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庶子 出身 主導한 甲午改革, 日 閔妃殺害로 무너져[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東亞日報

庶子 出身 主導한 甲午改革, 日 閔妃殺害로 무너져[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2月 4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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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단발령 포고에 따라 남성들이 상투를 손질하는 모습으로 알려진 사진. 상투 자르는 것을 신체적 정신적 박해로 받아들인 일부 백성들은 단발령에 극렬히 반대했다. 나무위키 제공
舊韓末 斷髮令 布告에 따라 男性들이 상투를 손질하는 모습으로 알려진 寫眞. 상투 자르는 것을 身體的 精神的 迫害로 받아들인 一部 百姓들은 斷髮令에 극렬히 反對했다. 나무위키 提供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1894年은 韓國 近代史의 分水嶺이었다.

金玉均 暗殺, 東學農民軍 蜂起, 淸日戰爭 勃發이 연이어 일어났고, 무엇보다도 甲午改革(甲午更張)李 始作됐다.

內亂(東學蜂起)과 外勢(日本侵略)의 틈바구니에 좁게 난 낭떠러지에서 試圖된 이 ‘革命的’ 改革은 開港 以後 朝鮮社會가 쌓아온 力量과 限界를 同時에 보여준 것이었다.

結局 絶壁 아래로 굴러 떨어졌지만, 우리 社會는 아마도 그것이 稀微하게 비춘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改革과 外勢 둘러싼 ‘難題’

1894年 봄 勃發한 동학農民 蜂起는 애初에는 20年에 걸친 高宗과 閔氏 政權의 虐政에 對한 抗拒였다. 그 칼날을 謀免하려고 政權은 金弘集, 金允植, 魚允中 等 開化派 人士들을 一部 登用했다. 1884年 甲申政變 失敗 後 10年間 찬밥만 먹던 人士들이었다. 甲午改革은 淸日戰爭(1894年) 以前에 東學軍 蜂起가 觸發시킨 것이다. 7月 日本軍의 景福宮 쿠데타로 閔氏 政權이 무너지고 甲午政府가 들어서자 閔氏 20年 政權 下에서 볼 수 없었던 改革 政策들이 瀑布水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朝鮮八道에 人材들이 없어 못 했던 것이 아니었다. 人材들을 쓸 政權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改革 政權의 權力 基盤은 脆弱했고, 淸日戰爭에서 日本이 連戰連勝하자 그 影響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改革과 外勢라는 韓國近代史를 貫通하는 ‘아포리아(答을 찾기 어려운 難題)’를, 이 甲午改革만큼 赤裸裸하게 보여준 것은 없다.

하지만 甲午改革에서 日本의 影響力을 過度하게 評價할 必要는 없다. 그때까지 朝鮮에서 淸에 比較할 수 없을 程度로 劣勢였던 日本이 하루아침에 위안스카이처럼 君臨할 수는 없었다. 日本은 그해 9月 平壤戰鬪에서 請을 擊破하고서도 統監府나 總督府를 設置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通商 外交機關인 朝鮮駐在 公使館을 통해 朝鮮 內政에 介入하는 데 머물렀다.

1894年 10月에 메이지維新 元勳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6∼1915)가 公社로 派遣됐지만 그 亦是 김홍집(1842∼1896)-박영효(1861∼1939) 聯立政府를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 日本이 派遣한 顧問官들도 單純한 諮問役에 不過했다. 日本은 淸日戰爭의 名分을 ‘朝鮮의 獨立’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대놓고 그것을 해치는 行爲는 敢行하기 어려웠다. 改革政權은 1895年 以後 3年間 日本의 經濟援助에 依存하되, 1898年 以後에는 自立하려는 플랜을 갖고 있었다. “그런 意味에서 甲午政權 樹立이 곧바로 日本의 保護局으로의 轉落을 의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向後 甲午改革의 推進 方向과 成果에 依해 朝鮮이 獨立主權國家와 近代國家로의 改革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保護國으로 轉落하느냐 하는 問題가 決定”될 것이었다.(왕현종, ‘韓國 近代國家의 形成과 甲午改革’)

軍國機務處로 改革 드라이브

구한말 화가 조석진이 갑오개혁을 추진했던 군국기무처의 회의 장면을 그린 그림. 구성원 절반 이상이 서자 출신이었던 군국기무처는 궁중과 정부의 분리, 교과서와 공문서에 한글 사용 등 체제 개혁에 나섰다. 위키피디아 제공
舊韓末 畫家 조석진이 甲午改革을 推進했던 軍國機務處의 會議 場面을 그린 그림. 構成員 折半 以上이 庶子 出身이었던 軍國機務處는 宮中과 政府의 分離, 敎科書와 公文書에 한글 使用 等 體制 改革에 나섰다. 위키피디아 提供
이렇게 열린 政治的 空間을 活用해 甲午改革派들은 軍國機務處라는 改革司令部를 두고 改革 드라이브를 걸었다. 놀랍게도 軍國機務處 核心 멤버 中 半 程度가 庶子 出身이었다. 外務次官 김가진(1846∼1922), 財政部次官 안경수(1853∼1900), 서울市長 권재형(1854~1934) 等이다. 惡名 높은 朝鮮의 庶子 差別을 생각할 때 쉽사리 믿기지 않는 일이다. 參考로 1864年부터 1894年까지 30年 동안 堂上官 職位에 오른 375名의 高官 中 庶孼과 中人 出身 官僚는 各各 2名과 1名에 不過했다. 또 核心 멤버 大部分이 美國, 日本, 淸 等 外國 經驗이 있었고, 過去에 合格하지 않은 者도 相當數 있었다. 要컨대 朝鮮 歷史上 初有의 權力機關 構成이었다. 이들이 旣存의 어떤 政府보다도 積極的으로 體制 改革에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改革政府는 民族主義的 政策을 쏟아냈다. 中國年號 代身 朝鮮의 個國을 起點으로 하는 開國紀年, 그리고 讀者의 年號를 採用했고, 敎科書와 公文書에 한글을 使用하기로 했다. ‘造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비롯해 廳과 맺은 不平等條約을 改正하려 했으며, 위안스카이 때문에 挫折됐던 西洋 各國에 對한 公使 派遣을 再開하려고 했다. 宮中과 政府의 分離, 財政·司法制度의 近代的 改革을 計劃하거나 實施했고, 이 中 司法改革은 公平한 裁判을 받을 機會를 保障하는 改革措置로서 韓國 司法 史上 劃期的 意義가 있는 것이었다. 惡質的인 奴婢制度度 革罷됐고, 庶孼·中人·女性 같은 社會的 弱者에 對한 待遇도 改善됐다.(국사편찬위, ‘新編韓國史40: 淸日戰爭과 甲午改革’)

改革 可能性 보인 박영효 內閣


1895年 4月 淸日戰爭이 끝나자마자 벌어진 三國干涉으로 日本 勢力은 멈칫했다. 이 틈을 노린 것이 風雲兒 박영효였다. 日本 亡命에서 돌아온 朴泳孝는 日本의 期待와는 달리 이노우에 工事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高宗과 閔妃에게 接近해 日本과 김홍집 勢力을 누르고 1895年 5月 政府를 掌握했다. 박영효 內閣의 構成員은 平均年齡이 42歲였고, 30代도 5名이나 됐다. 18名의 內閣構成員들 中 10名이 오랫동안 美國에서 生活한 사람들이었으며, 大部分이 그 後 獨立協會의 指導者가 되었다.

박영효 內閣은 두 달로 短命했지만 韓國近代改革運動에 印象的인 可能性을 보여줬다. 開化派가 獨自的인 權力 基盤 形成에 나선 것이다. 甲午改革이 成功하려면 日本이나 王權과 隻을 져서도 곤란했지만, 一旦 有事時에 그들을 누를 수 있는 改革派 讀者의 權力 基盤이 必要했다. 11年 前 性急했던 金玉均은 이에 對한 考慮 없이 無謀한 쿠데타로 自滅했었다. 官僚型 政治人인 김홍집에게도 이를 期待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1884年 甲申政變 以來 死線을 넘나들어온 權力型 政治人 朴泳孝는 달랐다. 朴泳孝는 朝鮮協會라는 組織을 만들어 自身의 政黨으로 삼고자 祈禱했다. 비록 實現되지는 않았지만 朝鮮協會는 後날 獨立協會로 連結된다. 또 觀察使를 새로 任命해 地方 管制를 權力 基盤으로 만들려 했다. 武力 確保에도 注意를 기울였다. 近代式 小銃으로 武裝한 670名의 警察을 組織했고, 士官學校 出身 將校가 指揮하는 約 7800名 規模의 常備軍을 組織하려고 했다. 甲午改革 中에 가장 大膽한 軍制改革 試圖였다.(‘신편한국사40: 淸日戰爭과 甲午改革’)

이 野心 찬 試圖는 結局 高宗·閔妃와 衝突했다. 7月 朴泳孝는 逆謀 嫌疑를 받고 다시 日本으로 亡命했다. 이어서 甲午政府는 閔妃 殺害라는 日本의 天人共怒할 蠻行과 高宗의 俄館播遷으로 무너졌지만, 한番 터진 改革의 물꼬는 쉽사리 닫히지 않았다. 速度는 더뎌지고 後進하는 境遇도 있었지만, 朝鮮은 甲午改革 前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1894年 #甲午改革 #軍國機務處 #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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