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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年 11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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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年 壬辰年
- 1593年 鷄舍年
- 1594年 甲午年
- 1595年 乙未年
- 1596年 丙申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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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戰鬪
(東萊城戰鬪)는
1592年
5月 25日
(
陰曆 4月 15日
)
釜山鎭 戰鬪
에 이어 일어난
壬辰倭亂
두 番째 戰鬪로 東來 府使
송상현
이 2時間을 버티며
日本軍
을 끝까지 막아냈으나 結局 戰死하고
동래성
은 陷落되었다. 이 戰鬪에 敗北로
大邱.尙州,金海,密陽,星州,忠州까지 陷落되고 만다.
戰鬪 準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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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來府使
송상현
은 日本이 쳐들어올 것을 미리 對備하기 위해
동래성
周邊에 나무를 最大限 많이 심어서 外部에서는 동래성을 觀測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는 等 萬般의 準備를 했다.
日本軍 上陸 消息을 들은 경상좌도兵馬節度使 離角이 軍隊를 이끌고 合流하였으나 日本軍의 氣勢에 氣가 꺾여 城 밖에서 싸우겠다고 하며 나가려는 離角을 宋象賢이 붙잡고 城안에서 같이 싸우길 바랬으나 그대로 密陽 方面으로 逃走하였고 量産郡守
조영규
또한 戰鬪에서 死亡 할 것을 直感하고 어머니에게 마지막 人事를 한다며 梁山으로 돌아갔다. 송상현 홀로 蔚山郡守
이언성
等과 함께 戰鬪를 치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새벽에
부산진城
을 出發하여 午前 10時 동래성에 到着해 部隊를 3個로 나누어 一帶(一隊)는
황령산
기슭에, 다른 一帶는 동래성 西便의 大路에, 마지막 一帶는 翠屛長으로부터 南門을 向하도록 하여 城을 包圍하였다.
그리고 無理한 戰鬪를 避하기 위해 朝鮮軍과 協商을 위해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
(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牌木을 세우게 했고, 宋象賢은 곧 거기에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
(戰死易 假道難)라고 回答하였다. 그리고 동래성 안에서는 百姓들까지 守備에 加擔하여 抵抗하여 한동안은 日本軍의 攻擊을 막아내는 듯하였으나, 日本軍은 城郭이 낮고 守備가 허술한 東門의 人生門(人生門)을 集中攻擊함으로써 防禦線을 뚫는 데 成功하였다. 梁山에서 돌아온 조영규는 一時에 同門이 무너지는걸보고 쏟아져들어오는 日本軍을 向해 突進하여 싸우다가 戰死하였다 性이 뚫리고 동래성이 陷落될 危機에 處하자 宋象賢은 朝服으로 갈아입고 故鄕의 父母에게 보내는 詩 한 數를 쓴 뒤 日本軍의 칼에 맞아 戰死했다.
結果 및 影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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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
部隊는
부산진城
과 동래성 陷落 後
가토 기요마사
,
구로다 나가마사
等과 함께
慶尙道
및
忠淸道
로 進擊해 各地의 城들을 陷落시키고
忠州
까지 進擊해
彈琴臺 戰鬪
에서
申砬
의 朝鮮軍을 潰滅시킨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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