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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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
柳在夏
基本 情報
出生 1962年 6月 6日 ( 1962-06-06 )
慶尙北道 安東市 풍천면 하회리 [1]
死亡 1987年 11月 1日 ( 1987-11-01 ) (25歲)
서울特別市 龍山區 漢南大橋 北端 江邊北路
性別 男性
職業 싱어송라이터
活動 時期 1984年 ~ 1987年
樂器 기타 , 피아노
學歷 한양대학교 作曲과
家族 아버지 유일청
어머니 黃瑩
兄 2名
누나 3名
女同生 1名
宗敎 天主敎 (洗禮名: 미카엘)
웹사이트 유재하音樂奬學會

유재하 (柳在夏, 1962年 6月 6日 ~ 1987年 11月 1日 )는 大韓民國 싱어송라이터 이다.

1962年 出生. 한양대학교 作曲科에 在學하던 中 1984年 조용필 과 偉大한 誕生의 키보드 走者로 拔擢되었다. 大學 卒業 後 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 로 活動, 1986年 김현식 3輯 收錄曲 〈가리워진 길〉을 作曲하여 김현식 의 初期 明礬을 만들어 내는 데 一助하였다. 이듬해 1987年 自身의 1輯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發表, 같은 해 11月 1日 25歲의 나이에 交通事故로 夭折하였다. [2]

單 한 張의 앨범을 남기고 世上을 떠났음에도 그의 音樂은 當代는 勿論이고 只今도 엄청난 影響力을 行使하는 韓國 大衆音樂의 偉大한 遺産으로 남게 되었다. [3] 現在 그를 기리는 유재하 音樂 奬學會가 設立되어 있으며, 財政的 問題로 열리지 못했던 2005年을 除外하고 1989年부터 每回 유재하 音樂競演大會 를 開催하고 있다. [4]

生涯 [ 編輯 ]

어린 時節 [ 編輯 ]

1962年 6月 6日 慶尙北道 安東郡 하회마을 에서 事業家였던 父親 류일청과 母親 黃瑩 사이에서 3男 4女 中 여섯째로 태어났다. 裕福했던 집안 德澤에 이른바 빽版과 電蓄으로 音樂的 享有를 누릴 수 있었으며 電氣 기타로 自身의 싹트는 創作熱을 試驗해 볼 수도 있었다. [5] 親兄은 "내 바로 위에 兄과 14살 差異가 나 둘이 親했다"며 "동생은 純眞하고 어수룩한 구석이 있어서 몸이 아픈 내게도 잘 依支하는 귀염둥이였다. 사랑스럽고 늘 걱정스러웠다"고 어린 유재하를 回顧하였다. [6] 1969年  은석初等學校 를 入學할 무렵 아코디언과 첼로를 연주하였고, [4] 5學年 때부터는 기타를 붙잡고 노래를 했다. 여느 또래들과 달리 어니언스( 이수영 , 임창제 )의 노래를 부르며 혼자 놀았다. 特히 映畫 俳優 李小龍 을 좋아하여 헤어스타일과 패션까지 이소룡을 따라 했고 每日 그 흉내를 내며 다녔다 한다. [7]

1975年 三線中學校 에 入學하였다. 親兄은 當時의 其他 솜씨를 보고 "눈이 튀어나올 程度로 잘 치더라" 했다. [6] 音樂에 對해 남다른 愛情을 쌓아가며 프레시(Fresh)라는 그룹을 構想하기도 하였고, 끝내는 클래식으로 進路를 잡게 되었다. [5] 그러나 音大를 가기로 作定하고 피아노 레슨을 받았던 대일고 在學 時節에도 클래식보다는 大衆音樂에 關心이 많았다. 當時 레슨을 해주던 先生님이 宿題를 내주어도 宿題는 안 하고 曲 쓰고 노래만 하곤 했다. [7] 1981年 高校 卒業 後 한양대학교 音樂大學 作曲科에 進學하였다. 進學하여 정원영 전태관 김종진 박성식 장기호  等과 交流하며 每日 모여 함께 音樂을 듣고 연주하는 것을 日常으로 알았다. [7]

經歷 [ 編輯 ]

大學 在學 時節 2學年 때인 1982년 조용필과 偉大한 誕生 의 키보드 演奏者로 本格的인 音樂 活動을 始作했다. [5] 그를 만난 송홍섭 은 "當時 大學生이었던 遺在하는 내게는 宏壯히 얌전한 學生이었고 性品도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팝 音樂에 對한 欲望은 대단했다. 在荷는 앞으로 팝 音樂에 있어서 自己 旗발을 確實히 꽂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回顧했다. [8] 조용필 은 後날 유재하의 代表曲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自身의 7輯 앨범에 먼저 吹入했다. 그러나 學校에서 大衆音盤 分野의 아르바이트는 許可할 수 없다고 妨害하여 演奏者 生活은 2個月만에 접고 말았다. [5] [9]

大學 卒業 後 軍服務를 마치고 1986年 어릴 적 親舊였던 김종진이 屬해있던 김현식 의 밴드인 봄여름가을겨울 에서 客員 멤버로 活動하였다. 大學 先輩 한봉근은 "콘서트때나 錄音 때 한두番 세션으로 도와줬을 뿐이지 정식 멤버는 아니었다" 말한다. [10] 이 그룹에서는 6個月 程度 活動하였으며 大邱, 釜山 等地에서 신촌 블루스 팀과 더불어 地方 公演을 갖기도 했다. [9] 김현식에게는 自身의 1輯에 收錄될 曲을 몽땅 주기도 했다. [11] 하지만 밴드 멤버와 追求했던 音樂的 指向點이 달랐고, [12] 後輩 뮤지션을 偏愛하지 않고 챙겨주려 曲 하나만 가져간 김현식의 뜻을 誤解하여 自身의 音樂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운한 마음에 6個月의 밴드 活動을 접었다. [11]

86年 겨울, 在荷가 레코드를 내겠다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準備해 온 樂譜를 내미는데 거기에는 作詞, 作曲뿐 아니라 編曲까지도 完璧하게 되어 있더군요. 다른 사람의 손이 갈 餘地가 없었습니다. 一瀉千里로 레코딩이 進行되었죠. 참 才能있는 親舊구나 하며 期待를 크게 걸었습니다. [9]

―조원익

1986年 겨울 베이시스트 조원익을 찾아가 自身의 프로젝트에 對한 靑寫眞을 提示, [5] 1987年 8月 自身의 데뷔 앨범이자 遺作 앨범이 된 《 사랑하기 때문에 》를 서울음반 을 통해 發表한다. 音盤이 나온 後 조원익은 유재하로부터 매니저를 맡아달라는 付託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 생각해봐도 매니저로서의 資質이 없었다고 여겼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여 얼마 동안은 함께 일을 보러 다녔다. 이렇게 잠깐 매니저를 맡은 조원익은 그의 死後 處理 問題까지 맡았으며 結局에는 追慕公演까지 企劃하게 된다. [9]

《사랑하기 때문에》는 當初 '音程이 不安하다'는 理由로 여러 次例 審議에서 伴侶가 되었으며, 發賣 初期에도 評論家들로부터 好意的인 評價를 얻지 못했다. [13] 클래식 音樂의 和聲學과 갖가지 樂器들의 音色을 攄得한 遺在하는 旣存의 大衆 歌謠와는 全혀 다른 느낌의 노래를 만들었으며, 音樂 關係者들조차도 '노래가 異常하다'라는 反應을 보였다. [14] MBC 放送 審議를 위해 PD들 앞에서 피아노 伴奏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退字를 맞았다. 거의 모든 노래가 當時로서는 破格的으로 正拍子가 아닌 엇拍子로 始作되는데 PD들은 이를 듣고 그를 拍子도 못맞추는 歌手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5] KBS 의 《 젊음의 行進 》에서 한 番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부른 게 유재하의 唯一한 TV 出演이었다. [8] 게다가 日本의 야마다 歌謠祭에 出品한 앨범의 收錄曲 〈지난날〉은 豫選에서 脫落, 그를 한層 더 落膽으로 몰아갔다. [16] 크게 傷心한 遺在하는 國內 音樂 專門誌와의 인터뷰에서 自嘲 섞인 喪失感과 自愧感을 드러냈다. [17] 이 無名의 時間은 여름이 되어 〈지난날〉이 電波를 타기 始作하면서 끝이 났다. 負擔 없는 목소리는 瞬息間에 모든 不運의 狀況을 反轉시켰고, 音盤은 好調를 띠기 始作했다. [5] 서울음반의 이재석은 末年의 유재하를 이렇게 回顧했다. "레코드가 나온 後 길에서 偶然히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自身의 作品에 對해 몹시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때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조금씩 人氣를 얻기 始作할 무렵이었지만 그는 벌써 다음 앨범을 計劃하며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앨범을 만들어야겠다고 하더군요." [9]

죽음 [ 編輯 ]

1987年 10月 31日 午後 5時 30分頃 어둑해질 즈음이었다. 平素에도 多情多感했던 遺在하는 手術을 받고서 蟄居하던 兄의 볼에 뽀뽀하고 門밖을 나섰다. [6] 이날 同窓會에서 1집에 對한 아쉬움을 吐露하기도 했던 그는 술에 醉해 運轉대를 잡은 親舊 성낙헌의 車에 올랐다. [18] 1987年 11月 1日 새벽 3時 27分頃, 遺在하는 서울特別市 龍山區 漢南洞 江邊北路 附近에서 乘用車를 타고 가다가 車가 中央線을 侵犯하여 마주오던 限度콜택시와 正面 衝突하는 事故로 인하여 25歲의 나이로 絶命했다. [19] 屍身은 京畿道 龍仁 天主敎 龍仁 公園墓地에 묻혔다. [6] 무덤 앞에는 노래 〈사랑하기 때문에〉의 樂譜 彫刻像이 있으나 그 樂譜 中 2個 音標가 틀려 있다. [10] [20]

事後 [ 編輯 ]

유재하의 家族은 運轉者 성낙헌의 아버지 성순용과 限度콜택시 等을 相對로 4億 1,600餘 萬원의 損害賠償을 請求하였고, 1988年 8月 3日 서울民事地法 合議 15部에서는 "乘用車를 모는 親舊가 술에 醉한 것을 알고도 같이 타고 가다 事故가 났으면 被害者도 50%의 過失이 있다"며 "被告 星氏는 兪氏 家族에게 4,460餘 萬원을 支給하면 된다"고 判決했다. [20]

親兄이 밝힌 바로 未發表曲은 남아있지 않으며, "大略 5年間 11曲을 썼다"고 한다. [6] 事後 一般人들과 音樂 專門家들 사이에 유재하에 對한 關心이 늘어남과 함께 유재하의 音樂은 再評價를 받기 始作했다. [21] 3年 後 같은 날 김현식이 世上을 떠나자 演藝界에는 "먼저 간 유재하가 술親舊가 그리워 그를 데리고 갔다"는 式의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에 더해 唯獨 11月에 演藝界 事件 事故가 많이 터지면서 '11月 怪談설'로까지 부풀려지기도 했다. [22] 2004年 7月 안병기 監督의 《 分身사바 》 映畫 製作社는 인터넷에서 '다시 살려내고 싶은 演藝人'이라는 設問 調査를 벌였고 遺在하는 5位에 올랐다. [12]

유재하의 影響을 받은 柳喜烈은 유재하 歌謠祭를 繼續하기 위해 基金 마련 公演을 열었다. [23]

事後 유재하의 아버지 유일청은 아들의 音樂的 業績을 기리기 위해 音盤收益과 誠金을 寄託하여 유재하 音樂奬學會를 設立하였다. 奬學會 主管으로 1989年부터 유재하 音樂競演大會 를 開催하기 始作했으며, 大韓民國 大衆音樂界의 수많은 人材를 發掘해 내기도 했다. 1回 大會 受賞者인 조규찬 을 筆頭로 柳喜烈 , 고찬용, 김연우 , 나원주, 정지찬 等이 代表的이다. [21]

1990年代 발라드의 皇帝로 불린 신승훈 은 自身의 데뷔 20周年 앨범을 유재하의 忌日인 11月 1日 發賣했다. 김동률은 "유재하의 죽음은 韓國 발라드가 音樂的으로 10年은 後退했음을 의미한다"는 發言을 하기도 했고, [22] 柳喜烈은 "유재하氏가 音大 作曲科 出身이란 걸 알고는 音大에 進學했어요. 거기 가면 그 程度 實力이 될까 하고요. 大學에 進學한 뒤 유재하 歌謠祭에도 出戰했죠."라고 告白하는 等 遺在하는 後輩 創作者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23] 作曲家 김형석 이 音樂에 발을 디딘 것도 그의 노래가 契機가 되었다. [24] 이러한 後輩 音樂家들을 두고 유재하師團이라고도 일컫는다. [16]

유재하 音樂의 價値는 映畫와 各種 TV 프로그램, 言論 記事에서 只今도 擴張되고 있다. [22] 1985年 조용필을 筆頭로 이문세 , 한영애 , 김현식 , 봄여름가을겨울, FT아일랜드 , 朴軫永 , DJ DOC , 조규찬, 왁스 , 이기찬 , 정수라 , 나얼 , 백지영 , 김조한 , 朴政賢 等 수많은 歌手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에픽하이 2輯 앨범 에서 〈11月 1日〉이란 曲으로 김현식과 유재하를 追慕했다. [25] 1996年 著名한 클래식 演奏者 리처드 스톨츠만 은 自身의 音盤 《Spirits》에 〈사랑하기 때문에〉를 收錄했다. [26] 韓國에서 發賣된 音盤에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副題로 찍혀 있다. [27] 1997年에는 後輩 音樂家들이 憲政 앨범인 《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를 發表하였다. 앨범 發表 當時 크게 히트하지 않았던 〈憂鬱한 便紙〉는 2003年 映畫 殺人의 追憶 》에서 犯行과 關聯된 重要한 端緖로 映畫에 揷入되어 다시 히트하기도 하였다. [28] [29] 유재하의 遺作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京鄕新聞 에서 2007年에 選定한 韓國大衆音樂 100代 明礬 에서 2位를 차지했다.

2017年 1月 4日에는 그의 1輯 題目을 딴 映畫 《 사랑하기 때문에 》가 開封했다. 차태현은 "시나리오를 봤을 때 映畫는 느낌이 괜찮았는데 저는 좀 걸렸"지만, "이 作品을 選擇한 건 유재하 노래로 채워진다는 게 좋아서였다"고 밝혔다. [30] [31] 주지홍 監督은 "나는 시나리오 脚色에 參與하다 演出까지 하게 됐다. 平素 유재하의 노래를 좋아한다. 유재하 노래의 歌詞를 映畫를 통해 紹介할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다. 유재하의 노래를 통해, 우리 映畫를 같은 느낌으로 끌어가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32]

人間 關係 [ 編輯 ]

生前에 切親했던 유재하의 親舊로는 김광민 , 전태관 , 김종진 , 장기호 , 박성식 , 夕曛 等이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전태관은 幼稚園 時節부터 함께 놀던 사이였다. [7] 그는 "幼稚園 때부터 같이 놀았던 親舊 在荷는 어릴 적부터 노래를 하고 싶어했다. ... 나는 딱紙치기하고 담타고 놀 때 在荷는 혼자 그렇게 놀았다. 音樂뿐 아니어도 當時 또래들과는 뭔가 달랐다. ... 暫時 서로 鳶이 끊어지고 大學校 때 원영이型(정원영)의 紹介로 만나게 되었는데 在荷가 鍵盤 演奏者라며 나타난 것이다. 무척 반가웠고 다시 우리는 音樂하며 親하게 지내게 되었다."고 回顧한다. [8] 世界的으로 有名한 美術家인 서도호 는 어린 時節 그와 親舊 사이였다. 전태관은 그를 두고 "留別"나다고 表現하였으며 "타이거마스크를 그려달라고 하면 너무나 完璧하게 똑같이 그려주었다."고 回顧했다. 나중에 서도호는 유재하 솔로 앨범의 자켓 그림을 그려줬다. [8]

김현식 [ 編輯 ]

"유재하라고 音樂 잘하는 後輩가 있었는데, 제 술親舊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렇게 됐네요." [33]

―김현식, 라디오 인터뷰 錄取錄에서

遺在하는 1986年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 加入했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當時 屬望받는 젊은 演奏者들인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박성식, 그리고 유재하로 構成됐었다. 遺在하는 정원영을 통해 김종진, 장기호 等을 만나게 됐다. 김현식은 鍵盤, 其他 等 다양한 樂器를 다루는 유재하를 팀에 꼭 必要한 存在라며 만족해했다고 한다. 김현식은 유재하를 매우 아꼈다.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다 같이 술을 마실 때 다른 이들이 다 나가떨어져도 둘은 밤새 마셨다고 한다. [33]

한영애 [ 編輯 ]

한영애 는 2輯 作業에 들어가며 여기저기 音樂 同僚들에게 노래를 받고 있던 中에 유재하한테도 한 曲을 付託하게 되었다. 그는 "누나! 누나가 부를 거면 나는 언제든지 콜이지!"라며 欣快히 對答해줬고, 以後 直接 피아노를 치며 부른, 2輯에 收錄된 〈悲哀〉의 데모 테이프를 가지고 왔다. 그는 그女에게 "누나! 이 노래 누나가 꼭 히트 시켜줘야해! 아니면 내가 다시 불러서 꼭 히트시킬 거야!"라고 말했지만, 이 노래가 실린 앨범은 그가 世上을 떠난 뒤에 發賣되었다. 遺在하는 自身이 KBS 《젊음의 行進》에 出演하게 되었을 때에도 기쁜 마음에 電話를 걸어 "누나! 나 드디어 TV에 나가! 난 大衆音樂家가 될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8]

김광민 [ 編輯 ]

김광민 은 2014年 MBC 《 라디오스타 》에서 "美國에 있을 때 유재하 氏의 事故 消息을 듣고 되게 많이 울었다"며 "제가 再下衣 消息을 들었을 때도 外國에 있으니까 電話밖에 方法이 없었다. 知人들에게 花環을 付託할 수밖에 없었다"며 답답한 마음에 피아노 앞에 앉았음을 傳했다. 그러면서 김광민은 동생 유재하를 만난다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냐는 質問에 "'그 동안 正말 보고 싶었다. 잘 있었니. 네가 있었으면 좋은 音樂도 같이 할 수 있었을 텐데 何如튼 너무나 반갑다'고 말 할 것 같다. 한동안 부둥켜안고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며 津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김광민은 1987年 11月 2日 유재하를 위해 〈地球에서 온 便紙〉를 썼다. [34]

戀人 [ 編輯 ]

《사랑하기 때문에》는 유재하가 當時 사랑했던 한 女人과의 러브스토리를 主題로 했다. 유재하의 生前 切親이었던 피아니스트 김광민 은 《 黃金漁場 라디오스타 》에서 "유재하의 노래에 登場하는 女人은 單 한名이다. 대단하지 않은가"라고 말門을 열어 그女가 "유재하의 初等學校 同窓"이었으며, "初等學校 卒業 後 못 만나다가 커서 再會했다"고 말했다. [35] 그女는 유재하의 1집에서 플루트를 연주했다. [10]

音樂性 [ 編輯 ]

한양대 作曲科에서 正式으로 音樂敎育을 받은 遺在하는 피아노 , 바이올린 , 기타 , 첼로 等의 樂器들을 能手能爛하게 다룰 수 있었다. [36] 봄여름가을겨울에서 유재하와 함께 活躍하고 그의 追慕 公演에서도 피아노를 연주한 박성식 은 유재하의 演奏를 이렇게 評價했다. "演奏者로서의 遺在하는 自身만의 獨特한 感覺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演奏 스타일은 感情이 잘 살아 있어 듣는 사람에게 크게 어필한다는 게 特徵이었죠. [9]

在荷의 天才性에 重要한 要素는 오케스트레이션이었다. 오케스트라의 話法이 分明 달랐다. 音樂을 言語라고 하면 單語의 驅使가 달랐고 그 言語는 旣存에 存在하지 않았던 것이다. 在荷의 오케스트라는 냇 킹 콜 , 웨스 몽고메리 , 그리고 70年代 오케스트라를 硏究했던 것이었는데 當時 우리는 그런 것들이 먼 이야기였는데 在荷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8]

임진모 는 "피아노는 말할 것도 없고, 바이올린 첼로 기타를 마스터했으며 作詞 作曲 솜씨도 뛰어났다. 樂器에 能通한 德分이었지만 編曲까지 도맡았다는 點은 當時 狀況으로서는 놀라운 것이었다."고 했다. [21] 音樂웹진 이즘 筆者 兆이슬은 "그가 드럼, 기타, 鍵盤을 모두 消化해낸 멀티 플레이어라는 事實보다 더 衝擊的이었던 건 바로, 樂器 하나하나의 音色까지 正確히 把握하여 曲 全體를 調律하고, 曲의 質感을 決定하는 非凡한 '編曲' 能力이었다. 우리가 只今에서도 '高級歌謠'라고 부르는 正統 발라드의 얼개를 事實上 이 때 形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37] 그를 平生의 스승으로 삼고 있는 신승훈 은 "作詞, 作曲, 編曲이 모두 유재하로 表記되어있는 것을 보고 一大 衝擊을 받았다"라고 告白한 바 있다. [38] 金秀哲 은 當時 유재하의 앨범을 듣고 "노랫말이 너무 빼어났다"는 느낌이 앞섰다고 述懷한다. [39]

作曲과 學生들에게는 한 學期에 한 番씩 直接 作曲한 作品을 提出해야 하는 課題가 주어진다. 大學 2學年쯤 되었을 때의 유재하가 作曲한 樂譜를 본 敎授는 그것을 집어던지며 '자네가 아무리 바빠도 모차르트를 倍껴오면 어떡하는가'라고 그를 叱責했다. 그것은 유재하의 作曲이 火星이나 樂節進行에서 모차르트와 비슷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훌륭한 뜻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9] 삼선 中學校 時節 그는 브레드, 퀸, 비틀즈, 피터 프램프톤의 音樂을 많이 들었다고 傳해진다. [5] 김종진은 그가 "라이오넬 리치, 弼 콜린스, 엘튼 존의 노래를 즐겨 불렀고 種種 다른 歌手들에게 줬던 本人의 노래들도 부르며 놀곤 했다."고 말했다. [8]

私生活 [ 編輯 ]

遺在하는 愛酒家였다. 바로 위의 親兄은 "先親이 藥酒를 좋아하셨는데 집안 來歷인지 제가 동생에게 '술을 366日 먹느냐'고 잔소리를 하곤 했죠. 在荷는 싸고 독한 40度짜리 쥬니버 드라이진을 좋아했어요. 前 한盞도 못 하겠던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1時間 半이면 700ml짜리 한 甁을 다 비웠죠. 그것도 '스트레이트'로요."라고 回顧하였다. [6] 김광민 또한 "遺在하는 술을 宏壯히 좋아했다. 술 마시다가 돈이 떨어지면 집에서 돈을 가져와 더 마실 程度였다"고 말했다. [40]

장기호는 "아버님이 炭鑛을 하신 것으로 안다. 在荷의 外貌는 中産層 아래쪽 이미지인데 집을 가보면 宏壯히 富裕했다"며 "若干 빈티지다. 在荷 집에 있던 모든 什器는 外製品이였다."라고 當時 富裕했던 유재하의 집안을 回想했다. [40] 東亞企劃의 代表 김영은 유재하가 "요즘말로 하면 개그맨"이었으며 "또 美男은 아니었지만 바람둥이였다."고 말했다. [41] 김종진은 "在荷는 舞臺 위에서 '꺅' '오빠' 소리 듣는 걸 좋아했던 親舊였다"고 記憶했다. [42]

音盤 [ 編輯 ]

追慕·憲政 音盤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大邱는 김광석거리, 安東은 유재하거리 Archived 2016年 12月 22日 - 웨이백 머신 , 每日新聞, 2016年 5月 30日
  2. “유재하 vs 柳喜烈, 未來의 소리에 귀기울여라” . 《오마이뉴스》. 2008年 5月 19日.  
  3. 임진모 (2010年 10月). “萬若 유재하가 살아있다면” . 2017年 2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4. 夭折한 류재하-김현식, 아직도 當身은! 《조이뉴스》, 2006年 11月 1日
  5. 지운 (2001年 2月). “유재하” . 《이즘》.  
  6. “親兄이 말하는 故유재하…"愛酒家에 音樂 自尊心 江했죠 " . 《聯合뉴스》. 2017年 2月 3日.  
  7. 崔, 性徹 (2016年 4月 21日). “[大衆音樂家 列傳] 6. 뮤지션 유재하” . 《釜山日報》.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8. “유재하와 함께 했던 瞬間들” . 《네이버 뮤직》 . 2017年 2月 5日에 確認함 .  
  9. 金, 정숙. “사람은 갔어도 音樂은 남아···”. 《1988年 音樂世界 2月號》.  
  10. 이승형 (2003年 10月 28日). “다시 듣고싶다…그들의 노래를” . 《文化日報》 . 2017年 2月 4日에 確認함 .  
  11. 이상훈. “아! 故 유재하! 그가 없어 더욱 텅빈 오늘…11月 1日” .  
  12. “[追憶의 LP 旅行] 유재하” . 《데일리韓國》.  
  13. 故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女主人公은 '플루트 金' 《마이데일리》, 2008年 11月 8日 作成
  14. 유재하, 韓國 ‘大衆音樂의 自主’를 이루다. 《경향신문》, 2007年 8月 23日 作成
  15. “다시 듣고싶다…그들의 노래를” .  
  16. 임진모 (2007年 10月 30日). “生前의 不運, 死後의 榮光” . 《民衆의소리》.  
  17. 小乘根. “[레전드 100人] 유재하, 大韓民國 발라드의 基準이 되다.” . 《Mnet》. 2017年 2月 2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18. 이재윤 (2016年 11月 1日). “29年 前 오늘… '音樂天才' 유재하 交通事故로 世上을 떠나다” . 《머니투데이》.  
  19. 休紙桶 《東亞日報》, 1988年 8月 3日
  20. 한겨레 (1988年 8月 4日). " 飮酒運轉 交通事故 同乘者도 50% 責任" "安全運行 注意 喚起시킬 義務 지녀 "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한겨레.  
  21. 임진모. “사랑하기 때문에” . 《이즘》.  
  22. 최규성. “歌謠앨범 리뷰 - 사랑하기 때문에” . 《네이버》. 韓國大衆歌謠硏究所.  
  23. 이경희 (2006年 5月 31日). “[me] 遺在하는 떠나보냈지만 歌謠祭까지 보낼 수 없·어…” . 《中央日報》.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4. “[스타메이커] 作曲家兼 音盤製作者 김형석” . 《韓國日報》. 2003年 6月 18日.  
  25. 京鄕新聞 (2007年 8月 23日). “大衆音樂 100代 明礬 ‘들菊花’1位” .  
  26. “유재하 遺作 "사랑하기 때문에" 클라리넷으로 連奏” . 《中央日報》. 1996年 6月 16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7. “리처드 스톨츠먼의「Spirits」” . 《東亞日報》. 1996年 5月 23日.  
  28. 주간한국 (2007年 12月 6日). “[우리時代의 明礬·名曲] 류재하 1輯 '사랑하기 때문에'/ 1987年 서울음반” .  
  29. 有, 知性 (2014年 11月 1日). “#1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은 유재하” . 《GQ》.  
  30. “차태현, '사랑하기 때문에'는 '유재하 때문에 ' . 《이데일리》. 2017年 1月 2日.  
  31. ' 呈戱' 차태현 "'사랑하기 때문에' 出演, 故 유재하 노래 影響 커 " . 《뉴미디어局》. 2017年 1月 3日.  
  32. 量미르 (2016年 12月 20日). ' 사랑하기 때문에' 주지홍 監督 "유재하 노래 이야기를 선보인 理由는? " . 《文化뉴스》.  
  33. 권석정 (2013年 11月 1日). “김현식 “유재하라고 音樂 잘하는 後輩가 있었는데, 제 술親舊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 《텐아시아》. 2017年 3月 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34. ' 라스' 김광민의 切親 故 유재하를 向한 '짠한 그리움 ' . 《일간스포츠》. 2014年 10月 30日.  
  35. “김광민 "유재하 모든 曲, 한 女人을 위한 노래 " . 《 位키트리 》. 2014年 10月 30日.  
  36. “[커버스토리]유재하, 韓國 ‘大衆音樂의 自主’를 이루다” . 《京鄕新聞》.  
  37. 兆이슬 (2007年 10月 30日). “사랑하기 때문에, 유재하가 남긴 발자취” . 《民衆의소리》.  
  38. 배순탁 (2007年 10月 30日). “變色되지 않는 아름다움, 유재하의 音樂” . 《民衆의소리》.  
  39. “韓國 大衆音樂界의 燦爛한 寶石” . 《네이버 뮤직》.  
  40. ' 라스' 김광민 富裕했던 유재하 言及 '집안 什器 다 外製品 ' . 《일간스포츠》. 2014年 10月 30日.  
  41. 이창호 (2005年 11月 18日). “김영 "最高 音樂人은 김현식 " . 《世界日報》.  
  42. “KBS 쿨FM, 故 유재하 라디오 出演 肉聲 公開” . 《聯合뉴스》. 2013年 10月 31日.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