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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 漁夫들은 왜 每年 鬱陵島를 往復했을까[전승훈의 아트로드]|東亞日報

全羅道 漁夫들은 왜 每年 鬱陵島를 往復했을까[전승훈의 아트로드]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2月 11日 12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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鬱陵島 北西쪽 끄트머리 태하리 海邊에는 ‘大豐감(待風坎)’이 있다. ‘바람을 기다리는 絶壁’이라는 뜻의 커다란 바위가 바닷쪽으로 삐죽 나와 있는 形態다.

鬱陵島에는 예로부터 배를 만들기에 알맞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많아서 새로 배를 만들어 完成하게 되면 大豐感에서 바위에 밧줄을 매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에서 세찬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 돛이 휘어질 程度로 세찬 바람이 불면 한달음에 東海岸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고 한다. 動力船이 開發되기 前에는 鬱陵島에서 陸地로 가기 위해서는 大豐感에서 北西風이 불기를 기다려야 했다.

지난달 鬱陵島를 찾았을 때 大風감 絶壁 위를 올랐다. 大豐感에 오르기 위해서는 태하海邊에 있는 태하香木觀光 모노레일을 利用하면 된다. 總延長 304m 길이의 모노레일은 20人乘 짜리 2個의 칸으로 돼 있다. 頂上까지는 約 6分이면 到着을 한다. 모노레일은 出發하자마자 最大 登板角度가 39度나 되는 急激한 바위山의 傾斜를 오른다.

태하香木觀光 모노레일
그러나 急傾斜에서도 언제나 自動으로 水平을 維持해주기 때문에, 便安하게 利用할 수 있다. 고개를 돌려 窓밖을 쳐다보면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下車 後에 태하燈臺까지는 約 500m 程度를 걷게 된다.

태하燈臺
태하燈臺를 지나면 태하香木展望臺와 大豐감 展望臺가 있다. 展望臺는 아랫部分이 鐵製 構造物로 돼 있는데,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大豐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바람이 올라온다. 추운 겨울에 大豐感의 바람을 제대로 맞아볼 수 있는 機會다.

展望臺에서 바라보는 왼쪽이 바로 大豐感의 柱狀節理 絶壁이다. 絶壁 바위 틈에서 모진 바람을 맞으며 大豐감 香나무들이 歲月을 견뎌내고 있다.

위태롭고 切迫해서 더욱 아름답고, 希望마저 갖게 하는 작은 香나무들이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鬱陵島의 北쪽 海岸이 펼쳐진다. 학포마을과 玄圃, 노인봉과 송곳鳳(推算)李 어깨춤을 추듯 불쑥불쑥, 삐죽삐죽 이어집니다. 바다 위에는 코끼리바위(공癌)가 귀여운 공처럼 떠 있다. 韓國觀光 100線, 10代 祕境이란 讚辭를 들을 만한 絶景이다.



全羅道 漁夫들이 故鄕가는 배를 기다리던 大豐감
朝鮮時代 政府는 鬱陵島에 對해 ‘공도政策’ ‘刷還政策’을 펼쳤다. 鬱陵島가 東海岸에 들끓는 倭寇들의 前哨基地가 될 것을 憂慮해 섬에 住民들을 아예 비워놓는 政策이었다. 朝鮮政府는 2~3年에 한番씩 鬱陵島에 수土沙를 派遣해 사람들을 搜索하고, 日本人은 追放하는 政策을 펼쳤다.

그렇다면 나라에서 아무도 살지 말라고 하는 鬱陵島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

1882年 鬱陵島 檢察師로 派遣된 이규원은 鬱陵島에 朝鮮人이 140名, 日本人 78名이 살고 있었다고 報告했다. 朝鮮人 140名 中 115名이 全羅道 出身이었다고 한다. 大部分 麗水, 巨文島, 高興半島 隣近에 살던 全羅道 사람들로서 배 運航에 老鍊한 技術을 가진 뱃사람들이었다.

鬱陵水土歷史記念館에 展示돼 있는 數土沙가 타고 왔던 배.
“全羅道 사람들은 春三月 東南風을 利用해 돛을 달고 鬱陵島에 가서 나무를 伐採하여 새로운 배를 만들고 여름내 미역을 採集해두었다가 가을철 하늬바람(北西風)李 불면 木材와 海藻類 그리고 고기를 가득 싣고 하늬바람에 돛을 달고 南下하면서 지나온 浦口에서 販賣하거나 物物交換을 하면서 巨文島로 歸鄕하였다.” (전경수 ‘鬱陵島 오딧세이’)

鬱陵島는 開拓令 以前부터 全羅道 사람들의 往來가 많았다. 이른바 ‘螺旋’이라고 불리는 全羅道 出身의 배가 千部 海岸을 中心으로 많이 오갔다고 한다. 이들은 봄에 南東風이 불 때면 배 한 隻에 타고 건너와 여름 동안 배를 建造하고 미역을 따고 고기를 잡아서, 鬱陵島에서 乾燥한 배를 各自 한 隻씩을 몰고 돌아갔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 始作되는 11月末, 大豐感에서 北西風이 불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全羅道에서 鬱陵島까지 어떻게 動力도 없는 木船을 타고 오갈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 주변의 해류 (국립해양조사원)​
우리나라 周邊의 海流 (國立海洋調査員)?
그것은 바로 海流와 바람의 힘이다. 鬱陵島에는 南쪽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쿠로시오海流(桐한亂流)가 있다. 봄에 이 海流를 타면, 南쪽에서 鬱陵島로 航海하기가 豫想 外로 쉽다고 한다. 바다를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季節과 海流에 對한 知識이 豐富했기 때문이다. ??

울릉도 바다의 자리돔떼
鬱陵島 바다의 자리돔떼
實際로 鬱陵島에서 다이빙을 해보면 海流의 흐름을 알 수 있다. 바로 鬱陵島 바닷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자리돔떼다. 元來는 濟州 앞바다의 따뜻한 亂流에 살고 있는 자리돔이 요즘에는 鬱陵島 앞바다에도 가득하다. 쿠로시오 海流, 冬寒亂流를 타고 올라온 자리돔떼다.

울릉도 바다의 자리돔떼
鬱陵島 바다의 자리돔떼
울릉도 바다의 대황숲.
鬱陵島 바다의 大黃숲.


태하海邊散策路
태하海邊散策路 (鬱陵海담길 6-2코스)
大豐感에서 내려갈 때는 모노레일을 타지 말고 ‘태하海邊散策路’ 方向으로 내려가는 方法도 괜찮다. 태하香木展望臺에서 밑으로 내려가면 鬱陵海담길 散策路 6-2코스가 나온다. 숲 속 길을 걸어서 내려가다보면 ‘가재굴’이라고 불리는 海邊의 絶壁 洞窟이 나온다.

가재굴
‘가재굴’의 뜻은 무엇일까. 鬱陵島와 獨島에 남아 있는 ‘假題 바우’ ‘가재 바위’ ‘假題굴’이라는 이름은 바로 ‘獨島 강치’로 有名한 바다獅子(또는 물개)가 살았던 바위나 굴을 意味한다. 江치는 當時에 ‘가지어(可支魚)’로 불렸는데, ‘假題’ ‘가재’는 모두 강치를 指稱하는 말이다.

元來 鬱陵島에 살던 가지어(강치)는 20世紀 初에 鬱陵島에서 밀려나 獨島를 據點으로 살게 된다. 그런데 가지어는 日帝에 依해 大擧 屠殺되고 濫獲돼 滅種하기에 이른다.

태하海邊散策路를 걷다보면 鬱陵島를 덮고 있는 粗面巖의 實體를 볼 수 있다. 火山活動에 依해 생겨난 粗面巖은 風化作用으로 벌집模樣의 구멍이 가득하다. 海邊散策길을 걷다보면 날카로운 매와 禿수리의 부리처럼 생긴 멋진 粗面巖 바위가 있다.

태하海邊散策路 禿수리바위.
태하海邊散策路 禿수리바위.
‘禿수리 바위’ ‘매바위’로 불리는 바위다. 海邊 散策길에서는 태하黃土굴이 있는 황토구미度 볼 수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아도 바위 밑의 붉은色 黃土가 鮮明하다.

황토구미.


鬱陵島 指名에 남아 있는 全羅道 方言
鬱陵島와 獨島는 浦項과 217km 떨어져 있는 東海의 외딴 섬이다. 周邊은 水深이 2000m가 넘는 甚해다. 그런데 慶尙北道에 屬해 있는 鬱陵島의 地名에는 豫想 外로 全羅道 사투리가 많이 남아 있다.
가장 代表的인 것이 獨島의 ‘補刹바위’다. ‘補刹’은 全羅道 地域 사투리로 ‘거북손’을 뜻하는 말이다. 거북손은 南海岸 地域에서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 生物로, 무쳐서 먹으면 別味다. 鬱陵道民들도 ‘거북손’이라는 말보다는 ‘補刹’이라는 말을 익숙하게 使用한다. ??

나리盆地에 있는 ‘閼逢’ 案內文에도 ‘全羅道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러 왔다가 알처럼 생긴 봉우리라고 해서 ’閼逢‘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說明이 붙어 있다.

또한 鬱陵島 海邊의 곳곳에도 全羅道 方言으로 된 地名이 許多하다. ‘통구미’ ‘황토구미’ 等의 ‘-龜尾’는 全羅道 方言으로 海岸이 쑥 들어간 地形을 말한다. 港口로 利用할 수 있는 좁고 깊숙하게 들어간 만을 뜻하죠. ‘大豐감’의 ‘感(坎)’도 ‘-龜尾’를 漢字語로 表現한 말로, 바닷가 絶壁에 움푹 들어간 땅이라는 뜻이다.

玄圃는 元來 옛 이름이 ‘街문작지’였다. 全羅道 方言으로 ‘-작지’는 자갈돌들이 널려 있는 海邊가를 말한다. ‘검을 現(玄)’字를 쓰는 玄圃는 바닷물이 검게 보인다고 해서 ‘街문작지’(검은 자갈海邊이라는 뜻)로 불렸다고 한다.

玄圃 海邊에 있는 노인봉
이 밖에도 ‘와달’(작은 돌들이 널려 있는 긴 海岸), ‘걸’(물고기나 水草가 모여 있는 넓적한 바닷속 바위), ‘독섬(돌섬)’ 等이 鬱陵島 指名에 남아 있는 全羅道 方言이다.

鬱陵島 海岸道路 事態감 터널.
그래서 獨島의 領有權 紛爭에 있어서도 全羅道 方言을 硏究해야 한다는 主張이 學界에서 나온다. 바로 石島(獨島)를 大韓帝國의 領土로 한다고 밝힌 ‘大韓帝國勅令 41號(1900年 10月25日)’에 對한 올바른 解釋에 對한 內容이다. 勅令에는 鬱陵島의 管轄區域을 ‘鬱陵 顚倒(全島)와 粥도(竹島), 石島(石島)’라고 規定했다.

獨島
전경수 서울대名譽敎授(人類學科)는 ‘“獨島에 對한 領有權은 바로 위의 大韓帝國勅令에서 明示한 ‘石島’가 只今의 ‘獨島’ 임을 證明하면 된다”며 “이를 위해서는 全羅道 方言을 硏究해야 한다”고 强調한다. 鬱陵島를 來往했던 全羅道 흥양 脂肪(麗水, 巨文島, 高興半島 等)의 漁夫들이 불렀던 ‘독섬’(돌섬의 全羅道 方言)에 解答이 있다는 이야기다.

獨島
全羅道 方言에서는 只今도 ‘돌’을 ‘독’이라고 부른다. ’독섬‘이라는 全羅道 方言을 大韓帝國의 公文에서 漢字로 ’石島‘(돌石+섬도)라고 적었다는 解釋이다. 前 敎授는 “우리가 요즘 부르는 ’獨島(獨島)‘는 發音을 中心으로 지은 이름이고, ’石島‘는 意味 中心으로 지은 이름으로 같은 섬”이라고 말한다.

鬱陵크루즈에서 바라본 鬱陵島 前景.
朝鮮 政府는 섬을 비워놓는 공도政策을 펼쳤지만, 民草들은 每年 海流를 타고 排他고 섬을 찾아와 나무를 베고, 배를 만들고, 미역을 따서 바람을 타고 다시 故鄕으로 돌아오는 먼 旅行을 했다는 事實이 놀랍다. 그 重要한 삶의 現場이 바로 ‘大豐감’이다.


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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