섰다.”
- 吳世勳, ‘시프트 : 생각의 프레임을 轉換하라’, 2009年 中 -
이에 吳世勳은 黨內 整風運動에 앞장섰다. 2003年 少壯派였던 南景弼 원희룡 議員 等이 함께한 ‘未來連帶’ 代表를 맡아 ‘5, 6共 勢力 勇退論’을 主張했다.

以後 2004年 1月 그는 부끄러움과 政治改革 外侵에 對한 責任을 擧論하며 總選 不出馬를 宣言했다. 黨 改革을 외쳐도 空虛한 메아리에 그치는 데 挫折했던 그가 “내가 던져야겠구나”라는 생각에 劇藥處方을 한 것이었다.

“지난 4年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먼저 政治 現實에 精通하지 못하면서 政治를 바꿔보겠다고 덤벼든 無謀함이 부끄럽고, 잘못된 길을 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默認한 武力함이 부끄럽고, 默認을 넘어서서 어느 사이 同化되어 간 無感覺함이 부끄럽고, 未熟한 自己 確信을 眞理인 양 錯覺한 無知함이 부끄럽고, 世界觀이 다르다는 理由로 內心 無視하고 排斥한 偏狹함이 부끄러우며, 그리고 이렇게 부끄러운 自身의 입으로 歷史에 功過가 있음을 애써 無視하고 先輩들께 敢히 勇退를 要求한 그 勇敢함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흔들리는 나라를 살리려면 政治를 바로 세워야 하고, 政治를 바꾸려면 多數黨인 한나라당이 바뀌어야 하고, 한나라당을 바꾸려면 사람을 바꾸어야 한다는 躁急症 때문이었음을 理解하여 주십시오.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제 自身이 그에 對한 責任을 져야 할 것이며, 조그마한 旣得權이라도 이를 버리는 데에서 政治改革이 始作된다고 主張했던 대로 이제 實行하려 합니다. 그러한 苦悶의 産物이 지난番 地區黨委員長職 辭退에 이은 이番 不出馬이며, 이것이 政治權의 새로운 變化를 바라는 國民의 期待를 충족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 2004年 1月 吳世勳의 不出馬 宣言文 中 -
‘不出馬 勝負手’는 오히려 轉禍爲福이 됐다. 吳世勳의 支持者 2萬餘 名은 인터넷을 통해 ‘吳世勳을 사랑하는 모임’을 結成해 ‘午風(吳風)을 일으키자’는 캠페인까지 벌이기 始作했다.

또 그는 政治改革特別委員會 政治資金法小委員長을 맡아 企業의 政治資金 寄附 禁止, 國會議員 1年 後援金 1億5000萬 원(選擧가 있는 해는 3億 원) 制限, 地區黨 廢止 等 法 改正을 主導했다. 2002年 大選을 앞두고 與野가 數百億 원의 大選資金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非難 輿論이 거세게 일었던 德分이다. 그의 政治改革法案은 그대로 反映이 됐고 나중에 一名 ‘吳世勳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國民들에게 그의 이름을 刻印시킨 첫 番째 瞬間이었다.

以後 그는 다시 辯護士로 돌아갔다. 같은 해 6月 江原 속초시에서 열린 2004설악國際트라이애슬론大會(鐵人3種競技)에 出戰해 이를 完走하며 剛한 體力과 精神力을 誇示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2004년 6월 28일 자 지면.
東亞日報 2004年 6月 28日 자 지면.
休止期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6年 地方選擧에서 서울市長 候補로 나서며 다시 政治權으로 돌아온 것이다. 競選 過程에서 그는 홍준표 맹형규 等 候補와 競爭했지만 壓倒的인 差異로 勝利했다. 洪準杓 大邱市長은 當時 그를 向해 “黨이 어려울 때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혼자 이미지만 가꾸고 다녔다”고 批判하기도 했다.

黨 候補로 選出된 그의 選擧캠프는 過去 選擧캠프와 달리 壁(파티션), 돈, 종이컵 等이 없는 3無(無) 캠프로 注目을 받았다. 캠프 部署 間 境界를 허물어 疏通하고, 政治改革을 앞세운 그의 깨끗한 이미지를 위해 選擧費用을 줄이고, 環境保護를 위해 종이컵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結局 열린우리당 강금실 候補 等과 붙어 勝利했고 最年少 民選 서울市長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 디자인에, 福祉에, 環境에 ‘미친’ 市長님
吳世勳은 市場으로서 신명 나게 일했다. 디자인, 環境, 福祉에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10年 世界 디자인 首都에 選定되며 서울을 ‘디자인 中心都市’로 만들며 브랜드를 업그레이드했다. 서울市廳 廳舍 新築을 果敢히 推進했고 露店商 等을 說得해 동대문야구장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變身시켰다. 盤浦大橋 隣近 세빛섬과 頒布 分數 等 漢江 造景도 바꾸며 行政家로서의 面貌를 보여줬다.

特히 그는 人生의 轉換 機會를 주는 것이 眞正한 福祉라는 생각에서 ‘露宿人 希望의 人文學 코스’를 만들었다.

“十 年 前에 人文學 講義로 人生 바뀐 사람이 많다. 얼마 前에 警備員 하시는 분을 만났는데 10年 前에 그 希望의 人文學 코스를 2年을 들었다더라. 그래서 人生이 달라졌다고 했다. 露宿人들이 重要한 건 알코올中毒 때문에 안 바뀌는 境遇가 많은데 그런 敎育을 받음으로써 알코올中毒을 벗어날 수 있는 意志가 생긴다.”
- 取材 메모 中 -
이와 함께 그는 創意行政과 女性이 幸福한 都市 프로젝트인 一名 ‘旅行(女幸) 프로젝트’를 導入해 ‘UN 公共行政上’을 2回 連續 受賞했다. 直接 市民인 척 民願室에 電話를 걸어본 뒤 느낀 不便함을 解消하기 위해 ‘茶山 120콜센터’로 行政 問議 案內를 統合한 서비스를 정착시켰다. 長期傳貰住宅인 ‘시프트’도 정착시켰다.

吳世勳의 業務 스타일에 對한 前職 서울市 公務員의 이야기다.

“꼼꼼하게 直接 챙기고 每日 아침 會議를 통해서 點檢하고 또 問題가 있으면 바로바로 解決하려고 한다. 報告를 하면 바로 피드백을 주고 狀況 把握과 業務 掌握力, 問題 解決 能力이 뛰어났다. 業務 理解度가 높고 시스템을 掌握하고 있으니 公務員들은 늘 勞心焦思하고 坐不安席이다. ‘無寬容’, ‘盧 머시(no mercy)’ 스타일이어서 매몰차게 面前에서 斷罪하는 스타일”
- 取材 메모 中 -
2010年 再選에서 成功했지만 2011年 危機가 찾아왔다. 當時 與野는 段階的 無償給食이냐 全面的 無償給食이냐를 놓고 尖銳하게 對立했는데 오세훈이 住民投票로 이를 決定하자고 提案한 것이다. 그해 8月 及其也 吳世勳은 政治的 生命을 걸고 投票率이 33.3%에 未達하면 市長職을 辭退하겠다는 意思까지 公式 發表했다. 突破를 위한 勝負手였지만 結局 自充手로 돌아왔다. 投票率은 25.7%에 그쳤고 그는 結局 市長職에서 물러났다.

● 英國·中國 硏修, KOICA 諮問團 等으로 活動하며 10年 臥薪嘗膽
오세훈 시장이 2011년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에 시장직을 걸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뒤 무릎을 꿇고 읍소하고 있다. 동아일보DB
吳世勳 市長이 2011年 8月 無償給食 住民投票 結果에 市長職을 걸겠다는 勝負手를 던진 뒤 무릎을 꿇고 泣訴하고 있다. 東亞日報DB
이때부터 吳世勳은 酷毒한 後半戰에 突入한다. 市長職을 건 決定은 黨 指導部의 同意 없이 進行해 黨內에선 保守 陣營의 潰滅을 自招했다는 責任論이 提起됐다. 그해 10月 치러진 補闕選擧에선 서울市長 자리를 朴元淳 市長에게 내줬다.

그는 이듬해 5月 英國 킹스칼리지 公共政策大學院 硏究員 資格으로 留學길에 올라 福祉政策에 對해 工夫하고, 中國 상하이(上海)로 넘어가선 語學 工夫를 했다. 2012年 12月 大選 直前 歸國했지만 좀처럼 言論에 登場하지 않았다. 一種의 自肅의 時間을 보낸 것이다.

漢陽大 公共政策大學院 特任敎授와 法務法人 大陸亞主義 顧問辯護士 等을 지내던 그는 2013年 12月부터 2015年 1月까지 韓國國際協力團(KOICA) 中·短期 諮問團의 一員으로 中南美 페루에서 6個月,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6個月을 보냈다.

修道僧같이 지내던 외로운 時間이었다. 그는 每日 혼자 밥을 해 먹었다. 每日 視聽에 出勤해 배울 게 있으면 배우고 助言할 게 있으면 助言을 했다.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아프리카 等 現地에 있다고 率直하게 얘기를 못 했다. 懶怠해지지 않기 위해 골프場은 勿論 술집 한 番 가지 않았다. 日記를 쓰며 現地에서 느낀 걸 冊으로 出刊했다. 自身과 마주하는 時間이었다. 르완다에서는 아이들이 맨발로 다니다 거머리에게 물려 結局 발목을 자르는 事例를 보고 신발 普及 活動도 펼쳤다.

오세훈이 事實上 政界에 復歸한 건 2016年 20代 總選이다. 總選을 앞두고 黨 指導部로부터 險地 出馬 要請을 받았지만 그는 서울 鍾路 出馬를 固執했다. 鍾路 地域區에서 3選을 했던 朴振 現 外交部 長官과 競選 끝에 本選에 進出했지만 민주당 所屬 정세균 前 國務總理에게 敗北했다. ‘政治 1番地’에서 當選된 뒤 大選 候補로 浮上하려는 ‘華麗한 復歸’는 失敗로 끝났다.

以後 2019年 黨 代表 選擧에서 黃敎安 前 代表에게 敗北했고 2020年 21代 總選에서 서울 廣津乙에 出馬했다가 高旼廷 議員에게 苦杯를 마셨다.

2021年 서울市長 補闕選擧에 出馬할 무렵엔 그의 周邊에 사람이 없었다. 캠프 代辯人을 시킬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廣津乙 選擧에서 떨어지자 ‘再起 不能’에 가까워졌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도 밉거나 섭섭하지 않았고 理解가 됐다고 한다.

그는 2021年 再·補闕 選擧 初盤 史上 初有의 ‘條件附 不出馬’를 宣言했다. 안철수 議員이 國民의힘에 入黨하면 市場에 出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는데 當時 政治權에선 奇異한 行步라는 批判이 나왔다. 無償給食 住民投票 自進 辭退와 겹치면서 當時 與圈 안팎에선 “吳世勳度 이제 政治生命 끝난 것 같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難關 끝에 그는 이를 突破했고 當選됐다. 後半戰 10年이 그를 가장 서글프게 한 건 달라진 世上의 人心을 보는 것이었다.

“2021年 選擧에서 4位로 出發했을 때 나는 속으로 當選된다는 確信이 있는데 世上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競選에서 羅卿瑗 候補를 이기고 나니까 그때는 이제 일할 사람들이 캠프에 찾아오기 始作했다. 안철수 議員과 單一化에 成功하니까 이제 正말 못보던 사람들까지 全部 캠프에 와 가지고 ‘자리를 달라’고 亂離 치고 싸우기 始作했다. 그 10年은 宏壯히 큰 人生 工夫가 됐다.”
- 取材 메모 中 -


● 서울市長 5善이냐, 大選 挑戰이냐…오세훈의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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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吳世勳은 10年 만에 다시 서울市長 자리로 돌아왔고 尹錫悅 政府가 出帆한 뒤 치러진 2022年 地方選擧에서 4線에 成功했다. 그는 ‘弱者와의 同行’이라는 是正哲學을 통해 安心所得, 安心住宅, 서울런(Learn) 等 福祉政策을 推進하고 있다. 漢江 首相버스 導入, 上巖洞 하늘公園 大觀覽車, 서울 高度 制限 緩和 等 다양한 政策도 推進 中이다.

그는 10年 동안 끊어진 서울市 政策을 보면서 無償給食 住民投票에 職을 건 것을 많이 後悔했다고 한다. 土建(土木建設) 爲主 政策을 反對했던 朴元淳 前 市長 時節 基盤施設에 對한 投資家 멈춰 있었고 自身의 在任 時節 推進했던 政策이 中斷됐기 때문이었다.

特히 最近 日本 도쿄를 다녀온 뒤 後悔를 많이 했다고 한다. 지난 10年 동안 日本은 도쿄 올림픽을 準備하면서 디자인과 基盤施設을 準備했고 綠地空間 等 都市計劃을 새로 하면서 市民들에게 아름답고 便利하게 空間이 再編된 反面 서울은 멈춰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서울 올림픽 誘致를 내세운 理由이기도 하다.

“내가 할 말을 잃었다. 이番에 眞짜 뼈저리게 내가 지난 10年 동안, 政治를 그만둔 때에도 勿論 瞬間瞬間 後悔하고 反省하고 할 때가 있었지만 이番만큼 내가 切實하게 쇼크를 받은 적이 없어요.”
- 取材 메모 中 -
自身이 推進했던 政策이 中斷된 것을 본 그는 2026年 市場 5線 挑戰과 2027年 大選 出馬에 對해 “只今 마음은 半半”이라고 했다. 自身이 推進하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市長職을 繼續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에서다.

大選 走者로서 그는 如前히 組織과 勢力이 弱하다거나, 이미지 政治를 한다거나 ‘선당후사’가 아닌 船社後唐의 政治를 하며 개인플레이를 해왔다는 批判을 받아 왔다. 旣成 政治人답지 않다는 意味도 담겨 있다. 過去의 吳世勳은 이런 批判을 內心 無視하며 ‘일만 잘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었다. 깨끗한 政治가 그의 슬로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酷寒期 10年을 보낸 只今의 吳世勳은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이런 批判을 受容하고 民心을 얻기 위해 努力하고 있다고 했다. 各各 成功과 失敗의 原因이 됐던 그의 勝負師的 氣質이 어떻게 發揮될지 지켜볼 일이다. 勝負處는 結局 서울施政의 成果物이 될 것이다.



吳世勳 市長의 核心 目標인 ‘弱者와의 同行’이 吳 市長의 ‘웰빙 辯護士’ 이미지와 庶民的이지 않은 느낌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指摘이 있다고 그에게 돌直球를 던졌습니다. 아마 吳 市長 삶의 軌跡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고 이를 稀釋시키기 위해 오히려 同行을 내세우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담긴 批判이지요.

그러자 그는 “政治人의 말이나 이미지를 보지 말고 行跡과 발자취를 봐달라”며 “10年 前에도 서울型 그물網 福祉를 推進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自身이 서울市長 初再選 時節부터 一貫되게 福祉에 焦點을 맞춘 다양한 政策을 推進해 왔다는 겁니다.

吳 市長의 冊들을 豫想보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서울市民人 저 自身도 吳 市長이 남긴 成果에 對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를 만나면서 率直담백하고 指導者로서의 所信과 一貫性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延長戰’에선 그의 哲學과 眞心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呼訴力있게 傳達되길, 멋진 勝負를 겨룰 수 있게 되기를 期待해 보겠습니다.

올 1月부터 連載하기 始作한 <황형준의 法廷冒瀆> 시리즈는 이番 25火로 끝을 맺습니다. 政治의 司法化와 司法의 政治化가 이뤄지고 있는 現實에 對한 苦悶도 있었고, 또 政治가 우리 삶에 얼마나 重要한지를, 그래서 政治를 嫌惡의 對象으로 置簿해선 안 된다는 생각과 그래서 各各 政治人들의 魅力을 알리고 應援하고 싶었던 筆者의 속마음이 담겼습니다. 그동안 愛讀과 應援해 주셔서 感謝합니다. ^^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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