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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年代 韓國 學生運動史에 큰 影響을 끼친 ‘光州의 아들’|東亞日報

1980年代 韓國 學生運動史에 큰 影響을 끼친 ‘光州의 아들’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5月 16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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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5·18民主化運動]
〈中〉 박관현 烈士의 ‘들불夜學’

박관현 열사(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박용안 씨(뒷줄 왼쪽) 등 전남대 사회조사연구회 동아리 회원들이 1979년 늦여름 전남 영암군 월출산으로 산행을 가 촬영한 사진이다. 박 열사는 사회조사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박용안 씨 제공
박관현 烈士(뒷줄 왼쪽에서 두 番째)와 박용안 氏(뒷줄 왼쪽) 等 전남대 社會調査硏究會 동아리 會員들이 1979年 늦여름 全南 靈巖郡 月出山으로 山行을 가 撮影한 寫眞이다. 朴 烈士는 社會調査硏究會 副會長으로 活動했다. 박용안 氏 提供
1978年 12月 21日 木曜日 밤. 光州 西區 광천동 市民아파트 周邊 鑛泉三火신협의 안쪽 房으로 大學生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박관현 烈士(前 전남대 總學生會長·1982年 作故)와 신영일 烈士(1988年 作故)를 비롯해 박용안, 장석웅, 이세천, 박병섭, 안진, 김정희, 최금표, 위승량 氏 等이었다.

이들은 當時 광천동에 있던 光州工團 勞動者 實態調査를 위한 豫備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大學生은 아니었지만 윤상원(1980年 작고), 김영철 烈士(1998年 작고)도 參席했다. 尹 烈士는 當時 “김영철 氏는 市民아파트 A洞 班長이자 마을 指導者입니다. 鑛泉三火信協 實務를 맡고 있고 光州YWCA 信協에도 勤務하고 있는 八方美人”이라고 紹介했다.

朴 烈士는 들불夜學 食口들을 이렇게 처음 만나 學生運動에 첫발을 내디뎠다. 들불夜學은 1978年 7月 結成돼 勞動者와 學生들을 가르쳤다. 들불夜學의 ‘民主·犧牲·人權’의 精神은 5·18民主化運動에 이어 1987年 6月 民主抗爭을 이끌며 時代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됐다.

朴 烈士는 豫備 모임 한 달 뒤 時局 狀況, 勞動者 處遇 等과 關聯한 設問調査를 進行했다. 設問紙는 統一 豫想 時期, 勞動者 生活環境 等 39個 質問으로 채워졌다. 朴 烈士와 박용안 氏(60·韓國海洋水産開發院 名譽硏究委員)가 한 팀이 돼 光州工團 工場들을 돌아다녔다. 1978年 全南大 法大 行政學科 入學 同期인 두 사람은 光州工團 勞動者들의 實態를 調査하는 한便 전남대 社會調査硏究會에 參與하고 들불夜學에서 講學하는 等 2年 동안 同苦同樂했다.

朴 氏가 回顧하는 朴 烈士는 키 167cm, 몸무게 70kg 程度의 다부진 體格이었다. 疏脫하지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魅力이 있었다고 한다. 光州 東區 계림동에서 自炊를 하면서 들불夜學이 있던 광천동 市民아파트까지 自轉車를 타고 다녔다. 朴 烈士는 全南大 法大에 들어가기 위해 3修를 하고 軍 服務를 마친 뒤 入學한 터라 같은 學番 新入生보다 나이가 많았다. 朴 氏는 “朴 烈士가 司法試驗을 準備해야 하는지, 市民運動에 參與해야 하는지 苦悶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回顧했다.

實態調査는 239萬 m² 터에 자리 잡은 63個 業體를 돌아다니며 이뤄졌다. 朴 烈士는 처음 보는 業體 社長이나 幹部는 勿論 勞動者에게 살갑게 다가가 구수하게 말을 걸었다. 朴 烈士의 親近한 모습에 大部分 마음을 열었다고 한다.

勞動者 299名의 設問을 土臺로 報告書가 完成됐고, 1979年 5月 ‘全代新聞’에 ‘光州工團 全體 勞動者 50% 以上이 最低賃金의 折半에도 못 미치는 賃金을 받고, 22%가 週 60時間 以上 勞動을 하고 있다’는 內容의 記事가 실렸다.

朴 烈士는 勞動者 實態調査를 契機로 工夫보다는 現實 參與를 擇했다. 1979年 3月 전남대 社會調査硏究會 創立을 主導했고 한 달 뒤에는 윤상원 烈士의 勸誘로 들불夜學에서 英語, 數學을 가르쳤다. 1980年 ‘서울의 봄’을 맞아 들불夜學 食口들의 激勵 等에 힘입어 전남대 總學生會長에 當選했다. 5月 14日부터 사흘 동안 全南道廳 앞 等에서 5·18의 씨앗이 된 ‘民族民主化 大聖會’를 이끌었다.

新軍部가 5月 17日 非常戒嚴을 擴大하며 政治人, 在野人士, 學生 等 2699名을 逮捕하자 朴 烈士는 全南 麗水로 避身했다가 서울 男동생 집으로 居處를 옮겼다. 親戚집에서 1年間 隱身하며 소금과 모기帳을 팔았다. 서울의 한 鐵物工場에서 일을 하면서도 5·18 當時 들불夜學 食口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負債意識에 시달렸다. 1982年 4月 工場에서 警察에 붙잡혀 광주교도소에 收監됐다. 임낙평 (寺)들불烈士記念事業會 理事長(64)은 “朴 烈士의 逃避 루트를 따라가 본 적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먼저 숨진 들불烈士들에 對한 未安함으로 마음 아파했던 痕跡을 더듬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1審에서 懲役 5年을 宣告받은 朴 烈士는 5·18 眞相 糾明을 위해 40餘 日 동안 斷食을 하다가 1982年 10月 29歲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朴 烈士의 信念은 1980年代 韓國 學生 運動史에 큰 影響을 끼쳤다. ‘光州의 아들’ 朴 烈士의 뜻을 繼承하기 위한 追慕 事業이 다양하게 進行되고 있지만 法的 名譽 回復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朴 烈士는 숨진 지 40年이 흘렀지만 有罪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遺族은 故人의 名譽 回復을 위해 再審을 請求했으나 法院은 2013年 “朴 烈士가 抗訴 途中 숨져 現行法上 再審 請求 對象이 아니다”라고 判斷했다.

朴 烈士의 셋째 누나 박행순 氏(73)는 “올해부터 靈光郡에서 生家를 保全하는 事業에 着手한다”며 “동생의 法的 名譽 回復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형주 記者 peneye09@donga.com
#5·18民主化運動 #박관현 烈士 #들불夜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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