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석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박춘석
朴椿石
基本 情報
本名 박의병
朴義秉
出生 1930年 5月 8日
日帝强占期 京城府
死亡 2010年 3月 14日 ( 2010-03-14 ) (79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性別 男性
職業 作詞家 , 作曲家 , 피아노 演奏者 , 樂團場, 指揮者
장르 재즈 , 트로트 , 이지 리스닝
活動 時期 1952年 ~ 1994年 (腦卒中으로 쓰러진 時期) [1]
樂器 아코디언 , 오르간 , 피아노
學歷 慶熙大學校 英語英文學科 學事
配偶者 없음(독신)
家族 男동생 박금석 (作曲家, 피아노 演奏者) [1]
宗敎 儒敎 ( 性理學 ) → 改新敎 ( 침례회 )

박춘석 (朴椿石, 1930年 5月 8日 ~ 2010年 3月 14日 )은 大韓民國 作曲家 이다. 本名(本名)은 박의병 (朴義秉), 號(號)는 白虎(白皓)이다.

生涯 [ 編輯 ]

박춘석은 1930年 5月 8日 서울特別市 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 를 卒業하여 서울大學校 音樂學科에 入學했으나 끝내 中退하고 慶熙大學校 英語英文學科에 編入學을 한 以後 學士 學位를 마쳤다.

1952年 美8軍 舞臺에서 피아니스트 첫 데뷔한 그는 1955年 백일희 가 부른 《黃昏의 엘레지》를 作詞, 作曲하면서 作曲家로 데뷔하여 그 以後에 《 비 내리는 湖南線 》,《 麻布終點 》,《초우》를 包含한 2700餘個 作品을 作曲하였다. 特히 歌手 李美子 의 노래를 많이 作曲했으며, 《한番 준 마음인데》와 《섬마을 先生님》을 作曲한 作曲家로 有名하다. [2] [2] 그는 以後 國內 最高의 作曲家로 발돋움하였고, 日本에서도 有名해져 日本의 國民歌手 미소라 히바리 에게 曲을 吹入해 주기도 하였다.

KBS 歌謠大賞과 KBS 歌謠, 家事, 音盤奇劃上, MBC 10代 歌謠祭 特別賞 等 歌謠界에서 受賞을 많이 했으며, 1995年에는 獄官文化勳章 (4等級)을 받기도 하였다.

1990年에는 世界 法保社 會長을 맡기도 했고, 1992年에는 통일국민당 創黨 發起人과 統一國民黨 文化藝術行政特任拷問, 以後 1996年 自由民主聯合 文化藝術行政特任拷問 職位로 暫時 活動한 經歷이 있다.

平生 獨身으로 살았으며, 1994年 腦卒中 으로 쓰러진 以後 作曲 活動을 暫定 中斷했고, 동생 박금석의 보살핌을 받다가 2010年 3月 14日에 自宅에서 81歲의 나이로 他界했다.

박춘석 先生의 屍身은 2010年 3月 18日에 京畿道 남양주시 화도읍 月山里 모란공원 에 묻혔으며, [1] 2010年 事後 銀冠文化勳章 이 追敍되었다.

受賞 [ 編輯 ]

學歷 [ 編輯 ]

經歷 [ 編輯 ]

  • 1990年 世界 法保社 會長
  • 1992年 統一國民黨 創黨 發起人

各州 [ 編輯 ]

  1. 이향휘 (2010年 3月 14日). “`비 내리는 湖南線` 作曲家 박춘석氏 別世” . 每日經濟 . 2010年 3月 14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뉴스팀 (2010年 3月 14日). “元老 作曲者 박춘석氏, 享年 80歲로 別世” . 韓國經濟 . 2010年 3月 14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