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2次 포에니 戰爭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第2次 포에니 戰爭
포에니 戰爭 의 一部

紀元前 218年 戰爭直前의 로마 共和政과 카르타고의 影響力 比較
날짜 [紀元前 218年 ~ 紀元前 202年
場所
結果 로마 勝利
交戰國
로마 共和政
아이톨리아 同盟
페르가몬
카르타고
시라쿠사
마케도니아 王國
指揮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
파비우스 막시무스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
티베리우스 셉티미우스 롱구스 ,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壘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
마시니사 ,
美累키우스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한니발 ,
하스드루發 바르카 †,
마고 바르카 †,
하스드루發 기스코 †,
時팍스 ,
對 韓노
대머리 하스드루發
함프시코라
마하르發

第2次 포에니 戰爭 ( 라틴語 :Secundum Bellum Punicum) 또는 한니발 戰爭 ( 라틴語 :Bellum Hannibalcum)은 紀元前 218年부터 紀元前 202年까지 로마 共和政과 카르타고 사이에 벌어진 一連의 戰爭을 말한다. 카르타고의 將軍 한니발 과 로마의 對決이라는 點에서 한니발 戰爭 으로도 부른다. 이 戰爭에서 로마 共和政 은 初期에는 名將 한니발에 밀려 이탈리아 本土까지 침략당하였으나 끝내 逆轉에 成功하여 카르타고를 꺾고 地中海 西部의 霸權을 차지한다.

1次 포에니 戰爭과의 사이 [ 編輯 ]

카르타고의 狀況 [ 編輯 ]

第1次 포에니 戰爭 이 끝나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에 對한 主導權을 喪失하고 로마에 莫大한 賠償金을 물어주어야 했고 戰爭에 參加한 다른 나라 傭兵들의 給料도 支拂해야했다.

이것은 카르타고에게 相當한 壓迫으로 作用하여 及其也 紀元前 240年 給料에 不滿을 품은 傭兵들이 叛亂을 일으켰다. 傭兵의 叛亂은 傭兵의 出身 國家들과 카르타고內의 反 카르타고 勢力과 結合하여 거의 3年 4個月을 끌고서야 解決되었다. 그 渦中에 로마는 사르데냐 코르시카 에 對한 支配權을 얻었다.

한便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 는 傭兵의 叛亂을 鎭壓하고 海外로 눈을 돌려 히스파니아 로 移住하고 本格的인 히스파니아 植民地 經營에 着手했고, 紀元前 228年 에는 히스파니아 東쪽에 '새 카르타고'(現在 에스파냐의 카르타헤나 )를 세우고 自身의 바르카 家門의 中心地로 삼았다.

로마의 狀況 [ 編輯 ]

로마는 시칠리아를 屬州로 삼았고 카르타고가 傭兵 叛亂을 鎭壓하는데 餘念이 없는 동안 사르데냐 코르시카 를 카르타고의 影響力에서 自身의 것으로 만들어 地中海 西部에 對한 影響力을 擴大했다. 또한 일리리아 의 海賊을 掃蕩하면서 아드리아海 로 進出하고 南下하는 켈트人 의 侵入에 맞서 북이탈리아 , 알프스 以南까지 그 領土를 擴張하였다.

戰爭의 初期 [ 編輯 ]

第2次 포에니 戰爭의 主要 戰鬪 狀況도.

紀元前 219年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 의 뒤를 이어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植民地를 經營하던 한니발 이베리아半島 東쪽 海岸에 있는 사군툼 을 侵攻했다. 사군툼은 로마의 同盟國으로 로마는 한니발의 撤收를 要求했으나 히스파니아 植民地로 自信感을 얻은 카르타고는 이를 拒絶했고 로마는 카르타고에 宣戰布告를 했다. 第2次 포에니 戰爭이 勃發한 것이다.

紀元前 218年 5月 한니발은 步兵 4萬 名, 起兵 8,000名, 戰鬪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피레네山脈 을 넘었다. 로마는 卽時 2個의 軍隊를 編成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 로 나누어 보냈다. 한니발은 로마의 虛點을 찔러 갈리아 를 가로질러 바로 알프스山脈 을 넘어 이탈리아에 이르렀다. 險峻한 알프스를 넘으면서 그의 兵力은 步兵 2萬 名, 起兵 6,000名으로 줄었다. 그해 11月 로마軍과 카르타고군은 티키누스 에서 처음 만났다. 티키누스 戰鬪 에서 執政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 이끄는 로마軍은 카르타고의 騎兵에 밀려 敗했고 이어서 트레비亞綱에서 벌어진 트레비亞綱 戰鬪 에서도 騎兵과 步兵이 모두 맞붙었으나 한니발의 戰術에 밀려 로마軍은 大敗했다. 이로써 로마는 알프스 南쪽의 갈리아 地方을 抛棄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인 紀元前 217年 4月 예전에 에트루리아 地域인 트라시메노湖 戰鬪 에서도 로마軍은 執政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가 戰死할 만큼 壞滅的 打擊을 입고 敗했다. 이 戰鬪로 로마는 토스카나 地方도 잃었다. 이제 로마가 바로 코 앞에 있었지만 한니발은 바로 로마로 쳐들어 가지 않고 로마의 周邊 都市를 攻擊했다. 이는 로마의 聯合勢力을 次例로 로마로부터 分離하여 로마를 孤立시키고 最終的으로 로마를 攻擊하여 降伏을 받으려는 戰略이었다.

이에 맞서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 獨裁館 에 任命하고 한니발과 맞서 싸우지 않고 逃亡다니는 地球 戰術을 驅使했다. 이 戰術은 비록 많은 로마인에게 비웃음을 사고 批判을 받았지만 當時의 로마로서는 有效한 戰略이었다. 또한 한니발의 期待와는 달리 壓倒的인 카르타고의 戰力에도 不拘하고 로마의 同盟 勢力은 로마에 反旗를 들지 않았다.

紀元前 216年 카르타고와 로마軍은 칸나이 平原에서 大規模 回轉을 벌였다. 한니발은 언제 어디서든 自身이 願하는 位置에서 自身이 願할 때를 골라 戰鬪를 벌였고 勝利했다. 칸나이에서도 일부러 지는 척하다가 自身의 戰術上 有利한 칸나이 平原까지 로마軍을 끌어들여 싸웠다. 로마軍의 前歷은 8萬 4千에서 7千 名假量, 한니발의 軍隊는 5萬 假量이었다. 로마軍은 이러한 壓倒的인 數字에도 不拘하고 天才的인 한니발의 戰術에 휘말려 壞滅했다. 이 戰鬪는 包圍 殲滅戰의 敎科書的인 戰鬪로 歷史上 有名한 戰鬪로 손꼽힌다.

戰爭 中盤 [ 編輯 ]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乘勝長驅하고 있을 무렵, 히스파니아에서는 코르넬리우스 兄弟가 이끄는 로마軍이 한니발의 背後地인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植民地를 相對로 宣傳하고 있었다. 紀元前 215年 시라쿠사 카푸아 가 한니발 便으로 돌아섰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歲 도 한니발과 共同 鬪爭을 宣言했다. 로마 元老院 에서는 한니발의 慇懃한 强化 提議를 拒絶하고 파비우스 막시무스 를 다시 執政官으로 選出하여 파비우스 戰術 體制로 突入했다. 한니발과 正面 勝負를 避하고 群團을 쪼개어 持久戰을 펼치면서 한니발을 이탈리아 半島 안에서 고립시키는 戰術을 펼친 것이다. 이 해에 로마軍은 한니발을 相對로 이기지도 않았지만 지지도 않았다. 이때부터 4年間 南部 이탈리아에서 로마軍과 한니발은 消耗戰을 벌였고 戰線은 膠着 狀態에 빠졌다.

한便 시칠리아와 마케도니아 王國 에서는 로마가 漸次 傳貰를 逆轉시켜 나갔다.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5歲 는 한니발과의 約束을 지키지 못하고 로마의 軍團과 그리스의 다른 國家들의 妨害로 한니발과 呼應해서 이탈리아로 오지 못했으며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는 아르키메데스 의 新武器로 로마軍은 苦戰했지만 紀元前 211年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 이끄는 로마軍은 1年餘에 걸친 攻城戰을 끝내고 시라쿠사 를 陷落시켰다. 이때 아르키메데스 는 數學問題를 푸는 데 熱中해 있다가 미처 그를 알아보지 못한 로마兵士에 依해 殺害되었다. 또한 캄파니아 地方 의 要旨인 카푸아 는 로마軍에 包圍되었고 한니발이 求하려 애썼지만 結局 로마軍에게 奪還되었다. 이로써 시칠리아와 캄파니아를 모두 잃은 한니발의 孤立은 强化되었다.

戰爭 末期 [ 編輯 ]

자마 戰鬪

紀元前 209年 이탈리아에서 膠着狀態에 빠진 戰鬪와는 달리 멀리 히스파니아에서는 26歲의 젊은 스키피오 가 大膽한 戰術로 한니발의 根據地인 神 카르타고( 카르타고 노바 )를 陷落시켰다. 한니발은 로마의 將軍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와 쫓고 쫓기는 狀態에서 一進一退를 거듭하고 있었고 그 사이 마지막으로 한니발에게 남은 타렌툼 이 陷落되었다. 이듬해 히스파니아의 스키피오는 바이쿨라 戰鬪 에서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發 바르카 의 카르타고 軍을 무찔렀다.

하스드루발은 남은 精銳 카르타고 君을 모아 紀元前 207年 한니발의 알프스 行軍 길을 利用해 北部 이탈리아에 到着했고 半島를 내려가 한니발과 合流해 로마를 攻擊할 豫定이었다. 偶然히 이 情報를 入手한 로마군 司令官 클라우디우스 네로 는 自身의 區域인 南部 이탈리아를 離脫하여 北쪽으로 移動하여 메타우루스 江둑에서 카르타고군을 물리쳤고 이 메타우루스 戰鬪 에서 하스드루發은 戰死했다. 이듬해에는 只今의 세비야 近處에서 벌어진 一理派 戰鬪 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는 카르타고군을 壞滅시키고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 勢力을 完全히 물리쳤다. 以後 스키피오는 아프리카에서 누미디아 마시니사 와 손잡고 카르타고 本土 侵略을 위한 발板을 마련하였고 이 무렵 한니발의 막내동생 마고네는 제노바에 上陸하여 한니발을 도우려 했지만 로마軍에게 沮止 當했다. 한니발은 膠着된 戰線을 지키며 南部 이탈리아에 틀어박혀 있었고 負傷當한 마고네는 북이탈리아에 蟄居했다.

한便 스키피오는 北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를 威脅했고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는 强化交涉이 이어졌다. 紀元前 203年 한니발과 동생 마고네는 本國 政府에 依해 카르타고로 送還되었는데 마고네는 航海 中 죽었다. 兩國의 强化가 거의 이루어질 무렵 强化는 決裂되었고 이듬해인 202年 兩쪽은 나라의 運命을 건 決戰을 準備하게 되었다.

자마에서 벌어진 回戰에서 한니발이 指揮하는 카르타고군과 스키피오가 指揮하는 로마軍과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騎兵隊 聯合軍이 맞붙었다. 카르타고군은 步兵 4萬 6千, 騎兵이 4千, 戰鬪 코끼리가 80마리였고 로마軍은 라일리우스가 左翼, 마시니사 의 누미디아 騎兵이 右翼을 맡은 騎兵隊 6千을 包含하여 約 4萬 名의 兵力이었다. 戰鬪의 結果는 스키피오의 勝利였다. 한니발은 그의 長技인 騎兵의 劣勢를 克服하지 못하고 敗했다. 結局, 카르타고는 降伏했다.

더 읽어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