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관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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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관 戰鬪
丁酉再亂 의 一部
날짜 1597年 陰曆 9月 ~ 陰曆 11月
場所
結果 日本軍 의 勝利
交戰國
指揮官

이원춘   求禮縣監
왕득인   義兵將
왕의성 義兵將
이정익   義兵將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種  

조경남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視

시마즈 요시히로
兵力
義兵 3,500名
僧兵 153名
總兵力 3,653名
34,000名
被害 規模
全滅 正確한 數字는 알 수 없음

석주관 戰鬪 (石柱關戰鬪)는 朝鮮 宣祖 31年( 1597年 , 丁酉再亂 )에 求禮 地方의 선비 들이 義兵 을 일으켜 日本軍 에 맞서 석주관 을 死守하다 戰死한 戰鬪이다.

背景 [ 編輯 ]

1597年 丁酉再亂이 일어나고 남원성 全州城 이 陷落되었다. 하지만 湖南 地域에서의 抵抗이 完全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日本軍이 侵攻해 擄掠질을 當했던 求禮 地域에서 前 南原 戰鬪에서 敗해 後退했던 求禮 縣監 이원춘 이 義兵을 일으켜 들고 일어나 석주관 (石柱關)에서 日本軍과 戰鬪를 벌였다.

當時 求禮는 南原 全州 로 통하는 戰略的 要衝地이자 交通地이었으므로 日本軍은 다시 求禮 地域을 討伐하기 위해 軍士를 돌려야 했다. 석주관에서 戰鬪를 벌인 끝에 이원춘은 結局 戰死했다.

이에 求禮 住民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10月 31日 ( 陰曆 9月 22日 ) 字母腸 왕득인 이 50名의 軍士를 이끌고 와 싸우다가 戰死했다. 이에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 12月 16日 ( 陰曆 11月 8日 ) 아버지가 석주관에서 戰死했다는 消息을 듣고 義兵을 일으켜 이정익 , 한호성 , 양응록 , 고정철 , 오種 等과 함께 義兵을 이끌고 석주관으로 갔다.

12月 17日 ( 陰曆 11月 9日 )에 벌어진 戰鬪에서 이정익과 고정철이 조경남 의 義兵과 合勢해 연곡에서 陣을 쳐 日本軍 60名을 죽이고 우리 砲로 200名을 救出했다.

第2次 戰鬪가 있기 前에도 近處 화엄사 에서 僧兵 153名과 軍糧米 103席을 支援받았다. 義兵과 僧兵 聯合軍은 最後의 戰鬪로 '皮內' 라 불리는 溪谷으로 日本軍을 誘引해 5醫師 義兵軍과 僧兵軍이 一齊히 攻擊을 始作했다. 또한 왕의성은 日本軍에게 바위를 내려 奇襲했다.

그러나 繼續 오는 日本軍의 數字에 衆寡不敵으로 敗北해 5醫師 義兵將들度 모두 戰死하고 오직 왕의성만이 禍를 免해 後退했다.

結果 및 影響 [ 編輯 ]

석주관에서 繼續 抗戰을 벌이다 戰死한 求禮에는 석주관漆義士墓 가 세워졌다.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