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歲 ‘現役’ 재즈보컬리스트 실라 조던
24日 午後 7時 서울 麻浦아트센터 舞臺에 선 94歲의 美國 재즈 보컬리스트 실라 조던(94)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알콜中毒 어머니 밑에서 자란 幼年時節의 아픔, 男便 없이 홀로 딸을 키워야 했던 싱글맘의 哀歡…. 150cm를 조금 넘는 雅淡한 體軀에서 그를 거쳐 간 삶의 曲折들이 悽然한 바이브레이션으로,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멜로디로 흘러나왔다.
‘더 크로싱’이란 自作曲에선 재즈의 힘으로 알코올과 藥물 中毒을 이겨낸 過程을 淡淡히 노래했다. 마지막 曲 ‘실라스 블루스’(Sheila's Blues)은 不幸했던 어린시절부터 傳說的인 色素포니스트 찰리 파커를 만났던 燦爛한 瞬間까지 그의 人生의 조각들이 담겼다. 삶 自體를 노래하는 巨匠에게 觀客은 起立拍手로 和答했다.
美國과 스페인, 獨逸, 이탈리아, 濠洲, 日本 等에서 世界 투어를 해온 ‘現役’ 조던에게 이番은 첫 來韓公演이다. 재즈公演 企劃社 플러스히치가 國內에서 公演을 가진 적이 없는 재즈 巨匠 舞臺를 여는 ‘더 늦기 前에’ 프로젝트의 첫 主人公으로 조던을 招請했다.
보컬裏題(보컬을 利用한 卽興演奏)의 代價로 불리는 조던은 有名 演奏者의 솔로를 보컬로 따거나, 公演 때마다 卽興的으로 歌詞를 입혀 노래한다. 그는 2006年 맨해튼 카바레츠 클럽 協會(MAC) 平生 功勞賞, 2012年 美國 聯邦藝術基金(NEA) 재즈 마스터 賞을 받았다. 데뷔앨범 ‘Portrait of Sheila’(1963年)는 1939年 設立된 재즈 音盤社의 名家 ‘블루노트’가 發賣한 첫 재즈 보컬리스트 앨범이다.
23日 서울 中區의 호텔房에서 그를 만났다.
“서울이 이렇게 華麗한 都市인 줄 몰랐어요. 뉴욕과 正말 비슷해요. 勿論 서울이 뉴욕보다 훨씬 安全할 테지만요.(웃음)”
●찰리 파커가 認定한 天才 재즈 뮤지션
音樂은 不幸했던 어린시절의 唯一한 脫出口였다. 17歲에 조던을 妊娠한 엄마는 그를 낳자마자 펜실베니아에 살던 그의 父母님에게 조든을 보냈다. 14살까지 할머니와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먹을 것은 늘 不足했고 집에 히터도 나오지 않았으며, 化粧室은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野外에 있었다고 조던은 回想했다.
“洞네에서 저희 집이 가장 가난했고, 사람들은 우릴 無視했죠. 노래를 부르면 氣分이 나아졌어요. 제가 좋은 귀를 가졌거든요. 라디오에서 들은 멜로디를 그대로 記憶해서 樂譜에 옮긴 뒤 노래로 불렀죠. 엄마는 제가 엄마 뱃속에서 나왔을 때 ‘으앙’하고 울지 않고 ‘워禹’라며 노래를 불렀다고 했어요. 저는 노래하기 위해 태어난 存在였어요.”
재즈가 삶의 全部였기에 그의 關心은 자연스럽게 當代 最高의 色素포니스트 찰리 파커에 向했다. 조던은 파커의 音樂에 歌詞를 붙여 노래했고, 그의 公演을 따라다녔다. “18歲에 파커의 音樂에 가까이 있기 위해 뉴욕으로 移徙를 갔을 程度"로 파커는 조던에게 재즈를 하는 理由이자 召命이었다. 以後 조던은 파커 밴드의 피아니스트 듀크 조던과 結婚했다.
“10代 後半 디트로이트의 한 클럽에서 파커의 公演을 처음 봤어요. 當時 제가 재즈 보컬 트리오로 活動한다는 걸 안 파커가 ‘여기 재즈 할 줄 아는 아이들이 있다면서요?'라며 公演 中間에 저흴 舞臺 위로 불렀어요. ‘누구지?’ 하며 두리번거리자 ‘그래, 거기 너네!’라며 저흴 指目했죠. 舞臺에 올라 파커의 노래 中 하나를 불렀고, 舞臺가 끝난 뒤 파커는 제게 와서 ‘꼬마야, 너는 百萬 달러짜리 귀를 가졌구나’라고 말했어요. 그때부터 파커의 音樂이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것이 제 疏明이 됐습니다.”
●알콜中毒, 痲藥中毒의 수렁에서 그女를 救한 재즈
20代에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페이지 쓰리’ 클럽 等 有名 클럽에서 公演을 했던 조던에게 술과 痲藥은 뿌리칠 수 없는 惡魔의 손길이었다. 舞臺가 끝난 뒤 손님이 건네는 술을 한두 盞씩 받아먹던 習慣은 알코올과 痲藥 中毒으로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94歲까지도 透明한 音色과 또렷한 發聲을 維持하는 理由로 “禁酒와 禁煙”을 꼽았다.
“술을 못 마시냐구요? 저희 엄만 알코올中毒으로 죽었어요. 姨母 한 名을 빼고 저희 家族 全部 알코올中毒이었어요. 저는 한 모금만 마셔도 술에 對한 渴望이 끓어요. 한동안 술과 痲藥에 빠져 살다가 노래를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을 독하게 먹고 再活센터에 들어갔죠. 술을 입에도 대지 않은지 48年이 됐네요. 音樂이 아니었다면 前 只今쯤 죽었을 거에요.”
그는 한창 天才性을 噴出할 時期인 30代부터 50代까지 事務職 타이피스트와 法律 祕書로 일했다. 結婚 直後 男便이 그를 떠났기에 딸을 혼자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세 살 때부터 노래한 ‘본 套 비’ 보컬리스트, 파커가 認定한 天才 재즈 뮤지션인 그의 이름이 大衆에겐 조금 낯선 理由다. 더 큰 成功을 거두지 못한 것이 아쉽지 않느냐는 質問에 그는 “난 成功했다”는 答이 돌아왔다.
“난 팝스타가 되려고 한 게 아니에요. 그런 類의 成功을 얘기하는 거라면 난 成功하지 못한 게 맞아요. 하지만 내 音樂은 재즈에요. 내가 하고 싶은 건 재즈 音樂을 繼續 살아 숨쉬게 하는 것, 그게 全部에요. 제가 只今 이 자리에 앉아있는 理由이기도 하죠.”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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