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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北 1號 作曲家 김영남입니다”[주성하의 北에서 온 이웃]|東亞日報

“脫北 1號 作曲家 김영남입니다”[주성하의 北에서 온 이웃]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8月 13日 13時 51分


코멘트
손풍금 연주를 하고  있는 김영남 NK예총 회장
손風琴 演奏를 하고 있는 김영남 NK禮銃 會長


新義州의 鴨綠江邊에 사랑에 빠진 두 男女가 앉았다. 中國 단둥을 건너다보며 男子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나를 따라 어디든 갈 수 있어?”

“嶺南 同志가 祖國을 배반하지 않는 以上 어디든 가겠습니다.”

結婚 뒤 男便은 아내에게 韓國 라디오 放送을 듣게 했다. 두 달이 지나자 아내가 말했다.

“우리가 속고 살았습니다. 南朝鮮에 갑시다.”

地獄에서 脫出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다. 中國에서 3年 동안 마음을 졸이며 숨어살아야 했고, 미얀마 監獄에서 1年 3個月이나 收監生活을 했다.

그렇게 到着한 韓國에서 男子는 音樂家라는 꿈을 쫓아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는 아코디언 敎本이 單 한 卷밖에 없던 韓國에서 9卷의 아코디언 便曲集을 펴냈고 脫北民 1號 作曲家로 成長했다.

올해 6月 그는 自身의 이름을 딴 ‘第1回 김영남 音樂會’를 열었다. 서울로망스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音樂會에선 그가 作曲한 노래 6曲이 舞臺에 올랐다. 自身의 人生이 녹아있는 노래들을 들으며 NK禮銃 會長 김영남 氏는 걸어온 60年의 삶을 눈시울을 붉히며 돌아봤다.

● 兵士 作曲家
金 氏는 1962年 平北 新義州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도 人民委員會 保健處長이었다. 父親은 勞動黨 幹部였다. 1948年에 入黨해 戰爭 때엔 面당위원장, 前後엔 道黨 組織部에서 일했다. 하지만 戰爭 前에 兄이 南쪽으로 간 事實이 밝혀져 黨 幹部에서 行政 幹部로 左遷됐다. 그럼에도 保健處長이란 職責은 꽤 權限이 있어서 家族들은 父親 德分에 裕福한 環境에서 살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音樂을 좋아했던 金 氏는 學校에 다닐 때 아코디언 塑造에 뽑혀 專門的인 敎育을 받았다. 1978年 黃海南道 駐屯 4軍團에 入隊할 때만 해도 音樂人生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숨겨진 才能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當時 北韓軍은 2年에 한 番씩 軍務者祝電이라는 것을 열었는데, 中隊別로 音樂 才能을 가진 兵士들을 뽑아 訓鍊을 시킨 뒤 平壤에서 最終 競演을 가진다. 金 氏는 1983年 열린 21次 軍務者祝典에서 直接 作曲한 中窓으로 全軍 2等을 했다.

그러자 軍團에서 바로 召喚했다. 4軍團 宣傳隊 所屬으로 專門的으로 作曲을 하게 한 것. 軍團 宣傳隊는 上佐 階級의 宣傳大將과 大尉 또는 少佐 階級의 作曲家가 指揮官으로 있었다. 그 아래 글을 잘 쓰는 兵士들로 構成된 文學創作條와 音樂을 잘 하는 兵士들로 構成된 音樂創作條가 있었다.

宣傳隊에서 그는 너무 幸福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피아노와 아코디언 演奏가 革命任務가 됐기 때문이다. 北韓에선 피아노가 願한다고 아무나 칠 수 있는 樂器가 아니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鍵盤을 치고 또 쳤다. 얼마 뒤 그는 軍團 音樂創作助長으로 任命됐다. 勿論 作曲한 音樂에 對한 最終 承認權限은 軍官 身分의 作曲家가 쥐고 있었지만, 兵士들도 마음껏 作曲을 할 수는 있었다.

1988年 軍 服務 10年을 마치고 除隊할 때 그는 平壤音樂大學에 가는 것이 目標였다. 그런데 何必 그때 音樂大學 學生은 除隊軍人을 받지 말고 留學生 出身으로 받으라는 김정일의 指示가 下達됐다. 10年 동안 軍 服務를 하고 오면 技倆이 딸려 물을 흐린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金 氏는 新義州 第2師範大學 藝能學部로 갈 수밖에 없었다. 大學에 가니 除隊軍人들은 義務的으로 豫備科 1年을 다니게 했다. 軍에서 10年 있다 보면 머리에 綠이 쓸 수밖에 없다며 中學校 卒業한 學生들보다 1年 더 大學을 다니게 한 것이다.

이때 그는 眞摯하게 自退를 苦悶했다. 大學에 가보니 水準이 너무 맞지 않았다. 豫備科를 다녀야 할 學生들은 軍에서 5年 동안 作曲까지 하다가 온 自身이 아니라 어린 親舊들이었다. 特히 그가 피아노 鍵盤을 두드리면 10年 어린 親舊들이 몰려와 恍惚하게 구경했다. 當時 北韓에서 피아노를 마음대로 칠 수 있는 사람들은 極少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自退하지 않은 理由는 뜻밖에도 大學에서 배우는 政治經濟學이나 哲學, 心理學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音樂만 했던 그에겐 新鮮한 衝擊이었다.

地域社會 奉仕의 一環으로 老人들로 構成된 아코디언 동아리에서 아코디언을 가르쳐주고 있는 김영남 氏.


● 金正日 집안 家庭敎師
1993年 大學 5年 過程도 끝나갈 즈음 사회주의청년동맹(사로청)에서 그를 찾았다. 平安北道 사로청 靑年期東海설대 大將(團長)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靑年機動解說臺는 聲樂, 器樂, 話術, 舞踊 等으로 構成된 25名 안팎의 未婚 專門藝術人들로 構成돼 있다. 이들은 사로청에서 發給한 俳優라는 身分證을 가지고 있고, 主로 工場이나 農場과 같은 生産現場에 나가 督勵하는 活動을 했다. 그런데 大將을 求하기가 쉽지 않았다. 大將은 儼然하게 北韓에서 幹部 職責이다. 幹部가 되려면 除隊軍人 出身의 黨員에 大學까지 나온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찾으면 또 音樂을 몰랐다. 그런 點에서 金 氏는 사로청이 찾은 大將 適格者였다.

大學 卒業 前에 大將으로 任命된 그는 첫해부터 ‘事故’를 쳤다. 1993年 10月 平壤에서 열린 角度 사로청 靑年期東海설대 競演에서 堂堂하게 1等을 한 것이다. TV 5代, 6000달러어치의 音響設備, 各種 樂器 세트를 優勝 商品으로 받았다. 그런데 정작 그를 위한 것은 單 하나도 없었다. 商品을 받아가지고 내려오자마자 그보다 職責이 높은 사로청 高位 幹部들이 다 나눠가졌던 것. 그는 幻滅을 느꼈다.

하지만 最高의 幻滅을 느낀 事件은 이듬해에 찾아왔다. 金 氏는 날짜도 생생하게 記憶한다. 1994年 10月 3日 土曜日에 한 農場에서 宣傳活動을 熱心히 하고 있는데 道黨 組織部에서 連絡이 왔다.

“동무, 午後에 正裝을 입고 道黨 組織部로 찾아오시오. 좋은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午後에 都堂에 가니 中央黨 副部長이 앉아있었다.

“우리가 찾던 동무가 이 동무나? 동무는 黨이 부르면 어디든 갈 수 있어?”

北韓에서 幹部로 살려면 이럴 때 答辯해야 하는 말은 定해져 있다.

“제가 黨의 配慮로 이렇게 살고 있는데, 黨이 부르면 어디든 마다하겠습니까.”

“좋소. 집사람은 무슨 일을 하오?”

“도 地方總局 資材商社 統計院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참 좋은 職業이네. 우리가 동무를 平壤으로 召喚하려 하는데, 平壤에 가면 좋은 집도 있고 피아노도 있고 아무튼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야. 가서 기다리고 있소.”

金 氏는 갑자기 찾아온 幸運에 얼떨떨했다. 마침 道黨 組織部에 먼 親戚이 있어 그를 찾아가 中央黨 副部長이 찾아온 理由를 알아봐달라고 付託했다.

며칠 뒤 親戚이 그를 불렀다. 그러더니 큰 祕密을 알려주는 듯이 속삭였다.

“네가 將軍님 집안 音樂 家庭敎師 候補로 뽑혔어. 身元照會가 끝날 때까지 몇 달 기다려봐. 그동안 事故치지 말고 模範的으로 살아야 돼.”

“아니, 나 같은 사람을 왜 將軍님 집 家庭敎師로 뽑아요?”

“外國 留學 다녀오고 實力 있는 애들이야 當然 있겠지. 그런데 그들은 除隊軍人度 아니고 勞動黨員度 아니야. 第一 重要하게는 師範敎育度 못 받았단 말이지. 너는 黨 幹部가 될 條件을 다 갖추고 있고, 게다가 機動宣傳隊張으로 實力도 認定받았잖아. 子弟분들 音樂 가르치는 게 國際 콩쿠르 入賞者 만드는 일도 아니니 充分히 할 수 있어.”

金 氏는 부푼 꿈을 안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當時 어머니는 癌 鬪病으로 死境을 헤매느라 말을 못할 때였는데, 온힘을 짜내 艱辛히 한마디 남겼다.

“꿈 깨라. 너는 큰아버지가 越南해서 안 돼.”

어머니는 두 달 뒤 世上을 떠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黨에선 그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遺言처럼 남긴 말이 實感이 됐다. 北韓 體制에 對한 背信感이 漸漸 커졌고, 내가 이 社會에서 限界가 있다면 내 子息도 限界가 있을 것이라는 絶望도 들었다.

2013년 부산에서 진행된 kbs 열린음악회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는 김영남 씨.
2013年 釜山에서 進行된 kbs 열린음악회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는 김영남 氏.


● “오늘도 꿈길을 가네”
金 氏의 父親은 1948年에 勞動黨에 入黨한 黨員이었고, 母親도 1950年에 入黨한 黨員이었다. 이 程度 經歷이면 北韓에선 ‘48年 黨員’ ‘50年 黨員’이라고 부르며 老黨員 待接을 해주었다. 믿을 수 있는 忠誠階層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家庭環境에 ‘티’가 있으면 絶對 어느 程度 以上 昇進할 수 없었다.

父母님들은 일찍이 그 現實을 깨달았다. 金 氏가 제대돼 돌아오니 어머니가 저녁마다 韓國 라디오를 몰래 듣고 있었다. 金 氏도 好奇心에 듣다가 아예 中毒됐다.

1989年 結婚해 이듬해에 아들이 태어났고, 4年 뒤 딸도 태어났다. 家庭을 이뤘어도 그는 저녁마다 몰래 라디오를 들었다. 北韓 體制에 對한 忠誠心이 남아있는 아내는 그가 라디오를 들을 때면 다른 房에 건너가 모르는 척했다.

라디오를 통해 그는 6.25戰爭이 北韓이 宣傳하는 대로 北侵이 아니라 南侵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고, 主體思想에서 宣傳하는 自己 運命의 主人은 自己 自身이 아니라는 點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김일성이 死亡했을 때 눈물 같은 건 全혀 흘리지 않았다.

金正日 家庭敎師 脫落 以後 그는 北韓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는 中國語 工夫를 始作했다. 北韓 體制를 讚揚하는 靑年期東海설대 大將 노릇도 더는 하기 싫어 도 職盟委員會 創作課長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5年부터 北韓에선 苦難의 行軍이 始作됐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續出했다. 아내도 職場을 잃었다. 出勤할 곳이 사라지고 장사를 해야 먹고 사는 삶이 始作되지 아내도 變했다. 男便의 勸誘하자 韓國 라디오를 듣기 始作한 것이다.

金 氏는 自身의 決心을 近處에 사는 작은 누나에게도 터놓았다. 작은 누나도 오래 前부터 韓國 라디오를 들었다. 그의 속셈을 들은 누나 家族도 같이 가자고 意氣投合했다.

하지만 한집에 모시고 사는 아버지가 걸렸다. 아버지는 喘息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해 함께 데리고 떠나기는 無理였다. 그렇게 3年이 지났는데, 脫北을 無限定 미룰 수도 없었다.

라디오를 통해 황장엽 勞動黨 祕書의 亡命 消息까지 듣자 마음은 더 多急해졌다. 1998年 설을 쇠자마자 그는 마침내 떠나기로 決斷을 내리고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아버지, 저의 家族은 南朝鮮에 가기로 했습니다. 작은 누나 家族도 함께 갈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걸립니다. 이제부터 동생네 집에 가서 사시면 안 될까요.”

아버지는 이미 豫感을 한 듯한 表情이었다. 淡淡한 목소리로 네 決心이 그러하다면 그대로 하라고 支持해 주었다.

金 氏는 韓國에 오고 나서 自身들이 떠난 지 1年 뒤 아버지가 死亡했다는 이야기를 傳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男동생에게 아버지를 맡기고 온 것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統一되면 自身이 가진 財産을 모두 男동생에게 주겠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다.

하지만 2年 前 男동생마저 癌으로 世上을 떠났다는 消息을 傳해 들었다. 그날 그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한참 뒤 아내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만 울어요. 只今 8時間째 울고 있는 거 알아요?”

밖을 내다보니 새날이 밝고 있었다. 그는 不孝로 우는 自身의 心情을 담아 노래를 作曲했다.

오늘도 꿈길을 가네(김성민 作詞. 김영남 作曲)
그리움의 저 하늘 노을보다 불타는 當身의 그 微笑는
내 삶의 安息處 內 어린 마음에 이 世上 全部이셨던
사무치게 그리운 사랑하는 내 아버지
期約없이 떠난 子息 가슴깊이 묻어두고
기다리실 當身 그리며 오늘도 꿈길을 가네

아픈 매도 들었고 미운 程度 쌓였던 當身의 그 마음은
내 삶의 安息處 내 가는 이 길이 故鄕에 닿아있기를
걸음걸음 손잡아 이끄시는 내 아버지
故鄕으로 가는 그 길 마음으로 열어가리
못다 드린 사랑 바치며 오늘도 꿈길을 가네
2016年 單동에서 鴨綠江을 背景으로 찍은 寫眞. 江 건너가 金 氏가 나서 자란 故鄕 新義州이다.


● 7名이 함께 脫北
1998年 1月 21日. 金 氏는 마침내 脫北길에 올랐다. 그와 아내, 8살 아들과 4살 딸. 그리고 작은 누나와 妹兄, 9살 난 누아의 딸까지 모두 7名이었다.

脫北 經路는 新義州를 떠나 양강도 惠山까지 간 뒤 그곳에서 鴨綠江을 넘을 생각이었다. 그와 작은 누나 家族 모두 너무 가난하게 살지 않았던 터라 漸次 몰래 處分했던 財産도 달러로 換錢해 품속에 두둑하게 챙겼다.

떠난 瞬間부터 事故가 터졌다. 體軀가 가장 健壯한 金 氏가 一行이 가면서 먹을 쌀을 가득 채운 背囊을 멨다.

金 氏는 신의주역에서 一行을 사람들이 빼곡한 汽車에 억지로 밀어 넣고 맨 마지막에 列車 昇降臺에 매달렸다. 그런데 느낌이 異常했다. 뒤를 돌아보니 젊은 꽃제비들이 쌀 背囊 밑을 面刀칼로 짼 뒤 麻袋에 담고 있었다. 이들은 普通 몇 名씩 함께 움직이는데, 일부러 周邊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役割이 있고, 背囊을 찢은 뒤 담는 役割이 있으며, 背囊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背囊끈을 손으로 꽉 잡아당기는 役割이 있었다. 萬若 들켜도 여럿이기 때문에 被害者를 때리고 달아나면 그만이었다.

猝地에 떠나자마자 食糧을 다 잃었다. 그럼에도 돈이 남아 있기에 믿을 구석은 있었다. 迂餘曲折 끝에 慈江道 熙川에 到着해 惠山으로 가는 汽車를 갈아타려 하니 20日에 한 番씩 다닌다는 것이었다. 一行은 列車를 기다리는 동안 逆轉食堂에 짐을 풀었다. 이곳은 國營食堂이었지만, 苦難의 行軍이 始作되면서 從業員들이 먹고 사는 터전이 됐다. 飮食도 팔지만, 宿泊을 提供하고 1人當 1時間에 北韓돈 2원씩 받았다. 一行이 내야 할 돈은 한 時間에 14원, 하루에 336원이었다. 336원은 옥수수 8㎏ 程度 살 수 있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方法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 食堂에 있으면서 食堂 從業員들과 親해졌다. 이들 中 한名의 故鄕이 慈江道 渭原郡이었다. 滿浦 아래에 位置한 委員엔 鴨綠江을 막은 댐이 있는데, 鴨綠江 옆 道路는 湖水를 끼고 구불구불 길어졌다. 겨울이면 委員 사람들은 얼어붙은 湖水를 질러가는데 이럴 때 中國 땅도 經由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듣자 金 氏는 굳이 惠山까지 힘들게 가지 않아도 鴨綠江을 넘을 수 있다는 確信이 생겼다. 그들은 路線을 變更했다. 언제 올지 모를 惠山行 列車를 抛棄하고 萬匍行 列車를 타기로 했다.

며칠 만에 들어온 列車는 지붕까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비닐도 쳐있지 않은 列車 窓門엔 軍人들이 걸터앉아 돈을 준 사람을 안으로 끌어올려주었다. 아이들이 있는 金 氏 一行은 어쩔 수 없이 돈을 주고 列車에 탔다.

列車 內部도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해 一旦 타면 서있는 姿勢조차 바꾸기 어려웠다. 化粧室을 간다는 것은 어림도 없어 生理的 欲求는 선 자리에서 解決해야 했다. 列車엔 惡臭가 가득했다. 이들이 타고도 8時間이 지나서야 列車는 徐徐히 萬捕虜 떠났다.

2018年 韓國文化藝術人協會 送年의 밤 行事에 參加한 金 氏(왼쪽에서 두 番째)가 宋海 先生과 손을 잡고 寫眞을 찍었다.


● 瀋陽에 定着하다
滿浦에 到着하자마자 했던 일은 僞造 公民證(住民登錄證)을 사는 것이었다. 鴨綠江 옆 道路에는 團束 哨所들이 많아 外地 公民證으로는 通過할 수 없었다. 當時엔 國境 옆에서 居住하는 것으로 僞造한 公民證度 場마당에서 1000원에 팔렸다. 公民證을 사다가 安全員에게 걸려 끌려갈 뻔한 아찔한 瞬間도 있었지만, 마침 安全員이 故鄕사람이라 가까스로 危機를 謀免했다.

僞造 公民證 2個를 품고 이들은 委員으로 向했다. 滿浦에서 委員까지는 70里였는데, 中間에 얼어붙은 湖水에 올라가 中國으로 간다는 것이 計劃이었다.

여러 哨所를 어찌어찌해 通過했다. 어둠이 내리기 直前인 午後 6時쯤 다시 團束哨所와 맞닥뜨렸다. 앳돼 보이는 軍人 한 名이 公民證을 보자고 要求했다. 只今까지 했던 것처럼 살갑게 다가가 委員 사람이라고 하면서 먹을 것을 주자, 그 兵士는 銃을 옆에 놓고 허겁지겁 먹기 始作했다. 한참을 먹는데, 小隊 哨所 쪽에서 밥 먹으러 오라는 高喊소리가 날아왔다. 6時부터 7時까지 食事 時間이었는데 이때는 警備隊員 모두가 撤收해 밥 먹으려 간다. 밥이 적으니 交代 食事라는 法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警備가 나오는 7時까지 若干의 時間이 남았다.

金 氏 一行은 軍人이 사라지자마자 鴨綠江으로 내려가 얼음 위를 내달렸다. 마침 날이 어두워져 發覺되지 않았다. 한참을 내달리니 벌거벗은 北韓 민둥山이 아닌 鬱蒼한 山이 앞에 나타났다. 中國에 到着한 것이다.

一行은 山에 올라가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다. 밤을 꼬박 새고 일어나 周邊을 살피니 바로 위에 허름한 집이 하나 있었다. 집에 가서 살피니 젊은 한족이 나무를 패고 있었다.

몇 年 동안 熱心히 배워둔 中國語가 이때 要緊했다. 北에서 왔으니 좀 재워달라고 하자 한족 靑年은 100달러를 要求했다. 다음날 그는 一行을 마을로 데리고 가 朝鮮族 할머니 집으로 案內했다.

말이 통하는 老人을 만나니 눈물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할머니는 “김정일을 鴨綠江에 처넣고 오지 왜 그냥 왔냐”며 人民들을 굶겨 죽이는 北韓 當局을 向해 辱說을 퍼부었다.

그 할머니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이들은 3日 뒤에 瀋陽에 到着했다.

瀋陽에는 찾아갈 사람이 있었다. 新義州에 살 때 한 親戚이 貿易去來를 했는데, 그 大防이 瀋陽에 살았다. 金 氏는 떠나기 前 그의 住所를 외워두었다.

그 사람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자, 暫時 唐慌했던 그는 여기저기 搜所聞해 韓國 牧師를 찾아 連結했다. 當時 宣敎로 中國에 派遣돼 있던 주계명 牧師가 이들을 맞았다. 그는 이들 家族에게 숨어 살 집도 찾아주고, 韓國 企業에서 일감도 따올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中國에서 온家族의 목숨을 살려준 恩人인 주계명 牧師(앞줄 왼쪽에서 두 番째)와 최정숙 私募(앞줄 맨 왼쪽). 3年 前 찍은 寫眞이다.


● 미얀마에서 1年3個月 監獄 生活
그렇게 沈孃에 定着한 이들은 3年을 이곳에서 지냈다. 主 牧師가 生活費와 집貰, 아이들 學費까지 대주는데다, 어른들이 어느 程度 일도 하니 사는 것은 問題가 없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곳에서 살 수는 없는 法. 目的地인 韓國으로 가려니 길이 없었다. 信仰生活도 熱心히 하게 돼 마음도 安定이 됐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不安한 身分으로 中國에 있을 수는 없었다.

金 氏는 無酌定 떠나기로 했다. 地圖 한 場에만 依支해 東南亞에 가서 韓國大使館에 들어가면 方法이 생길 것이라 判斷했다. 當時엔 東南亞나 몽골을 거쳐 韓國에 오는 脫北 루트가 없을 때였다. 그만큼 國境 經費도 허술했다. 쿤밍을 經由해 未安먀 北部에 到着하는 데까지는 큰 問題가 없었다. 하지만 미얀마에서 軍人들에게 逮捕돼 拘置所로 끌려가게 됐다. 그 地域은 郡守, 道知事까지 모두 軍人이었다.

金 氏는 自身들이 얼마나 危險한 곳에 왔는지 알지 못했다. ‘골든 트라이앵글’이라고 불리는 미얀마 北部는 世界 阿片 栽培의 主要 山地였다. 이곳을 25年 동안 掌握하며 한때 美國 헤로인 供給量의 70%를 차지한다는 말이 나왔던 痲藥王 쿤사가 1995年에 降伏하면서 이곳엔 政府軍이 들어왔다.

몇 年 뒤부터 쿤사의 殘存 勢力이 中國 三合會와 손을 잡고 다시 골든 트라이앵글을 支配하고 阿片을 栽培하면서 이곳은 脫北者를 잡아먹는 ‘버뮤다 三角地帶’가 되고 말았다. 極少數 目擊者에 따르면 미얀마 北部를 통해 中國을 빠져나오다 犯罪組織에 逮捕된 脫北民은 이곳에서 奴隸가 됐다. 이들은 깊은 웅덩이에 갇혀 있다가 낮에는 足鎖를 차고 銃口 앞에서 阿片栽培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數字가 얼마나 되는지는 直接 들어가 調査해 본 사람이 없어 알 수가 없다.

金 氏가 逮捕될 때는 多幸히 軍部가 一時的으로 北部를 다스리던 時期였다. 그런데 시스템이 제대로 되지 않아 金 氏 家族은 男女가 따로 갈라져 拘置所에서 9個月을 보내야 했다.

이들은 中國의 主 牧師에게 도와달라고 連絡했고, 主 牧師가 미얀마 主宰 韓國大使館에 連絡을 하는 等 여기저기 뛰어다녀봤지만 도움의 손길은 오지 않았다.

9個月 뒤 이들은 다시 監獄으로 옮겨가 7個月 남짓을 더 보냈다. 金 氏는 監獄에 갇힌 아이들이 미얀마 말을 알아듣고 軍人들과 對話가 되자 큰 不安感을 느꼈다. 이러다가 여기서 永永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恐怖心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韓國大使館에서 이들을 데리려왔다. 大使館에 連絡을 韓紙 8個月 만이었다. 2002年 5月 마침내 金 氏 家族 7名은 韓國에 到着했다.

2018年 夫人의 生日에 온 家族이 함께 모였다. 8살, 4살 때 脫北한 아이들은 이제 어엿한 靑年으로 成長했다.


● “先生님을 招聘합니다”
2002年 8月 金 氏는 家族과 함께 서울 陽川區에 賃貸住宅을 받았다. 모든 脫北民들이 그러하듯이 金 氏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家長이었다.

하나圓을 나오자마자 牛乳代理店에 就職해 6個月 동안 일했다. 서울 生活에 어느 程度 適應되자 그는 北에서 배운 知識을 活用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過去 피아노를 쳤던 經驗을 되살려 피아노 修理工이 되려고 調律學院에 熱心히 다녔다. 그리고 樂園樂器商街 피아노代理店에 就職했다.

樂器商街에는 그가 구경도 못했던 樂器들이 櫛比했다. 어느 날 아코디언 賣場에 들려 練習 삼아 演奏를 했는데, 女社長이 그의 演奏를 가만히 지켜보다 말했다.

“先生님. 그 程度 實力이면 피아노 受理하지 말고 아코디언만 가르쳐줘도 돈을 벌 수 있어요.”

그 말에 希望을 가진 金 氏는 韓國 아코디언 實態를 硏究해보기 始作했다. 그가 봤을 때 韓國 아코디언의 水準은 北韓의 1960年代 水準보다 못했다. 敎本도 全國에 單 한 卷밖에 없었다.

“韓國은 다 發展된 줄 알았는데 아코디언은 正말 人氣가 없구나. 그렇다면 내가 아코디언이란 市場을 한番 開拓해보자.”

그는 큰맘을 먹고 650萬 원이라는 巨金을 들여 이탈리아製 아코디언을 샀다. 두 달 程度 熱心히 訓鍊을 하니 10餘年 前 全盛期 時節의 技倆이 나오기 始作했다. 그는 여기저기 廣告를 해 아코디언 敎習을 始作한다고 알렸다.

熱心히 努力한 끝에 두세 名의 學生이 아코디언을 배우겠다고 찾아왔다. 그中 한 名이 그의 演奏를 찍어 자주 인터넷에 올렸다.

2005年 어느 날 그에게 電話가 걸려왔다.

“여기는 뮤직필드라는 連奏 江의 사이트인데요. 先生님을 招聘하고 싶어 電話했습니다.”

그것이 김영남을 韓國에 알리는 始作이었다. 뮤직필드에서 金 氏는 76個의 아코디언 連奏 講義를 製作했다. 講義를 하려니 敎本이 없어, 스스로 各種 曲을 아코디언 演奏에 맞게 編曲해야 했다.

各各 100曲씩 收錄된 김영남 아코디언 名曲集 1,2卷이 그렇게 나왔다. 그걸 始作으로 그는 數百 曲의 歌謠를 아코디언에 맞춰 編曲하기 始作했고, 只今까지 9卷의 便曲集을 냈다.

뮤직필드를 보고 全國에서 連絡이 왔다. 只今까지 그에게 아코디언을 배운 사람은 數千 名에 이른다.

6월 3일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제1회 김영남 음악회의가 열렸다.
6月 3日 南北統合文化센터에서 第1回 김영남 音樂會議가 열렸다.


● 成功한 人生
아코디언으로 世上에 이름을 알리면서 그의 目標도 漸漸 높아졌다. 2006年 그는 北에서 25名으로 構成된 都給 靑年藝術團을 이끌었던 經驗을 살려 2006年 평양예술단을 만들었다. 이듬해엔 社會的 企業인 NK禮銃度 만들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前까지 그는 18名의 團員들과 함께 全國을 누비며 北韓 藝術을 알렸다. 同時에 그와 家族들도 韓國에 잘 定着했다. 서울에 번듯한 집도 장만했고, 아내는 裁可療養福祉센터 센터長이 돼 老人福祉에 專念하고 있다. 아들도 올해 經歷 7年次의 會社員이 돼 誠實하게 韓國 社會의 一員이 됐고, 딸도 公企業의 正規職 調理士로 成長했다.

작은 누나 家族은 2010年 캐나다로 移民을 갔다. 脫北民 身分이 아닌 韓國人 身分으로 堂堂하게 永住權을 받고 現地에 잘 定着했다.

좋아하는 音樂으로 잘 定着했지만, 金 氏의 마음에는 늘 이루지 못한 꿈이 남아있었다.

“어찌되다 보니 아코디언 演奏家로 알려졌지만, 실은 作曲家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韓國의 音樂을 理解하는데 10年이 걸렸습니다.”

코로나로 活動이 中斷되자 그는 오히려 解放感을 느꼈다. 自身이 하고 싶었던 꿈, 作曲에 邁進할 時期라고 判斷한 그는 藝術團을 다른 사람에게 引繼하고 曲을 만들기 始作했다.

그렇게 만든 6個의 曲으로 올해 6月 第1回 김영남 音樂會를 열었다. 脫北 藝術人들이 아닌 서울對 音樂大學과 有數의 海外 音樂 大學을 나온 人材들과 함께 연 音樂會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품고 살 3가지 꿈이 있다고 말했다.

“于先 죽을 때까지 아코디언 編曲을 繼續 할 겁니다. 韓國 아코디언의 技術 發展에 한 劃을 그은 사람이라는 評價를 받고 싶습니다.”

이는 그가 只今도 鍾路에 허름하긴 하지만, 그래도 自身의 이름을 딴 아코디언 學院을 維持하며 弟子들을 키우는 理由이기도 하다. 감칠맛 나는 김영남만의 奏法 映像은 只今도 유튜브에 수많이 찾아볼 수 있다.

“두 番째 目標는 世界가 認定하는 曲을 만드는 것입니다. 勿論 제 欲心이겠지만, 그래도 脫北者라는 身分을 넘어 世界에 大韓民國 音樂을 알리는 堂堂한 音樂人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그가 自身의 이름을 딴 音樂會를 연 理由였다. 앞으로 그는 音樂會를 2回, 3回로 繼續 이어갈 생각이다.

“세 番째 目標는 脫北民들을 위해 뭔가 하고 싶습니다. 저는 韓國에서 20年 넘게 살아오면서 正말 幸福했고, 後悔가 없었고, 또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一部 脫北民은 定着에 失敗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저는 잘 살았지만 저만 잘 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도우면서 살고 싶습니다.”

幼稚園 時節부터 金 氏는 海外에 音樂 留學을 떠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只今 삶을 돌아보면 그는 K팝의 元祖 大韓民國에 留學이 아닌, 音樂人으로 堂堂히 定着했다. 그의 人生은 成功이었다.

東亞日報·南北하나財團 共同企劃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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