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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마오쩌둥 時代로 回歸” 文革 反省 代身 ‘美貨’|週刊東亞

週刊東亞 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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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마오쩌둥 時代로 回歸” 文革 反省 代身 ‘美貨’

[조경란의 21世紀 中國] 文化大革命은 記憶의 戰場… 動機 善하다고 責任 避할 순 없어

  • 조경란 연세대 國學硏究院 硏究敎授

    入力 2021-05-3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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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 국가주석을 우상화한 그림. ‘마오 주석은 우리 마음속 붉은 태양’이라고 적혀 있다. [동아DB]

    中國 文化大革命 當時 마오쩌둥 國家主席을 偶像化한 그림. ‘마오 主席은 우리 마음속 붉은 太陽’이라고 적혀 있다. [東亞DB]

    美國에서 中國 文化大革命(文革) 專門家로 有名한 로더릭 맥파커(Roderick Mac Farquhar) 하버드대 敎授는 最近 “中國은 매우 빠르게 過去로 돌아가고 있다”고 指摘했다. 여기서 ‘過去’란 마오쩌둥 時代를 말한다. 마오 時代의 象徵的 事件이 바로 文革이다. 文革의 最終 責任者 마오쩌둥은 中國共産黨 그 自體다. 中國에서 被害者 大多數가 文革에 對해 沈默하고 있다. 이 두 가지 要因 탓에 文革의 正確한 實態 把握은 어렵다. 只今도 문혁은 ‘記憶의 戰場(戰場)’이자 ‘끝나지 않은 過去’다.

    1966年 始作된 문혁은 1976年 가을 마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마오는 社會主義·共産主義 社會를 이룩하려면 人民의 意識을 ‘프롤레타리아化’하는 것이 先決 課題라고 믿었다. 大衆이 文化的 次元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을 近代 經濟發展의 産物이 아닌 條件으로 본 것이다. 문혁은 全 社會 프롤레타리아化를 위한 手段이었다. 物質的 生産力의 發展이 社會主義·共産主義 體制 樹立에 先行한다는 傳統 마르크스주의와는 크게 다른 視角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改造’하는 것이 마오主義(마오이즘)의 關鍵이었다.

    마오쩌둥에게 階級은 ‘道德’

    마오는 階級을 社會的 範疇가 아닌 道德的 範疇로 봤다. 1950年代 末부터 1960年代 初까지 마오가 主導한 大躍進運動이 失敗하자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中心으로 한 實用主義的 勢力이 浮上했다. 이들을 ‘走資派’(走資派: 資本主義的 要素를 主張하는 勢力)로 認識한 마오는 體制가 危機에 빠졌다며 警戒했다. 自身이 農民을 앞세워 都市를 包圍함으로써 이룩한 中國式 社會主義가 都市 엘리트의 反擊으로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憂慮했다. 結局 그는 一般 大衆을 부추겨 黨과 國家 官僚를 攻擊했다. 中國 밖에서 볼 때 문혁은 마치 파리 코뮌처럼 政治權力을 民主的으로 改造하는 것 같았다. 따라서 當時 蘇聯式 社會主義에 失望한 相當數 左派 知識人이 文革에 熱狂했다.

    中華人民共和國 成立 直後부터 知識人과 專門家에 對한 攻擊이 始作됐다. 1950年代 이미 中國 大學에서 政治學, 社會學, 法學, 新文學 等 重要한 學科가 사라졌다. 學者들도 설 자리를 잃었다. 當時 베이징대에서 勤務한 運轉技士가 “날이 어두워지면 車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는 사람이 많아 運轉하기 두려웠다”고 回顧할 程度다.

    마오는 1956年 蘇聯의 이오시프 스탈린 格下 움직임을 修正主義라고 非難했다. 스탈린 批判이 自身에 對한 批判으로 이어질까 두려웠던 그는 1957年 半(反)右派鬪爭을 일으켰다. 秦始皇帝의 焚書坑儒에서 힌트를 얻어 마오의 決定으로 이뤄진 思想統一 作業이다. 문혁은 그 延長線上에 있다. 中國 知性界의 良心 첸리췬 前 베이징大 敎授는 “유토피아가 現實이 되자 그것이 바로 地獄이었다”고 評했다.



    1981年 덩샤오핑 政府는 ‘若干의 歷史問題에 對한 決意’를 통해 文革을 “中國民族을 災難에 빠뜨린 하나의 悲劇”으로 整理했다. 이 같은 歷史 解釋은 1980年代까진 關防(官方: 政府, 公的 領域)과 民間 모두에 어느 程度 共感帶를 形成했다. 勿論 일정한 批判은 許容됐으나 文革에 對한 모든 記憶이 公的 市民權을 얻진 못했다. 1989年 톈안먼 民主化運動이 暴力으로 鎭壓되자 文革을 向한 批判的 反省은 그마저도 中斷됐다.

    이때부터 中國共産黨은 文革 關聯 硏究를 事實上 禁止하고 文革을 神話化하기 始作했다. 20世紀 끝자락에 들어선 中國共産黨은 톈안먼 示威와 蘇聯의 崩壞 속에서 體制 危機를 感知했다. 덩샤오핑은 1992年 남순강화(南巡講話: 우한·선전·상하이 等 中國 南部를 視察하고 經濟改革·開放政策을 再闡明)로 資本主義 經濟體制 導入을 加速化해 危機를 打開했다.

    ‘社會主義 商品化’ 文化政策

    1968년 5월 ‘68운동’ 와중에 프랑스 소르본대 학생들이 학교 건물 기둥에 마오쩌둥과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오른쪽부터)의 초상화를 붙이고 시위하고 있다. [GETTYIMAGES]

    1968年 5月 ‘68運動’ 渦中에 프랑스 소르본大 學生들이 學校 建物 기둥에 마오쩌둥과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오른쪽부터)의 肖像畫를 붙이고 示威하고 있다. [GETTYIMAGES]

    共産黨은 大衆文化政策의 一環으로 ‘社會主義 商品化’ 戰略을 採擇했다. 革命 以後 中國 現代史를 革命世代의 자랑스러운 回顧談이나 外勢에 맞선 英雄譚으로 消費하는 것이 뼈대다. 文革度 例外는 아니었다. 1990年代 덩샤오핑 政權 下에서 문혁은 省察과 反省보다 商業的·娛樂的 消費 對象이 됐다. 政治權力과 市場이 結託해 文革에 對한 脫政治化, 脫이데올로기化를 斷行했다. 쉬번(徐賁) 美國 세인트메리스 칼리지 敎授의 指摘처럼 文革 當時 生活 經驗을 담은 物件이 ‘文化財’ ‘個人 所藏品’으로 消費된 것이 代表的 事例다.

    문혁은 單純히 忘却될 뿐 아니라 粉飾되고 美化되기까지 했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아리프 딜릭(Arif Dirlik) 等 西方의 一部 左派 知識人이 文革 美化에 한몫했다. 新左派와 포스트모던 學派 等은 이들과 相互作用하며 文革에 對한 談論을 形成했다. 이들 西洋 左派 中 마오를 ‘反逆의 마오’ ‘國家의 마오’로 區別한 바디우만이 아직도 自己 생각을 固守한다고 알려졌다.

    中國 社會가 昏迷를 겪어도 西洋 左派 知識人에겐 그저 江 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文革으로 象徵되는 中國의 强力한 權威主義를 直接 겪지도 않았으면서 羨望한 셈이다. 文革을 온몸으로 겪은 中國 知識人들은 이런 모습을 納得하기 어렵지 않을까.

    文革과 마오이즘을 認識하는 脈絡과 層位는 多樣하다. 中國과 유럽의 左派 靑年 知識人이 보는 문혁은 서로 다르다. 이른바 第3世界에 流通된 마오이즘은 이들과 또 다르다. 마오이즘의 矛盾 섞인 遺産을 中國뿐 아니라 中國 밖에서도 簡單히 ‘淸算’할 수 없는 理由다. 1940~1970年代 마오이즘은 제3세계에서 ‘또 다른 近代’ 이데올로기로 浮刻됐다. 第3世界 國家엔 自身의 祖國을 ‘近代化’하려던 靑年과 知識人이 있었다. 이들에겐 同時代 유럽보다 中國이 가까운 未來로 비쳤다. 第3世界에서 마오이즘은 帝國主義, 植民主義 等 外勢에 맞설 抵抗 이데올로기이자 舊時代的 傳統·宗敎나 位階的 社會構造를 打破할 啓蒙 이데올로기였다.

    애初에 마오이즘과 中華人民共和國의 誕生은 巨大한 代案 이데올로기의 登場이었다. 이미 1940年代 마오의 路線은 蘇聯 스탈린주의에 失望한 世界 左派들에게 또 다른 希望으로 여겨졌다. 마오 自身도 이를 看破하고 西洋 資本主義와 蘇聯式 社會主義를 모두 克服한 第3의 路線으로서 中國 革命을 企劃했다. 따라서 世界 수많은 左派 知識人은 마오이즘과 中國 革命에 熱狂했다. 다만 中國에서 마오이즘이 보인 많은 問題點이 마오이즘을 ‘輸入’韓 外部에선 보이지 않았다.

    當代 프랑스 左派 知識人과 靑年들은 마오이즘과 文革에 크게 共感했다. 理由가 뭘까. 그들은 中國을 對案으로 여겼다. “새로운 帝國이 된 蘇聯과 달리 中國은 참된 共産主義 國家로서 帝國主義 戰爭에 反對한다”는 論理였다. “문혁은 부르주아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의 鬪爭이자 修正主義에 對한 참된 共産主義의 鬪爭”이라는 認識도 澎湃했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哲學者 루이 알튀세르度 文革을 스탈린주의에 對한 左翼的 批判으로 여겼다. 階級鬪爭을 結末이 定해진 目的論的 過程으로 본 旣成 社會主義와 달리 文革이 革命을 日常化·永久化했다고 賞讚했다.

    美·蘇 아닌 中이 解答?

    日本 思想家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도 蘇聯에 失望한 反對給付로 中國的 代案을 期待했다. 그는 흐루쇼프 以後 冷戰 葛藤軸이 美國-蘇聯의 對決에서 美國-中國 或은 中國-蘇聯의 對決로 바뀌었다고 봤다. 그 近間엔 이데올로기 對立보다 文明 次元의 對立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같은 東洋 文明圈에 屬한 中國의 潛在力에 期待를 걸었다. 그러나 文革의 結果는 어땠나. 國家를 社會의 主人이 아니라 種으로 삼겠다던 約束은 깨졌다. 行動의 動機, 卽 ‘信念倫理’가 善하다고 해서 그 結果인 ‘責任倫理’를 避할 순 없다. 美國의 中國 現代知性史 權威者 모리스 메이스너(Maurice Meisner)의 指摘처럼 마오는 蘇聯式 社會主義의 問題點을 反面敎師로 삼았다면서 정작 그 眞짜 敎訓은 無視했다. 그리고 그 弊害에서 中國과 世界는 如前히 自由롭지 못하다.

    조경란은… 연세대 國學硏究院 硏究敎授, 國務總理室 傘下 經濟人文社會硏究會 人文政策特別委員會 委員. 中國現代思想 · 東아시아 思想 專攻. 홍콩中文臺 房文學者 · 베이징大 人文社會科學硏究院 招聘敎授 歷任. 著書로는 ‘現代 中國 知識人 指導 : 新左派·自由主義 · 新儒家’ ‘20世紀 中國 知識의 誕生 : 傳統 · 近代 · 革命으로 본 라이벌 思想家’ ‘國家, 遊學, 知識人 : 現代 中國의 保守主義와 民族主義’ 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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