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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韓 解放의 鬪士가 된 人民軍 大尉…自由北韓放送 김성민 代表가 걸어온 길 [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東亞日報

北韓 解放의 鬪士가 된 人民軍 大尉…自由北韓放送 김성민 代表가 걸어온 길 [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9月 30日 14時 00分


코멘트
김성민 代表가 2019年 自由北韓放送 錄音室에서 北韓에 보낼 放送을 製作하고 있다. 이때 그는 抗癌治療 中이었다.
양강도 惠山을 끼고 悠悠히 흐르는 鴨綠江 기슭에 앉아 있던 人民軍 大尉가 瞥眼間 江물에 뛰어들었다. 아직 해가 中天에 떠있던 時刻이었다.

빨래를 하던 30名 남짓의 女人들은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라 가만히 보다가 大尉가 가슴 깊이까지 들어가자 한꺼번에 悲鳴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에 國境警備隊가 달려 나와 온갖 辱說을 퍼붓더니 銃을 쏘기 始作했다.

大尉는 銃聲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繼續 江을 건넜다. 추워서 이빨이 덜덜 떨렸다. 中國 땅에 接近하면서 그는 軍服에 붙은 階級章을 뜯어버렸고 軍帽도 江에 던져넣었다.

中國 쪽은 45度 傾斜의 가파른 堤防이었다. 미끄러워 到底히 오를 수가 없었다. 그때 한 朝鮮族 靑年이 머리를 내밀었다. 도와달라고 하자 그는 어디선가 나무 막대기를 찾아와 내밀었다. 1996年 9月 3日에 일어난 일이다.

나중에 이 靑年은 脫北하는 人民軍 軍官을 도와주었다는 理由 하나로 北韓에 誘引 拉致돼 6個月 동안 拷問을 받고 가까스로 살아왔다.

그로부터 約 4年 뒤 休戰線 對北 心理戰 擴聲器를 통해 絶叫하듯 외치는 목소리가 두 달 넘게 北韓으로 퍼져갔다.

“나는 620訓鍊所 宣傳隊 作家 大尉 김진(김성민 氏의 改名 前 이름)이다. 620訓鍊所 政治委員, 宣傳部長 너희들은 無辜한 戰友를 反逆者로 몰아가 結局 나를 南朝鮮까지 오게 만들었다.”

擴聲器 放送이 始作된 뒤 北韓軍에선 非常이 걸렸다. 그로부터 다시 6年 뒤 그가 服務했던 部隊에서 한 軍官이 脫北해 왔다.

그 軍官은 “그 事件 대단했죠. 所聞이 퍼지자 總政治局에서 直接 김진 大尉는 抑鬱했다는 것을 部隊에 通報했습니다”라고 傳했다.

2006년 자유북한주간 행사로 워싱턴을 방문한 김성민 대표가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면담을 가졌다.
2006年 自由北韓週間 行事로 워싱턴을 訪問한 김성민 代表가 조지 W. 부시 當時 美國 大統領과 面談을 가졌다.


●“脫北한 人民軍 大尉입니다.”
대낮에 人民軍 現職 軍官이 鴨綠江을 넘자 양강도 保衛部에선 다음날 卽時 逮捕組를 匠伯에 派遣했다.

逮捕組가 넘어오던 視角, 金 氏는 山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部隊를 脫出해 꼬박 8日이나 汽車를 타고 惠山으로 왔고, 다시 惠山에서 3日을 헤맸다. 온몸의 緊張이 江을 넘자마자 풀렸다. 하루 밤, 하루 낮을 자고 깨어나니 배가 고팠다. 태어나 네 끼를 처음 굶어봤다.

배가 고픈 그는 山 아래 十字架 불빛을 찾아갔다. 北韓軍 服務 時節에 읽었던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新婦를 記憶해냈던 것이다.

女性 執事가 門을 열었다. 그를 보더니 대뜸 “어제 江 넘어온 분이죠. 오늘 北에서 逮捕組가 와서 人民軍 軍官 찾겠다고 돌아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只今 배고프고 지쳐서 어디 갈 수가 없어요. 도와주세요.”

執事는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먹고 나니 또 졸렸다. 敎會의 작은 房에 들어가 쓰러졌는데 깨어보니 다음날 저녁이었다.

“여기엔 오래 있을 수가 없어요. 저랑 延吉에 갑시다. 거기엔 도와줄 분들이 있을 겁니다.”

女執事와 함께 12時間을 달려 延吉에 갔다. 1996年엔 道路에 檢問이 없었다.

延吉에서 한 朝鮮族 牧師를 만났다. 牧師는 敎會에서 먹고 자도 좋다고 했다. 그로부터 6個月 남짓 그는 敎會 안에서 먹고 자고 지냈다. 새벽祈禱를 오는 信徒를 위해 아침마다 불을 피우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 敎會에선 ‘월간조선’을 定期購讀하고 있었다. 作家 出身인 그는 脫北한 前 北韓軍 大尉의 스토리를 스스로 써서 雜誌社에 보냈다. 그가 보낸 寄稿文은 월간조선 1996年 10月과 12月號에 두 次例에 거쳐 실렸다. 各各 60萬, 80萬 원씩 原稿料도 到着했다.

“當時엔 엄청난 돈이었는데, 아마 雜誌社가 넉넉히 보내준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걸 바꾸니 中國돈 6000위안, 8000위안이 됐는데, 當時 中國 勞動者 月給이 2~300慰安에 不過했거든요. 巨額이 생긴 거죠.”

雜誌 寄稿 後 赤十字社 名銜을 든 韓國 男子가 찾아와 意味 있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提案했다.

“韓國에 있는 三寸을 찾아 거기에 가는 게 目標입니다. 一旦 三寸부터 찾아주면 생각해볼게요.”

赤十字社 男子는 1000위안을 주고 가면서 기다려보라 했다. 하지만 答은 오지 않았다. 이듬해 2月 韓國에서 白頭山 見學을 가는 牧師 一行이 敎會에 到着했다. 金 氏는 이들에게 事情했다.

“저는 脫北한 人民軍 大尉입니다. 韓國으로 가려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500萬 원이 있으면 韓國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합니다.”

釜山 東萊제일교회에서 왔다는 조완주 牧師가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朝鮮族 現地 宣敎師에게 付託해 一旦 500萬 원을 求해 그에게 준 것이다.

돈이 생기자 그는 돌봐주던 朝鮮族 牧師와 함께 大連으로 떠났다. 牧師가 大連에 가면 500萬 원을 받고 韓國으로 보내준다는 美國 國籍의 韓人 牧師가 있다며 周旋했기 때문이다.

2010년 제주도의 해변에 선 김 씨. 그에게 바다는 탈북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였다.
2010年 濟州島의 海邊에 선 金 氏. 그에게 바다는 脫北의 아픈 記憶을 떠올리게 하는 場所였다.


● 公安에 넘겨준 韓國 船長
1997年 2月 大連에 到着하니 風采 좋은 韓人 牧師가 約束場所인 카페에 나타났다. 500萬 원이 든 封套를 넘기자 그는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靑年을 가리키며 “저 사람을 따라가면 韓國으로 보내준다”고 말했다.

그날 밤 金 氏는 靑年과 함께 택시를 타고 大連港으로 갔다. 港을 둘러싼 鐵條網 앞에서 靑年이 “이제 鐵條網을 넘어 南朝鮮 배를 찾은 뒤 거기에 몰래 올라가면 됩니다”고 말했다.

“아니 500萬 원이나 받고 港에 데려와서 아무 倍나 타고 가라는 게 말이 돼요?”

“저는 그 사람 잘 몰라요. 그냥 大連港에 데려가주면 2000위안 준다고 해서 심부름한 것뿐입니다.”

金 氏 머리에선 抛棄할까, 그냥 進入을 試圖할까 온갖 생각이 交叉했다. 決心이 서자 그는 靑年을 잡고 事情했다.

“그럼 내가 들어가 南朝鮮 배를 찾아볼 테니 제발 여기서 좀 기다려주시오. 난 中國말을 하나도 몰라서 어딜 갈 수도 없어요.”

靑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鐵條網을 넘어 大連港에 들어갔다. 大型 船舶들이 碇泊한 港口 쪽으로 갈수록 불은 더 밝아졌다. 步哨兵의 눈을 避해 바닷물에까지 뛰어들며 끝까지 살펴봤지만, 船舶들은 모두 英語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北韓에서 러시아語를 工夫한 그는 南朝鮮 배를 끝내 찾지 못했다. 젖은 옷이 얼기 始作했다. 덜덜 떨며 다시 港口 밖으로 나오니 靑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너무 불쌍해 보였는지 靑年은 “아무래도 그 牧師는 詐欺꾼 같으니 내가 天津에 사는 親舊들을 통해 南朝鮮 배를 찾아주겠다”고 했다.

金 氏는 靑年과 함께 이番엔 天眞으로 갔다. 朝鮮族 靑年은 親舊들을 통해 搜所聞한 끝에 “天津港에 ‘後션프랜드’라는 南朝鮮 鑛石 運搬船이 들어와 있으니 밤에 그걸 타는 걸 돕겠다”고 했다. 金 氏는 다시 天津港으로 갔다.

靑年이 “저기 끝에 있는 배가 南朝鮮 배니 몰래 接近해 타라”고 알려주었다. 金 氏는 어둠을 타고 項에 들어가 몰래 船舶에 接近했다. 그 배에 거의 다가갔을 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公安이 세 名이나 뛰쳐나왔다. 金 氏는 배 船員인데 술을 마시러 나갔다 오는 길이라고 손짓발짓을 動員해 熱心히 說明했다. 그러자 公安은 배 船長을 불렀다.

船長이 나왔다. 金 氏는 船長에게 말했다.

“나는 脫北한 人民軍 大尉입니다. 여기서 船長님이 船員이 아니라고 하면, 저는 公安에 끌려가 北送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公安의 앞이라 웃는 表情을 지었지만, 船長의 말 한마디에 그의 生死가 달린 瞬間이었다.

船長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이것 보시오. 脫北者를 도와주면 우린 公安이고 安企部高 다 끌려다녀야 해요. 우리도 먹고 살자고 일을 하는데 도울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金 氏는 如前히 웃는 表情으로 船長을 보며 말했다. “當身이 그리 말하면 난 죽어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라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船長은 斷乎하게 “盧”를 외쳤다. 公安에게 “노스코리아 아미”라며 잡아가라고 손짓했다. 公安들이 달려들어 金 氏에게 手匣을 채웠다.

나중에 韓國에 온 뒤 金 氏는 그 船舶을 찾아 復讐하기 위해 釜山으로 갔다. 그런데 後션프랜드라는 船舶을 찾지 못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다짐했던 複數의 決心은 時間이 지날수록 稀微해졌다.

2009年 마잉주 當時 臺灣 總統이 김성민 代表에게 ‘2009年 아시아 民主人權賞’을 授與했다.


● “北韓 體制가 얼마나 나쁘냐?”
天津 監獄에 끌려간 그는 通譯을 救하지 못해 40日이나 收監돼 있었다. 나중에 김일성대에 留學을 다녀왔다는 女子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韓國말을 너무 못해 겨우 意思疏通을 했다.

“저는 人民軍 軍官입니다. 中國에 政治亡命을 하겠습니다”고 하자 女子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우린 그딴 거 몰라”고 對答했다. 1次 調査를 받은 그는 圖們 邊方收容所로 移送됐다. 그를 移送하는데 無慮 7名이 護送員으로 따라왔다.

到門에서 다시 調査가 始作됐다. 그런데 調査官이 2名씩 繼續 바뀌었다. 朝鮮族 公安이 그에게 懷柔를 했다.

“너 가면 죽는다. 우린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率直히 말하면 北에 보내지 않고 中國에 있는 ‘로개農場(勞動改造農場)’으로 보내겠다.”

北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에 金 氏는 率直하게 對答했다.

하루는 새로 나타난 調査官이 “김정일 體制가 싫어서 왔다”는 그의 答辯을 듣고 “그럼 北韓 體制가 얼마나 나쁜지 說明해보라”고 했다. 金 氏는 北韓 體制를 猛非難했다.

9日째 되는 날 調査를 받으러 나왔는데 갑자기 여럿이 달라붙어 그의 팔을 꺾고 手匣을 채운 뒤 봉고차에 실었다. 車 안에서 처음 보는 脫北 男性과 手匣을 한 쪽씩 나눠차고 짐짝처럼 구겨진 채 北韓으로 護送됐다. 現職 軍官으로 脫北한 그는 北에 돌아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身世였다. 그는 死刑場에 끌려가는 死刑囚의 心情을 그때 알 수 있었다.

咸鏡北道 南陽의 國境다리를 건너 到着하자마자 中國 公安이 두 사람을 北韓 保衛部에 引繼했다. 中國에서 차고 온 반짝반짝한 새 手匣이 풀리고, 피로 變色된 듯한 시꺼먼 北韓 手匣이 덜커덩 채워졌다. 中國 쪽에서 南陽을 바라보면 國境다리 바로 앞에 ‘영생탑’이란 것이 있다. 保衛部에선 두 사람을 그 塔 周邊을 돌게 했다. 周邊에서 장사하던 아줌마들이 몰려왔다. 두 사람을 祖國反逆者라고 辱說을 퍼부으면서 침을 뱉고 신발을 집어던졌다. 죽음을 앞둔 瞬間임에도 그는 이때 人生 最高의 羞恥心을 느꼈다.

영생탑을 돌게 한 保衛部員들은 다시 이들을 싣고 穩城 保衛部로 끌고 갔다. 金 氏는 中國이 自身에 對한 資料를 北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元山樂器工場 勞動者라고 熱心히 거짓말을 했다. 처음에는 保衛部가 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듯했다.

穩城 保衛部에서 調査 7日째 되는 날 調査室에 들어간 그는 온몸이 굳어져버렸다. 그의 앞에 나타난 調査官은 圖們에서 “北韓 體制가 얼마나 나쁜지 說明해보라”고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北韓 保衛部가 中國에 건너와 直接 脫北民의 審問에 同參했던 것이었다. 中國에서 北韓 體制를 非難했던 그의 答辯이 고스란히 北韓 保衛部 冊床에 올라와 있었다. 死刑 當해야 할 理由가 追加된 것이다.

다음날 軍官 4名이 穩城에 나타났다. 그가 服務했던 部隊와 人民武力部 所屬 보위司令部 軍官들이었다.

“김진. 이제 가야지. 于先 平壤에서 調査를 받고, 다시 部隊에 가서 調査를 받을 거야.”

“調査가 끝나면 어떻게 됩니까.”

“임마, 그건 네가 判斷해야지 우리가 어케 알갔어?”

2007年 캐나다에서 열린 北韓舊怨祈禱運動 行事에 參加한 金 氏가 北韓 實相을 證言하고 있다.


● 달리는 列車에서 뛰어내려
護送員 4名과 함께 그는 平壤으로 가는 汽車에 올랐다. 사람들로 빼곡한 一般 客室이 아닌 列車 護送員과 乘務員들이 타는 特別 客室이었다. 汽車는 느릿느릿 平壤을 向해 가고 또 갔다. 4名이 돌아가며 監視하는 바람에 도망칠 수가 없었다. 가는 내내 그는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지를 苦心했다. 希望은 있었다. 天眞監獄과 圖們監獄에서 50日 넘게 手匣을 차고 收監生活을 하다보니 고무줄이 들어있는 속옷 혼솔 部分의 살이 온통 벌레에 물어뜯겨 피고름 투성이었다. 到底히 手匣을 찰 地境이 아니어서 護送員들은 솜옷 위에 手匣을 채웠다. 그러다보니

손을 살살 움직이면 手匣에서 손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3日이 지났다. 깊은 밤 窓밖을 내다보니 汽車는 平成을 지나 平壤으로 달리고 있었다. 平壤에 到着하면 더는 機會가 없을 게 뻔했다.

그는 化粧室에 가겠다고 했다. 化粧室은 온갖 汚物로 가득 차 더럽기 그지없었다. 化粧室 門을 열어놓고 그 앞에 서있던 護送員은 냄새가 싫은지 뒤로 돌아섰다. 그 瞬間 金 氏는 3日 동안 머리 속으로 練習한대로 手匣에서 한쪽 손목을 뽑아냈다.

同時에 벌떡 일어나 琉璃窓을 발로 차 깨뜨린 뒤 時速 80㎞ 程度로 달리는 列車 밖으로 몸을 던졌다. 於此彼 平壤에 가서 온갖 苦痛을 겪다가 죽을 運命이라면 汽車에서 뛰어내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便으로는 100m에 하나씩 있는 列車 電報대만 避하면 살 수도 있다는 希望도 있었다. 護送員의 高喊소리를 들으며 몸을 던진 瞬間 그는 精神을 잃었다.

精神을 차려보니 線路 옆 작은 밭에 쓰러져 있었다. 봄을 앞두고 마침 밭을 갈아서 땅이 푹신했다. 3年間의 特殊部隊 訓鍊이 無意識中에 그를 땅에 제대로 着地시킨 듯싶었다.

周邊을 돌아보니 멀리 汽車가 멈춰서 있었고, 數十 個의 손電燈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도망가려고 일어서려는데 무릎이 움직여지지 않아 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線路에 있다간 꼼짝없이 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는 必死的으로 기기 始作했다. 마침 數十m 옆에 山이 있었다. 그가 山자락에 붙어 몇 미터 올라가지 않았을 때 先頭의 손電燈이 그가 뛰어내린 자리에 到着했다. 仔細히 보면 사람이 쓰러졌던 자리나 깨어진 琉璃窓을 發見할 수도 있었겠지만, 列車에서 뛰어내린 護送員들과 安全員, 警務員(憲兵)들도 唐慌했는지 精神없이 앞으로 달리기만 했다.

손電燈이 漸漸 멀어지는 것을 보며 金 氏는 다시 山을 기어올랐다. 몇 時間 뒤 山中턱에서 바라보니 손電燈들은 周邊 마을 집집마다 奔走히 오가며 돌아치고 있었다. 子正이 넘은 時刻 추운 山등성이에서 金 氏는 脫營兵으로, 祖國 背反者로, 死刑囚로 轉落한 自身의 運命을 凄凉하게 되돌아봤다.

2008年 國境없는 記者會가 授與한 賞을 受賞한 김성민 代表(왼쪽).


● 南朝鮮 革命詩를 쓴 아버지
金 氏는 1962年 慈江道 熙川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當時 아버지는 平壤에서 희천工作機械工場 勞動者로 革命化 對象이 됐던 身世였다.

아버지 김순석은 北韓 文學史에 이름을 남긴 詩人이었다. 解放 後 咸鏡北道 作家同盟 支部長을 歷任한 그는 北韓 最高 權威의 文學雜誌에 여러 篇의 詩를 실었고, 이것이 인정받으면서 平壤創作室 作家로 拔擢됐다. 6·25戰爭에는 從軍作家로 參戰했고, 前後엔 雜誌 ‘朝鮮文學’ 編輯部長, 조선작가동맹 時分課委員長 等을 지냈다.

하지만 1950年代 後半 北韓에서 宗派 肅淸 바람이 불 때 아버지도 左遷돼 勞動者로 地方에 쫓겨났다. 어떤 理由였는지 金 氏는 正確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解放 直後인 1946年 2月에 할머니가 맏이이자 靑年이 된 아버지만 咸鏡北道 淸津에 남겨둔 채 金 氏에겐 三寸인, 아들 두 名을 데리고 서울로 간 것이 左遷의 重要 理由였던 것으로 推定한다. 政治的 理由가 아닌, 但只 10代의 어린 두 아들을 서울에서 공부시키겠다고 떠난 것뿐이지만, 北韓 當局은 越南者로 判斷한 것이다.

數年 間의 革命化 끝에 아버지는 1964年에 김일성代 語文學部 敎員으로 平壤에 復職했다. 金 氏는 희천에 對한 記憶은 全혀 없다. 平壤 重九譯에서 北韓 最高의 名門 幼稚園으로 치는 輕傷幼稚園과 大同門人民學校, 聯狂中學校를 次例로 卒業했다.

그가 中學校에 다닐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世上을 떴다. 김일성대 敎員을 하던 아버지는 김정일이 1970年代 初盤 對南事業을 하겠다며 ‘3號 廳舍(勞動黨 對南擔當 機關만 모아놓은 建物 名稱)’를 만들었을 때 이곳으로 옮겨갔다. 아버지가 맡은 일은 救國戰線 等 南朝鮮 地下組織의 作家가 쓴 것처럼 詩를 지어내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쓴 詩는 ‘南朝鮮 革命家들이 보내온 時’로 遁甲돼 對南放送으로 나갔다. 나중에 金 氏는 아버지가 썼던 詩를 찾아봤다. 서울로 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感情이 句節句節 歷歷했다. 아버지는 이 일을 얼마하지 못했다. 金 氏가 12살 때인 1974年에 타고 가던 車가 平壤의 한 高價다리에서 顚覆돼 世上을 뜬 것이다.

아버지가 世上을 뜨자 어머니는 다음날부터 쓰러져 누웠다. 어머니는 當時 조선중앙通信使 國際年鑑 擔當 記者였는데, 하루도 出勤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後부터 繼續 누워만 있다가 1年 뒤 돌아갔다. 金 氏는 “어머니가 世上을 살기 싫어 自殺한 것 같다”고 回想했다. 외아들인 金 氏는 出嫁하지 않은 막내 누나와 함께 살았다.

● ‘創作兆 兵士’가 되다
1978年 中學校를 마친 金 氏는 滿 16歲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軍에 入隊했다. 父母를 잃고 빽도 없는 그는 黃海南道 苔灘郡에 駐屯한 28社 輕보병隊臺에 配屬됐다. 輕보병隊臺는 北韓에서 特殊部隊로 看做된다. 게다가 그가 入隊했을 때 “一般 兵士도 甓돌 한 張은 거뜬히 깨야 한다”는 김정일의 指示가 下達됐다.

輕보병隊臺는 아침 氣象 直後부터 內服바람으로 3000番 打擊 訓鍊을 한 뒤 밥을 먹었다. 嚴冬雪寒 山골짜기로 타고 내리는 찬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打擊 訓鍊을 하다보면 손에서 흐르던 피고름이 얼음이 돼 달라붙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24㎏짜리 軍裝을 메고 平日 50里(20㎞), 土曜日은 100里(40㎞)씩 行軍 訓鍊을 했다. 地獄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金 氏는 人民軍 協奏團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弟子들에게 部隊를 좀 옮기게 해달라고 거듭 事情했다.

3年 만에 마침내 金 氏는 輕보병隊臺에서 82미리 迫擊砲部隊로 移動됐다. 砲部隊의 삶은 警報兵部隊에 비해선 天國이었다.

餘裕를 찾은 그는 짬짬이 詩를 써서 人民軍 新聞社에 寄稿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詩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詩人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新聞社에 約 10篇의 詩를 寄稿하면 1篇은 新聞에 실렸다. 5篇 程度 실렸을 때 人民軍 新聞社에서 어떤 兵士인지 궁금해 記者가 찾아왔다. 師團에서도 그를 注目했다. 入隊 4年次가 됐을 때 師團 宣傳部長이 찾더니 “師團 創作兆에 들어오라”고 命令했다.

이곳에서 1年 程度 活動하다가 入隊 5年次엔 軍團 宣傳대로 옮겨갔다. 北韓軍은 軍團別로 正規 宣傳隊를 運營한다. 그가 屬한 4軍團 宣傳隊는 當時 120名 編制였는데 200名이나 勤務했다. 對坐인 宣傳大將 傘下에 文學創作條는 勿論 聲樂, 器樂, 話術, 舞踊, 照明 等 各 分野別 特技者들이 所屬돼 있었다. 軍團 宣傳隊에 所屬되면 軍官들이 입는 軍服을 입히는데, 宣傳隊를 區分하는 肩章度 따로 있었다. 먹는 것도 一般 軍部隊와 훨씬 나아서 배고픈 걱정이 없었다. 그가 屬한 文學創作條는 少佐 편제의 作家 밑에 8~10名의 兵士가 所屬돼 있었다. 冊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이 이들의 任務였다.

宣傳隊의 가장 큰 目標는 4年에 한 番씩 열리는 軍務者祝典과, 亦是 4年 週期로 열리는 軍團別 宣傳隊祝典에서 優秀한 成果를 내는 것이다. 2年에 한 番씩 돌아오는 祝典을 위해 軍人 200名이 服務하는 것이다.

假令 軍務者 祝典의 境遇 23個 群團級 宣傳隊(正規軍團 12個, 空軍, 海軍 및 群團級 訓鍊所 包含)에서 고른 作品들로 2時間 半짜리 公演을 進行하는데, 軍團에서 作品이 하나라도 뽑히면 優秀한 成果를 냈다고 본다. 各 軍團 宣傳隊는 聲樂이나 器樂은 勿論 合唱이야기, 合唱과 詩, 노래이야기, 重創이야기, 독연 等 다양한 장르를 내놓고 最終的으로 公演에 選定되기 위해 애쓴다.

金 氏는 軍團 宣傳隊에 들어간 첫 해부터 全郡에서 注目할 만한 成果를 냈다. ‘兵士의 自敍傳’ ‘中臺의 기타수’라는 題目으로 그가 쓴 歌詞가 軍務者祝典에 오른 것. 金 氏는 “歌手가 노래를 잘 불렀던 탓이 컸다”고 回想했지만, 23個 軍團 作家들이 競爭하는 자리에 一般 兵士가 쓴 歌詞가 두 個나 選定된 것은 매우 異例的인 일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中央 祝典에 올라가면 “김진이 너냐”는 質問을 받게 됐다.

創作兆 生活을 하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冊이었다. 北韓에서 發刊된 고리타분한 書籍밖에 없었는데, 外國 名作도 보고 싶었다.

한 番은 創作兆 兵士 한 名이 “海州圖書館에 가면 過去 出版됐다가 回收했던 冊을 한 部씩 保管하는 倉庫가 있다”는 情報를 갖고 왔다. 그에게 時間을 주니 圖書館에 들어가 1950~60年代 出版됐다가 김일성 獨裁體制가 鞏固化되면서 回收한 뒤 한 部씩 남겨 倉庫에 두었던 禁書를 無慮 6麻袋나 훔쳐왔다.

그 德에 金 氏는 안나 카레리나, 레미제라블 等 世界 名作들을 읽을 수 있었다. 1980年代 中盤 以後 北韓은 世界 名作 中 一部를 다시 出版했지만 當時엔 이런 冊이 禁書였다.

自由北韓放送은 北韓의 祕密資料들을 入手해 北韓 實情을 告發한다. 自由北韓放送 事務室에는 이런 北韓 指示文들이 北韓 情報員들을 통해 隨時로 들어온다.


● 김형직사범대학에 가다
入隊 7年次가 되자 金 氏는 創作兆 助長으로 拔擢됐다. 組長이 되니 1年에 6個月씩 평양시 送信區域에 있는 人民軍創作室에 올라가 ‘創作助長 講習’을 받을 機會가 생겼다.

入隊 8年次인 1986年에 그는 送信에 갔다. 全郡에서 온 30名의 軍團 創作助長이 모였는데, 그해와 이듬해 그는 이 創作助長 强襲團의 助長으로 拔擢됐다. 이때 그는 北韓 體制의 不條理를 생생하게 體驗하게 됐다.

저녁이 되면 30名 中 20名이 넘게 사라졌다.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平壤의 高位 幹部집 子息들이었다. 創作室 軍官들은 이들에게 ‘課題’를 주어 外出을 許容했다. 假令 政務員 貿易部長의 아들은 6個月 내내 며칠에 한 番씩 食用油 桶을 兩손에 들고 들어왔다. 이 기름은 軍官들과 軍官 食堂에 配定됐다. 貿易部長 아들은 기름桶만 傳達하고 집으로 歸家했다.

軍官 結婚式 準備 任務 名目으로 나가는 兵士, 쌀을 갖고 오라는 付託을 받고 나가는 兵士, 副食物을 解決하라는 課題를 받고 나가는 兵士 等 事由는 다양했다. 理由야 어찌됐든 平壤 幹部집 子息들은 賂物을 주고 軍 服務 期間을 집에서 자유롭게 지냈다.

金 氏도 집이 平壤이지만, 父母가 없어 物資를 解決할 能力이 없었다. 그와 몇 名만이 實力으로 創作助長으로 拔擢됐을 뿐 나머지는 賂物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그런 金 氏도 軍 生活 末年에 賂物을 엄청 쓸 수 있는 機會가 생겼다. 김정일이 軍團 傘下 宣傳隊와 體育團이 혼자만 잘 산다고 火를 내면서 解散하라고 한 것. 勿論 이 指示는 3年쯤 지나 飜覆되긴 했다.

宣傳隊가 解散되면서 그는 迫擊砲部隊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가니 重大에선 그가 가장 古參이었다. 中隊長과 小隊長도 그보다 늦게 入隊한 사람들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뭐라고 못하고 어려워하자 大隊長이 그를 불러 “只今 너 하나 때문에 部隊 規律이 어지러워지니 武力部 감 밭에 가서 警備나 서라”고 指示했다.

黃海南道 용연군에는 人民武力部 豪放總局이 所有한 無慮 2萬 情報 面積의 감나무 밭이 있었다. 警備 움幕에 올라가 바라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몇몇 兵士들과 감 警備를 서게 된 金 氏는 살면서 처음으로 豪華生活을 누리게 됐다. 規律生活度 없는데다, 감을 따서 고기와 실컷 바꾸어 먹을 수가 있었다. 顔面을 익힌 人民軍 創作室에 감을 한 트럭 가득 따서 보내도 痕跡도 나지 않았다. 北韓에선 貴한 과일인 감으로 創作室에 繼續 賂物을 보내니, 創作室이 報答을 했다.

人民軍 創作室은 3年에 한番씩 김형직사범대학에 委託生을 募集해 보낼 수 있는 權限을 갖고 있었다. 委託生은 旣存 身分은 維持한 채 大學에 派遣하는 學生을 意味하는데, 卒業하면 派遣한 組織으로 돌아가야 한다.

1988年 10年次를 맞아 除隊할 나이가 된 金 氏는 人民軍 全體에서 3名을 뽑는 김형직事大 作家養成班 委託生으로 拔擢됐다. 人民軍뿐만 아니라 社會安全部, 保衛部, 角度 文學創作室, 中央 映畫文學 創作室 等에서 委託生을 뽑는데 이들은 한 個 學級을 構成해 3年 동안 大學에서 工夫한 뒤 卒業狀과 作家 資格證을 받고 派遣 機關으로 돌아간다.

그가 入學했을 때 이렇게 募集된 委託生은 19名이었다. 作家同盟 文藝創作실 室長 情熱(對坐)李 創作指導 敎授였고 勞動黨 作戰部長 오극렬의 딸로, 北韓에선 有名한 映畫文學 作家로 알려진 오혜영度 敎授陣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2019年 황장엽 前 勞動黨 祕書의 忌日인 10月 10日을 맞아 그의 墓所를 訪問한 金 代表. 金 代表는 自身에게 큰 影響을 주었던 黃 前 祕書의 墓所를 每年 빠지지 않고 찾고 있다.


● 軍團 作家, 大尉로 昇進
金 氏는 大學을 1年 半밖에 다니지 못했다. 새로 생긴 620訓鍊所에서 作家를 뽑으려고 搜所聞하다가 學生 身分인 金 氏에게 提案을 해왔다. 小委를 달고 訓鍊所 作家로 일하면 3年 뒤에 卒業證을 받아주겠다고 한 것. 金 氏의 實力을 알아본 것이다.
黃海北道 新溪郡에 指揮部를 둔 620訓鍊所는 巷間에 自走砲群團으로 알려져 있다. 1980年代 末에 생겼는데, 이때만 해도 世上에 公開하지 않은 群團이라며 祕密主義를 固守했다.
金 氏는 提案에 선뜻 應했다. 事實 兵士 時節 그의 꿈은 軍官이었다. 하지만 남들은 軍官學校에 잘만 가는데, 그는 아무리 熱心히 努力해도 推薦해주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안쓰러웠는지, 除隊 前 賂物을 주어 親分이 두터워진 軍團 幹部指導員이 부르더니 冊床에 書類를 두고 化粧室에 가는 척 자리를 비웠다.
書類를 펼쳐본 金 氏는 啞然失色했다.
‘할아버지 日帝 때 뽕밭 4000坪 保有, 賭博으로 蕩盡. 三寸 2名 越南. 아버지 基督敎 신우회 總務 出身. 어머니 日本軍 羅南憲兵隊 打字手’ 等 그의 家族 內譯이 仔細히 적혀 있었다.
北韓에서 나서 자란 金 氏가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를 理가 없었다. 幹部指導員은 그에게 알아서 斷念하라는 시그널을 준 것이다.
特히 어머니의 日本軍 經歷이 가장 걸렸다. 나중에 그는 어머니의 知人들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돼 羅南憲兵隊 打字手를 하게 됐나요?”
돌아온 對答은 虛無했다.
“진이야, 中央黨이나 軍團에 가면 예쁜 女子들이 勤務하는 걸 많이 봤지? 딴 理由는 없어. 너희 엄마가 處女 때 淸津에서 第一 예뻤어.”
軍官 希望을 抛棄하고 있었던 金 氏에게 軍團 宣傳隊 作家 提案이 왔으니 大學을 더 다닐 理由도 없었다. 그가 軍團에 가니 作曲家, 演出家 等을 各 部隊에서 스카웃하면서 宣傳代價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1996年 9月 脫北할 때까지 7年 동안 正말 熱心히 일했다. 軍服을 입을 사이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글을 썼다.
장성인 訓鍊所 政治委員은 北韓에서 有名한 口號인 ‘黨이 決心하면 우리는 한다’를 自己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던 사람인데, 隨時로 創作室을 찾아왔다. 黨을 讚揚하는 척하면서 自己를 浮刻시키는 內容을 巧妙하게 끼워넣는 作品을 만드느라 1年 半 넘게 함께 苦生했고, 親分도 두터워졌다.
元來 軍團 作家 編制가 少佐라 進級도 빨랐다. 少尉로 赴任했지만 大尉까지 거침이 없었다. 1991年 最高司令官으로 任命되면서 金日成에게서 軍權을 넘겨받은 金正日은 그해 모든 軍人의 階級을 한 階級씩 올려주라고 命令하는 바람에 中尉로 昇進하기도 했다. 約束대로 김형직事大에선 卒業 學年이 되자 卒業狀도 주었다.

한국에 입국한 이듬해인 2000년, 38세 젊은 시절의 김성민 대표.
韓國에 入國한 이듬해인 2000年, 38歲 젊은 時節의 김성민 代表.


● 韓國에서 날아온 便紙
金 氏는 1996年 8月까지 脫北이란 것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過去에 벌어진 두 가지 事件이 同時에 겹치면서 脫營을 할 수밖에 없는 處地로 내몰렸다.

첫 番째 事件은 1994年에 있었다. 그의 麾下 創作室에 豆滿江 옆 咸北 새별(慶源郡)이 故鄕인 兵士가 있었다. 이 兵士가 休暇로 집에 다녀오면서 떡을 가득 메고 왔다. 그런데 떡을 싼 종이가 北韓에선 볼 수 없는 高級 종이였다. 仔細히 보니 ‘월간조선’의 畫報였는데, 거기에 ‘사람찾기란’이 있었다. 兵士에게 물어보니 中國에 있는 親戚이 뭘 包裝해 보낸 종이인데, 종이가 좋아 떡을 包裝해 왔다는 것이었다.

金 氏는 갑자기 三寸을 찾고 싶었다. 1980年代 初盤 北韓이 南朝鮮 各界 人士들에게 보낸 呼訴文 名單에 三寸과 같은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兵士에게 “中國 親戚에게 이 住所로 사람찾기를 付託할 수 있냐”고 물으니 可能하다고 했다. 金 氏는 三寸 2名의 人的事項을 적어 兵士에게 주었다. 特히 勞動新聞에 나왔던 三寸 이름과 같은 사람은 某 基督敎 團體 總務 牧師인 것 같은데, 알아봐 달라고 特別히 付託했다.

몇 달이 지나 兵士가 中國 親戚을 통해 월간조선이 보낸 回答을 갖고 왔다. 內容은 簡單했다. “김관○ 牧師는 알아보니 當身의 三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兵士가 保衛部에 包攝된 스파이였다. 兵士는 金 氏가 준 便紙와 回答을 고스란히 保衛部에 가져다주었다. 現職 軍官이 韓國과 便紙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政治犯으로 몰릴 수 있는 매우 重大한 犯罪였다.

保衛部 調査가 始作되던 刹那 軍團 政治委員이 나섰다. 自己를 弘報하는 作品을 한창 만들고 있는 作家를 굳이 잡혀가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金 氏를 불러 “뭐, 內容을 보니 別 것도 아니던데 내가 잘 處理해줄거니 創作에만 集中하라. 이제부터 이 일은 當身과 나만 아는 祕密”이라고 했다. 軍團 政治委員이 힘을 쓴 德에 이 事件은 조용히 묻혔다.

두 番째 事件은 1993年에 始作됐다. 當時 軍團의 新生 宣傳隊의 苦悶은 管樂器가 변변치 않은 것이었다. 北韓製 管樂器를 들고 祝典에 올라가면 外製 樂器를 쓰는 다른 軍團의 宣傳隊에 繼續 밀렸다. 軍團 宣傳部에 外貨벌이를 한 돈으로 管樂器를 좀 求해달라고 繼續 要求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1993年 祝典을 앞두고 宣傳大將은 이 問題를 두고 繼續 속을 썩였다. 하루는 宣傳大將이 金 氏를 불렀다. 當時 金 氏는 宣傳隊 勞動黨 細胞祕書를 맡고 있었다.

“祕書 동무, 우리가 알아보니 開城學生少年宮殿에 在日僑胞가 寄贈한 樂器 세트가 쓰지도 않고 保管돼 있다고 하오. 우리 이거 훔친다 생각 말고, 잠깐 빌리고 다시 갖다 준다는 마음으로 가져오면 안 될까.”

“大將 同志가 알아서 하시죠.”

祕書와 相議를 마친 宣傳大將은 때마침 宣傳隊에서 아코디언 講習을 받고 있던 砲縱深偵察 大隊 講習生 5名을 뽑았다. 그리고 自身이 直接 引率해 石炭트럭을 타고 數百 里 떨어진 個性으로 떠났다.

浸透와 奇襲 訓鍊에 特化된 偵察兵들은 이틀 만에 새까만 石炭더미에 樂器를 숨겨 部隊로 돌아왔다. 喇叭은 勿論, 日本産 드럼세트와 電子바이올린 等 없는 것이 없었다.

훔쳐온 一齊 樂器로 그해 宣傳隊는 軍務者祝典에서 1等을 하는 氣焰을 吐했다. 다시 가져다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樂器에 對해 물어보면 外貨벌이를 한 資金으로 사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祕密을 아는 사람은 몇 名밖에 없었다.

그런데 1996年에 이 事實이 發覺됐다. 누군가 軍 總政治局에 投書를 보낸 것이다. 軍團 宣傳大將은 黜黨된 뒤 强制 제대됐다. 훔쳐온 樂器를 使用한 作曲家는 黨員 資格이 박탈당하고 候補黨員으로 降等됐다. 金 氏는 이 事件에 加擔한 적이 없어 處罰을 避했다. 두 指揮官이 處罰을 받으면서 세 番째로 職級이 높았던 金 氏가 宣傳大將 代理를 맡았다.

이때부터 部隊에 金 氏가 大將이 되려고 總政治局에 投書를 보냈다는 所聞이 퍼졌다. 猝地에 그는 出世를 위해 組織과 同僚를 背信한 사람이 돼버렸다.
황장엽 前 祕書는 金 代表에게 자주 便紙를 보냈다. 첫 番째는 脫北者同志會 事務局長으로 와달라는 要請 便紙이고, 두番째는 自身의 글을 다듬어 달라고 보낸 便紙다.


● 脫營, 그리고 脫北
金 氏는 처음에 自身이 背信者로 指目된 줄 몰랐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外面하고 避하는 것을 보면서 뭔가 尋常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은 받았다.

마침내 그는 部下를 通해 眞相을 알게 됐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軍團 政治委員이라면 抑鬱한 心情을 알아줄 거라 믿었다. 軍團 指揮部에 가니 步哨兵들이 政治委員의 命令이라며 正門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그는 담牆을 뛰어넘어 步哨兵들의 눈을 避해 政治委員 房으로 찾아갔다.

그가 抑鬱하다고 吐露하자 政治委員이 “너 아니면 됐어, 가봐. 일 熱心히 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던진 마지막 말이 가슴에 匕首처럼 박혔다.

“자루 속의 송곳이야 언제든지 드러나지 않겠어.”

房을 나오면서 그는 政治委員度 自身을 背信者로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總政治局이라도 시원하게 投書를 누가 했는지 밝혔으면 좋으련만, 北韓도 提報者의 身上은 나름 保護해 준다.

宣傳대로 돌아온 그는 이 陋名을 어떻게 벗을지 苦悶하느라 이틀 밤을 꼬박 샜다. 그러다가 親舊인 旅團 保衛指導員을 찾아가 하소연했다. 그런데 그가 한마디 던졌다.

“너 只今 그게 問題가 아니야. 너 南朝鮮에 便紙를 쓴 적이 있다면서?”

瞬間 金 氏는 눈앞이 캄캄했다. 便紙 事件은 親舊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政治委員 等 몇 名만 알았다. 그런데 그가 上官을 背信한 사람으로 指目되자 政治委員度 그를 除去하려 弱點을 꺼내든 것이다. 이때는 政治委員을 띄우는 作品 創作도 끝난 뒤라, 金 氏의 活用度度 사라졌다.

親舊에게서 便紙 이야기를 듣자마자 金 氏는 房으로 돌아왔다. 南朝鮮에 便紙를 보냈다는 事實을 다시 들추면 政治犯으로 몰릴 것이 뻔했다. 죽을 일만 남은 것이다.

“이럴 바엔 南朝鮮으로 가자.”

그는 地圖를 펼쳤다. 鐵道를 따라가 보니 양강도 惠山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簡單히 짐을 챙겨 部隊를 빠져나와 汽車에 올랐다. 1996年은 苦難의 行軍으로 經濟가 痲痹됐던 때라 汽車도 가다 서다를 反復했다.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列車 안에서 8日이나 苦生한 끝에 惠山에 내렸다.

惠山驛에 내렸지만 鴨綠江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몰랐다. 軍官服을 입고 “鴨綠江으로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면 殊常하게 볼 것이 뻔한 터라 그는 無酌定 헤맸다. 그런데 何必 方向이 反對였다. 無慮 3日이나 헤매다가 鴨綠江에 到着했다. 나중에 보니 惠山驛에서 强까지는 500미터 程度밖에 되지 않았다.

鴨綠江 기슭에 앉아 그는 하염없이 中國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되면 물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午後 5時쯤 變數가 생겼다. 지나가던 國境警備隊 두 名이 다가와 證明書를 보자고 했다. 軍官이 午前부터 江가에 木石처럼 앉아있으니 殊常해보였던 것이다.

證明書를 받아본 한 軍人이 갑자기 반색을 했다.

“820訓鍊所 김진 作家 同志군요. 저는 人民軍 新聞으로 통해 作家 同志 잘 압니다. 甚至於 大尉 同志에게 便紙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作品 하나 쓰려고 現場 踏査 왔어.”

相對는 기뻐서 주절거렸지만, 身分을 들킨 金 氏는 心臟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저들이 部隊로 가서 報告하면 逮捕組가 올 可能性이 컸다. 軍人들이 헤어져 얼마쯤 갔을 때 그는 鴨綠江에 뛰어들었다.

● 手配를 避한 9日間의 脫出
北送돼 平壤으로 끌려가다 달리는 汽車에서 뛰어내려 脫出한 金 氏는 山에서 하루를 더 隱身해 있다가 周邊 汽車驛을 찾아갔다. 그런데 벌써 汽車驛에 그의 手配 寫眞이 붙어있었다.

그는 다시 돌아가 숨어 있다가 밤 12時에 담牆을 넘어 驛에 몰래 들어갔다. 北으로 가는 貨物列車를 잡아타고 가다가 새벽이면 無條件 내려 周邊에 隱身하고 다시 밤마다 貨物列車를 탄다는 것이 計劃이었다.

그렇게 9日 동안 北으로 繼續 올라갔다. 中國에서 겨울에 옷을 여러 벌 입고 있다 잡혔던 것은 그나마 多幸이었다. 護送될 때까지 그 옷들을 如前히 입고 있었는데, 그는 脫出 後에 옷을 한 벌씩 汽車驛 앞 商人들에게 넘겨주고 먹을 것과 바꾸었다.

때는 1997年 3月 末이었다. 낮에 山에 隱身해 있다보면 山나물 캐려 올라오는 남루한 사람들, 나물이라도 캐먹고 살려고 山 밑에 비닐로 대충 幕舍를 만들고 사는 家族들을 數없이 만나게 됐다.

只今까지 部隊 밖 世上은 많이 接해보지 못했던 金 氏는 그것들을 보면서 “이 나라는 亡했구나. 이런 걸 내가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했고, 讚揚을 하다니”라고 數없이 自責했다.

9日째 되는 날 汽車 옆에 豆滿江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날은 날이 밝아도 繼續 汽車를 타고 갔다. 適當한 場所를 物色하기 위해서였다. 午前 9時쯤 되자 咸北 會寧과 학포 사이 區間을 가던 汽車가 고개에서 速度가 急激하게 늦춰졌다. 그는 汽車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논밭을 가로 질러 豆滿江을 向해 달렸다. 民家나 道路와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라 그런지 막아서는 警備隊도 없었다.

아직 豆滿江은 3分의 1 程度 얼어있었다. 그는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흙湯물로 變한 豆滿江에 뛰어들었다. 쑥 들어갈 것이란 豫想을 했는데 意外로 물이 무릎程度밖에 오지 않았다. 냅다 뛰어 中國땅에 到着한 그는 갈대밭에 드러누웠다. 드디어 中國에 다시 온 것이다.

아는 곳이 지난番 머물던 延吉의 敎會인지라 그곳을 찾아갔다. 大連까지 案內해주었던 태中院 牧師는 그가 南朝鮮에 이미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北에 잡혀갔다 왔다고 해도 믿지 않고, 安企部에서 다시 任務를 받고 왔냐고 물었다.

1998년 봄 중국에 살던 김성민 대표가 자신이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건넜던 두만강의 탈북 현장을 다시 찾았다.  강 건너가 북한이다.
1998年 봄 中國에 살던 김성민 代表가 自身이 달리는 列車에서 뛰어내려 건넜던 豆滿江의 脫北 現場을 다시 찾았다. 江 건너가 北韓이다.


● 延吉에서 올린 結婚式
延吉에서 金 氏는 1999年 2月 韓國에 올 때까지 繼續 머물렀다. 延吉에 오자마자 그는 詐欺꾼 牧師를 搜所聞했다. 그가 베이징에 있다는 情報를 入手하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牧師는 “네가 牧師냐”고 울부짖는 그를 보고도 沈着한 목소리로 “正말 未安합니다. 牧師도 사람이라 失手합니다”고 하며 500萬 원을 돌려주었다.

나중에 그 牧師는 贖罪한다며 脫北民 救出活動에 뛰어들었고 數十 名의 脫北民을 韓國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이 事實을 알게 된 北韓이 要員을 보내 그를 拉致한 뒤 殺害했다.

金 氏는 베이징 韓國大使館에 찾아가 韓國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기다리란 말만 되풀이해 들었다.

延吉에 있을 때 가장 큰 變化는 그를 保護해주던 태中院 牧師의 妻弟와 結婚을 한 것이다. 當時 그女는 延邊病院 醫師로 있었는데, 아프리카 宣敎師가 꿈이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언제 잡혀갈지도 모르는 金 氏를 男便으로 選擇하는 것은 대단한 冒險이지만 그女는 이 男子를 保護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사람을 좋아하는 金 氏는 韓國에 온 뒤에 時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집에 끌고 왔다. 名節이면 周邊 脫北民들을 다 불러 모으는 바람에 집이 넘쳐나 아파트 複道에까지 사람들이 앉아 고기를 굽기도 했다. 金 氏의 집을 거쳐 간 脫北民은 數없이 많은데, 그때마다 夫人은 不平 없이 男便과 손님들에게 床을 차린다. 脫北民 社會에서 金 氏 夫人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밥을 해먹인 사람은 없다.

그는 韓國에 와서 20年 넘게 살면서 自己 집도 마련하지 못하고, 돈이 생기면 繼續 엉뚱한데 써버리는 男便이지만 只今도 金 氏와 뜻을 같이하며 믿음직하게 곁을 지킨다. 이들은 夫婦가 아닌 同志가 된지 이미 오래다. 延吉에서 태어난 딸은 벌써 20代 中盤이 넘었다. 중앙대를 卒業하고 最近 社會生活을 始作했다. 延吉에서 牧會 活動을 하던 태中院 牧師는 脫北民을 도와줬다는 罪로 迫害를 받아 外國으로 亡命했다.

結婚하고 얼마쯤 지나 金 氏는 韓國에 있는 三寸을 찾았다. 延吉에 있는 내내 여러 線을 통해 數없이 알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는데, 白頭山 觀光을 왔다가 敎會에 들린 韓國 事業家가 自身이 알아본다며 돌아가더니 3日 만에 찾았다고 連絡을 해왔다. 韓國에 사는 할머니와 작은 三寸은 이미 世上을 떠났고, 큰 三寸 한 名만 남아있었다. 둘은 通話를 하면서 今方 서로를 알아봤다. 큰 三寸의 목소리가 아버지와 똑같았다.

三寸은 成功한 事業家가 돼 있었고, 子息들 또한 잘 나갔다. 조카가 왔다는 消息에 三寸은 延吉로 날아왔다. 처음 봤지만 보자마자 “兄님 아들이 맞구나”고 부둥켜안았다. 피는 물보다 津했다.

三寸은 몇 萬 달러를 주고 갔다. 當時 延吉에서 第一 좋은 아파트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金 氏는 이 돈 一部로 中國 戶口를 사서 身分을 洗濯한 뒤 韓國式 撞球場을 하나 차렸다. 三寸은 韓國으로 오라고 거듭 勸했지만, 그는 家族과 떨어져 살기 싫었다.

撞球場을 運營하면서 그는 갈 데 없는 脫北 靑年 數十 名을 그곳에 숨겨주고 먹여주었다.

2006年 美國 워싱턴 議會 建物 앞에서 열린 自由北韓週間 行事. 金 代表는 自由와 民主主義를 위해 犧牲된 脫北民들을 그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다.


● 延邊의 熾烈한 南北 情報戰
1990年代 後半 延邊은 南北의 熾烈한 戰爭터였다. 保衛部와 安企部 要員들이 身分을 숨기고 猛活躍했다. 이때는 脫北民이 延邊에 가장 많았던 때이기도 했다.

脫北民 속에서 北韓을 붕괴시키는 것을 目標로 한 地下組織들度 생겨났다. ‘北韓人民解放戰線’ ‘피로써 北朝鮮民主化를 爭取하기 위한 聯合(피憫憐)’ ‘진달래回’ 等 알려진 것만 5個의 祕密組織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豆滿江 건너에 있는 김일성 銅像을 폭파시키겠다며 러시아 暗市場에서 携帶用 對戰車 流彈發射機(RPG)를 사오기도 했다.

保衛部는 이 組織들을 摘發하기 위해 脫北民으로 僞裝한 要員들을 繼續 潛入시키며 血眼이 돼있었다. 保衛部의 公爵은 大體로 成功的이었다.

1990年代 末 惠山에선 김일성銅像을 爆破시키려던 祕密組織 數十 名이 逮捕되기도 했다. 同志들을 密告한 背信者는 共和國 英雄 稱號를 받았는데, 報復이 두려워 元山에 移住해 살다가 얼마 뒤 앓아 죽었다.

北韓 體制를 겨냥한 수많은 工作을 粉碎시키며 猛活躍을 한 指揮官은 咸鏡北道 保衛部 윤창주 臺座였다. 北韓 體制를 守護하기 위해 數百 名을 拉致 殺害하며 共和國 英雄 稱號까지 받았던 그의 運命은 悲慘했다. 2011年 處刑된 柳京 保衛部 副部長의 心腹으로 烙印돼 咸北 保衛部 心腹 10餘名과 함께 處刑됐다. 그들의 家族은, 그들이 數없이 사람들을 잡아 보냈던 政治犯收容所로 끌려갔다. 以外에도 脫北民 工作에 加擔한 北韓 保衛部 幹部와 要員들의 末年은 大槪 다 悲慘했다. 北韓에서 사냥개에게 차려진 運命은 兎死狗烹뿐이었다.

1990年代 後半 延邊에서 活躍하던 安企部 要員들은 김대중 政府 出帆 後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사라졌다. 赤十字 名銜을 들고 다니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이 時期에 延邊에서 成功한 脫北民 出身 事業家로 活動했던 金 氏는 수많은 公爵의 全貌를 直接 보았다. 하지만 아직 公開할 수 없는 祕密이 많기에 나중에 記錄으로 남길 생각이다.

延吉에서 많은 脫北民과 連繫를 하면서, 그의 身分도 漸漸 露出되기 始作했다. 언제 逮捕組가 들이닥쳐도 異常한 일이 아니었다.

中國 戶籍을 갖고 있던 金 氏는 中國 旅券을 만들어 韓國의 三寸에게 두 番 놀러오기도 했다. 1999年 2月에도 韓國에 와서 江原道 等을 놀려 다니고 돌아가려는데, 金浦空港에서 逮捕됐다. 空港 職員이 朝鮮族 같지 않은 그의 行動을 尋常치 않게 여겨 北韓 間諜으로 疑心한 것이다. 그는 脫北한 北韓 軍官 出身이라고 順順히 是認하고 調査機關에 移送됐다.

當時엔 北韓軍 自走砲에 對한 情報가 많지 않을 때였다. 그는 하나圓에도 가지 않고 無慮 10個月을 調査받았다. 그리고 1999年 12月 社會에 나와 定着을 始作했다. 2002年엔 中國에서 家族도 데리고 왔다. 韓國에서 그는 새 삶을 始作한다는 意味에서 김성민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2005년 워싱턴에서 한성렬 북한 유엔대표부 차석대표 면전에서 김정일을 타도하라는 구호를 들고 시위하는 김성민 대표.
2005年 워싱턴에서 한성렬 北韓 유엔代表部 次席代表 面前에서 김정일을 打倒하라는 口號를 들고 示威하는 김성민 代表.


● 對北 라디오의 歷史
그가 入國하자 三寸은 조카에게 自己 會社 部長 職銜을 달아주고 事務室까지 내주었다.

하지만 會社에 나가도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出勤해 冊床 먼지를 털어내고 앉아있는 날이 反復됐다. 그의 性格과 조금도 맞지 않았다.

그는 周邊의 脫北民들과 어울리며 1年 넘게 보냈다. 그러다가 이렇게 脫北民이 많으니 뭉쳐서 뭔가 해보자고 提案했다. 2001年 첫 自生的 脫北團體 ‘白頭한라會’가 만들어졌다. 金 氏는 30餘名의 會員들을 데리고 奉仕活動을 다녔는데 每달 두 집씩 獨居老人의 집을 찾아 塗褙를 해주었다.

그렇게 살던 中 2003年 황장엽 前 勞動黨 祕書에게서 脫北者同志會 事務局長을 맡아달라는 連絡이 왔다. 三寸 會社를 나와 그는 黃 前 祕書를 補佐하는 일을 始作했다. 2006年엔 脫北者同志會 會長을 맡기도 했다.

2004年 그는 첫 民間對北放送人 ‘自由北韓放送’을 만들었다. 2004年 6月 4日 南北 將星級 軍事會談에서 南北은 宣傳 活動을 中止하고 宣傳 手段을 撤去하기로 合意했다는 6·4 合意가 放送에 나오던 날 그는 10餘名의 前職 外交官 等 脫北 先輩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放送을 보던 누군가 “政府에서 對北 放送을 끊으면 우리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同席者들의 눈은 一齊히 金 氏에게 向했다.

“對北 放送을 할 사람은 너 밖에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中에서 金 氏의 나이가 第一 어린 理由도 있었지만, 더 큰 理由는 그를 放送人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當時 金 氏는 KBS ‘南北의 窓’, KBS 라디오 ‘出發東西南北’ 等에서 MC로 活躍했고 國政弘報放送에서 ‘서울말 平壤말’ 코너를 3年째 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前方에 나가 擴聲器로 北韓 指揮官들을 斷罪했던 勇氣도 있었다. 나중에 歸順한 620訓鍊所 出身 軍官은 金 氏에게 그 放送 때문에 620訓鍊所 政治委員 等이 解任될 뻔 했지만 “變節한 사람의 말을 믿고 解任시키는 것은 抑鬱하다”는 하소연이 認定돼 살아남았다고 했다.

軍 總政治局은 그때에야 投書를 보낸 사람의 身元을 밝혔다. 알고 보니 勞動黨에 入黨하지 못하고 除隊했던 宣傳隊 創作助長 出身의 兵士가 惡感을 품고 벌인 일이었다. 部隊에선 樂器를 훔쳐온 祕密을 宣傳隊 幹部 몇 名만 알고 있다고 생각해 除隊해 간 사람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宣傳大將 代理가 돼 가장 큰 受惠者로 여긴 金 氏를 投書者로 確信했던 것이다.

그날 술자리에 參席한 12名이 金 氏에게 對北라디오 放送을 하라며 100萬 원씩 모아주었다. 韓國의 民間 對北라디오의 歷史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게 6·4 合意가 發表된 날에 始作됐다. 하지만 放送人과 라디오 放送 運營은 全혀 다른 일이었다. 1200萬 원으로 라디오 放送局을 차리기엔 어림도 없었다. 이때 三寸이 3億 원이란 巨額을 건네주었다.

한 北韓 關聯 硏究所의 建物을 빌려 放送局을 차리고 첫 放送을 始作했을 때 이 消息이 알려지면서 한총련 統一先鋒隊 30餘名 等 온갖 團體들이 몰려와 示威를 벌였다.

每日 같이 示威에 시달리자 金 氏는 없던 傲氣가 생겨났다.

“내가 對北放送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구나. 絶對 그만두지 않겠다.”

示威隊에 시달리던 硏究所 側은 나가달라고 했다. 그는 放送局을 서울의 한 작은 빌딩으로 옮겨왔다. 脅迫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죽은 쥐, 칼을 꽃은 人形 等이 隨時로 配達됐다. 팩스에 딸 이름까지 적어 보내며 脅迫하는 者들도 있었다. 그런 脅迫을 견디며 그는 只今까지 20年 동안 自由北韓放送을 運營해 오고 있다. 그 期間 數없이 많은 事緣들이 있었다.

2005年 10月 그는 다른 脫北 女性 3名과 함께 美 下院 脫北者 聽聞會에 參席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날 한성렬 유엔代表部 次席大使와 北韓 外交官 몇 名이 같은 建物에 왔다. 北韓 外交官들이 왔다는 소리에 證言하러왔던 脫北 女性 3名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金 氏는 火가 났다. 急히 종이板을 救해 ‘한성렬, 韓半島 平和의 길은 김정일 打倒!’라고 적고 한 臺詞가 있는 房으로 들어갔다. 그가 “韓半島 平和의 길은 김정일 政權을 打倒하는 것”라고 口號를 외치자 한 臺詞는 險한 表情으로 “너 이 새끼, 죽을래?”라며 高喊을 질렀다. 金 氏는 “너도 죽을거야”라고 맞받았다. 北韓 最高의 對美 라인으로 알려진 한성렬은 2018年 眞짜로 處刑됐다.

金 氏는 北韓 住民의 人權과 尊嚴性 增進을 위해 美國과 韓國에서 번갈아 每年 열리는 北韓自由週間 行事도 20年째 進行하고 있다. 美國의 團體들과 聯合해 열리긴 하지만, 韓國에서 모든 業務를 擔當해 處理하는 金 氏가 없다면 이 行事는 열릴 수가 없다. 北韓 民主化를 위한 活動 公的으로 그는 ‘2009 아시아 民主人權上’ 受賞者로 選定되기도 했다.

구글에서 自由北韓放送 김성민 代表를 檢索하면 수많은 記事들이 뜬다.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北韓의 脅迫도 많아졌다.

2017年 肺癌 末期로 死亡 宣告를 받은 김성민 代表가 오랫동안 옆을 지켜온 夫人과 함께 寫眞을 남겼다.


● “세 番째 삶을 삽니다.”
2017年 3月 어느 날, 그날도 金 氏는 北韓自由週間 行事를 準備하기 위해 밤늦도록 事務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 페이지만 마무리하면 되는데 도무지 字板을 칠 수가 없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겨우 作業을 마친 그는 마지막 마침標를 누른 뒤 쓰러졌다.

病院에 가보니 腦腫瘍이라는 判定을 받았다. 腦에 생겨난 시꺼먼 구멍이 보였다.

卽時 手術이 잡혔다. 腦에 있는 腫瘍을 도려내고 入院해 있는데, 醫師가 다시 찾아왔다.

“寫眞을 判讀하니 腦腫瘍보다 더 深刻한 것이 肺癌입니다. 癌이 肺에서 轉移됐어요. 肺癌 末期입니다.”

찾아온 家族에게 醫師는 “더는 손 쓸 수가 없으니 마지막 準備를 하라”고 말했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 아직 金正恩 政權이 그대로 살아있는데 내가 먼저 죽을 수는 없다. 이젠 살아남는 것이 나의 鬪爭이다.”

金 氏는 抗癌 治療를 始作했다. 注射 한 番 맞고 나니 머리가 다 빠졌다. 그의 삶을 아는 知人들이 積極 나서서 數千萬 원의 治療費를 모아 後援해주었다. 또 延世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治療를 받게 해주었다. 그러나 癌細胞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러워 治療를 抛棄하려는 생각도 여러 番 들었지만, 끝내 그는 自身과의 싸움에서 이겨냈다.

奇跡이 일어났다. 新藥 臨床對象子 名單에 이름을 올려 最新 抗癌劑를 投藥했다. 臨床對象自家 되면 새로 나온 비싼 抗癌劑를 無料로 맞을 수 있다.

이 藥의 效果가 너무 좋았다. 肺癌 末期에서 治療를 始作한 뒤 5年이 넘었지만 그는 如前히 살아 있다. 癌 鬪病 中에도 그는 如前히 自由北韓放送 代表로, 北韓自由週間의 運營委員長으로 活動했다. 그런데 昨年 8月 打者를 치다가 또 같은 症勢를 느꼈다.

病院에 가보니 이番엔 反對쪽 腦에 腫瘍이 생겨났다. 다시 手術을 했는데 豫後는 나쁘지 않다. 그는 이番에도 이겨낼 수 있다고 確信하고 있다. 더구나 最近에 美國에서 效果가 뛰어난 抗癌劑가 또 나왔다고 한다.

“事實 삶에 對한 愛着은 크게 없어요. 달리는 列車에서 뛰어내려 살았고, 肺癌과 腦癌 말기도 이겨냈으니 이미 두 番을 죽었다 살아났다고 봐야죠. 남은 生은 덤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便해져요. 每日每日 最善을 다해 살자. 그리고 自由北韓放送은 中斷돼선 안 된다. 只今 저의 目標는 이 두 가지로 單純하게 좁혀졌어요.”

아버지는 南朝鮮을 解放한다며 平壤에서 對南放送을 하다가 숨졌다. 只今은 아들이 서울에서 北韓을 解放하기 위한 使命感으로 목숨 걸고 對北放送을 進行한다. 그는 이미 이름을 歷史에 남겼다.

東亞日報·南北하나財團 共同企劃
主星하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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