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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日戰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東亞日報

‘淸日戰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1月 7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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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 보병들이 사격을 하는 모습. 청일전쟁은 아시아 패권을 걸고 조선 땅에서 청일이 맞붙은 전쟁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싸우려면 조선 밖에서 싸우라”고 무력하게 외칠 뿐, 이들을 막아낼 군사력도 외교력도 없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894年 淸日戰爭 當時 日本 步兵들이 射擊을 하는 모습. 淸日戰爭은 아시아 霸權을 걸고 朝鮮 땅에서 靑일이 맞붙은 戰爭이다. 當時 朝鮮 政府는 “싸우려면 朝鮮 밖에서 싸우라”고 無力하게 외칠 뿐, 이들을 막아낼 軍事力도 外交力도 없었다.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1894年 韓半島에서 淸日戰爭이 勃發했다. 韓半島에서 戰爭이 일어난 것은 1637年 丙子胡亂 後 無慮 250餘 年 만이었다. 이렇게 오랜 期間 戰爭이 없는 것은 世界史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그것은 팍스 시니카(Pax Sinica·廳에 依한 平和)로 可能한 것이었다. 朝鮮은 ‘請에는 事大外交, 日本에는 交隣外交’라는 精巧한 外交術로 ‘태평천하’를 謳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結果 朝鮮은 當時 有數한 國家 中 가장 非武裝狀態에 가까운 國家가 되었다.》

‘天下의 要衝地’ 韓半島의 눈물

國際情勢가 이렇게만 持續되었다면 別 問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世紀 中盤 大變動이 찾아왔다. 메이지 日本이 新興勢力으로 팍스 시니카에 挑戰한 것이다. ‘天下의 要衝地’ 韓半島는 國際情勢의 大變動, 卽 霸權다툼이 벌어지면 늘 試鍊에 直面하곤 했다. 誦에 對한 몽골의 挑戰으로 考慮는 쑥대밭이 되었고, 名에 對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누르하치의 挑發은 壬辰倭亂·丁卯胡亂·丙子胡亂을 불러왔다. 250餘 年 만에 霸權다툼이 벌어지자 韓半島는 또다시 그 한복판으로 끌려들어갔다. 그 70年 뒤에는 微笑 霸權다툼 속에서 6·25戰爭이 벌어졌다. 그 後 70年間의 平和가 찾아 왔지만, 昨今 벌어지고 있는 美中 霸權다툼은 그런 面에서 매우 不吉하며 北核과 臺灣 問題는 그 鮮明한 徵兆다.

1884年 甲申政變 失敗로 日本勢力은 韓半島에서 물러나고 朝鮮은 淸의 위안스카이와 閔氏 勢力의 獨판이 되었다. 이로부터 淸日戰爭이 일어난 10年 동안 實質的인 ‘朝鮮痛感’ 위안스카이와 閔氏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時間에는 物理的 時間과 歷史的 時間이 있다. 같은 10年이라도 例를 들어 1820∼1830年의 10年과, 이 時期 10年의 ‘歷史的 密度’는 天壤之差다. 世上은 10倍의 速度로 變해가고 있었다. 密度가 높은 時期인 만큼 더욱 濃密하게 살아내야 했지만, 朝鮮의 爲政者들과 朝鮮을 改革한답시고 君臨하던 위안스카이가 이 10年 동안 무슨 改革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동안 日本은 西南戰爭(西南戰爭)이라는 內亂을 鎭壓하고 本格的으로 富國强兵과 文明開化에 邁進했다. 그 主役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다. 莫大한 戰爭費用으로 인플레이션이 發生하자 地主들의 反撥을 억누르고 超緊縮戰爭을 斷行했다(마쓰가타 디플레이션). 그 效果로 1880年代 中盤 ‘工業發興’이라 불리는 好景氣가 찾아왔다. 稅收는 늘어났고 豫算의 10%臺에 머물던 軍事費는 25%를 突破했다. 1889年에 憲法을 制定하고 議會를 開設하여 反政府勢力까지도 日本이라는 國家 밑에 結集시켰다.

이 ‘密度 높은 歷史的 10年’李 모든 걸 결정지었다. 征韓論紛爭(1873年), 壬午軍亂(1882年), 甲申政變(1884年) 等에서 마주한 韓日의 國力 車는 아직 日本이 함부로 할 수 있을 程度는 아니었다. 그러나 1894年 淸日戰爭 直前 韓日의 國力 隔差는 甚하게 벌어져 있었다. 10年 前의 國力 差만 維持되었더라도 日本은 敢히 韓半島를 侵略하지 못했을 것이다. 個人 間에 벌어진 是非에서는 남을 탓할 수도 있다. 그러나 國家 間에는 第一 먼저 自身에 嚴重하게 責任을 물어야 한다. 日本의 侵略根性에 對한 批判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淸日, 韓半島서 ‘朝鮮 爭奪’ 戰爭

全琫準이 이끄는 東學蜂起가 일어나자 朝鮮 政府는 淸에 鎭壓軍을 要請했다. 애初에는 淸道 日本도 골치 아파했다. 청은 派兵을 선뜻 決定하지 못했다. 日本 亦是 靑軍에 東學軍 鎭壓을 맡기자는 意見과, 請이 派兵하면 日本도 卽時 派兵해야 한다는 意見이 맞섰다. 日本 內에서는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陸軍參謀次長을 筆頭로 軍部가 卽時 派兵을 主張했고, 애初엔 신중했던 外務大臣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가 이에 同調했다. 受賞 이토 히로부미는 靑果의 軍士衝突이 부담스러웠으나 野黨이 國內問題로 政府 不信任 決意를 하는 等 國內 情勢에 突破口가 안 보이자 開戰으로 기울었다.

日本軍의 派兵은 豫想보다 迅速했고 大規模였다. 淸軍이 忠南 牙山으로 들어온 데 비해 日本軍은 仁川을 통해 들어와 서울을 掌握했다. 한때 전주성까지 占領했던 東學軍은 이미 解産한 狀態였다. 駐屯 名分이 사라지자 靑軍은 撤收를 提案했으나, 이미 大軍을 派遣하여 ‘다른 欲心’이 생긴 日本은 拒否했다. 하지만 撤兵拒否의 名分이 必要했다. 外務大臣 무쓰조차도 “表面上 마땅한 口實이 없어 交戰할 理由도 없었으므로, 이러한 踏步的人 局面을 打開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外交的인 政略을 통해 이런 政局을 一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狀況”이었다고 回顧錄(무쓰 무네미쓰 ‘件件錄’)에서 告白하고 있다.

무쓰는 請에 朝鮮을 이대로 놔두면 壬午軍亂, 甲申政變, 東學軍 蜂起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 繼續 ‘東洋의 禍根’이 될 터이니 이참에 淸日 兩國이 共同委員會를 構成해 朝鮮內政을 改革하자고 提案했다. 靑 혼자만 먹지 말고 나눠 먹자는 心算이었다. 이에 청은 “朝鮮의 改革은 朝鮮 스스로가 할 일이며 中國조차도 아직까지 內政干涉을 안 하고 있다. 日本국은 처음부터 朝鮮이 自主國임을 認定해왔으니 더더구나 內政에 干涉할 權利가 없다”고 拒否했다. 繼續 獨차지하겠다는 말이었다. 이런 論議에 朝鮮 政府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韓半島 威脅하는 ‘歷史의 反復’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승리한 상황을 풍자한 영국 잡지 ‘펀치’의 삽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894年 淸日戰爭에서 日本이 中國을 相對로 勝利한 狀況을 諷刺한 英國 雜誌 ‘펀치’의 揷畵.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結局 日本軍은 淸軍을 先制攻擊했다. 朝鮮이 參與하지도, 願하지도 않은 戰爭이 朝鮮 땅에서 벌어진, 類例없는 戰爭이었다. 當時 朝鮮 政府는 “싸우려면 朝鮮 밖에서 싸우라”고 했지만 兩軍의 上陸을 막아낼 軍事力도, 이런 말도 안 되는 狀況을 世界 各國에 呼訴할 外交力도 없었다. 戰爭은 百姓에게 莫大한 苦痛을 안겼지만, 戰爭 後에도 國王 高宗과 閔氏 勢力은 健在했다. 위안스카이 자리를 日本이 차지했을 뿐이었다.

淸日戰爭으로 長久한 歲月동안 維持되어 왔던 中國의 影響力은 사라졌다. 그 틈을 러시아와 日本이 치고 들어왔다. 그러나 中國勢力은 6·25戰爭 參戰으로 不過 50餘 年 만에 韓半島에 復歸했다. 南쪽에는 日本 代身 美國이 들어왔다. 最近 激化되는 美中 對立은 ‘天下의 要衝地’ 韓半島를 다시 威脅하고 있다. 可恐할 만한 歷史의 反復이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條件이 있다. 繼續되는 歷史의 장난 속에서도 期於이 先進國이 된 大韓民國이라는 存在다. 大韓民國의 市民들이야말로 ‘歷史의 장난’을 拒否할 ‘民族史의 主體’다. ‘淸日戰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淸日戰爭 #팍스 시니카 #태평천하 #非武裝狀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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