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日修好條約
(?日修好?規)은
1871年
9月 13日
에
淸나라
톈진
에서
日本
과 淸나라 사이에서 처음으로 맺어진 對等한 條約이다. 日本 側 大使는 財務代身
다테 무네나리
, 淸나라 側 大使는 直隷總督
李鴻章
이었다.
槪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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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과의 國交 問題가 坐礁되고 있는 가운데
淸나라
와의 國交 締結을 優先視해야한다는 생각에서
1870年
7月 27日
야나기와라 사키미츠
,
하나부사 요시모토
를 派遣해 豫備 協商을 통해 이어 正規 臺詞로 다테가 보내졌고, 府使가 된 야나기하라와 함께 막바지 協商을 進行했다. 平等 條約이었지만 그 內容은 兩國이 함께 龜尾에서 强要했다 不平等 條約의 內容을 相互 認定할 程度로 매우 特異한 內容이었다.
淸日 戰爭
勃發 前까지 그 效力이 繼續되었다.
內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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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容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 兩國은 서로의 ‘領土’에 ‘國境 侵犯’ 自制 (第1條)
- 外交 使節의 交換과 領事를 相互 主宰하게 한다 (第4條, 第8條)
- 兩國의 協商은 漢文을 使用하며, 一門을 利用할 때 漢文을 追加한다.(제6조)
- 制限的인 領事 裁判權을 相互 認定한다.(제8조, 第9條, 第13條)
- 兩國의 開港場에서는 刀劍의 携帶를 禁止한다. (第11條)
- 通商 關係에 對해서는 龜尾 列强에 準하는 待遇(
最惠國 待遇
, 協定 關稅率)를 서로 認定한다.
批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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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協約의 特異性에서 當時 東洋에 進出했던 主要 龜尾 列强의 軍事 同盟의 密約 疑惑을 갖게 한 것이나 領事 裁判權의 存在 等에 對한 問題點으로 批准이 遲延되었지만,
마리아루스 號 事件과
류큐 御用 船舶의 臺灣 漂着 事件
의 影響으로 批准의 必要性이 높아지면서 一連의 事件을 마무리 짓기 위해 淸나라를 訪問한 外務卿
소에지마 다네오미
에 依해
1873年
4月 30日
批准書가 交換되어, 發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