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大 申 敎授 性戱弄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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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大法院 判例
날짜 1998年 2月 10日
코드 民事訴訟, 95다39533 ( 原文 )

判事 이임수 (裁判長), 최종영 (主審), 이돈희 , 徐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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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稿 原審原告 우희정
原稿 辯護 김창국 , 박성호 , 배금자 , 최일숙 , 朴元淳 , 李鍾杰
被告 原審被告 신정휴, 김종운 (서울대 總長) , 大韓民國
被告 辯護 임완규 , 최재호
結果 原告勝訴

서울大 申 敎授 性戱弄 事件 은 1993年 서울大學校 自然大 化學과 NMR 機器 擔當助敎였던 우희정 助敎(女)가 敎授였던 신정휴 敎授(남, 경북대학교 學士 出身)에게 性戱弄 을 當했다고 告發한 事件이다. 이 事件은 大韓民國 에서 最初로 提起된 職場 內 性戱弄 關聯 訴訟 이었다. 6年間의 法廷鬪爭이 이어졌고, 結局 1999年에 申 敎授가 于 助敎에게 500萬원을 支給하라는 最終判決이 나왔다. 이 事件을 契機로 性戱弄 도 明白한 不法行爲 라는 社會的 認識이 생기기 始作했다.

事件 槪要 [ 編輯 ]

서울大學校 化學과 實驗室에서 1年間 有給契約職으로 勤務하던 우희정 助敎는 管理責任者인 신정휴 敎授에게 業務上 不必要하거나 難處한 身體接觸이나 性的言動을 持續的으로 받아왔다. 이에 對해 助敎가 拒否의 意思를 밝히자 敎授가 非友好的인 態度를 보였고 結局 當初 再任用 約束과 다르게 再任用 推薦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敎授의 報復的인 行爲에 對해 1993年 10月 18日 서울民事地法에 擔當敎授, 서울대 總長, 大韓民國을 被告로 하여 5千萬원의 損害賠償을 提起했다. 以後 4番의 判決이 있었는데 2審을 除外하고는 모두 指導敎授의 性戱弄을 認定했다. 다만 4番의 判決 모두 職場 內에서 發生한 性戱弄 行爲가 職務關聯性 없이 隱密하고 個人的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서울大總長과 國家의 責任은 認定하지 않았다. 大法院은 性戱弄의 不法行爲 成立 與否를 判斷함에 있어 이를 雇用關係에 限定하거나 條件的 性戱弄과 環境型 性戱弄으로 區分하는 論旨는 採擇하지 않았다.

經過 및 進行 [ 編輯 ]

公論化 [ 編輯 ]

于氏는 서울大學校 總長과 敎育部 等에 신정휴 敎授의 性戱弄 事實과 不當 解任에 對하여 歎願과 陳情書를 냈으나, 어떤 解答도 듣지 못한 狀態였다. [1] 이에 1993年 8月 25日 서울對 自然大 助敎 于氏는 大學 圖書館 앞에 大字報를 붙여, * 自身의 指導敎授로부터 性的戱弄을 當했으며, 該當 敎授를 敎壇에서 追放해야 한다는 要旨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2] [3] [4]

  • 于 助敎는 擔當敎授로부터 最小限 2年을 約束받고, 機器擔當 助敎로 1992年 5月頃부터 出勤하게 되었다.
  • 하지만 在職期間 中 擔當敎授는 平素 손목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는 等 業務와는 關係없는 不必要한 身體接觸 및 性的 戱弄을 加해왔다.
  • 이에 助敎는 不快感을 넘어 精神的 負擔感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는 自身의 勤務意欲을 저하시키기까지 했다.
  • 그러던 中 敎授가 助敎에게 단둘이 散策할 것을 提案하였으나, 助敎가 이를 斷乎하게 拒絶했다.
  • 그 後 敎授의 態度는 突變하여, 처음의 2年을 約束했던 것과는 달리 1年 1個月만에 出勤 停止命令을 받았다.
  • 이에 助敎가 强力하게 抗議했지만 敎授와 學校側은 一方的인 措置를 變更하지 않았다.
  • 1993年 7月 敎授는 助敎를 2學期 助敎 再任用에서 탈락시켰다.
  • 2名의 前任助敎度 같은 性戱弄을 當했다
  • 助敎는 敎授의 이러한 行爲가 繼續的으로 反復되는 것임을 깨닫고, 이같은 일에 對한 警覺心을 불러일으켜 自身과 같은 不幸을 未然에 防止하고자 大字報를 붙임으로써 自身의 일을 公開하기로 決心했다.

擔當敎授는 이에 對해 "于氏의 平素 勤務態度가 성실치 못해 再任用에서 除外했을 뿐"이라며 "于氏의 主張은 全혀 事實無根"이라고 主張했다. 該當學科 一部 大學院生들은 大字報를 붙여 于氏의 主張을 反駁했다. 該當 反駁 大字報에서는 于氏가 홍익대를 卒業하고 大學院 碩士課程에 入學 ,1年前부터 留級助敎를 맡아왔으며, 平素 出勤時間이 늦는 等 勤務를 怠慢히 한데다가, 學科規則上 助敎年限이 1年이라 再任用에서 탈락한 것일 뿐이라며 該當 大字報의 主張을 一蹴했다. [2] [3]

서울대 總學生會와 大學院 自治協議會 等이 構成한 眞相調査團은 于 助敎의 大字報 內容이 事實이라고 確認하였다. 1993年 10月 19日 性暴力 特別法 制定 推進 特別 委員會, 서울대 總學生會, 大學院 自治會 協議會가 共同으로‘서울대 助敎 性戱弄 事件 共同對策 委員會’를 構成하여 敎育部 等에 陳情書 보내기, 性戱弄 被害 相談 窓口 開設, 公開 討論會, 弘報 活動 等 各種 連帶 支援 活動을 벌이기 始作했다. 하지만 신정휴 敎授는 于 助敎를 名譽毁損과 脅迫 嫌疑로 告訴하였다. [1]

第1審 [ 編輯 ]

訴訟 提起 및 審問 [ 編輯 ]

被害者는 1993年 10月 서울民事地方法院에 신정휴 敎授, 서울대 總長, 大韓民國 等을 相對로 5千萬원의 損害賠償 請求訴訟을 냈다. [5]

判決 [ 編輯 ]

1994年 4月 18日 서울民事地法 合議18部(裁判長 박장우 部長判事)는 서울大 自然大 前助敎였던 于氏가 `擔當敎授로부터 性戱弄을 當했다'며 신정휴 敎授와 學校 및 國家를 相對로 낸 5千萬원의 損害賠償 請求 訴訟에서 "新 敎授는 于氏에게 3千萬원을 支給하라"며 原告 一部勝訴 判決을 宣告했다. 裁判部는 判決文에서 申 敎授는 決코 性戱弄 事實이 없었으며 于氏 지난해 8月 助敎職에서 解任된데 不滿을 품고 性戱弄 問題를 提起하고 있다고 主張하고 있지만 于氏의 法廷陳述과 同僚 助敎 等의 證言을 綜合해 볼때 必要 以上의 身體的 接觸 等으로 인해 于氏가 精神的 苦痛을 받은 事實이 認定된다"고 밝혔다. [6] 裁判部는 申 敎授의 禹氏에 對한 一連의 行爲가 原告에게 局限되었던 것이 아니라 專任 女性助敎들에 對하여도 行하여졌다는 事實을 判斷 根據 中 하나로 삼았다.

判決 以後 인터뷰에서 于氏는 原稿 本人이 社會的으로 힘없는 狀態였다는 點, 相對 被告는 社會的으로나 倫理的으로나 尊敬과 信望을 받고 있는 서울對 敎授인 點, 裁判部도 같은 先入見을 가지리라 豫想한 點, 關係者들의 陳述 以外에 뚜렷한 證據를 提示하지 못했던 點 等의 要因으로 인해 이길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全혀 하지 못하였으나, 女性團體 關係者等 많은 사람들이 積極 協助해 준 것에 希望을 두었다고 밝혔다. 또한 公判에서 國家와 大學總長에 對한 賠償責任이 認定되지 않은 것에 對해 아쉬움을 표하며, 該當 責任을 묻기 위해 抗訴할 豫定이라고 밝혔다. 外國의 境遇 및 `無過失 責任主義'에 根據하여, 韓國에서도 마땅히 責任을 지우는 風土가 이뤄져야 한다는 要旨였다. [7]

授業 自動 閉講 및 未配定 [ 編輯 ]

1審 裁判 前 1994年 1學期 신정휴 敎授가 開設한 4科目의 授業 中 `化學 및 實驗1'과 `有機化學1' 2 科目이 이 學生들의 受講申請 拒否 및 變更으로 自動 閉講되었다. 이는 總學生會가 學期 初부터 "性戱弄事件과 關聯된 敎授로부터는 더 以上 授業을 받을 수 없다"며 신정휴 敎授의 授業 配定에 反對하는 署名 作業과 受講 申請 變更 運動을 벌인 끝에, 學生들이 受講을 抛棄함에 따라 自動으로 閉講된 것이었다. [8] 以後 나머지 2科目도 自動 閉講되어 1學期 開設된 4個 授業 모두가 自動 閉講되었다. [9]

1審 判決 以後 신정휴 敎授는 1994年 2學期 授業 配定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 敎務處 關係者에 따르면, 裁判 日程과 날로 거세지는 學生들의 授業拒否 움직임을 勘案해 이같은 決定을 내린 것이며, "신정휴 敎授를 當分間 硏究에만 專念하는 `硏究敎授'로 發令하는 方案"李 檢討 中이라고 밝혀졌다. [9]

抗訴審 [ 編輯 ]

現場 檢證 [ 編輯 ]

兩 側은 抗訴를 提起했다. 申 敎授 側은 自身의 有罪를 認定할 수 없다는 趣旨였고, 于 助敎 側은 申 敎授 뿐 아니라 申 敎授의 이러한 行爲를 暗默的으로 감싸고 있는 大學當局과 서울대학교를 直接 運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大韓民國에 對해 有罪認定이 되지 않았다는 趣旨였다. [4]

1994年 7月 抗訴審 첫 公判이 열렸다. [5] 以後 1994年 10月 1日 서울高法 民事9部(裁判長 박용상 部長判事)의 指揮로 現場 檢證이 1時間餘 동안 進行됐다. 現場 檢證의 目標는 피고 신정휴敎授가 原稿 于氏를 實驗室 等 3곳에서 `뒤에서 抱擁하는 듯 姿勢'를 取하는 等 性戱弄을 했는가 與否를 가리는데 集中되었다. 現場 檢證에는 原稿 于氏와 그 訴訟代理人 최은순 辯護士, 피고 申 敎授와 訴訟代理人 임완규 辯護士가 參席했다. [10]

原稿 側은 申 敎授가 92年 6月께 實驗室에서 NMR 機器 作動法을 가르쳐 주면서 機械 앞에 앉아있는 于氏 뒤에 서서 抱擁하는 姿勢를 醉한채 가슴을 등에 대고 어깨나 等에 손을 올려 놓는 等 性戱弄을 했다고 主張했다. 反面 被告 側은 申 敎授가 機器作動法을 禹孃에게 교육시킬 때는 반드시 于氏 옆에 서 있거나 다른 椅子에 앉아 있었다"며 "于氏를 性戱弄한 事實이 全혀 없다"고 主張했다. 또한 "`뒤에서 껴앉는 姿勢'를 取하면 機械의 키보드가 잘 보이지 않는다"며 "`申敎授가 椅子에 앉아 있는 于氏의 뒤에 서서 등을 팔로 감싸며 機械作動法을 指導했다'는 原告側의 主張은 說得力이 없다"고 主張했다. [10]

原稿 側은 또한 "實驗室 琉璃窓에는 빛이 機械 모니터에 反射되는 것을 막기위해 綠色 코팅紙와 發이 쳐져 있어 옆 實驗室에서는 사람이나 物體의 輪廓을 把握할 수 없었다"고 主張했다. [10]

現場檢證 周邊에는 `서울대 助敎 性戱弄事件 共同對策위' 學生 等 1百餘名이 `眞實은 반드시 勝利합니다. 禹助敎님 힘내세요' 等의 口號가 적힌 피켓을 들어 禹氏에 對한 支持를 표했다. [10]

上告審 [ 編輯 ]

1997年 6月 11日 大法院에 하버드 로스쿨 學生 1百62名과 8個 學生團體들이 「서울대 助敎 性戱弄事件의 공정한 判決을 위한 하버드 法大生들의 意見書」를 11日 大法院에 接受하였다. 現地에서 硏修中이거나 遊學을 온 韓國 學生들이 하버드 法大生들에게 于 助敎 事件에 對한 消息을 傳하였고, `하버드法大 韓國 學生會' 等 學生團體들을 中心으로 該當 意見을 모은 것이었다. 意見書는 "郵 助敎 事件에 對한 抗訴審 判決은 國際的인 흐름에 逆行해 女性에 對한 差別의 한 形態로서 性戱弄을 認識하고 規制하려는 努力에서 크게 後退하고 있다"고 陳述하면서, "郵 助敎 事件에 對한 大法院判決이 女性에 對한 正義와 平等의 具現에 寄與할 수 있기를 希望한다"고 促求하였다. 이에 對해 大法院 關係者는 "하버드 法大生들이 다른 나라 法院의 判決과 關聯해 意見書를 보내 裁判에 關與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다"고 批判的으로 評價했다. [11]

1998年 2月 10日 大法院 上告審에서 原審判決 中 피고 敎授에 對한 部分을 破棄하여, 서울高等法院으로 歡送하였다.

破棄還送審 [ 編輯 ]

1998年 4月 申 敎授는 「나는 性戱弄 敎授인가」(혜화당刊)라는 冊을 失明으로 出刊하며, 서울 혜화동의 某 카페에서 記者會見을 가졌다. 申 敎授는 "나의 潔白을 主張하기 위해 이 冊을 쓴 것은 아니다"고 線을 그으면서, "裁判過程에서의 各種 證言, 所見書, 歎願書, 判決文 等을 公開하고 그 判斷은 讀者들에게 맡기겠다는 趣旨"라고 出刊의 趣旨를 밝혔다. 그가 밝힌 所懷에 따르면 "師弟間, 性醜行 等의 要素들이 結合되면서 言論과 인터뷰를 해도 나의 意圖와는 다른 記事가 나오곤 했다"면서 "特히 言論은 이 事件을 强者와 弱者라는 二分法的 事故로 取扱했는데, 果然 敎授와 여러 女性團體들을 比較할 때 어느쪽이 强者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女性團體들이 共同對策위를 構成해 于助敎를 支援한 것은 當時 性暴力特別法을 만들기 爲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申 敎授는 또 "職場生活을 하려면 操心해야 한다. 허튼 弄談을 할 境遇 이 事件에 對한 大法院의 判決처럼 `執拗하고 持續的'이라는 項目을 들이대면 배겨날 장사가 없다"고 言及했다. [12] 該當 著書에는 法廷攻防 記錄 等과 함께 申 敎授 夫人의 心境, [13] [14] 마지막 구두辯論, 美國과 日本의 判例, 高等法院과 大法院의 判例 等이 함께 收錄되었다.

1999年 6月 25日 서울高等法院은 破棄還送審에서 被告에게 原稿의 精神的 損害에 對한 賠償責任으로서 5百萬원의 損害賠償 支給을 命令하였다.

影響 [ 編輯 ]

서울대학교는 1998年 初부터 校內 性暴力 根絶과 迅速한 對處를 위해 申告專用 電話 `핫라인'을 開設하고 相談 敎授制를 實施하기 始作했다. [15]

大法院의 破棄還送審 約 6個月 뒤인 1998年 9月, 國內 大學 中 最初의 `性暴力 特別委員會'가 서울대에 設置되게 되었다. 이 委員會는 副總長과 敎務處長, 學生處長, 學生生活硏究所 女性部長 等 11名으로 構成될 豫定이었다. 大學本部 次元의 公式 機構로서 이 委員會는 學生, 敎授, 敎職員 等 大學 構成員들이 連累된 性暴行이나 性醜行, 性戱弄 等 性關聯 事件에 對해 審議를 벌여 嫌疑가 드러나는 대로 關聯者를 懲戒할 수 있는 權限을 갖게 되었다. 委員會 設置와 더불어, 서울大는 性暴力 事件 關聯者를 懲戒하기 위해 `性的 괴롭힘에 對한 處罰 規定'을 마련할 豫定이라고 밝혔다. 該當 委員會의 設置 背景으로 大學 關係者는 "最近 몇年 사이에 校內에서 性問題로 인한 雜音이 끊이지 않고 있어 問題를 그대로 放置해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共感帶가 形成됐다"고 밝혔다. [15]

서울大學校 정운찬 總長은 2002年 10月 23日 韓明淑 當時 女性部 長官을 만난 자리에서 서울대 性戱弄 事件은 '再契約에 탈락한 于 助敎의 怏心에서 비롯되어 抑鬱한 사람이 社會的 賣場을 當한 事件'이며 '當時 于 助敎를 志願한 女性運動이 신중하지 못했다'라는 發言을 하기도 했다. [16]

신정휴 敎授는 2008年 서울대 化學部 敎授로서 停年退任하였다. 退任 所懷를 밝힌 大學新聞 인터뷰에서, 申 敎授는 1991年 核磁氣 共鳴 裝置(NMR)를 서울대에 처음 들여왔던 것을 가리키며, “以前에는 서울대에 化合物分析 裝備가 없어 海外에 나가서 硏究를 했는데 이제는 서울大에서 할 수 있게 됐다”며 “後學들이 좀더 便安한 環境에서 硏究를 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17]

于 助敎는 서울대 再契約에 탈락한 뒤 다른 學校에 再就業하려고 했지만, 就業에 失敗했다. 于 助敎는 6年間 이어진 訴訟戰과 就業 失敗로 辨理士의 꿈을 접으며 心理的인 苦痛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며, 2018年 當時 '조용히 살고 싶다'며 外部 活動을 全혀 하지 않는것으로 傳해졌다. [18] [19]

性戱弄 問題가 最初로 공론화된 場所 中 하나로서의 大學 [ 編輯 ]

韓國과 類似하게 日本에서도 처음으로 性戱弄 ( ja:セクシャルハラスメント 或은 줄여서‘セクハラ(세쿠하라)’) 問題가 이슈化된 機關 中 한 곳은 大學이었으며, 1993年 最初로 該當 事件이 公論化되었다. [20]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人權運動舍廊房 (1993年 11月 24日). “서울大 敎授 性戱弄 事件 經過” .  
  2. “<現場> 서울대 女助敎 性的 戱弄主張 大字報” . 서울. 聯合뉴스. 1993年 8月 25日.  
  3. " 敎授가 女助敎 性的戱弄"/서울대 大字報 眞僞論爭(色鉛筆)” . 《朝鮮日報》. 1993年 8月 26日 . 2021年 3月 29日에 確認함 .  
  4. 정혜령 (1994年 9月 12日). “性戱弄 事件 裁判 飜覆 憂慮” . 《李大學步》.  
  5. 이정연 (2020年 6月 15日). “[時間의 劇場] 그리고…性戱弄 豫防敎育이 始作됐다” . 《한겨레》.  
  6. “서울대 性戱弄事件,`被害助敎에 3千萬원 賠償하라' : 裁判部,"精神的 苦痛 받은 事實 認定된다" 判決” . 서울. 聯合뉴스. 1994年 4月 18日.  
  7. “性戱弄事件 禹 前助敎 一問一答” . 서울. 聯合뉴스. 1994年 4月 18日.  
  8. “<現場> 서울大,性戱弄事件 關聯 敎授 科目 閉講” . 서울. 聯合뉴스. 1994年 3月 22日.  
  9. “<現場> 서울大,性戱弄事件 關聯 敎授 科目 閉講” . 서울. 聯合뉴스. 1994年 5月 27日.  
  10. “<現場>`서울대 女助敎 性戱弄事件' 現場檢證” . 서울. 聯合뉴스. 1994年 10月 1日.  
  11. “<現場> 美 하버드 法大生들, 大法院에 意見書 提出” . 서울. 聯合뉴스. 1997年 6月 11日.  
  12. “<인터뷰> 서울대 于助敎 性戱弄事件의 신정휴敎授” . 서울. 聯合뉴스. 1998年 4月 14日.  
  13. 김희섭 (1998年 4月 14日). “于助敎事件 서울대敎授 冊 出版” . 《朝鮮日報》 . 2021年 3月 29日에 確認함 .  
  14. 고정애 (1998年 4月 14日). “[주사위]有助敎事件 서울大 신정휴氏'나는 性戱弄 敎授인가' 冊펴내” . 《中央日報》.  
  15. “서울大,`性暴力 特別委員會' 設置” . 1998年 9月 12日.  
  16. 정운찬 總理 候補 ‘于助敎 性戱弄’ 敎授 감싸 입길
  17. 류원식 (2008年 2月 25日). “[停年敎授 인터뷰]核磁氣共鳴裝置를 들여온 熱情가” . 《大學新聞》.  
  18. 백俊茂 (2018年 10月 18日). “[날짜 속 이야기] 韓國판 미투 1號 '서울대 助敎 性戱弄 事件', 그後 25年” . 《아주經濟》.  
  19. 조은정 (2018年 3月 7日). ' 最初 미투' 于 助敎의 苦痛과 눈물, 25年 지나도 그대로” . 《노컷뉴스》.  
  20. 신상숙 (2015年 6月 12日). 〈大學校 性戱弄·性暴力 被害救濟의 現況과 爭點〉. 서울大學校 女性硏究所; 서울대학교 人權센터. 大學 캠퍼스의 權力型 性戱弄·性暴力, 무엇이 問題인가 (PDF) (報告書). 1-25쪽. 2020年 7月 11日에 原本 文書 (PDF) 에서 保存된 文書 . 2020年 7月 10日에 確認함 . 水谷英夫 (2001). 『セクシュアルハラスメントの 實態の 法理』. 東京: 信山社. 109-112.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