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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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城府
漢城府
朝鮮 의 部
남산의 정상에서 바라본 한양의 풍경
南山의 頂上에서 바라본 漢陽의 風景
行政
國家 조선 朝鮮 대한제국 大韓帝國
行政 區域 漢城府
歷史
設立 1392年
景福宮 흥례문
勤政殿 御座의 모습

漢城 (漢城, 中世 韓國語 : 한?쎠ㅇ ) 또는 漢陽 (漢陽)은 朝鮮 大韓帝國 수도 였다.

1392年 朝鮮이 開國하면서 朝鮮 太祖 는 風水 圖讖說에 따라 1394年 朝鮮의 首都를 이곳으로 定하였다. 3年 後에 景福宮 을 짓고 昌德宮 을 景福宮의 离宮으로 지었다. 이 當時 漢城府의 領域은 城郭의 四大門(四大門, 東西南北 方向)과 城郭 外部의 一部 地域을 包含하는데, 卽 現在의 서울市의 江北地域 大部分이 包含된다.

城郭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道理인 儒敎의 誤想 仁義禮智信(五常 仁義禮智信) 理念을 具體化하여 城門을 建築하였다. 卽 中央은 時間을 알려주기 위해 普信閣 을 세우고, 東쪽에는 興仁門 (寶物), 西쪽에는 敦義門 , 南쪽에는 崇禮門 (國寶), 北쪽에는 肅淸門 을 세웠다. 北쪽은 本來 소지문(炤智門)으로 하려 했으나 最終 落點은 肅淸門(現在 肅靖門 [1] )이 되었다.

壬辰倭亂 丙子胡亂 等의 變亂을 거치면서 景福宮 等이 破壞되었다가 高宗 臺에 이르러 흥선 大院君 의 名으로 다시 復舊되었다. 高宗은 1896年 圜丘壇 을 지어 大韓帝國 을 宣布하였으며 德壽宮 을 中心으로 都市의 軸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下部 行政區域은 五部 와 房(坊)과 界(契)·桐(洞)으로 構成되었다. 15世紀 初 人口는 10萬 名 程度였다. 오늘날 서울의 中心 業務 地球 ( 都心 )를 차지하였으며 바깥에는 城底十里 가 있었다.

서울의 歷史

沿革 [ 編輯 ]

天道의 背景 [ 編輯 ]

1392年에 開京( 開城 )에서 朝鮮王朝를 세운 太祖 李成桂 는 朝鮮王朝의 面目과 人心을 새롭게 할 目的으로 都邑地를 옮기기로 決心을 하였다. 首都를 옮기는 것을 決定하는 데에는 君主인 李成桂의 意志가 決定的이었다. 太祖는 한時라도 빨리 옛 王朝로부터 벗어나고 새 王朝의 權威를 높이기 위하여 새 王朝가 하늘의 命을 받고 百姓들의 支持를 받아 正當하게 세워졌음을 世上에 널리 强調하였다.

太祖가 遷都를 한 理由로는 旣存 勢力의 根據地인 開京 에 對한 政治的 不安과 心理的 葛藤, 그리고 風水 地理說의 影響, 民心의 刷新 等을 들 수 있다. [2] [3] [4] [5] 새 都邑地를 物色하던 中 舞鶴局社 河崙 (河崙) 等 여러 臣下들의 意見에 따라 1393年에 都邑地를 漢陽으로 定하고 1394年 信徒宮闕造成都監 (新都宮闕造成都監)을 設置하여 새 首都의 都市 計劃을 構想하였다. 1394年 11月 21日(陰曆 10月 28日)에 漢陽 으로 天道(遷都)를 하였는데, 漢陽은 한手(漢水, 漢江)의 北쪽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天道의 基準은 風水 · 圖讖說 에 따르면서, 南쪽에 漢江이 있어 交通上 배로 物件을 실어 나르기가 便利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6] 儒學者들은 이러한 論據에 反對하였으나 李成桂의 意志가 굳건했기 때문에 天道는 旣定事實이 되었다.

한便 風水 · 圖讖說 에 能했던 河崙 에 따르면 오늘날의 延世大學校 자리인 무악 一帶가 明堂이었고, 이로 인해 首都의 位置에 對해 크게 論議가 일기도 했다. 實錄에 따르면 李成桂는 이러한 論據로 首都의 立地를 定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境內에서는 송경이 第一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限되는 바는 건방(乾方, 北쪽)李 낮아서 不過 샘불이 마른 것 뿐입니다.”
賃金이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송경인들 어찌 不足한 點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形勢를 보니, 王道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漕運하는 배가 통하고 [四方의] 이수도 고르니, 百姓들에게도 便利할 것이다.”

? 《太祖實錄》, 3年 8月 13日條

따라서 風水·圖讖說에 基盤한 論議가 國王의 決定에 決定的 影響을 끼치지 않았다는 點을 알 수 있다. 王사 自招( 舞鶴 )가 仁王山에서 出發한 軸을 따라 하여 都邑의 터를 잡자고 主張했다는 說은 野史로 16世紀 末~17世紀 初에 刊行된 《誤算說林》에 收錄되어 있는 이야기다. 實錄에는 全혀 傳하지 않는 이야기로, 信賴할 수 없다.

1395年 (太祖 4年) 6月 6日에 한양부(漢陽府)의 名稱을 漢城府(漢城府)로 고쳤으며, 그와 同時에 漢陽 遷都 當時에 宮闕과 官廳이 세워진 地域에 살던 百姓들을 犬主(見州)로 옮기고 洋酒(楊州)라 고친 바 있다. [7]

漢城의 建設 [ 編輯 ]

1840年頃의 漢城 地圖인 《 首善全圖

太祖(太祖)는 宮闕을 中心으로 ‘左廟宇社, 前兆後市(左廟右社, 前朝後市)’라는 東洋 古來의 首都 配置 原則에 따라서 都邑을 建設하였다. 天道 以後 漢陽에는 各種 工事가 잇따라 施行되어 首都로서의 面貌를 갖추었다. 調整과 市場 또한 비슷한 時期에 建設되었다. 城郭은 宮闕과 宗廟가 完工된 以後에 建設되었다. 가장 먼저 西쪽에 辭職(社稷)을 完工하고, 宮闕을 세운 뒤, 그 東쪽에 宗廟(宗廟)가 完成되었다. 그리고 光化門 앞에 六曹官署(六曹官署)를 配置하여 官衙가(官衙街)로 하고, 北쪽 神武門(神武門) 밖에는 市場을 두었다. 이때부터 서울은 朝鮮의 政治都市로서의 機能을 갖추어 나가기 始作하였다. 그 다음으로 太祖는 漢陽의 防衛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北岳山과 駱山(駱山)·南山(南山)·仁王山(仁旺山)을 잇는 約 117km의 城壁을 쌓기 始作하였다.

1395年에 漢陽을 漢城(漢城)으로 改稱하고 1395年에는 漢城의 行政區域을 設定하였다. 그 行政區域은 都城(都城)과 城底(城底)로 構成되었는데, 朝鮮時代의 500年 동안을 使用하여 왔던 것이다. 都城은 城 안의 땅으로 모두 國有地이며, 宮闕·官廳·道路·下水道·市場 等의 位置가 定해져 있었다. 城底( 城底十里 )는 城壁으로부터 四方 10里 되는 限界線까지를 가리키는데, 北쪽은 北韓産, 南쪽은 漢江 怒濤(露渡) [8] , 東쪽은 洋酒 송계원·大絃(大峴) [9] ·중랑포(中浪浦)·장안평, 西쪽은 楊花渡(楊花渡)·고양덕水原(高陽德水院) [10] , 모래내(沙川)를 따라 蘭芝島(蘭芝島) 附近까지였다. 이 地域內는 山林과 風致의 保護를 目的으로 暗葬과 벌目·採石이 禁止되었다. 이 都城은 洞·西·男·北·中部의 五部(五部)를 두고 그 밑에 52房(坊)을 두었다. 같은 해 9月에 城壁과 門樓(門樓)가 完成되어 旺盛은 周圍에 堅固한 城壁이 쌓여진 城郭都市가 되었다.

1398年 王子의 亂 이 일어나고, 定宗 이 卽位하면서 2年동안 首都를 開城으로 옮긴 일이 있었으나, 太宗(太宗)이 卽位하자 곧 漢城으로 다시 還都하였다. [6] 太宗代에는 太宗의 卽位를 도와 强力한 權勢를 지니고 있던 河崙이 다시금 舞樂薦度論을 主張하였고, 여기에 開城까지 더해 세 個의 候補地가 다시금 朝鮮朝 首都가 立地할만한 곳으로서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太宗은 銅錢을 던져 吉凶을 점치는 擲錢 (擲錢)으로 都邑을 決定하기로 했다. 擲錢의 結果는 "信徒(新都)는 2길(吉) 1凶(凶)이었고, 宋璟(松京)과 무악(毋岳)은 모두 2凶(凶) 1길(吉)이었다"고 한다 [11] . 勿論 太宗은 太祖의 決定으로 지어진 首都를 버리는 데 對한 負擔感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고, 새로이 土木工事를 일으키는 데 對한 負擔感 亦是 컸을 것으로 보인다 [12] .

還都한 다음 해부터 宮闕을 收縮하면서 都邑地로서의 여러 施設을 갖추어갔다. 路幅 56隻(尺)의 ( 雲從街 (雲從街) [13] )를 비롯하여 路幅 16隻, 11隻의 各種 道路를 만들고, 그 兩쪽에는 가가(假家)라고 부르는 商店을 만들어 繁華하게 하였는데 商店이 들어서 있는 土地는 10年을 限度로 貸與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幹線道路邊에는 2隻의 溝渠(溝渠)를 만들어 排水가 잘 되게 하였다. 또한 개川(開川) [14] 을 竣工하여 排水가 잘 되게 하였고, 都邑地의 美觀과 火災豫防을 위하여 草家(草家)의 建築은 抑制하였다.

朝鮮 中後期 [ 編輯 ]

1905年의 漢城

1592年 宣祖 때의 壬辰倭亂과 1624年 仁祖 때의 丙子胡亂으로 입은 被害는 흥선大院君 때에 와서 全面 復舊되었다. 1876年 開港 以來 外國人에게 門戶를 開放하고 漢城에는 새로운 文明施設이 갖추어져 가는 等, 現代化하기 始作하였다.

大韓帝國期 [ 編輯 ]

서울은 東아시아에서 電氣 , 戰車 , 수도 , 電話 , 前身 體系를 모두 同時에 갖춘 最初의 都市가 되었다. 近代的인 病院·學校·敎會·新聞社 等이 세워졌고, 1898年에는 西大門과 홍릉(洪陵) 사이에 電車가 附設되고, 1899年에는 京仁線의 開通과 電話의 假說, 1900年에는 漢江架橋가 竣工되었다. 그러나 繼續하여 近代的인 商工業 發達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6]

1895年 5月 26日 高宗 이 全國을 23部로 나누면서 漢城府 를 하나의 地方行政區域으로 改編하였으나 1年만에 13道制 가 施行되면서 元來대로 還元되었다. 1910年 總督府令에 따라 京城府 로 改稱되고 京畿道에 編入되었다.

지리 [ 編輯 ]

朝鮮 時代의 漢城府의 區域은 오늘날의 서울보다 훨씬 狹小하였다. 東쪽은 駱駝山 , 西쪽은 仁王山 , 南쪽은 木覓山 , 北쪽은 白岳山 으로 둘러싸인 盆地가 그 터전으로서, 城 밖의 一部 地域도 管轄하였지만, 朝鮮 建國 當時에는 原則的으로 城 안의 區域만을 ‘漢陽’이라 하였다. [15]

그러나 都城 안에 居住하는 人口가 漸次 增加하여, 城內에 모든 人口를 收容할 수 없는 狀況에 이르렀다. 이 즈음부터 城郭으로부터 十 里 바깥까지의 地域을 ‘ 城底十里 ’라 稱하게 되었으며, 城底十里로의 人口 移動도 일어났다. 結局 1461年 2月 27日 城底十里는 公式的으로 漢城府에 屬하게 되어 [16] , 漢城府의 領域이 擴張되었다.

行政 [ 編輯 ]

朝鮮 後期 漢城府 內 官廳 位置도
漢城府의 職制
品階 官職 庭園
情2品 判尹 1名
種2品 左尹
右尹
各 1名
種4品 庶尹 1名
種5品 判官 2名
情7品 參軍 3名 [17]

漢城府 (漢城府, 中世 韓國語 : 한?쎠ㅇ붕? )는 當時 朝鮮의 '漢城'을 擔當하여 管轄하는 官廳으로, 只今의 서울特別市靑 格이다. 大韓帝國 高宗 治世에 이르러, 宮闕을 擴張하고 商街를 짓는 等 都市가 擴張되었다. 漢城府는 鄭2品인 漢城判尹 이 最高 責任者였다.

일정한 地域을 擔當하는 點에서는 一般的인 地方 機關과 같지만, 수도 라는 點에서 中央官廳으로 認定하였으며 六曹 와 같은 格의 官廳으로 待遇하였다. 刑曹 · 司憲府 와 함께 三法司(三法司)라고도 불렸다. 서울의 虎口, 市場 및 店鋪와 家屋 및 土地, 산, 道路, 橋梁, 河川 等의 管理와 財政 및 司法, 檢屍, 鼓室 等의 일을 擔當했다. 漢城府의 管轄 領域은 漢陽과 城底十里였다.

漢城府 官廳의 本廳 建物은 여러 次例 變動이 있었으나 가장 오래 存續한 곳은 世宗大路( 六曹거리 ) 東便의 李朝 好調 사이 地域이었다. 現在 住所 體系로는 서울特別市 종로구 세종로 82-14番地의 駐韓美國大使館 北쪽 敷地(美國大使館 公報院 자리)이며, 堂上大淸, 郎廳大淸, 戶籍 倉庫 等의 建物이 있었다.

行政 區域 [ 編輯 ]

五部 [ 編輯 ]

경조오부도
漢城府 行政區域 領域도

桐·西·男·北·中(中)의 五部로 構成되었으며, 이 아래에는 房(坊)과 界(契)·東(洞)을 두었다.

漢城府 設置 當時에는 52房을 두었는데, 各 部의 방명은 다음과 같다.

① 東部 12放
연희방(燕喜坊)·숭교방(崇敎坊)·千달방(泉達坊)·창선방(彰善坊)·乾德房(建德坊)·德性房(德成坊)·서운房(瑞雲坊)·연화방(蓮花坊)·숭신房(崇信坊)·인창방(仁昌坊)·關德房(觀德坊)·흥성방(興盛坊)
② 南部 11放
광통방(廣通坊)·好懸房(好賢坊)·明禮坊(明禮坊)·臺平方(大平坊)·訓導房(勳陶坊)·聲明房(誠明坊)·落選房(樂善坊)·正心房(貞心坊)·명철방(明哲坊)·성신방(誠身坊)·예성방(禮成坊)
③ 西部 11放
迎見房(永堅坊)·인달房(仁達坊)·적선방(積善坊)·여경방(餘慶坊)·人地方(仁智坊)·荒貨房(皇華坊)·取懸房(聚賢坊)·養生方(養生坊)·반석방(盤石坊)·神話房(神化坊)·搬送房(盤松坊)
④ 北部 10放
광화방(廣化坊)·陽德房(陽德坊)·街回榜(嘉會坊)·안국방(安國坊)·관광방(觀光坊)·진정방(鎭定坊)·醇化房(順化坊)·名通房(明通坊)·遵守房(俊秀坊)·醫通房(義通坊)
⑤ 中部 8放
정선방(貞善坊)·狂行方(廣幸坊)·官印方(寬仁坊)·수진방(壽進坊)·澄淸房(澄淸坊)·長通房(長通坊)·서린방(瑞麟坊)·견평방(堅平坊)

52房은 世宗 때 西部의 3房을 廢止하여 49房이 되고, 英祖(英祖) 때는 東部 6放, 南部 11放, 西部 9放, 北部 12放, 中部 8房으로 5部 46房이었으며, 그 밑에 328係(契)를 두었다. 그 後 1865年 (高宗 2) 東部에 景慕宮房(景慕宮坊)李 新設되어 47房이 되고, 啓導 11個가 增加되어 339系가 되었다.

朝鮮 初期의 漢城府 管轄區域은 都城으로부터 四方 10리까지로 하였으나, 大部分의 人口가 都城 內에 集中되어 1428年 (世宗 10) 漢城府 人口 10萬 3328名 가운데 都城 밖 10리까지의 人口는 不過 6,044名 뿐으로, 都城 밖에는 西大門·西小門 밖에 2放, 東大門 밖에 2放, 南部의 2房 等 6房이 있을 程度였다.

大韓帝國 副題에 따른 行政區域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只今의 肅靖門 木造 樓閣은 消失되었던 것을 1976年에 復元한 것이며, 懸板의 글씨는 朴正熙 大統領 이 쓴 것이다.
  2. 金龍國 (1957). “서울 天道의 動機와 顚末”. 《鄕土서울》 1 .  
  3. 이원명 (1984). “漢陽 天道의 背景에 關한 硏究”. 《鄕土서울》 42 .  
  4. 임덕순 (1984). “漢陽이 首都로 選定된 理由”. 《충북대학교 論文集》 27 .  
  5. 원영환 (1988). “漢陽 天道와 首都建設高”. 《鄕土서울》.  
  6.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 〈 朝鮮時代의 서울
  7. 《太祖實錄》 太祖 7卷 4年 6月 6日, 한양부를 漢城府로 고치다. 國史編纂委員會 Archived 2017年 3月 20日 - 웨이백 머신
  8. 노들나루
  9. 只今의 우이천
  10. 只今의 응암동
  11. 《太宗實錄》4年 10月 6日
  12. 《太宗實錄》4年 10月 4日
  13. 只今의 鍾路 1街에서 鍾路 4街까지
  14. 只今의 淸溪川
  15. 손정목 (1977). 《朝鮮時代 都市社會硏究》. 일지사. 35쪽.  
  16. 《世祖實錄》 世祖 23卷 7年 2月 27日, 漢城府에서 서울의 五部 밖의 城底 十里를 各 部에 分屬시킬 것을 建議하다. 國史編纂委員會 Archived 2017年 3月 20日 - 웨이백 머신
  17. 1名은 通禮院 의 仁義가 겸한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