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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技人生 50年, 두리랜드 33年 俳優 임채무 “餘生은 醫療奉仕 다니며 살고 싶다”[복수자들]|동아일보

演技人生 50年, 두리랜드 33年 俳優 임채무 “餘生은 醫療奉仕 다니며 살고 싶다”[복수자들]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6月 3日 15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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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50周年을 맞은 ‘援助 멜로丈人’ 俳優 임채무.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 캡처
日日連續劇, 週末드라마 안房劇場의 ‘탤런트’로 50年, 運營할수록 損害가 더 큰 놀이公園 ‘社長님’으로 33年을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 새 나이는 七旬을 넘었습니다. 人生 後半部 餘生은 40年 前 품었던 宿願을 이루며 살아보기로 다짐했습니다. 올해 데뷔 50周年을 맞은 俳優 임채무(75)의 이야기입니다.

40年 前, 全國을 돌아다니며 드라마 撮影을 다녔던 10年 차 俳優 임채무에겐 所願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이 모여 사는 山間僻地에 醫療奉仕를 다니는 것. 40年 前이나 只今이나 都市로부터 한참 떨어진 시골의 醫療 인프라는 劣惡합니다. 限平生 농사짓느라 몸을 쟁기처럼 써왔던 어르신들 大部分 무릎과 허리에 골病이 들었지만 제때 治療를 받기란 어려웠습니다. 시골엔 큰 病院이 없었던 탓에, 診療라도 받으려면 大都市로 나와야 하지만 交通便도 如意치 않은 곳이 大部分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歲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을 지켜볼 時間도 없이 하루하루 살다가 이 나이가 됐다”는 임채무. 七旬이 넘은 나이, 子息이 子息을 낳아 손주를 둔 할아버지가 된 後에야 오랜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4月부터 自身의 이름을 내건 藝能 ENA ‘임채무의 浪漫닥터’를 進行하게 된 겁니다. ‘임채무의 浪漫닥터’는 移動治療所 車를 타고 다니며 全國 各地를 찾아 醫療奉仕를 하는 프로그램으로, 早晩間 시즌2 撮影을 앞두고 있습니다. 임채무는 이番 시즌에서도 出演料를 받지 않습니다. “늘그막에 奉仕한답시고 始作했지만 結局 내가 얻는 게 더 많더라”는 그를 最近 景氣 楊州의 두리랜드에서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지난해 放映된 ‘임채무의 浪漫닥터’ 시즌1에 이어 시즌2에도 임채무는 出演料를 받지 않을 計劃이다.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 캡처
―‘임채무의 浪漫닥터’ 시즌2 撮影을 앞두고 계십니다.
“(시즌1 撮影 때) 7個月 동안 20個 넘는 邑面리 시골을 다녔어요. 가서 보니까 어르신의 99.9%가 무릎, 허리는 基本으로 故障이 나 있는데 病院을 안 가시는 거예요. 왜 안 가시느냐 물으면, 마을 交通便이 아무리 좋아도 아침에 한 番, 저녁에 한 番 아니곤 버스가 오질 않는다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큰 理由는 시골엔 病院이 없잖아요. 病院 가려면 大都市로 나와야 하고 겨우 豫約을 하면 患者가 워낙 몰리니 診療도 미뤄지고…. 그러다 보면 버스가 끊겨서 집에 오기 힘들고. ‘에라 모르겠다, 귀찮다’ 하면서 病院을 안 가는 거죠.”

―醫療奉仕 하겠다 마음 먹으신 게 40年 前이시라고요.
“全國 各地를 돌아다니며 드라마 撮影을 하고 夜間 業所나 地域 祝祭에서 行事 뛰던 時節이에요. (시골의 醫療施設이) 그때는 只今보다 훨씬 劣惡했어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나이 들면 시골로 醫療奉仕를 다니며 살아야겠다고요. 어르신들 治療도 해드리고 맛있는 飮食도 먹여드리고 싶다. 診療 椅子, 醫療器具, 寢臺, 冷藏庫 같은 게 다 들어갈 수 있는 버스가 한 臺 있으면 참 좋겠다. 構想만 한 게 아니라 實際로 해보려고도 했어요. 故 김우중 대우그룹 會長님이 도와주려고 하셨어요.”

―金宇中 會長과는 어떤 因緣이었나요.
“當時 演藝人들로 이뤄진 ‘無窮花 蹴球團’이 있었어요. 그때 金宇中 會長이 우리 蹴球團을 支援해주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大韓民國 公務員들, 特히 警察, 市廳, 區廳 公務員들이 運動할 時間이 없어서 運動을 못 한다고 하더라. 억지로라도 運動을 해야 몸도 精神도 健康해진다. 有名한 演藝人들이 親善 蹴球大會 하자고 하면 運動하러 나올 것이니 公務員들 불러내서 같이 運動하라.’ 나라와 國民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신 분이었어요. 참 尊敬하고 좋아했죠. 私席에서 會長님을 뵐 機會가 있었는데 그때 醫療奉仕 이야기를 잠깐 꺼냈었어요. 當時만 해도 (제가) 人氣가 좋았을 때니 팬클럽 會員들이랑 奉仕活動 다니고 싶은데 醫療 車輛 한 臺灣 寄附해줄 수 있냐고 여쭤봤죠.”

―뭐라고 하시던가요.
“너무나 欣快히 알겠다고 하시더니 바로 祕書室長을 불러서 이것저것 指示를 하시더라고요. 計劃도 다 세우고 이런저런 計算도 끝내고 기다리는데, 나중에 祕書室에서 連絡에 왔어요. 當時 金額으로 醫療 車輛 製作에만 2億 원이 넘게 들어가는 거예요. 法人 會社에서 個人에게 無償으로 줄 수 있는 方法이 없었어요. 法的으로 問題가 될 수 있던 거였죠. 아쉽지만 抛棄할 수밖에 없었어요.”

‘醫療奉仕’라는 40年 前 宿願을 ‘임채무의 浪漫닥터’를 통해 이루게 됐다.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
俳優 生活을 하며, 두리랜드를 運營하며 한동안 잊고 살았던 꿈을 다시 꺼내게 된 건 比較的 最近이었습니다. ‘9988 整形外科醫院’ 이태훈 院長과 獨特한 因緣이 始作되면서부터입니다. 整形外科 專門醫인 이태훈 院長은 ‘임채무의 浪漫닥터’ 시즌1 때부터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태훈 院長과는 어떤 因緣이었나요?
“이태훈 院長이 運營하는 ‘9988 整形外科醫院’을 보고 누가 나한테 提報를 했어요. 제 노래 ‘9988 내 人生’ 題目을 베껴서 病院 이름을 지은 게 아니냐는 거예요. ‘9988 내 人生’은 2018年에 제가 直接 만든 曲이에요. ‘99歲까지 팔팔(88)하게 살아서 子息 속 썩이지 말자’는 뜻을 담은 曲인데, 이태훈 院長이 許諾도 없이 ‘9988’을 갖다 썼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매니저한테 ‘잘됐다. 著作權 엄청 뜯어내자’ 해놓고 잊어버렸어요.(웃음)

그러고 한참 있는데, 몸이 너무 아픈 거예요. 治療를 받아야 해서 어느 病院을 갈까 했는데, 매니저가 9988 病院에 가자고 했죠. 當時 狀況이 危急해서 바로 手術하고 治療도 잘 받았어요. 그러고 이태훈 院長이랑 食事를 했는데 슬쩍 著作權 이야기를 꺼냈죠. 이태훈 院長은 ‘9988’은 自己가 2017年부터 썼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러더니 ‘先生님이랑 家族분들 平生 整形外科 診療는 제가 無料로 해드리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그건 됐고 나랑 醫療奉仕하러 다니자’고요.”

―撮影이긴 하지만 7個月 동안 每週 奉仕를 다니셨습니다. 힘들진 않으셨나요?
“나이가 나이인지라, 每週 全國 各地를 다니다 보니 疲困하고 이제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도 率直히 있어요. 근데 이걸 하면서 새롭게 느낀 건, 남의 人生을 들여다본다는 게 참 즐거운 日이더라고요. 80歲, 90歲, 100歲까지 健康하게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보면서 배우는 게 많아요. 술 담배 적게 하고 飮食 잘 챙겨 먹는 것보다 肯定的이고 樂天的으로 사는 게 가장 重要하더라고요.
慶北 義城에 사는 87歲 할아버지가 있는데, 그분은 아침 10時에 막걸리 半甁, 午後 4時에 막걸리 半甁을 每日같이 마셔요. 막걸리가 거의 株式이야. 근데도 나보다 기운이 훨씬 더 좋아요. 樂天的인 마음으로 즐겁게 사니까.”

1990年 開場해 올해로 33年째 運營 中인 두리랜드의 모습.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 캡처
시골 老人들의 樂天的인 삶을 憧憬한다고 했지만, 事實 임채무는 누구보다 ‘樂天的인 夢想家’에 가깝습니다. 30年 넘게 京畿 楊州에서 아이들을 위한 놀이公園 ‘두리랜드’를 運營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企業이 아닌 個人이 놀이公園을 運營하는 건 임채무가 唯一합니다.

‘두리랜드’를 만들어야겠다 決心한 건 1973年 京畿 楊州의 史劇 撮影 現場. 端役을 轉轉하던 無名 俳優 임채무는 自身의 撮影 順序를 기다리다 隣近 溪谷에서 놀던 家族을 發見합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엔 깨진 술甁이 흩어져 있고 高聲放歌를 하는 어른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날 문득 이런 다짐을 하게 합니다. “아이들이 安全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자!” 10餘 年이 지난 1989年 그때 그곳에 짓기 始作한 ‘두리랜드’는 1990年 5月 門을 열었습니다.

―30年 가까이 두리랜드엔 담도 없고 入場料도 없었다고요.
“元來부터 入場料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2000원씩 받았어요. 門 연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들을 데려온 父母가 門 앞에 서있는 거예요. 아이는 들어가겠다고 울고, 帽子를 푹 눌러쓴 아버지의 주머니에선 銅錢 소리만 들렸죠. 入場料 때문에 難處한 것 같았어요. 다음 날 職員 불러서 入場料 없애자고 했죠.”

1990年代는 그가 CF, 드라마, 夜間 業所에 出演해서 돈을 벌었을 때입니다. 放送에 나가 번 돈이 놀이동산 賣出의 두 倍가 넘었습니다. 私費를 털고 私財를 팔아 職員들 月給을 줬습니다. 하지만 IMF를 겪으면서 事情이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놀이동산을 찾아오지 않았고, 그를 불러주는 放送도 많이 줄었습니다. 經營 危機로 두리랜드는 2000年代 初 閉場했다 2009年 재개장했습니다. 以後에도 ‘入場料 0원’을 固守하던 두리랜드는 2020年부터 入場料를 받기 始作했습니다.

入場料를 받으시면서 辱을 많이 먹었다고요.
“여태 안 받다가 다 늙어 돈毒이 올랐냐고 辱하는 분도 있었어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해요. ‘돈 받지 말고 다음 달에 門 닫을까요?’라고요. 제가 예전에는 夜間 業所도 다니고 CF, 드라마 撮影도 많았으니까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는데 只今은 불러주는 데가 없으니 돈을 못 벌잖아요. 근데 電氣稅나 稅金, 人件費에 每달 利子만 7千萬 원이 넘어요. 두리랜드가 亡하면 안 되잖아요. 亡하는 거 막기 위해 入場料를 받게 됐어요.”

―두리랜드 運營하느라 생긴 빚이 160億 원이라고 들었어요.
“IMF 外換危機 때는 正말 어려웠는데 그래도 入場料 안 받고 運營하겠다는 原則을 固守했어요. 근데 90年代만 해도 人氣 있었던 回轉木馬, 바이킹, 범퍼카 같은 아날로그 놀이器具는 아이들이 더 以上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요즘엔 微細 먼지와 黃沙 때문에 엄마들이 바깥에서 아이들을 놀게 하는 걸 꺼리잖아요. 그래서 롯데월드처럼 室內 施設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2017年 末에 두리랜드를 닫고 2018年부터 新築 工事를 始作했죠.”

27年間 無料入場으로 運營되던 ‘두리랜드’는 再開場을 하면서 3年 前부터 入場料를 받기 始作했다.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 캡처
VR 같은 새로운 놀이器具를 들여오고 室內 施設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지만, 演藝人 임채무의 輸入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結局 汝矣島에 있는 아파트 두 채를 팔았고 子女들 마이너스 通帳까지 끌어 썼습니다. 迂餘曲折 끝에 두리랜드는 再開場했지만 정작 그와 夫人이 잘 곳도 如意치 않았습니다. 두리랜드 안 化粧室을 改造해 一 年 넘게 먹고 자고 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第一 未安하고 고마울 따름”이라며 “두리랜드는 돈 벌려고 運營하는 게 아니다. 빌린 돈 갚으려고 이제 와 入場料를 받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벌었던 돈도 다 쏟아부으시고 빚도 많으신데, 이렇게까지 下 는 理由가 뭔가요?
“이제 이게 내 삶이에요. 便하게 살 수 있는데 大體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물으면 그렇게 答할 수밖에 없어요.(웃음) 어른들을 만나면 이 사람은 나한테 뭘 願할까, 뭘 바랄까를 苦悶하게 돼요. 근데 아이들은 달라요. 아무 計算 없이 웃고 울고 나한테 안겨서 人事도 해주고요. 그런 아이들 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죠. 가끔 놀이公園에서 만나면 父母님들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人事를 시켜요. ‘여기 만들어주신 분이야.’ 그런 말을 들을 때면 正말 感謝하고 또 보람을 느낍니다.”

이지훈記者 easyhoon@donga.com
김재희記者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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