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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日의 波濤소리 : 다음 文明을 위한 人文學的 想像|新東亞

來日의 波濤소리 : 다음 文明을 위한 人文學的 想像

“只今 人類에게 必要한 것은 野蠻의 歷史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責任感”

  • 入力 2011-07-21 1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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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아’는 創刊 80周年 記念으로 韓國 代表 知性들의 릴레이 講演會를 마련했다. 지난 5月 始作한 이 行事는 2012年 4月까지 1年間 이어진다. 6月22日 서울 光化門 敎保生命 컨벤션홀에서 열린 2回 講演의 講師는 도정일 경희대 名譽敎授다. “只今의 世界人은 現存하는 多數의 文明으로부터 이어받을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 人間을 위한 人間의 文明을 構築해야 할 責任을 지고 있다”고 力說한 그의 講演을 紙上中繼한다. <편집자>
    내일의 파도소리 : 다음 문명을 위한 인문학적 상상
    앞으로 50年 或은 100年의 世界를 主導할 國家나 國家群, 文明과 文明圈은 어디일까? 이것은 21世紀 初盤의 初期를 살고 있는 韓國人, 아시아人, 世界人들에게 非常한 關心을 觸發하는 質問이다. 50年이라면 只今 生存하는 世代의 生涯 期間에 包含될 만큼 가까운 未來이며 이 近接 未來의 世界에 어떤 變化가 發生할 것인지(혹은 發生하지 않을 것인지)는 現存 世代의 삶과 運命에 直結된 問題이기 때문이다.

    100年이라면 좀 멀어 보이긴 해도 그 亦是 只今부터 20年쯤 後인 2030年代에 태어날 世代의 生涯期間에 包含될 만한 時間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 속에는 그 世代의 다음 世代가 살게 될 時代가 거의 몽땅 包含된다. 그렇게 보면 100年度 그리 긴 時間은 아니다. 게다가 人間은 計算上 그가 살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時代에 對해서도 깊은 關心을 갖는 動物이다. 살아生前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 確實한 後續 世代를 위해 걱정하고 그 後代가 살게 될 날들의 아침과 저녁을 위해서 무언가 일을 圖謀한다는 點에서도 人間은 奇異하고 獨特한 動物이다. 이 별난 動物이 未來를 생각해본다는 일은 안 그래도 분주한 그에게는 決코 閑暇한 占卦놀이나 심심풀이 公傷놀음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의 ‘오늘’ 自體가 몹시 窮乏해지기 때문이다.

    人文學的 視角의 한 모퉁이에서 50年 或은 100年 後의 世界를 생각해본다는 것은 ‘未來豫測’ 作業이 아니다. 未來를 豫測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堪當할 만한 다른 學問 分野가 얼마든지 있고, 노상 틀리긴 해도 豫測을 專門으로 하는 ‘未來學’ 系列 業種의 從事者도 많다. 다음 時代의 文明을 人文學的으로 想像해본다고 할 때의 ‘想像하기’는 未來 文明에 對한 豫測이기보다는 어제와 오늘의 人間 文明을 ‘省察하기’이며 그 省察의 바탕 위에서 未來 文明의 모습을 미리 ‘點檢하기’다. 아직 오지도 않은 文明을 미리 點檢하는 일은 可能한가?

    人文學的 觀點에서 未來 文明을 말할 때 가장 重要한 것은 ‘文明의 條件’에 對한 點檢, 다시 말해 어떤 文明이 文明이라 불리자면 거기 要求되는 最小 條件 或은 基本的 條件이 무엇인지를 點檢하는 일이다.

    只今까지는 文明을 말할 때 거의 例外 없이 適用돼온 일정한 基準들이 있다. 그 基準들은 “힘이 센가?”라는 單 하나의 基準으로 要約된다. 이 ‘힘’을 測定하는 잣대도 例外 없이 政治的 힘, 經濟的 힘, 軍事的 힘이라는 잣대다. 그러나 文明史의 展開 5000年을 지나오는 사이에, 特히 20世紀 後半 以後, 文明을 보는 人間의 눈에는 相當한 變化가 發生하고 있다. 文明을 보는 ‘눈’의 變化는 文明에 對한 質問의 變化다. 文明에 對한 質問이 “힘이 센가?”에서 “文明을 文明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文明을 말하는 基準이 힘의 觀點에서 ‘基本條件’의 觀點으로, 다시 말해 “그 文明은 文明이라 불릴 만한 基本的 條件들을 갖추고 있는가?”라는 쪽으로 移動하고 있다.



    未來 文明의 條件

    世界의 現存 文明은 이 같은 質問의 變化와 觀點 移動에 對해 아직 매우 둔감하다. 그러나 앞으로 50年 或은 100年 동안에도 그럴까? 앞으로도 繼續 人間은 政治的, 經濟的, 軍事的 힘의 잣대만으로 文明을 말할까? 이것이 未來 文明을 미리 點檢한다고 할 때 그 ‘點檢’이 지니는 첫 番째 重要한 意味다. 未來의 人間 文明, 特히 世界를 敢히 ‘主導’하고자 하는 國家나 文明은 文明을 文明이게 하는 條件의 具備 與否라는 現代的 基準을 決코 避해갈 수 없을 것이다.

    只今의 世界 秩序가 相當期間 큰 變化 없이 維持될 것인지 아니면 어떤 새로운 秩序에 依해 代替될 것인지의 두 展望 가운데 어느 쪽으로 蓋然性의 저울이 기울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勿論 點檢 作業에 屬한다. 지난 60年間 世界를 主導해온 나라는 美國이고, 決定的으로 18世紀 以後 200年 以上 世界를 掌握해온 文明은 美國이 包含된 西유럽 文明이다. (‘主導’라는 用語는 批判的 觀點에서는 歡迎할 만한 것이 아니지만 現實的 觀點에서는 그것을 代替할 다른 마땅한 用語가 없다.)

    國家로서는 美國, 文明圈으로서는 西유럽 文明이 主導하는 世界의 現象 秩序는 앞으로 얼마나 持續될 수 있을까? 가까운 未來에, 21世紀 안에, 그 支配 勢力을 代替할 만한 다른 勢力으로서 只今 사람들의 可視圈 안에 들어오는 나라나 文明이 있는가? 東아시아의 中國은 가장 눈에 띄는 强力하고 野心滿滿한 代替 候補의 하나다. 世界의 눈은 只今 中國으로 쏠리고 있다. 世界가 美國과 中國의 한판 競爭을 보고 있다는 생각도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美國이냐 中國이냐의 版圖 變化를 政治的 影響力, 經濟力, 軍事力 等 힘을 基準으로 豫測하는 것은 人文學的 觀點에서는 거의 無意味하다. 그런 豫測이라면 그것은 單純한 統計上의 數値 變化를 따라가는 일만으로도 얼마든지 可能하기 때문이다.

    文明의 資産

    더 重要한 質問이 있다. 中國은 世界의 主導國으로 올라설 만한 ‘文明의 資産(civilizational assets)’을 갖고 있는가? 美國은 競爭國들을 물리치고 繼續해서 世界를 主導해나갈 만한 文明의 資産을 保有하고 있는가? 中國이 힘을 길러 世界의 主導國으로 浮上한다면 그 中國은 어느 文明에 屬하고 어떤 文明을 代表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美國이 主導國의 地位를 維持한다면 그 能力은 美國이 가진 어떤 文明的 資産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美國도 中國도 아닌 또 다른 第3의 勢力이 나타난다면 그 새로운 勢力은 어떤 文明的 資産을 힘의 基盤으로 하는 것일까?

    어떤 國家도 ‘文明’을 基盤으로 하지 않고서 世界의 主導國으로 올라서는 일은 없다. 이것이 文明의 重要性이며, 國家와 文明이 다른 理由다. 칭기즈칸의 몽골帝國은 이렇다 할 文明의 基盤 없이 帝國을 構築할 수 있었던 例의 하나다. 로마는 어떤 文明을 基盤으로 해서 出發하고 또 제 손으로 文明을 만들어나갔던 諸國의 例에 屬한다. 그러나 몽골은 바람처럼 한때 中央아시아를 制霸했던 帝國의 이름으로만 記憶될 뿐 어떤 文明的 遺産으로 現在에 살아 있지 못하다. 로마帝國도 몽골帝國처럼 滅亡했지만 몽골과는 달리 로마가 남긴 文明的 資産은 只今도 繼承되고 있다. 未來의 相當 期間에도 國家라는 것이 存續하는 限 모든 國家는 國益(國益)追求라는 命令으로부터 놓여나기 어려울 것이지만, 어떤 國家도 自國 利益의 追求만으로 世界의 主導國이 될 수는 없다. 이 決定的 差異를 만드는 것이 只今까지 우리가 ‘文明的 資産’이라 부른 것의 有無다. 國益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文明的 資産은 國家들 사이에 共有될 수 있다. 이 共有 可能한 資産의 있고 없음을 點檢하기-이것이 앞에서 우리가 人文學의 觀點으로 未來 文明의 모습을 미리 點檢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그 ‘點檢’의 두 番째 重要한 意味다.

    그런데 그 文明的 資産이란 具體的으로 무엇인가? 우리는 啓蒙哲學者 볼테르에게서 쉬운 例를 하나 꿔올 수 있다. 只今 우리가 말하는 文明的 資産이라는 것과 類似한 意味에서 볼테르가 文明의 가장 重要한 資産이라 생각한 것은 ‘寬容(tolerance)’이다. 寬容의 核心은 他者의 認定과 尊重이다. 나와 다른 사람, 내 생각과 다른 생각, 내가 價値라고 여기는 것과는 다른 價値, 내 삶의 方式과는 다른 삶의 方式-이런 것이 통틀어 ‘他者’다. 이 他者를 認定하고, 單純 認定을 넘어 尊重하는 것이 寬容이다.

    寬容은 他者에 對한 認定과 尊重이라는 點에서 强者가 弱者에게 베푸는 慈悲, 容恕, 寬大함과는 다르다. 그것은 他者가 存在할 權利, 그의 自由, 그의 尊嚴과 品位에 對한 認定利子 尊重이다. 寬容은 쉬운 能力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獨善과 偏狹, 나의 眞理 主張과 利害關係 貫徹의 欲望을 犧牲하도록 내게 要求하고 (勿論 이 犧牲은 抛棄가 아니다) 내가 내 속에 他者의 空間을 만들어줄 것을 要求한다. 쉽지 않기 때문에 寬容은 文明이 힘들게 만들고 지켜가려는 ‘資産’이다.

    한 가지 例에 不過하지만, 文明을 文明이게 하는 것은 이런 資産이다. 寬容의 가장 큰 資産的 價値는 그것이 없거나 無視될 때, 바스라지고 破壞될 때, 人間들 사이의, 國家와 國家들 사이의 共存이 可能하지 않다는 데 있다. 共存은 文明의 定義(正義)다. 어떤 文明이 正義로운 文明(just civilization)인지 아닌지, 文明의 거죽을 쓴 野蠻인지 아닌지를 決定하는 것은 共存의 可能性 有無이며, 共存의 正義를 可能하게 하는 가장 큰 資産은 寬容이다.

    文明의 自體 矯正力

    人文學의 觀點에서 定義할 때 文明은 무엇보다도 ‘野蠻에 對한 抵抗과 拒否’다. 勿論 歷史賞 모든 文明이 野蠻에 對한 抵抗이자 拒否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反對다. 文明史에 오르내리는 過去의 文明들은 거의 例外 없이 그 自體로 野蠻의 體制였거나 野蠻의 要素를 잔뜩 內藏한 暴力體制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文明이 例外 없이 野蠻의 體制를 志向했던 것은 아니다. 人間 文明의 內部에는 文明을 文明일 수 있게 하는 條件들을 생각하고 그 條件들을 만들어내려는 强力한 精神的 道德的 志向도 存在했고 只今도 그러하다. 文明을 外的 物理的 條件만으로 規定하는 習慣은 文明이 지닌 이 內的 志向性을 無視하는 데서 생겨난다.

    獨逸 第3帝國의 나치즘은 西유럽 文明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온 野蠻性이고 野獸性이다. 그러나 그 野蠻性 때문에 西유럽 文明 全體가 野蠻의 體制로 規定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魔女사냥, 異端 火刑, 異敎徒 迫害, 眞理獨占注意 等은 基督敎 文明이 露呈했던 野蠻의 歷史를 裝飾한다. 그러나 그 野蠻性 때문에 基督敎 文明 全體가 野蠻의 體制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文明이 自身의 誤謬를 修正하고 野蠻性을 制御하려는 精神的 道德的 志向을 그 內部에 갖고 있는가 어떤가-이런 自體 矯正力의 有無가 한 文明의 成敗를 左右하고 그 運命을 決定한다. 그 矯正力은 말할 것도 없이 한 文明을 文明이게 하고 그 文明을 持續시키는 强力한 資産의 하나다. 이 資産의 有無를 點檢하는 것이 人文學的 觀點에서 未久(未久)의 文明을 點檢한다고 할 때의 그 點檢이 지니는 세 番째 重要한 意味다. 그 資産이 없거나 微微한 文明은 短命한다. 그런 文明은 제아무리 强한 物理的 힘과 影響力을 갖고 있어도 世界의 主導的 文明으로 올라서지 못한다. 國家의 境遇도 마찬가지다.

    以上에서 우리는 어떤 國家나 文明이 世界 主導的 勢力으로 올라설 수 있게 하는 條件들과 그 條件들을 點檢한다는 것의 人文學的 意味를 探索해보았는데, 이런 基準으로 50年 或은 100年 後의 主導國이나 主導 文明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까? 이 作業은 現在에 對한 在庫 點檢으로 出發한다. 國家의 境遇, 中國이 50年 안팎의 期間 안에 世界 主導國의 자리에 오를 可能性은 現在로서는 無望하다. 産業生産量과 交易量을 합친 中國의 經濟力은 向後 10年 안팎에 美國을 넘어설 것이라는 믿을 만한 統計들이 나오고 있다. 經濟力의 伸張은 中國의 政治的 影響力을 크게 增大시킬 것이고 軍事力에서도 相當한 힘의 誇示가 可能할 것이다. 말하자면 中國은 政治, 經濟, 軍事의 세 側面에서 早晩間 世界의 主導國으로 올라설 만한 힘을 備蓄해가고 있다. 그런데 왜 中國은 “아니다”로 判定되는가? 가장 큰 理由는 現在 中國 指導部의 머릿속에는 中國의 過去 榮光을 再現하고 周邊國들, 特히 韓國과 日本을 完全히 制壓해서 中國의 霸權 아래 두려는 野心 말고는 이렇다 할 다른 世界的 비전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道德的 矮小性

    내일의 파도소리 : 다음 문명을 위한 인문학적 상상

    大學生부터 老人까지, 世代를 網羅한 350餘 名의 聽衆이 도정일 敎授의 講義를 듣고 있다.

    中國 指導部가 榮光의 再現이라는 熱望을 世界에 劇的으로 宣布한 것은 2008年의 베이징올림픽 開幕式에서다. 그 開幕式의 巨大한 藏經(場景)들은 中國의 힘을 誇示하고자 하는 熱望을 早期에 視覺化하는 데는 成功했을지 몰라도 그 熱望의 物量的 表現과 그 表現을 組織하기 위해 中國이 動員해야 했던 全體主義的 方法들은 오히려 그 熱望의 초라함과 矮小함을 逆說的으로 誇示하고 말았다. 中國 指導部가 眞情으로 關心을 가져야 할 ‘헤게모니’는 힘의 物量的 誇示가 아니라 世界人을 說得할 다른 意味의 헤게모니, 곧 道德的 主導性이다. 現在의 中國은 이 意味의 헤게모니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 事實은 한 가지 代表的 事例를 드는 것만으로도 充分히 드러난다.

    지난 10年 남짓한 사이에 中國에서는 두 사람의 노벨賞 受賞者가 나왔는데, 한 사람은 2000年 文學賞 受賞者 가오싱젠(高行健)이고 다른 한 사람은 2010年 平和賞 受賞者 류샤오보(劉曉波)다. 둘 다 中國 政府의 迫害 對象이다. 가오싱젠은 ‘反國家的’ 作品을 썼다는 理由로 入國이 禁止돼 프랑스로 亡命한 人物이고 (事實 그는 反國家的인 作品을 쓸 程度의 剛한 政治的 性向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류샤오보는 ‘反政府’ 人事라는 理由로 投獄되어 노벨賞 施賞式에도 參席하지 못한 사람이다. 이들에 對한 迫害는 偉大한 復活을 꿈꾸는 巨大한 나라 中國의 道德的 矮小性을 世界에 誇示하고 있다(이런 矮小性을 보여주는 中國的 事例는 勿論 이밖에도 無數히 많다).

    設或 反體制 人士라 하더라도 그들을 迫害해야만 中國의 國家的 權威가 바로 서고 힘이 誇示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反對다. 只今의 世界에서 不寬容은 힘이 아니라 數値이며 權威主義的 國家 體制는 모델이 아니라 唾棄의 對象이다. 世界는 이미 不寬容의 權威主義 時代를 넘어서 있다. 中國 現 指導部는 勿論이고 다음 世代의 指導部가 이런 矮小性을 그대로 維持하는 限 中國이 世界의 主導國으로 올라설 可能性은 稀薄하다. 未來의 世界에서 權威主義 國家가 世界를 이끌 可能性은 全體主義 國家에 依한 世界 掌握 可能性만큼이나 想像하기 어려운 것이다. 中國이건 다른 어떤 나라이건 間에 道德的 權威의 喪失은 現代 世界에서 한 國家가 저지를 수 있는 失敗 가운데 最惡의 것이다. 그런데 國家로서의 中國을 넘어서서 그 國家의 失敗를 矯正할 ‘中國 文明’이 있다면 그 文明은 무엇인가? 그런 內的 矯正力을 가진 文明이란 中國의 境遇 무슨 文明을 말하는가? 儒敎文明, 社會主義 文明, 아니면 資本主義 文明?

    人間 存在의 品位와 價値

    앞서 우리는 한 文明의 成敗를 左右하는 힘이 ‘文明的 資産’의 有無에 달려 있다는 主張과 함께 ‘寬容’을 그런 資産의 한 例로 들었는데 寬容 外에도 그 資産 目錄에 들어갈 項目은 여럿이다. 그 多數의 項目을 人間 文明의 資産 目錄에 오를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資産이 共有 可能한 價値를 지녔느냐라는 單 하나의 基準이다. ‘共有 可能한 價値’란 表現은 ‘普遍價値’라는 말의 現代的 修訂版이다. ‘普遍’이라는 말에 對한 反感과 批判이 워낙 드센 時代에 그것을 代替할 거의 唯一해 보이는 다른 用語가 ‘共有 可能한’이라는 表現이다. 그런데 重要한 것은 表現 自體의 運命이 아니라 그렇게 表現해야 할 어떤 共通 價値의 有無-世界 어디書이건 間에 人間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그래서 ‘共通性(commonality)’의 範疇 속에 묶어 尊重할 만한 價値 或은 價値들이 있는지 없는지에 對한 問題이다.

    共有 可能한 共通의 價値란 그것의 重要性과 必要性이 ‘立證된’ 價値다. 그것은 理論的으로 構成되는 抽象的 價値도 假說的 價値도 아닌, 文明의 오랜 過程을 통해 人間의 삶의 經驗이 持續的으로 그 必要性을 證據해낸 價値다. 가장 손쉬운 方法으로 要約하면 그것은 ‘人間이 살아 있다는 것의 기쁨’을 經驗하게 하는 價値, 그것 없이는 삶이 초라해지고 悲慘해지는 그런 價値, 無意味한 世界 속에서도 人間 存在의 ‘品位와 榮光’을 드러내는 價値다.

    ‘人權’(human rights)은 그런 價値들의 目錄 첫머리에 오를 만한 土臺的 價値다. 이 價値의 尊重이 아니고서는 人間의 品位와 삶의 榮光이 保障될 길이 없다. 이것은 單純한 主張이 아니라 經驗的 眞實의 確認이다. 自由를 爭取하기 위한 奴隸들의 거듭된 叛亂, 平等을 實現하기 위한 人間의 오랜 鬪爭, 人間 品位의 根據를 確立해보려는 數千 年에 걸친 긴 倫理的 摸索 等은 人權이라는 價値의 土臺價値的 性格을 드러내는 歷史上의 證據다. 그 人權은 西洋 近代文明의 ‘發明品’이다.

    勿論 人間 尊重의 思想은 知性史的 意味에서는 東西洋에 걸친 오랜 歷史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尊重의 土臺가 되고 根據가 될 人權 槪念을 思想 次元을 넘어 制度와 法律로 옮겨내고 정착시킨 것은 近代文明의 業績이다. 自由民主主義와 近代 憲法은 人權 槪念을 ‘讓渡할 수 없는 基本 權利’로 制度와 法律에 定着시킨 近代文明의 代表的 業績이다. 人權, 民主主義, 近代 憲法 等은 말하자면 近代文明이 만든 文明的 資産이며 그 文明의 遺産이다. 그 資産과 遺産은 只今 이 時代에도 고스란히 效力을 이어가고 있다.

    人文學的 判斷 基準

    내일의 파도소리 : 다음 문명을 위한 인문학적 상상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가 注目해야 할 아주 重要한 問題 하나는 近代文明의 그 資産이 아직도 西유럽 文明만의 것인지 아니면 어떤 地球的 普遍性, 或은 앞에서 우리가 ‘共通價値’라 부른 人類 全體의 共有 資産으로 擴大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에 對한 問題다. 이것은 敏感한 事案이다. 이슬람 文明圈의 一部에서는 人權, 自由民主主義, 近代 憲法이 世俗主義와 함께 이슬람 文明의 正體性을 威脅하고 瓦解시키려는 ‘西歐的’ 近代性(modernity)의 代表 商品이라는 觀點을 維持하고 있다. 程度의 差異는 있지만 中國의 立場도 이와 類似하다.

    人文學의 觀點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特定의 政治的 立場이나 特定 이데올로기의 어느 한쪽에 줄 서지 않는 것은 人文學의 傳統이다. 價値에 關한 問題에서 人文學의 第1 關心事는 어느 하늘 밑에 살건 人間의 品位를 높이고 그의 삶을 意味 있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價値가 무엇인지를 思惟하고 探索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人文學的 判斷 基準은 어떤 價値가 바로 그 같은 共通性을 인정받을 만한 것인지 아닌지로 좁혀진다.

    이 觀點에서 우리는 이런 質問을 던져볼 수 있다. 未來 文明이 近代文明의 文明的 資産들을 拒否하거나 否定하고서도 文明으로 成立할 수 있겠는가? 그 資産의 相當 部分은 人間 文明을 文明이게 하는 ‘最小’ 條件이 아닌가? 더 분명한 말로 내 判斷을 말하라면, 그 最小 條件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文明은 제아무리 强力한 힘을 쌓아도 未來 世界를 이끌 主導 文明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根本的으로 그것은 缺如의 文明, 抵抗을 觸發하는 不滿의 文明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에 敢히 ‘人文學的 觀點’이라는 表現을 使用하고 있다.

    近代 西歐文明은 그 業績 못지않게 恥辱으로 가득 찬 文明이다. 帝國主義, 資源 收奪, 大規模 奴隸장사, 戰爭, 環境破壞는 文明의 이름으로 野蠻의 體制를 演出한 그런 恥辱의 章들을 代表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重要한 것은 그 野蠻을 벗어나고 羞恥스러운 歷史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自己 矯正力이 그 文明의 內部에 있느냐 하는 問題다. 우리가 앞에서 文明的 資産에 重要性을 附與한 것은 그 資産이 무엇보다도 그 같은 自己 治癒와 校庭의 能力을 發動시키는 힘의 源泉이기 때문이다. 이 源泉이 없거나 破壞되면 어떤 文明도 持續性을 갖지 못한다. 이 亦是 理論的인 主張이 아니라 文明史의 眞實이다. 우리가 西유럽文明의 持續的 主導性 與否를 判斷코자 할 때 動員할 수 있는 基準도 그것이다. 또 이 觀點에서 美國을 包含한 現在의 西유럽文明이 안고 있는 危機의 診斷도 可能하다.

    西유럽文明은 그 文明을 强한 文明이게 할 수 있었던 文明的 資産의 漸進的 弱化라는 危機를 안고 있다. 强點이 되레 弱點이 되고 있다. 이것은 유럽文明이 自己 自身에 對한 確信을 喪失해가는 데도 그 原因이 있지만, 本質的으로는 ‘文明의 約束’ 그 自體가 文明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아이러니에 起因한다. 유럽文明은 이 아이러니의 破壞性을 타넘을 수 있을까? 유럽文明의 未來는 이 問題에 달려 있다.

    偶然과 非偶然

    歷史의, 또는 文明의 未來를 豫測한다는 것은 都大體 可能한 일인가? 未來는 人間이 가진 어떤 豫測力度 벗어나는 偶然性의 領域이어서 그 未來를 展望한다는 것은 애當初 無用한 作業이라는 觀點이 없지 않다. 이 觀點은 相當히 魅力的인 것이다. 實際로 歷史上 이런저런 文明들이 우연한 事件에 依해 그 興亡盛衰의 瞬間을 맞았던 境遇가 없지 않다. 火山爆發, 洪水와 가뭄을 包含한 氣候變化, (한때의) 疫病 等은 人間의 統制力을 벗어난 것들이라는 意味에서 偶然性의 介入 事例에 屬한다고 볼 수 있고 이런 種類의 偶然性이 文明의 沒落을 招來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할 수 없는 境遇도 許多하다. 게르만의 오도아케르가 로마 城門을 밀치고 들어선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듯 로마文明은 偶然히 崩壞된 것이 아니다. 西유럽 近代文明이 世界의 支配 文明으로 올라선 것은 偶然이 아니며 19世紀 末 東아시아 儒敎文明의 衰落도 우연한 事件이나 不運한 事件의 連續에 依해서가 아니다. 이슬람文明은 14世紀 以後부터 西유럽文明에 밀리기 始作했는데, 이 後退 亦是 우연한 일이 아니다. 國家의 境遇도 그러하다. 淸朝(淸朝)의 滅亡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면 大韓帝國의 衰亡度 偶然은 아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라는 한 人物이 어느 날 난데없이 나타났기 때문에, 或은 다른 어떤 偶然要素의 不可解한 發生 때문에 蘇聯이라는 나라가 地球上에서 없어진 것은 아니다.

    文明을 包含한 人間 歷史가 偶然과 非偶然을 씨줄과 날줄로 해서 矯直되어왔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로운 者의 語法 같아 보인다. 그러나 文明의 興亡史에서 窮極的으로 重要한 것은 그 ‘非偶然’의 要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어떤 文明도 理由 없이 衰落하거나 敗亡하지 않듯 한 文明이 다른 文明을 代替하거나 어떤 文明이 獨特한 發展과 興戎을 보이게 되는 데는 合理的 說明의 要求를 충족시킬 만한 理由와 原因들이 存在한다. 成功하는 國家가 있듯 失敗하는 國家가 있고, 成功하는 文明이 있듯 失敗하는 文明이 있다. 國家나 文明의 失敗에서 人間의 統制力을 벗어난 힘의 作用을 除外했을 때 남는 것은 ‘非偶然的 要素’다.

    왜 失敗했는가? 이 質問에 對答하기 위해서는 責任의 問題가 提起되고 責任은 行爲者(actor)의 存在를 前提한다. 이 集團行爲者는 ‘人間’이다. 人間의 行動과 非行動, 그의 選擇과 誤判, 決定과 非決定 같은 것은 文明의 成敗를 左右하는 非偶然的 要素다. 이런 要素를 빼버리면 國家, 社會, 文明에 發生하는 失敗는 누구에게도 責任이 없는 失敗, 理由를 알 수 없는 失敗, 說明佛家의 模糊한 失敗로 돌아간다.

    文明의 未來

    文明의 未來 或은 未來의 文明을 展望하는 데도 우리는 같은 方式의 論理를 適用할 수 있다. 文明은 理由 없이 衰落하거나 失敗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文明의 未來가 ‘알 수 없는’ 多數의 可能性에 열려 있다는 생각, 人間의 豫測技術로는 그 多數의 可能性을 모두 考慮할 수 없기 때문에 未來는 거의 全的으로 어둠에 가려진 領域이라는 等의 생각은 人間의 傲慢을 警戒하는 데는 有用할 수 있어도 人間事에 對한 ‘人間 自身의 責任’을 깊게 考慮하는 데는 別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음 時期의 文明을 人文學的으로 想像해보는 일은 무엇보다도 ‘文明에 對한 人間의 責任’이라는 問題意識을 떠나서는 可能하지 않은 作業이다. 文明에 對한 人間의 責任이란 誤謬와 數値, 抑壓과 破壞의 文明을 可能한 限 遮斷하고, 그런 文明을 未來에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責任이다. 그것은 野蠻의 歷史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責任과 同一하다.

    只今의 世界人은 現存하는 多數의 文明으로부터 이어받을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어 人間을 위한 人間의 文明을 構築 또는 再構築해야 할 責任을 지고 있다. 最終的 責任은 人間 그 自身의 行動에 달려 있다. 이것이 人文學的 觀點에서 未來 文明을 點檢한다는 일의 마지막 意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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