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舜臣 (1553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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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舜臣
全羅道 兵馬節度使(全羅道 兵馬節度使)
이름
시호 無의
武毅
身上情報
出生日 1553年 12月 27日 ( 1553-12-27 )
子女 李鐸(아들) 이숙(아들)
宗敎 儒敎 ( 性理學 )
李舜臣
李純信
別名 字는 立部, 諡號는 無의(武毅)
出生地 京畿道 시흥군 書面 日直리
死亡地 漢城府
服務 朝鮮
服務期間 1578年 ~ 1611年
最終階級 品階:
官職:全羅道兵馬節度使(종2品級)
指揮 朝鮮 海軍
主要 參戰 壬辰倭亂 , 丁酉再亂
기타 履歷 朝鮮 王族, 諡號는 無의

李舜臣 (李純信, 1553年 [1] 12月 27日 ~ 1611年 9月 2日 )은 朝鮮 중기의 王族, 武裝, 儒學者이다. 壬辰倭亂 때에 活動하던 將帥로 그의 上官이기도 했던 忠武公 李舜臣 (李舜臣), 登臨수 李舜臣 (李舜臣) 等과의 區別을 위해 無衣공 李舜臣 , 立部 李舜臣 으로 불린다. 本貫은 全州 . 讓寧大君 의 다섯째 庶子 長平道政 (長平都正)의 4代孫이자, 大韓民國 初代 大統領 李承晩 의 9代 幇助가 된다. 시호 는 無의(武毅), 字는 立部(立夫)이다.

讓寧大君 의 後孫으로 1578年( 宣祖 11年 ) 武科에 及第하였으며 義州의 判官, 혜산진 僉節制使로 勤務했다. 1592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李舜臣(李舜臣)의 麾下에서 中位長·前部長으로 玉浦·합포·적진포·唐布·閑山島·釜山浦 해前 等에서 活躍하였고, 丁酉再亂 後半에 忠武公 李舜臣 李 戰死하면서 一時的으로 그의 役割을 代行(代行)하기도 했다. 또한 壬辰倭亂 때 戰死한 이억기 처럼 王室宗親이기도 하다. [2] 鶴峯 김성일 (金誠一)의 門下生이기도 하다. 京畿道 始興 出身.(朝鮮 漢城府 乾川洞)

生涯 [ 編輯 ]

壬辰倭亂 以前 [ 編輯 ]

出生 背景 [ 編輯 ]

李舜臣은 朝鮮 의 王族으로 덕수 李氏 忠武公 李舜臣 과는 同名異人이었다. 李舜臣은 朝鮮 太宗 의 長男 讓寧大君 의 後孫으로, 1553年 (明宗 8) 12月 27日 讓寧大君 의 다섯 番째 庶子 長平道政 (長平都正) [3] 의 4代孫 純忠補助功臣(純忠補祚功臣)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판 義禁府 社 완원군(完原君) 李瑱(李眞)과 安東金氏 成均館 眞사 김구수(金龜壽)의 딸인 貞敬夫人 金氏의 다섯째 아들로 京畿道 시흥군 書面 日直里에서 태어났다.

將軍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文學에 힘썼으며 智慧가 뛰어났다. 長成하면서 人格이 峻嚴하며 斷定하고 志操가 굳었다. 어려서는 李滉 의 弟子인 김성일 (金誠一)의 門下에서 修學했다.

官僚 生活 [ 編輯 ]

1577年 (宣祖 10) 9月 謁聖別試(謁聖別試) 武科 乙科에 及第하였으며, 활쏘기 大會에서 장원한 上으로 北方 防衛에 差出되는 것을 免除받았다. 1580年 (宣祖 13)에 彈劾을 받고 宣傳官에서 罷職되었으나 그 해 겨울 다시 福關하여 宣傳官이 되었다. 1582年(宣祖 15)에 備局랑(備局郞)을 兼任하고 이듬해 4月에 强震縣監에 赴任하여 善政을 베풀었다. 그러나 强震 의 地域 豪族(豪族)들과 摩擦을 빚어 1585年 (宣祖 18)에 罷職당하였다.

그 뒤 特別 別名(別命)을 받아 宣傳官에 復職되어 御殿을 護衛하다 옛 스승인 김성일 (金誠一)의 薦擧로 1586年(宣祖 19) 咸鏡道 온聲部 判官이 되었다.

1588年(宣祖 21)에 아버지像을 脫喪하고 義州판관(義州判官)으로 拔擢되어 明나라 使臣 遂行業務를 맡게 되었다. 이때 使節團의 行次時 賂物을 要求하는 것을 老子만 주고 모르는 체하자 明나라 使節團이 歸國길에 問責하려 함에 群舞를 暫時 떠났다가 彈劾당하여 罷職됐다. 1589年(宣祖 22)에 咸鏡道 혜산진僉使(惠山鎭僉使)에 任命되어 女眞族의 侵略을 막으러 나갔으나 赴任 途中 發病하여 敵軍이 管下(管下)의 운총壁(雲寵壁)을 네 次例나 侵入함을 막지 못하여 咸鏡道 조방장 한極盛(韓克誠)의 問責을 받았으나 宣祖가 特別히 銀錢을 베풀어 감율(減律)을 命했다. 그러나 전 上司와의 不和로 部下館과 함께 三修(三水)로 가게 되자 宣祖는 그를 罷職하여 귀양보냈다.

2年 後에 日本通信使 一行이 倭寇의 辯을 高下字 再登用되었으며, 1591年(宣祖 24) 방답陣僉使(防踏鎭僉使)로 赴任되어 武臣끼리의 社報聯統(私報緣通)으로 全羅左水使 李舜臣 의 電線(戰船) 製作에도 參與하여 諮問하였고, 管內의 聖地(城池), 機械(機械), 築城과 製作에 專力함으로써 望樓(望樓), 主로(舟櫓), 軍기영기(軍旗令旗)들이 一齊히 整備되었다.

壬辰倭亂 後 [ 編輯 ]

戰亂 初期 活動 [ 編輯 ]

忠武公 李舜臣 의 手下로 壬辰倭亂의 水軍 장수로 服務하였으며 功勞로 宣武功臣(3等)李 되었다. 壬辰倭亂 直前인 壬辰年 正月에 방답陣 僉使로 李舜臣 將軍의 麾下에서 水軍을 指揮하게 되었으며 以後 壬辰倭亂 동안 李舜臣 將軍의 先鋒將 役割을 遂行했다. 1592年(宣祖 25) 4月 倭敵이 侵入해 오자 全羅左水使 李舜臣 으로부터 管下 電線 24隻을 總動員하라는 命令을 받고 5月 20日 부터 水軍 중위장, 水軍 前部長으로 水軍 兵力을 이끌고 옥포(玉浦) 海戰에서 敵船 50餘 隻, 합포(合浦) 海戰에서 敵船 5隻, 高聲(固城) 海戰에서 敵船 13隻, 露梁(露梁) 海戰에서 敵船 1隻, 泗川(泗川) 海戰에서 敵船 12隻을 擊破하여 李舜臣의 信任을 받았다.

6月에는 唐布(唐浦)까지 나가 敵船 20餘 隻을 불사르고, 慶南 巨濟島 (巨濟島)의 敵 根據地로부터 敵船 10餘 隻이 支援오는 것을 擊墜하였으며 당항포(唐項浦)로부터 掩護하는 積善 26隻과 浦口에 있는 敵船 5隻을 擊破하였다. 또한 射殺한 적이 數百名에 이르고 緋緞軍服에 大檢을 짚고 있던 敵將度 1名 生捕하였으며, 鹵獲品 가운데는 敵의 部長들의 결瀉血眞시킨 砥鍊(祗聯)李 6卷이나 되었다. 7月 에는 加德島 , 巨濟島 에 積善을 追擊하다 견내량(見乃梁)의 敵船 73隻을 發見하고 하루 終日 閑散(閑山) 앞바다로 誘引하는 일을 專擔하여 끝내 敵을 沒殺시켰다. 연이은 勝戰으로 加德島 에 駐屯하던 倭軍은 閑山島 敗戰에 怯을 먹고 士氣가 떨어졌으므로 공이 먼저 나가 肉薄하여 積善을 擊沈하였다. 8月 , 敵들이 萎縮되어 釜山 앞바다에 潛伏하고 있는 것을 공이 先鋒將이 되어 禍존抛(和尊浦)에서 敵船 5隻을 誘引하여 擊破하고, 鉏大砲(西大浦)에서 8隻을, 서평포(西平浦)에서 9隻을 擊破하고 絶影島 (絶影島)에서도 敵船 2隻을 殲滅하였다. 9月에 들면서 釜山 앞바다의 倭敵 根據地를 殲滅하기 위한 哨戒(哨戒)와 探報(探報)를 수없이 遂行한 끝에 敵船 5百餘 隻이 세 곳으로 粉塵(分陣)하고 있는 것을 包圍전멸시키는 等 싸움을 勝利로 이끌었다. 敵의 士氣를 奇襲攻擊으로 挫折시켰으나 繼續되는 奇襲攻擊으로 共의 部下들은 敵의 受給을 모을 機會를 놓침으로써 共의 功績이 朝廷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忠武公 李舜臣 將軍은 苦心하였다고 < 亂中日記 (亂中日記)>에 적고 있다.

壬辰倭亂 [ 編輯 ]

1593年(宣祖 26) 敵軍이 和議를 내세워 接戰이 뜸한 동안에 忠武公 李舜臣 은 報告書에 “李舜臣(李純信)은 湖南 嶺南 開戰 以來 10回에 걸쳐 1回는 中軍(中軍)을, 9回는 先鋒을 맡아서 오직 敵의 氣勢를 꺾는 데 專念하느라고 敵의 受給을 모아 功績을 자랑할 겨를이 없기에 特別히 앞세워 상계(上啓)했건만 論功(論功)李 홀로 純臣(純信)에게 미치지 못하와 油田地空(有戰之功) 無電地上(無戰之賞)이라는 群心(軍心)의 怨望이 있습니다.”고 報告하였다.

李舜臣 의 報告를 받은 先祖로부터 折衝將軍(折衝將軍)에 祭需, 특진되었으며, 1594年 (宣祖 27) 忠淸道搜査(忠淸道水使)에 補職되었다. 忠淸水使 在職 中 刑律을 嚴히 適用했는데, 王命을 받고 派遣된 王命特使(王命特使)는 軍律을 嚴格하게 한다며 刑罰過中(刑罰過重)으로 報告하고, 保寧(保寧) 土豪 김태국(金泰國)李 私奴(私奴) 한손(漢孫)을 시켜서 낸 高변도 朝廷에 報告되어 拘禁 調査받게 되었다. 1595年(宣祖 28)에 다시 풀려나 고령진僉使(高嶺鎭僉使)로 降等되어 任命되었다.

1596年 (宣祖 29)에 發病하여 僉使職에서 辭任하였다가 忠淸水使로 復歸했다.

丁酉再亂 때 [ 編輯 ]

1598年 倭敵의 재침이 傳해지자 備邊司에 依하여 그는 유부수軍將(留部水軍將)으로 任命되었다.

全羅道 高嶺陶(高嶺島)에 軍士를 머물게 하고 戰費를 가다듬어 흥양(興陽)에서 敵船 30餘 隻을 壞滅시켜 一乘을 올리자 宣祖代王은 特別히 嘉善大夫에 乘車시켰다. 以後 李舜臣 의 幕下에서 中位長으로 露梁海戰 에 參戰 [4] , 敵의 우두머리 行長(行長)李 全南 順天(順天)에 城을 쌓고 지킴으로 明나라 將軍 유정 (劉綎)과 진린(陳璘)李 海溝(海口)를 守備하다 行長(行長)李 드디어 巨濟 · 海南 · 固城의 敗殘兵을 하여 夜襲을 敢行해 왔다. 忠武公 李舜臣 以下 全君은 總攻擊을 準備하고 豫備伏兵인 功은 敵의 歸路를 追擊하여 南海 露梁의 여울목에서 豫備伏兵인 功은 어영담 (魚泳潭)· 便興립 (邊興立)의 軍士와 함께 쳐들어오는 敵과 大接戰을 하였다. 이 過程에서 忠武公 李舜臣 李 戰死하게 된다.

戰亂 終結 以後 [ 編輯 ]

壬辰倭亂 이 끝나자 明나라 提督 진린 에 依해 忠武公 李舜臣의 뒤를 이을 統制使로 薦擧 받았다. 1599年(宣祖 32) 1月에 수社稷을 물러나서 捕盜大將 兼 道총사 摠管에 任命되었으며 1600年(宣祖 33)에 忠淸水使 · 水原府使 · 輕傷府使를 歷任하였다. 1601年 黃海道 兵馬節度使 가 되었으나 財物을 貪한 罪로 다시 罷職되었고, 1602年 (宣祖 34年) 昌原 府使 로 赴任했다가 到任한지 얼마 뒤인 그해 3月 遞任되었다. 1604年 僉知府使가 되었고, 宣武功臣(宣武功臣) 3等에 錄勳되었다.

1604年부터 全羅防禦使· 水原 府使 · 咸鏡道 兵士(咸鏡道兵使) 等을 歷任했다. 1607年 완천군(完川君)에 奉職되었으며 以後에는 全羅兵馬節度使를 歷任하였다. 以後, 捕盜大將, 訓鍊大將 兼 五衛都摠府 都摠管 等을 지냈다. 1609年 (光海君 1)溺死原從功臣 2等에 책록되었다.

1611年 ( 광해군 3年 ) 9月 2日 에 59歲로 別世하여 現在 京畿道 시흥군 서면 日直리(現 광명시 일직동)에 장사되었다. 人組 議政府 左贊成 追贈 (追贈)되었다. 1679年 ( 肅宗 6年 )에 無의(武毅)라는 諡號를 祭需 받았다.

無衣공 李舜臣 墓 》는 京畿道 光明市 일직동 에 있다. 1987年 9月 10日 광명시의 鄕土文化遺産 第4號로 指定되었다.

기타 履歷 [ 編輯 ]

朝鮮王朝實錄 》에는 忠武公 李舜臣의 勝戰報告에 權晙 , 정운 과 함께 가장 먼저 이름이 올라가 있는 長壽 中 하나로 功을 세웠다고 記錄하고 있다. [5] 그러나 非難을 받아 여러 番 彈劾 된 事實도 記錄되어 있다. [6]

主로 '방답僉使 李舜臣'으로 불러서 忠武公 李舜臣과 區分하며, 활을 매우 잘 다루었다.

家族 關係 [ 編輯 ]

  • 部 : 완원군(完原君) 李瑱(李眞, ? ~ 1588)
  • 某 : 安東 金氏 (安東 金氏) - 成均館 眞사 김구수(金龜壽)의 딸
    • 否認 : 坡平 尹氏 (坡平 尹氏) - 虞侯 윤천수(尹天壽)의 딸
      • 長男 : 완興群(完興君) 李鐸(李王+?, 1578 ~ 1608)
      • 며느리 : 鑛山 李氏 - 이호문(李好問)의 딸
      • 次男 : 완산군(完山君) 이숙(李琡, 1579 ∼ 1651)
      • 며느리 : 星州 裵氏 - 배흥립 (裵興立)의 딸
        • 孫子 : 이광보(李光輔, 1600 ~ 1670)
        • 孫女 : 宜寧 南氏 護軍(護軍) 남두名(南斗明)의 妻
        • 孫女 : 文化 류氏 縣監(縣監) 類린(柳璘)의 妻
        • 孫女 : 이정관(李廷觀)의 妻
      • 며느리(側室) : 이름 未詳
        • 鉏孫子 : 이광우(李光佑, 1603 ~ 1679)
    • 側室 : 이름 未詳
      • 庶女 : 判書(判書) 남이공(南以恭)의 粧帖(長妾)

기타 [ 編輯 ]

潛水艦 李舜臣函 [ 編輯 ]

大韓民國 海軍 場보고級 潛水艦 의 第7番함인 李舜臣函 (SS-68) [7] 은 無衣공 李舜臣의 이름을 딴 것이며, 1999年에 就役하였다. 參考로 忠武公 李舜臣 函 은 忠武公 李舜臣 提督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여러 次例의 彈劾 [ 編輯 ]

1, 임란以後(1598. 11 ~1610. 9) 無衣공 李舜臣이 死亡時까지 11年 10個月(母親喪 期間 2年 除外하고 實際 9年 10個月)동안 無衣공 補職이 18番 바뀐다.

2, 無衣공 李舜臣이 朝鮮 王室의 後裔이지만 平素 南人系列 鶴峯 金誠一의 推薦으로 가까웠다. 倭亂이 끝나면서 露梁海戰에서 忠武公이 戰死하는 날인 1598年 11月 19日 領議政 류성룡이 罷免에 이어 12月 6日 削奪官職 等 南人이 沒落하고 壬辰倭亂이 7年 戰爭이 끝나면서 朝鮮의 朝廷은 西人(北人)天下가 되었다. 戰爭을 함께 치룬 生死의 同志이자 멘토 忠武公의 戰士로 後援 勢力이 沒落했다.

3, 現職에 勤務하면서 1) 義州판관 在任時(1588年) 明나라에 가는 使臣(燕行士)의 無理한 要求를 拒絶하여 結局은 罷職, 귀양가게 되었다. 2) 忠淸水使 部臨時(1594年)戰爭 中 現地 牧師의 無節制한 行動과 處身에 對하여 罪를 줄것을 奏請하였는데 오히려 相對方에서 弄奸을 부려 無辜한 事例가 있었다. 3) 水原府使 兼 防禦使 在任時(1606年)京畿 觀察使가 집을 지으며 無理하게 사사로운 要求에 對하여 拒絶하여 미움을 사서 誣陷과 罷職을 當하였다

4, 無衣공 李舜臣이 여러次例 彈劾 理由는 無衣공이 自己 管理가 未洽하여 調整 管理의 미움을 샀기 때문으로 判斷된다. 1) 宣祖임금의 持續的인 關心과 王室 後孫의 自尊感으로 老鍊한 調整 管理와 圓滿한 妥協을 하지 않은 點 2) 壬辰倭亂 戰爭터에서 生死를 가르는 極限 狀況을 겪은 將帥로서 戰爭 後 現職에서 政爭에 익숙하지 못한 武人의 態度가 適應의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判斷됨 ● 그 當時 彈劾은 南人과 西人이 서로 反對 陣營의 管理(사람)를 끌어 내리고 自己 陣營의 사람을 薦擧하기 위한 手段으로 임금의 裁可를 받기 위하여 報告하는 節次로 彈劾을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 1610年 9月 마지막 林地인 全羅兵馬節度使 兵營에서 死亡하여 訃音이 알려지자 朝廷에서 藝場으로 葬禮를 치루고, 運柩를 全羅, 忠淸 京畿 三道에서 번갈아 喪輿를 護送해서 藝場으로 現在 광명시 일직동에 葬事를 지냈다는 記錄이 있다. ● 無衣공 李舜臣 將軍은 無人으로써 죽는 날까지 現職에 있었다는 것 自體가 榮譽를 지켰다는 證明이다 [出處] 無衣공 李舜臣이 여러 次例 彈劾을 當하는 記錄에 對하여

王室의 後孫 [ 編輯 ]

無衣공 李舜臣은 王室의 後孫으로 아버지 완원군(完原君) 李瑱(李眞)은 讓寧大君 의 다섯째 庶子 長平否定 (長平副正)의 4代孫이었다. 또한 後日 大韓民國 의 初代 大統領을 지낸 李承晩 은 그의 9代 傍孫이 된다.

關聯 作品 [ 編輯 ]

各州 [ 編輯 ]

  1. http://www.rfo.co.kr/pachong/view.php3?mode=view&inmul_code=&page=&type=serache&sermun=純臣&qu=content&mode1=&idcount=2026&page=1&qu1=name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全州李氏 대동종약원 ( http://www.rfo.co.kr/ Archived 2006年 4月 3日 - 웨이백 머신 ) 李億祺 將軍은 朝鮮 2代 定宗의 10째 아들인 덕천군의 後孫이다.
  3. 뒤에 追贈된 作爲이다.
  4.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3710a
  5. 朝鮮王朝實錄 宣祖 161卷, 36年( 1603 癸卯 / 名 萬曆(萬曆) 31年) 4月 28日 甲寅 2番째 記事 .
  6. 朝鮮王朝實錄 宣祖 142卷, 34年( 1601 新築 / 名 萬曆(萬曆) 29年) 10月 4日 無盡 1番째 記事 .
  7. 大韓民國 海軍의 函 番號에는 數字 0과 4를 使用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場보고級 第7番함의 陷穽 番號는 SS67이 아니라 SS68이 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宣祖實錄
  • 光海君日記
  • 亂中雜錄
  • 亂中日記
  • 懲毖錄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