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사
(博文寺)는
日帝强占期
서울
中區
奬忠壇公園
東쪽
新羅호텔
迎賓館 자리에 있던
査察
이다.
奬忠壇은 本來
乙未事變
때 被殺당한 示威聯隊長
홍계훈
과 宮內府大臣
이경직
等을 기리기 위해
大韓帝國
高宗이 쌓은 祭壇이었다.
이 곳은
명성황후
殺害에 對한 抗日 感情을 象徵하는 場所였기에
1919年
朝鮮總督府는 奬忠壇 자리를 公園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32年
에 公園 東쪽에
이토 히로부미
를 追慕하기 위한 査察을 짓고, 査察이 자리잡은 언덕을 춘霧散(春畝山)이라고 불렀다.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토의 이름 伊藤博文(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춘무는 이토의 戶이다. 박문사는 이토 23周忌 忌日인 1932年
10月 26日
에 完工했다. 落成式에는 朝鮮總督
우가키 가즈시게
와
이광수
,
崔麟
,
윤덕영
等 親日附逆者와 千餘 名 사람이 參席하였다.
[1]
政務總監
고다마 히데오
(兒玉秀雄)가 勃起하여 세운
小토슈
寺刹로 建坪은 387坪이었다. 設立 目的은 "朝鮮 招待總監 이토 히로부미의 勳業을 永久히 後世에 前"하고 "日本佛敎 振興 및 日本人과 朝鮮人의 굳은 精神的 結合"을 圖謀하기 위한 것으로 明示해 있다. 박문사 建築에는
光化門
의 石材,
景福宮
璿源殿과 附屬 建物,
南別宮
의 席高覺을 使用했으며,
慶熙宮
正門인
흥화문
을 移轉하여 正門으로 使用하였다. 落成式에는 朝鮮總督
우가키 가즈시게
가 參席하고
히로히토 天皇
과 皇族 下賜品度 傳했다.
1937年에는 日本軍
肉彈3勇士
銅像을 세워 大陸侵略을 위한 '精神基地'로 삼기도 하였다.
[1]
1939年
에는 이곳에서 이토를 包含하여
이용구
,
송병준
,
이완용
等
韓日 倂合
功勞者를 爲한 感謝 慰靈祭를 열기도 했다. 이용구 아들인
이석규
가
흑룡회
와 함께 開催한 이 行事에는
이광수
와
崔麟
,
윤덕영
等 約 1千餘 名 參席했다.
寺刹은
大韓民國
政府樹立 以後 撤去했고, 6.25戰爭으로 附屬建物은 破壞되었다. 現在 박문사 터로 推定하는 자리에
新羅호텔
迎賓館이 있다. 박문사는 사라졌지만, 그곳으로 오르는 길고 가파른 돌階段은 남았다가 신라호텔의 韓屋호텔 着工으로 사라졌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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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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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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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
나
권기봉,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歷史를 만나다, 알마, 2008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