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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新東亞

임권택

“칸에서 作品賞 期待했다가 監督賞 받고 脈 빠졌지”

  • 한상진 記者│greenfish@donga.com

    入力 2011-07-21 17: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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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鄕 떠나던 날 어머니의 마지막 말…“저놈 눈 봐라”
    • “누가 그러대. 나에겐 童心이 없다고, 그래서 映畫가 그렇다고…”
    • 結婚하고 애 낳아 길렀지만 如前히 떠돌이 人生
    • 低質 쓰레기 映畫 만들며 생긴 때 빼는 데 10年 걸렸다
    • 窮塞한 티 낸 적 없는 ‘우리 師母님’…“延期는 못했어”
    • “강수연 며느릿감? 그거는 안 돼. 술이 너무 歲가지고.”
    임권택
    임권택(76) 監督의 말套는 語訥했지만, 또 正確했다. 苟且한 說明 같은 게 없었고, 꼭 할 말만 꺼냈다. 그는 對話 途中 말門이 막혀도 뭐시기니 거시기니 하면서 대충 눙치고 넘어가지 않았다. 適當한 表現이 떠오르지 않으면 林 監督은, 생각이 整理될 때까지 時間을 두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고, 的確한 表現을 떠올린 다음에야 自身의 생각과 意見을 풀어나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時間의 餘白은 妙하게도 인터뷰에 緊張感을 더했다. 記者의 손아귀에 자주 힘이 들어갔다.

    이런 式의 話法은 林 監督의 映畫와도 닮아 있다. 군더더기 없고 感情의 浪費가 없는, 그 어떤 臺詞보다 剛한 映像과 音樂이 보는 이의 瞳孔을 꽉 채우는 그의 映畫들처럼. 떠올려보니 ‘西便制’가 그랬고 ‘吹花癬’이 그랬었다.

    數字에 意味를 두지는 않지만, 林 監督은 얼마 前 開封한 映畫 ‘달빛 길어 올리기’까지 總 101篇의 映畫를 만들었다. 1962年 ‘豆滿江아 잘 있거라’로 데뷔했으니, 50年 동안 映畫를 만든 셈이다. 그동안 수많은 賞을 받았고 大韓民國을 代表하는 世界的인 映畫監督의 자리에 올랐다.

    ‘달빛 길어 올리기’는 韓紙(韓紙)에 미친 사람들의 얘기를 담은 映畫다. 朝鮮王朝實錄 復元事業을 맡은 7級 公務員(박중훈), 韓紙에 關한 다큐멘터리를 製作하는 監督(강수연), 먹고살기 위해 韓紙를 만드는 쟁이들의 얘기가 버무려졌다. 우리 것에 미친 사람들이란 林 監督의 오래된 主題意識이 판소리(西便制, 천년학), 그림(吹花癬)을 넘어 이番에는 종이에 꽂힌 셈이다. 林 監督 인터뷰는 自然스레 이 最近作에 對한 것으로 始作됐다.

    韓紙에 빠지다



    ▼ 韓紙라는 좋은 主題를 다뤘는데, 映畫는 興行에 失敗했습니다. 괜찮으세요?

    “그건 뭐, 그런 일이 하도 많으니까, 괜찮아요. 그게 뭐 어쩌다가 만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백 作品이 넘었으니까.”

    ▼ 그래도 興行을 期待하셨을 텐데.

    “생각 안 했어요.”

    ▼ 失敗할 줄 아셨어요?

    “예. 나는 그동안 한番도 興行 成果를 맞힌 적이 없어요. 西便制 때도 사람들한테 ‘興行은 못할 거다’ 그랬으니까. 그래도 每番 期待는 하죠, 마음속으론. 그런데 이番엔 ‘힘들겠다’ 생각했지요. 할리우드 映畫에 길든 사람들이 보기에는 좀 재미없었을 거예요.”

    1993年 開封한 西便制는 韓國映畫 史上 처음으로 觀客 100萬名을 넘긴 映畫다. 觀客數를 集計하는 方式이 어설펐을 때니까 아마 統計(103萬名) 以上이었을 것으로 推定된다. 西便制는 林 監督의 前作인 ‘將軍의 아들’(1990年)李 大박(團成社 한 곳에서만 68萬名)이 난 뒤 製作社인 태흥映畫社가 보너스 次元에서 林 監督에게 製作費를 대준 映畫라고 알려져 있다.

    ▼ 監督님 程度 되면 觀客이 萬名이 들든, 100萬名이 들든 超然할 것 같은데요.

    “그렇지도 않아요. 왜 그러냐면, 어찌됐든 製作費를 쓰는 거 아니에요? 누구 돈이 됐든. 그래서 興行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든 興行이 될 수 있게끔 애쓰고 그러는 거지, 未安하니까.”

    ▼ 映畫 잘 안되면 잠 못 자고 그러세요?

    “興行 面에서 成果 없이 지나간 映畫들이 하도 많아서, 이젠 조금 免疫이 됐다고 할까.”

    ▼ 근데 이番 映畫는 映畫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같았어요. 工藝品의 材料로 쓰이는 韓紙, 한지 위에 그려진 韓國畫와 書藝글씨 같은 게 映畫 곳곳에서 롱테이크로 보여지잖아요. 映畫的인 緊張感을 떨어뜨리면서까지.

    “예, 맞아요. 그런데 記錄映畫라는 것을 强調하다보니, 韓紙의 世界가 虛構가 아니라는 걸 强調하다보니 다큐같이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면, 사람들이 믿어줘야 되니까, 우리만 (韓紙가) 막 좋다고 해봐야 소용없으니까.”

    ▼ 韓紙 工夫도 많이 하신 것 같던데요.

    “한 1年 半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取材하고 工夫했지요.”

    ▼ 主로 어딜 다니셨어요?

    “前奏도 가고 서울, 安東 그런 데 다 다녔는데, 우리 韓紙의 世界가 워낙 넓어요. 書藝나 그림뿐만 아니고 우리 生活 文化 안에서, 그 옛날 中國 같은 데서 그렇게 稱讚하고 輸入하려고 했다잖아요. 韓紙가 어떤 것인지를 알리는 데 目的을 뒀어요.”

    ▼ 근데 왜 何必이면 韓紙예요? 우리 固有의 文化라면 陶瓷器도 있고, 映像으로 담기에 훨씬 더 아름다운 文化가 많은데….

    “率直히 처음에는 누가 ‘韓紙를 가지고 映畫를 만들면 어떻겠냐’고 勸誘해서 關心을 갖게 됐어요. 근데 取材하면서 韓紙에 빠져들었어요. 안타까운 건 韓紙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무 意欲도 없이 산다는 點이에요. 옛 祖上들이 만든 것과 같은 좋은 종이를 만들겠다는 意志가 하나도 없어요. 理由는 簡單해요. 좋은 韓紙는 假令 한 張에 10萬원은 받아야 하는데, 實際로는 1萬원, 많아야 2萬원밖에 못 받거든요. 取材하면서 ‘아, 내가 수렁으로 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 수렁에 빠졌다?

    “예.”

    ▼ 이 映畫에는 監督님의 아들도 出演했죠. 어떠셨어요. 乾達 비슷한 役이 어울리던데….

    林 監督의 둘째아들 東齋(藝名 권현상)氏는 이番 映畫에 韓紙 만드는 匠人의 아들이자 ‘졸라’를 입에 달고 사는 乾達 役으로 잠깐 얼굴을 비췄다. 건들거리는 煙氣가 제법 볼만했다.

    “그럼 多幸이지. 걔는 뭘 잘하는가 난 모르겠고, 통 내가 關心을 안 보이다가 언제 한 番 ‘너, 演技者가 될래?’ 하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근데 무슨 꽃美男 役割이 아니고 카리스마가 있는 惡役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그 얘기를 들으면서 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놈 눈이 宏壯히 세거든요. 그래서 눈이 그렇게 歲다면 惡役은 或是 모르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건 잘 생각한 거 같다’ 그랬지.”

    ▼ 可能性이 좀 보였어요?

    “걔한테 그랬어요. ‘네 아버지가 監督이지만 조금도 도와줄 수가 없다’고. 왜냐면 다른 監督과 달라서 나는 거의 모든 映畫人과 다 일을 해 왔고, 내가 여기까지 온 데는 正말 모든 映畫人의 힘이 있었는데, 너를 내 子息이라고 무슨 좋은 役割에 데뷔시키면 사람들이 얼마나 失望하겠냐고. 그러니까 걔도 ‘아버지 도움 받을 생각은 全혀 없다’고 그러는 거야. 그러더니 이놈이 聖徒 權氏로 바꾸고, 처음에는 나도 어리둥절했는데 생각해보니 ‘저놈 意志가 確實하구나’ 싶어서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映畫는 나이만큼 나온다

    林 監督 映畫 속 主人公들은 大部分 世上을 떠돈다. 自己 居處를 찾지 못하고 時間과 空間을 헤맨다. 西便制의 판소리꾼들이 그랬고, 吹花癬의 主人公 장승업, 將軍의 아들, 下流人生의 乾達들도 마찬가지였다. 韓紙에 미친, 映畫 ‘달빛 길어올리기’의 主人公도 비슷하다. 문득 이들이 모두 일찍이 집을 떠나 他鄕을 떠돌며 살아온 林 監督의 人生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亦是 映畫에 미쳐 한平生을 떠돈 사람이 아니던가.

    ▼ 映畫 속 人物들의 삶이 監督님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듣고 보니 또 그렇네요.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說明이 될는지 모르겠는데…, 內 映畫를 相當히 깊이 分析한 어떤 映畫評論家가 그래요. ‘임권택 監督한테는 童心이 없다, 아니면 애써 童心을 外面하고 돌아보지 않는다’고 말이지. 그래서 映畫가 그렇다고.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眞짜 그렇다 싶더라고요. 내가 國民學校 3學年 때 解放이 됐단 말이에요. 그前까지는 日帝 治下에서 創氏改名이니 努力動員이니 하는 것에 불려 다니고, 解放되고 나서도 우리 집은 좀살만 했는데, 바로 左翼이니 右翼이니 하는 엄청스러운 것들이 들어오고, 빨치산 戰鬪가 있었고, 빨치산을 잡아다가 國民學校 바로 옆 냇가에다 놓고 公開處刑을 시키면서 애들 와서 구경하라고 그러고, 이런 거를 보면서 자랐어요.”

    ▼ 사람 죽이는 걸 直接 보셨어요?

    “봤죠. 그때는 다 봤지. 記憶에 남아 있다고.”

    ▼ 家族 中에 左翼活動을 한 사람이 있었나봐요.

    “저희 父親이 山生活(빨치산)을 하시고.”

    ▼ 힘든 일이 많았겠네요.

    “자고 있으면 刑事들이 잡으러 오고, 刑事들이 집에 막 들어와 가지고, 只今은 想像도 안 되는 일이죠. 刑事들이 拳銃이 아니라 이렇게 긴 日本刀를 차고 구둣발로 막 이 房 저 房 뒤지고 다니는데, 이불속에서 보면 日本刀의 칼날이 눈앞에서 번쩍번쩍하고, 코앞을 왔다갔다하고…. 그런 環境에서 자랐단 말이지요. 그 다음엔 6·25戰爭에 휘말려 들어갔고, 釜山에서 客地生活을 했는데, 그러니 나한테 童心은커녕 뭐 아무것도 없는 거지.”

    ▼ 마음을 둘 곳이 없었겠네요.

    “이를테면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이미 떠돌이였지, 어디 家庭에 定着해 가지고 뭐 무슨 變化를 期待할 게 없는 그런 人生인 거지. 이제 監督으로 오래 살고, 結婚해서 애들도 낳아 기르면서 많이 없어졌지만 如前히 精神的으로는 떠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다 映畫에 나오는 거겠죠.”

    ▼ 只今도 精神이 떠돌고 있다고 느끼세요?

    “떠돈다는 게, 이제 옛날만큼 甚한 것은 아니지만, 左翼도 右翼도 아닌 人生이, 하늘에 둥 떠버린 어떤 人生을, 어디에도 所信을 가지고 所屬되지 못하고 살아온 그런 것들이 있었죠. 그러니 自然히 野性이 强했다고 할까. 그래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냐면, 映畫라는 것도 그래요. 제아무리 장난을 치고 뭘 해도 結局은 나이 먹은 만큼 나오는 거죠. 드러나는 거예요. 그 以上도 그 以下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큰 都市로 가자

    ▼ 어디선가 보니까 18歲에 故鄕을 떠나 釜山으로 갔다고 되어 있던데. 故鄕은 왜 떠나신 거예요.

    參考로, 林 監督의 故鄕은 全南 長城이다.

    “故鄕을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左翼 家族이었는데 右翼이 世上을 主導하니까, 左翼들은 숨도 못 쉬고 있는데, 나는 勿論 左翼運動을 한 사람은 아니지만, 너무 어려서.”

    임권택
    ▼ 家族들을 데리고 가지, 왜 혼자 가셨어요.

    “家族 自體가 全部 散散이 흩어졌어요. 한 記者가 當時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러고들 살았다고.”

    ▼ 學校는 어떻게….

    “中3(光州 숭일中學校) 다니다가 그만뒀지.”

    ▼ 工夫는 좀 하셨어요?

    “學校 다닐 때 무슨 班長도 하고 한 거 보면 좀 했던 模樣인데, 뭐 試驗 보면 그냥 白紙로 내고 그런 程度였어요. 뭘 工夫하고 그런 時節이 아니었지요.”

    ▼ 父親이나 先代에 對한 怨望 같은 게 있었겠네요.

    “그런 건 없었어요. 누굴 怨望해서 될 일이 아니었고. 怨望이라기보단, 도무지 왜 이런 歲月을 살게끔, 우리가 왜 이런 不幸에 빠져 있었는지를 根源的으로 생각하곤 했죠. 民族에 對한 거, 그런 거 苦悶하고. 어머니, 아버지 怨望할 그런 階梯가 아니고.”

    ▼ 故鄕을 떠나겠다고 決心한 契機라도….

    “그냥 無條件…. 살 수 있는 狀況이 아니었으니까.”

    ▼ 一旦 어디론가 가야 된다.

    “그렇지. 當時에 釜山에 臨時政府가 있었으니까, 되도록 큰 都市로 가자, 뭐 그 程度 생각이었죠.”

    ▼ 釜山에선 뭘 먹고 사셨어요.

    “처음 가서 한 사흘을 굶었는데, 勞動판에 들어가서 지게 지면서 한 1年을 살았고. 근데 시골에 있을 땐 나도 나무도 해 보고 그랬는데도 體力이 너무 弱해가지고, 假令 뭐 짐꾼 10名이 똑같은 것을 나눠 지고 쭉~出發하면 나중에 보면 나만 저 뒤에 떨어진다고. 그러니 누가 나를 붙여주겠냐고.”

    ▼ 工事場에서는 競爭力이 없으셨네요, 한마디로.

    “全혀 競爭力도 없고, 그러다 아는 사람 紹介로 軍靴 장사하는 데서 일을 했지. 第2次 世界大戰 때 美軍이 使用하던 軍靴. 只今 같은 워커가 아니고, 소가죽으로 돼 가지고 (발목을 가리키며) 여기까지 軍靴高 나머지는 脚絆이 돼 가지고 이만큼 올라와 있는 건데 그거를 馬山에 있는 韓國 무슨 民事處라는 美軍部隊에서 拂下해주는 거예요, 조금씩. 必要하다고 拂下해달라고 하면 그만큼씩. 근데 이제 그거를 받아다가 뭐를 하느냐 하면 그 拂下할 때 아무거나 주는 대로 받아오는 게 아니고 사이즈를 골라요. 왜 사이즈를 고르냐 하면, 그때는 구두라는 게 없어, 戰爭통에 뭐 제대로(된 게 없었죠), 口頭래야 며칠 있으면 그냥 못이 막 다 뚫고 들어와버리는 것밖에 없고. 그런데 이 拂下받은 구두를 韓國人 體型에 맞게 줄이면 이거는 高級구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구두가 아주, 그 무렵 나다니는 구두로는 第一 좋은 구두였어요.”

    ▼ 잘했으면 크게 成功하셨겠네요.

    “軍靴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서울로 가면서 나한테 조그마한 이런 露店을 하나 國際市場에 내주고 장사해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要領이 없어서 失敗했죠. 장사를 못하는 거야, 쉽게 얘기하면. 뭐 좀 製品도 잘 닦고, 管理도 좀 하고, 또 손님이 오면 말도 잘하고 해야 되는데, 그게 안 돼가지고, 한 켤레 팔면 그걸로 며칠 먹고 마시고 그런 式이었죠.”

    緣坐制에 갇힌 人生

    ▼ 그 當時에 父母님 消息은 듣고 있었나요?

    “全혀 못 들었지.”

    ▼ 언제 들으셨어요?

    “나중에 내가 서울 가서 映畫 하면서.”

    ▼ 어떻게 사셨다고 하던가요?

    “그냥 저냥 죽지 못해서 사는 거지, 오죽하면 우리 어머니는 뭐 自殺하려고 뭐를 마시고 그랬다고 하더라고.”

    ▼ 죽으려고….

    “그런 騷動도 있었고, 우리 아버지는 山生活(빨치산)을 하다가 몸이 너무 아파 가지고 내려왔다고 하고.”

    빨치산이던 林 監督의 三寸은 補給鬪爭(食糧調達)에 나섰다가 붙잡혀 大邱刑務所에서 죽었다. 父親도 山生活을 오래했다고 한다. 戰爭이 끝날 무렵 父親은 自首했지만, 社會와 緣을 끊고 生活하며 病을 앓다가 1965年에 作故했다.

    ▼ 집 나올 때 父母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어머니하고만 얘기를 했지. 어머니는 이제 가지 말라고 했고, 그때 우리 어머니 말씀 中에서 第一 記憶에 나는 것이 내가 가겠다고 하니까 나더러 ‘저놈 눈 봐라’….”

    ▼ 저놈 눈 봐라?

    “내가 무슨 毒을 품고 있었던 模樣이지. 뭔가 決然하게 마음먹은 그런 거였겠지.”

    釜山에서 軍靴 장사를 하던 林 監督은 장사를 亡해 먹은 뒤 難堪해진다. 그러던 때 마침 같이 軍靴 장사를 하다 서울로 올라간 사람들이 映畫를 만든다면서 連絡을 해 왔다. 林 監督은 뒤도 안 돌아보고 짐을 싸 서울로 갔다. 希望이 없기는 釜山이나 서울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울에서 林 監督은 액션映畫로 有名한 정창화 監督을 만나 製作部 막내로 映畫판 人生을 始作했다.

    ▼ 鄭 監督님이 언젠가 쓰신 글을 보니까, 製作部 막내였던 林 監督님이 새벽 5時면 나와서 일을 할 만큼 성실했다고….

    “그랬어요. 그때 나는 製作部에 있었지만, 鄭 監督님이 언젠가는 나를 演出部로 起用할 거 같다는 느낌이 늘 있었어요.”

    ▼ 鄭 監督님이 特別히 아끼셨나 봐요?

    “아꼈다기보다는 演出部가 해야 될 일을 가끔씩 시키고 했으니까.”

    鄭 監督 밑에서 製作部, 演出部를 거치며 映畫를 배운 林 監督은 드디어 1962年 獨立運動을 素材로 한 ‘豆滿江아 잘 있거라’라는 映畫로 申告式을 치렀다. 結果는 좋았다. 興行에 成功하며 다음 作品을 만들자는 要請이 쏟아졌다. 그의 이름은 今方 地方 配給業者들 사이에서 입所聞을 타기 始作했다. 그 뒤로 約 10年間 1年에 5~6篇씩 ‘가케모치(겹치기)’로 映畫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林 監督은 當時를 잊고 싶은 時節, 쓰레기 低質映畫를 만들던 時節이라고 스스로를 卑下한다. 林 監督은 “可能하다면 그 時節 만든 映畫 50篇을 모두 없애고 싶다”고 했다.

    “그 時節에 만든 映畫는 그냥 다 보기가 싫어요.”

    ▼ 부끄러움인가요?

    “예. 왜 그러냐면, 그때 만든 映畫는 全部가 픽션이에요. 世上에 있을 理 없는 무슨 액션물, 이런 거였는데, 다 虛構인데. 眞摯하게 어떤 삶의 모습을 담아내려는 努力을 했다거나 뭔가 좋은 映畫를 남겨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면 많이 달라졌을 텐데, 그때만 해도 뭐 나는 배운 것도 없고, 또 緣坐制라는 것이 있어서 어디 나가려야 나갈 수도 없고, 뭐 그런 時節에 만든 거라서. 내가 꿈을 가져봐야 이룰 어떤 것도 없기 때문에 그냥 내가 살아 있고, 그러고 살아 있다는 것이 참 多幸이라는 생각을 하던 때였고, 나머지는 그냥 술을 마시는 거예요, 술을. 조금 벌면 마시고. 내가 도무지 어떤 장르의 映畫를 잘 만들 수 있는 監督인지 몰랐죠.”

    林 監督은 20代 때부터 手顫症이 아주 甚했다. 오히려 只今은 좋아진 便이라고 할 程度다. 술 마시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던, 아무런 希望도 없던 時節에 생긴 致命的인 病이다.

    ▼ 그럼 眞짜 映畫 같은 映畫는 언제부터 만드셨어요.

    “그러니까 1972年 程度부터, 내가 그때부터 覺醒하기 始作했으니까, 精神 차렸으니까. 근데 低質 쓰레기 映畫를 만들며 생긴 때를 빼는 데 한 10年이 걸렸어요. 그래도 난 참 運이 좋은 것이, 軍事政權이 이제 維新 이렇게 넘어가고 하니까 體制를 좀 다져야 되고, 政府가 映畫界를 살려야 된다고 해서, 映畫社를 만들 때 이런저런 條件을 갖추게 했거든요. 뭐 스튜디오가 있어야 된다거나, 카메라가 2대인가 3대인가 있어야 된다거나 하는 式으로. 뭐 그런 規定들이 생겼어요. 1年에 4篇씩 義務製作을 해야 外貨를 配給할 수 있는 許可를 주고 그런 式으로.”

    우리 삶을 담기

    ▼ 韓國映畫를 義務的으로 만들도록….

    “예. 네 篇을 만들면 外貨 한 篇 輸入權을 준 거죠. 그러니까 映畫製作者들이 事實은 外貨를 輸入하고 싶어서 억지로 韓國映畫를 만들어야 하는 時節인 거죠. 그러니까 製作費가 거의 안 들어가는 엉터리 映畫들이 막 만들어졌죠. 스크린에 걸리지도 못하고 없어지는 映畫도 많고. 그런데 그렇게 劣惡한 狀況이 나는 오히려 좋았어요. 왜 좋았냐면, 이제 내가 ‘韓國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그런 韓國映畫를 찍겠다’는 생각을 1970年代 初부터 했는데, 이런 制度 德分에 興行에 神經 안 쓰고 映畫를 繼續 만들 수 있게 된 거죠. 좋은 映畫를 찍을 수 있게 된 거예요. 10年 동안 精神없이 만들었던 엉터리 世界를 버리고, 어떻게든 거짓말 안 하기, 우리 삶을 담기, 뭐 이런 몇 가지 原則에 맞는 映畫를 만들 수가 있게 된 거죠. 그땐 다들 美國 映畫의 亞流를 찍었던 時節이었으니까, 나도 그렇고.”

    ▼ 映畫界의 危機가 監督님껜 오히려 機會가 된 거네요.

    “興行이 안 돼도 내가 좋은 映畫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이 또 그래요. 내가 가끔 反共映畫上 아니면 大鐘賞을 타는 監督이었으니까, 그런 것 때문에 低豫算이지만 映畫를 찍으라고 돈을 대주는 사람들이 繼續 나왔던 거죠. 그렇게 10年을 버틴 겁니다. 그 時間 동안 體質改善을 할 수가 있었지. 그러니까 그때 그 時代를 韓國映畫 史上 가장 暗黑期라고 얘기하지만, 何如튼 나만 暗黑期가 아니고, 오히려 체질개선하면서 좋은 時節을 보낸 거지.”

    ▼ 그 當時에도 ‘내가 좋은 時節을 보내고 있구나’하고 생각하셨어요?

    “그 當時에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韓國的인 어떤 情緖, 韓國人의 아름다움, 韓國人의 삶을 찍어야 되는데, 體質化된 나쁜 習慣, 美國映畫 같은 習慣이 몸에 배가지고, 그것을 빼내는 데 10年이나 걸렸지. 그리고 그때는 國産映畫의 位相이랄 게 없었어요. 正말 아무것도 아니었어. 밖에 나가도 韓國映畫에 對해 아무 關心도 없고, 眞짜 아무것도 아닐 때야, 아무것도.”

    ▼ 그렇게 나쁜 習慣을 빼고 나서 처음 내놓은 作品이 뭐였어요?

    “雜草.”

    1973年 開封한 映畫 ‘雜草’는 林 監督의 51番째 演出作이자 그가 처음으로 製作을 맡은 映畫였다. 장동휘, 申榮均, 최무룡, 박노식, 김지미 같은 當代 最高 俳優들이 總動員됐다. 男子에게 버림받은 女主人公 분례(김지미)가 한 대장장이(박노식)를 만나 난生처음으로 人間的인 待接을 받지만 대장장이는 前妻 所生의 두 아이를 분례에게 남긴 채 떠나버린다. 以後 분례는 고달프고 힘든 世上살이의 刻薄함 속에서도 獻身的인 母性愛로 두 아이를 기른다. 林 監督의 眞正한 데뷔作으로 불리는 이 映畫는 當時 下層 階級 女主人公의 고달픈 삶을 事實的으로 그려냈다는 評價를 받았다. 그러나 8500名의 觀客을 動員하며 興行에는 失敗했다.

    “何如튼 그렇게 좀 健康한 映畫를 만들고자 努力을 많이 했어요. ‘族譜’(1979年), ‘旗발 없는 旗手’(1980年), ‘짝코’(1980年) 같은 映畫들 만들면서 거의 完璧하게 映畫 全體가 내 생각대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지. 우리만의 情緖를 담은 映畫가 됐다고.”

    “칸 作品賞 받을 줄 알았는데…”

    임권택
    ▼ 그러고 나서부터 海外映畫祭 門을 두드리新 거네요, 1980年代 初盤부터. 무슨 契機가 있었어요? ‘海外 映畫祭에서 賞을 좀 받아야겠다’는 欲心이라도….

    “내가 ‘曼陀羅’(1981年) 같은 걸 찍어놓고도 도무지 내 映畫가 世界 속에서는 어느 水準에 와 있는 作品인지를 몰랐으니까, 내보내서 評判을 한番 들어보자는 생각이었지. 率直히 궁금했어요.”

    ▼ 反應이 좋았죠?

    “그렇지요, ‘曼陀羅’는.”

    ▼ 氣分이 어떠셨어요?

    “좋지요. 나는 그때 旣往의 韓國映畫의 未洽한 水準들에 對해서 조금 批判的인 視角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韓國에서 내가 누구와 무슨 競爭을 해야 된다는 그런 생각도 없었고, 但只 ‘世界 속에서 내 필름이 어떤 評價를 받을까’ 이런 것에만 關心이 있었어요. ‘길소뜸’(1985年)을 가지고 베를린映畫祭를 가니까 도와달라고도 안 했는데, 거기 映寫 技士들이 나서서 試寫會場에서 照度는 어떻게 하고, 사운드는 또 어떻게 하고 이러면서 어떻게든 좋게 틀어주려고 애쓰고 그래요. 마음에서 우러나서 날 도와주는 거죠. 그걸 보면서 ‘아, 얘들이 曼陀羅 같은 作品을 보고 나한테 잘해주는구나’ 생각을 했지.”

    ▼ 칸, 베를린, 베니스에서 賞을 받겠다는 感이 그때 좀 오던가요?

    “언젠가는, 언젠가는 받겠지 하고, 언젠가는.”

    ▼ 여러 賞을 받으셨지만, 아무래도 칸 監督賞이 가장 記憶에 남으실 텐데….

    林 監督은 그동안 喪服도 많았다. 國內에서 받은 賞은 이루 헤아리기 어렵고, 海外에서도 많은 成果를 냈다. 映畫 ‘씨받이’(1986年),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年)로 베니스映畫祭와 모스크바映畫祭에서 女優主演賞(강수연)을 받았고, 1987年에는 몬트리올映畫祭에서 ‘아다다’로 女優主演賞(신혜수)을 받았다. 1993年에는 ‘西便制’가 第1回 上海映畫祭에서 監督賞과 女優主演賞(오정해)을 받았다. 그리고 2002年 映畫 ‘吹花癬’으로 칸映畫祭 監督賞을 받았다.

    “왜 그 賞이 記憶에 남느냐면, 賞을 타면서 그 映畫가 全世界에 配給이 됐으니까. 칸에서 監督賞을 타면서 프랑스에서만 30萬名이 넘게 吹花癬을 봤다고 하니까. 그게 東洋映畫를 輸入해서 올린 興行成果로는 네 番째로 잘됐다는 거야. 그만큼 보람이 있죠.”

    ▼ 칸映畫祭에서 監督賞을 받고나선 像에 對한 渴症이 좀 解消됐겠네요.

    “率直히 난 (칸映畫祭에서) 다른 賞을 받는 줄 알았다고. 監督賞을 부르니까 實際로는 나는 脈이 빠졌다고.”

    ▼ 아~ 그래요?

    “作品賞 이런 것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한참 있다가 釜山映畫祭에서, 監督들 演技者들이 많이 왔을 땐데 무슨 30代 되는 惡童 監督, 有名한 프랑스 監督이 한 名 있는데, 그 사람이 프랑스大使館에서 리셉션을 하는데 나하고 얘기를 좀 하고 싶다는 얘기를 傳해온 거예요. 근데 通譯이 없어서 維持나 敎授더러 通譯 좀 하라고 했더니, 그 親舊 얘기가 ‘너 吹花癬 때 칸 作品賞 빼앗긴 거 알긴 아냐’ 그러는 거야.”

    ▼ 프랑스 監督이요?

    “예, 有名한 놈 있어. 그놈이 ‘우리는 다 알고 있는데 너 아냐’고. 근데 거기서 ‘모른다’고 할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뭐, 映畫祭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냐’하고 말았는데, 事實 그런 거예요. 이건 記事가 되면 안 되는 건데, 그런 어떤 變數를 만나고 나니까 이제 그렇게까지 허우적거리면서 또 뭘 해보자 하는 생각도 없어지고….”

    임권택의 사람들

    ▼ 監督으로 살아오시면서 經濟的으로는 어떠셨어요?

    “나는 그래도 쉬지 않고 찍었으니까, 많이 받는 건 아니지만. 그냥 그냥 그랬지.”

    ▼ 먹고살 만은 하셨나봐요.

    “生活이 좀 쪼들리고 했을 텐데, 집사람도 窮塞할 때도 많았을 텐데, 나한테 한 番도 그런 내色을 한 적은 없어요.”

    ▼ 結婚은 어떻게 하셨어요. 돈은 좀 있었어요?

    “그런 게 어딨어, 全혀 없지. 돈에 對한 槪念 自體가 없었어요. 돈을 모아서 뭔가 좀 人生을 좀 健康하게 남들처럼 살아봐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 結婚할 때 貰房은 하나 얻으셨을 텐데….

    “그거는 우리 집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 집사람한테 身世를 진 거야. ‘우리 師母님’이 그때 모델로 돈을 꽤 잘 벌었다고요.”

    ▼ 監督보다 俳優의 벌이가 더 좋았군요.

    “아~ 그럼. 그게 어떤 모델이냐면 纖維가 새로 나오면 模樣 좋게 모아놓고 그걸로 만든 옷을 모델들한테 입혀가지고 寫眞帖을 낸다고요. 그러면 사람들이 가서 이렇게 들여다보고 ‘나 이거 해입을래’ 그럴 때니까. 그게 아주 人氣가 좋아 가지고….”

    ▼ 師母님도 映畫俳優 出身이신데, 監督님 映畫로 데뷔했죠.

    “그렇지요. 근데 뭐 보니까 演技者가 되기에는 너무 氣質이나 이런 게….”

    林 監督의 夫人 채령(本名 채혜숙)氏는 MBC 탤런트 3期 公採 出身이다. 20歲인 1971年 林 監督의 映畫 ‘尿檢’을 통해 데뷔했다. 채령이라는 예명도 林 監督이 直接 지어줬다. 데뷔 初期부터 林 監督과 로맨스를 뿌리며 밀고 당기기를 繼續했고, 結局 1979年 當時 43살이던 林 監督과 結婚한 뒤 演藝界를 떠났다. 林 監督과는 15살 差異가 난다. 林 監督은 夫人과의 結婚過程에 對해 2002年 ‘신동아’ 인터뷰 當時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無名監督 時節이라 家庭을 꾸려나갈 만한 自身도 없었고, 아내가 예쁘다보니 奢侈에 빠져들면 뒷堪當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선뜻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다. 누가 먼저 좋아한 게 아니고 서로 같이 좋아했다. 워낙 나이 差異가 많고 나 自身이 別 볼일 없는 無名監督에다가 모아놓은 財産이 없으니 躊躇하게 됐다. 時間을 오래 끌다보니 아내 쪽에서 더 積極性을 보인 것은 事實이다.”

    林 監督과의 사이에 아들만 둘을 둔 채령氏는 林 監督의 101番째 映畫 ‘달빛 길어 올리기’에 若干 까칠한 韓紙攻防 主人으로 出演했다.

    ▼ 演技力이 떨어지던가요?

    “演技者는 낯가림이 없고 좀 그래야 되거든. 근데 그게 좀 甚하고 率直히 演技도 잘 못하고 그랬다고.”

    ▼ 監督님께서는 그동안 참 많은 因緣을 만드셨습니다. 直接 發掘해서 키워낸 俳優들도 그렇고, 定日性 撮影監督이나 이태원 社長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定日性 技士님은 진작부터 일을 한番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族譜’로 大鐘賞을 타고 나니까, 映畫振興公社에서 美國에 며칠間 旅行을 보내준 일이 있는데, 같이 다니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를 들었고, 돌아가면 같이 좀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定日性 監督이 年輩는 조금 差異가 나지만 살아온 歲月에 對한 理解가 나하고 맞아서. 그런 게 없으면 같이 일을 못 한다고.”

    ▼ 잘 맞으셨나봐요.

    “잘 맞으니까 오랫동안 했지. 왜냐면 全혀 새로운 사람하고 다시 하면 서로 自己를 알리는 데 宏壯히 時間들이 가기 때문에….”

    ▼ 태흥영화사 이태원 社長님과의 因緣도 깊죠.

    “이태원 社長과는 ‘씨받이’로 강수연羊이 女優主演賞 타고 뭐 좀 製作을 같이 했으면 하는 생각을 그분이 가지고 있었고, 그러다 이제 그거 때문에 홍콩으로 뭐 어디로 이렇게 旅行을 한 적이 있다고요. 강수연量, 우리 집사람, 또 太原映畫社 職員들 해가지고. 그런 데서 親해지기 始作했고 그러면서 한 것이 ‘比丘尼’였죠.”

    ▼ 그게 첫 作品이었어요?

    “한참 찍었는데, 佛敎 宗團, 比丘尼들 反對에 부딪혀 上映을 못했지. 근데 돈을 많이 들였단 말이야, 中斷하기까지. 근데 이제 다른 製作者 같으면 나한테 怨望을 많이 했을 텐데, 全혀 怨望도 안 하고, 그래서 이제 언젠가는 꼭 해야지 하다가 이제 만나서 하고. 그렇게 30年을 같이 했죠.”

    參考로, 林 監督이 만들고 조승우가 主演을 맡은 映畫 ‘下流人生’(2004年)은 이태원 社長의 一代記를 그린 映畫다.

    “어린 걸 너무 크게 만들어서…”

    임권택 監督의 映畫를 통해 얼굴을 알리고 큰 俳優가 된 사람도 一一이 셀 수가 없다. 1980年代 以後만 봐도, 映畫 ‘씨받이’로 一躍 월드스타의 班列에 올랐던 강수연, ‘西便制’로 데뷔한 오정해, ‘將軍의 아들’에서 金斗漢 役을 맡았던 박상민, ‘太白山脈’의 金甲洙, ‘춘향뎐’‘下流人生’의 조승우 等이 林 監督의 映畫를 통해 얼굴을 알렸다. ‘천년학’(2007年)의 조재현, ‘달빛 길어 올리기’(2011년)의 예지원도 再發見 소리를 들었다.

    ▼ 俳優들을 볼 때 가장 重要하게 보는 게 뭐예요?

    “그거는 시나리오가 定해주는 거야, 시나리오가. 시나리오가 要求하는 거에 맞춰서 配役을 決定하지.”

    ▼ 요즘 젊은 監督들 中에는 特定 俳優와 여러 作品을 하는 境遇가 많은데 監督님께서는 그런 일이 別로 없었어요.

    “나는 그것을 宏壯히 많이 警戒했다고. 왜냐면, 똑같은 俳優하고 繼續하면 얘기를 그 俳優한테 맞춰가게 되거든.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 한 俳優와 많은 作品을 안 했는데도, 例를 들면 오정해, 강수연 하면 사람들은 다들 監督님 作品만 記憶하거든요. 事實 몇 作品 안 되는데도….

    “오정해, 강수연量 모두 세 作品밖에 안 했는데. 근데 강수연量은 어린 나이에 너무 큰 賞을, 그거는 큰 事件이지. 그래서 弄談으로 ‘왜 어린 걸 그렇게 크게 만들어가지고 只今 이렇게 살게 만드냐’고들 그러잖아, 나한테.”

    ▼ 누가요?

    “그냥 사람들이.”

    ▼ 結婚도 못하고 혼자 산다고?

    “그냥 여러 가지로.(웃음) 그런데 내가 最近에야 알았는데, (강수연氏가) 宏壯히 똑똑한 사람이에요. 俳優로 안 컸어도, 무엇을 했어도 크게 무슨 일을 했겠구나 싶은 사람.”

    ▼ 그러면 며느릿감으로는 어떠세요? 강수연氏 스타일.

    “며느릿감? 그거는 안 돼.”

    ▼ 왜요?

    “술이 너무 歲가지고.”

    ▼ 그것만 빼면 다른 건 괜찮으세요?

    “예, 나머지는 다 (좋아요). 내가 오죽하면 마지막으로 主禮를 서줄 사람은 강수연이라는 생각을 하겠어요.”

    ▼ 네. 그럼 오정해氏 스타일은 며느릿감으로 어떠세요?

    “오정해는 또 오정해 나름대로 소리꾼으로 世上을 살아야 되기 때문에….”

    임권택
    ▼ 아니 그러니까, 며느릿감으론 어떠신데요?

    “글쎄, 그거는 우리 아들이 決定할 問題니까….”

    ▼ 아까 강수연氏는 안 된다고 딱 자르시더니….

    “그거는 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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