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尙道 防禦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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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 防禦線
(慶尙道 및 忠淸道 陷落)
壬辰倭亂 의 一部
날짜 1592年 5月 27日 ( 陰曆 4月 17日 ) ~ 6月 7日 ( 陰曆 4月 28日 )
場所
結果 日本 의 勝利, 慶尙道 忠淸道 의 모든 性 陷落
交戰國
朝鮮 日本
指揮官
朴振 (梁山, 密陽)
서예원 (金海)
朴議長 (慶州)
신길원   (聞慶)
申砬   (忠州)
이일 (尙州)
造景 (秋風嶺)
金睟 (秋風嶺)
정기룡 (秋風嶺)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兵力
軍民 300名(密陽)
兵力 1000名(金海)
兵力 8000名(忠州)
兵力 800名(尙州)
兵力 900名(秋風嶺)
總兵力 1萬 1000名
가토 기요마사 2萬 2800名
고니시 유키나가 1萬 8700名
구로다 나가마사 1萬 1000名
總兵力 5萬 2500名
被害 規模
신길원 戰死, 密陽 郡民 300名 全滅 別 다른 被害 없음

慶尙道 防禦線 또는 慶尙道 및 忠淸道 陷落 壬辰倭亂 當時 釜山鎭 동래성 을 무너뜨린 日本軍이 士氣가 떨어진 慶尙道 忠淸道 地域의 官軍들을 무찌르고 開戰 10日 만에 慶尙道 를, 開戰 14日 만에 忠淸道 를 陷落시킨 戰鬪이다.

名稱 問題 [ 編輯 ]

戰鬪의 發端으로 알고있는 名稱의 基準이 없어서 慶尙道 防禦線이라는 名稱이 言及되었는데 現在는 慶尙道 防禦線으로 알려져있다. 이 戰鬪에서 當時 벌어진 戰鬪의 名稱을 어떻게 定했는지 不明이다. 慶尙道 및 忠淸道 陷落이라는 名稱은 널리 알려진게 없는걸로 알려졌다.

量産 陷落 [ 編輯 ]

1592年 5月 27日 ( 陰曆 4月 17日 ) 密陽府使 朴振 釜山 東萊 가 陷落되었다는 消息에 怯을 먹어 戰鬪다운 戰鬪도 못하고 密陽 으로 後退하고 量産 은 왜 陸軍 3部隊 구로다 나가마사 에게 陷落된다.

密陽 戰鬪 [ 編輯 ]

1592年 5月 28日 ( 陰曆 4月 18日 ) 密陽으로 後退했던 密陽府使 朴振 은 郡民 300名을 모아 密陽 작원관 에서 釜山鎭 東萊 에서의 戰鬪 以後 最初로 戰鬪다운 戰鬪를 벌였다.

峽谷을 건너오는 왜 陸軍 1部隊 고니시 유키나가 의 日本軍을 막으려 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 의 部長 마쓰라 시게노部 의 奇襲 攻擊으로 괴멸당했고 結局 朴珍은 다시 後退한다.

언양 陷落 [ 編輯 ]

1592年 5月 29日 ( 陰曆 4月 19日 ) 士氣가 떨어진 언양 亦是 日本 陸軍 2部隊 가토 기요마사 에게 虛無하게 陷落되고만다.

金海 戰鬪 [ 編輯 ]

1592年 5月 30日 ( 陰曆 4月 20日 ) 金海 府使 서예원 은 官軍 1000名을 이끌고 金海 防禦에 나서 서예원 은 中軍을 맡아 南門을 지키고 중위장 抄啓郡守 이유검을 序文에 配置했다.

量産 을 陷落시킨 구로다 나가마사 가 金海로 쳐들어오고 初期에는 官軍은 熱心히 싸웠으나 釜山과 東萊가 陷落되고 密陽에서 支援軍이 敗北했다는 消息으로 이유겸 은 도망치고 서예원은 亦是 結局 도망치고 만다.

이에 남은 郡民들이 일어나 同門에는 김득기 , 序文에는 留食 , 南門은 송빈 , 北門은 이대형 이 맡아 다시 戰鬪를 치렀으나 結局 金海는 무너지고 만다.

慶州 陷落 [ 編輯 ]

1592年 5月 31日 ( 陰曆 4月 21日 ) 가토 기요마사 慶州 로 進擊하고 慶州판관 朴議長 이 싸웠으나 結局 陷落되고 日本軍은 慶州性 에 入城해 佛國寺 芬皇寺 같은 文化財들을 닥치는 대로 掠奪하고 불을 질러 慶州의 文化財가 크게 毁損되었다.

昌原, 永川 陷落 [ 編輯 ]

1592年 5月 31日 ( 陰曆 4月 21日 )과 6月 1日 ( 陰曆 4月 22日 ) 가토 기요마사 昌原 永川 을 쉽게 陷落시킨다.

聞慶 戰鬪 [ 編輯 ]

1592年 6月 5日 ( 陰曆 4月 26日 ) 尙州 戰鬪 以後 고니시 유키나가 聞慶 으로 進擊했는데 문경은 姓 안이 비어있었다. 聞慶 官衙를 지나는 途中 聞慶 縣監 신길원 이 20名의 決死隊를 이끌고 화살을 쏘며, 奇襲 攻擊을 했으나 戰鬪 끝에 신길원 은 投降을 拒否하다가 斬首당하고 聞慶 은 突破당한다.

星州 陷落 [ 編輯 ]

1592年 6月 6日 ( 陰曆 4月 27日 ) 고니시 유키나가 聞慶 을 陷落시킨 餘勢를 모아 星州 까지 陷落시킨다.

秋風嶺 戰鬪 [ 編輯 ]

1592年 6月 7日 ( 陰曆 4月 28日 ) 秋風嶺 에서는 戰爭 開戰 2日 만에 경상우도 防禦使로 任命된 造景 은 6番째로 구로다 나가마사 에 맞서 戰鬪다운 戰鬪를 벌였다.

特히 造景은 軍事 500名과 居昌 에서 申砬 의 밑에서 活躍한 軍官 정기룡 等을 모아 구로다의 日本軍 100名의 목을 베는 成果를 거두고 錦山 에서 金睟 가 400名의 兵力을 더 보내 總 900名의 兵力을 모아 구로다에 맞선다.

日本軍이 밀려들자 鄭起龍이 短期로 달려들어 日本軍 50名의 목을 베는 동안 日本軍의 埋伏으로 造景이 생포되자 정기룡 이 달려가 日本軍의 埋伏을 擊破하고 負傷을 입은 造景을 救해 後退했고 結局 秋風嶺 을 突破당하고 만다.

結果 및 影響 [ 編輯 ]

日本軍은 開戰 10日 만에 大勝을 거두면서 慶尙道 를 完全히 占領하고 開戰 14日 만에 忠淸道 까지 陷落시켰다. 以後 忠州 彈琴臺 戰鬪 에서 申砬 의 朝鮮軍까지 擊破해 朝鮮 은 危機에 處하게 되어 結局 朝鮮의 賃金인 宣祖 는 漢陽을 버리고 蒙塵에 이르게 되었다.

慶尙道 및 忠淸道 陷落의 意味 [ 編輯 ]

朝鮮 朝廷의 南部地域 影響力 消滅과 日本軍의 前哨基地 確立. 그리고 漢陽으로의 進路가 닦여졌다는데에 日本軍에게 意味가 있다. 朝鮮軍에게는 南部 地域의 防禦力을 잃은 戰略的 損失이 매우 컸다.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