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큰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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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큰아기 마리아
殉敎者
出生 1786年
서울
腺腫 1839年 9月 3日
서울 西小門
敎派 로마 가톨릭교회
諡福 1925年 7月 5日 敎皇 비오 11歲
諡聖 1984年 5月 6日 敎皇 요한 바오로 2歲
祝日 9月 20日

朴큰아기 (朴大阿只, 1786年 ~ 1839年 9月 3日 )는 朝鮮 天主敎 迫害 때에 殉敎 韓國 天主敎 103位 成人 中에 한 사람이다. 洗禮名 마리아 (Maria)이다.

生涯 [ 編輯 ]

朴큰아기는 漢陽 의 한 富裕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女에게는 동생 박희순 루치아 가 있다. 박희순은 美貌가 出衆하여 일찍이 王宮으로 부름을 받아 순원왕후 의 侍女가 되었다. 그女는 怜悧하고 有能하여 빠르게 昇進했다. 그女는 朝鮮語 淸國어 를 모두 읽고 쓰는데 매우 能했다. 한便으로는, 그女의 美貌가 問題 距離였다. 그女가 15歲 때, 17歲의 順調 賃金 이 그女를 보고서 美貌에 魅了되어 그女를 誘惑하려고 온갖 努力을 쏟았다.

宮女 는 一般的으로 그것을 榮光으로 알았고 그들 中 大部分은 의 耳目을 끌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苦生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희순은 王妃의 信任을 알고 있었으므로 큰 勇氣를 내어 그 誘惑에 빠지지 않았다. 宮闕 에서는 그러한 所聞이 돌았다. 後日에, 앵베르 主敎 도 그 이야기를 들었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勇敢하고 올곧은 行動이다. 그와 같은 사람은 그 前까지 朝鮮 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女는 30歲가 넘어서 天主敎 를 接했다. 天主敎가 알려지고 그女에게 廣大한 빛으로 다가왔으므로, 그女는 宮闕에서의 生活에 滿足하지 못하게 되었고 삶에 있어서 보다 崇高한 意味를 찾았다. 그女는 그것을 더 잘 알고 믿기 위하여 敎理 를 더 깊게 工夫하기를 願했다. 그러나, 宮闕은 奢侈와 迷信으로 인해 眞理의 實踐을 위한 場所가 없었다. 그 當時, 宮女는 매우 深刻한 理由를 除外하고는 죽을 때까지 宮闕에서 사는 것이 慣習이었기 때문에, 그女가 그곳을 빠져나오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女는 敎會의 가르침을 따라 餘生을 보내기로 決心했고, 病을 假裝하여 마침내 出宮 許可를 받았다.

그女의 父親은 敎會 를 頑强히 反對했고 그女가 집에 起居하려는 것을 拒絶하였으므로, 그女는 조카의 집에서 살아야 했다. 그女는 온갖 虛飾과 奢侈를 拒絶했고 儉素한 生活 方式을 擇했다. 그러함은 그女의 조카와 그의 家族들에게 模範이 되어 그들을 敎會로 이끌었고 그들은 洗禮를 받게 되었다.

그 무렵 그女의 언니 朴큰아기도 그 집으로 살러 왔다. 그女의 改宗 背景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女의 동생의 影響이 있었음은 분명했다. 迫害 가 勃發하자, 그들은 모두 沈着하게 살 窮理를 했지만, 1839年 4月 15日 , 調整 의 暴壓을 避할 計劃을 세우던 刹那에 捕卒 들이 집을 急襲했다. 박희순은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맞이하고 집 안으로 들여 술과 飮食을 待接했다. 그女는 唐慌한 家族과 敎友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하느님 의 許諾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의 뜻이므로, 우리 모두 기꺼이 받아들입시다."

박희순 루치아와 그女의 언니 朴큰아기를 包含하여 逮捕된 天主敎 信者들은 모두 意氣揚揚하게 監獄으로 向했다. 그들은 未來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지만, 異常하리만치 두려워하지 않았다.

宮女 中에 한 名이 逮捕되었다는 消息 消息은 急速히 퍼졌다. 宮闕에서 한 校誌 가 내려졌다. "萬一 어떤 現職 宮女나 前職 宮女에 對해 不利한 證據가 있다면, 그들은 闕에 申告가 있은 後에 逮捕된다." 박희순은 宮女였기 때문에, 無慈悲한 拷問을 받았다.

鋪裝이 그女에게 소리쳤다. "宮女라면 다른 女性들보다 더 많이 배웠을 텐데, 어째서 너는 그 그릇되고 卑劣한 宗敎를 믿을 수 있느냐?" 그女가 對答했다. "저희는 이것을 그릇된 宗敎라 여기지 않습니다. 하느님 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創造하셨고 사람들에게 生命을 주셨으므로, 그분을 讚美하고 崇拜하는 것은 當然한 일입니다. 하느님을 崇敬하는 일은 모든 사람의 義務 입니다."

鋪裝은 "天主敎를 抛棄하고 다른 信者들의 이름을 대라."고 要求했다. 그러나 그女는 이렇게 對答했다. "하느님은 저의 創造主 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그분을 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저희에게 다른 사람을 害하지 말라고 하셨으므로, 저는 敎友의 이름을 댈 수 없습니다."

鋪裝은 그女에게서 要求된 答辯을 얻어낼 수 없음을 깨닫고 그女와 그女의 언니를 刑曹 로 移送시켰다. 刑曹 監獄에서 그女는 各各 30代의 棍杖 을 包含한 세 次例의 拷問을 더 받았다. 그女의 살이 찢어져 피가 흘렀으며, 다리뼈가 튀어나왔고 結局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女는 그女의 머리카락으로 傷處를 닦아내며 말했다. "이제야 저는 예수님 聖母 마리아 의 苦痛을 若干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女는 自身의 苦痛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리 極甚한 傷處가 났어도, 그것들은 며칠 內로 完全히 治癒된 것으로 보였고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判書와 兄卒들은 그것을 妖術로 보았다. 罪囚들이 背敎할 可望이 없음을 깨달은 判書는 이렇게 報告했다.

박희순과 그女의 同僚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릇된 生活을 繼續했습니다. 그들의 所行은 邪惡하며 僞善的입니다. 그들의 말과 沈默은 모두 迷信이며 妖術입니다. 그들은 말과 몸짓으로 詛呪 밖에는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뉘우치기를 拒否하니 죽어야 마땅합니다.

監獄에서 박희순은 사도 가 되어 罪囚들을 가르쳤고, 슬퍼하는 이들을 慰勞했으며 근심과 疑心 中에 있는 敎友들에게 勇氣를 주었다.

그女는 殉敎 할 準備가 되었다. 收監 生活은 極度로 힘들었지만, 그女는 어서 의 곁으로 가기를 熱望했다. 하루는 그女가 刑吏를 불러서 말했다. "한가지 付託이 있습니다. 저의 목을 베실 때에 겁내지 마십시오. 單칼에 자르셔야 합니다."

그女와 마찬가지로 朴큰아기 亦是 엄청난 傷處를 입고 死刑 宣告를 받았다. 그러나 刑法 은 한 家族에서 두 名 以上을 같은 날에 處刑하는 것을 禁止하고 있었으므로, 그女와 그女의 언니는 서로 分離되었다.

1839年 5月 24日 박희순이 處刑되었고, 朴큰아기는 約 4個月 뒤인 9月 3日 에 54歲의 나이로 처형당하였다.

諡福 · 詩聖 [ 編輯 ]

박희순 루치아와 朴큰아기 마리아는 1925年 7月 5日 聖 베드로 廣場 에서 敎皇 비오 11歲 가 집전한 79位 諡福式 을 통해 福者 품에 올랐고, [1] 1984年 5月 6日 서울特別市 汝矣島 에서 韓國 天主敎 創立 200周年을 記念하여 訪韓한 敎皇 요한 바오로 2歲 가 집전한 미사 中에 이뤄진 103位 諡聖式 을 통해 成人 품에 올랐다.

各州 [ 編輯 ]

  1. 이상도 (2014年 7月 24日). “敎皇, 和解와 平和..8月의 크리스마스되길” . 평화방송. 2014年 10月 1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10月 18日에 確認함 .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