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京 (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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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歷史

南京 (南京)은 高麗 時代 三經 (三京) 中 하나로, 只今의 仁王山 아래쪽에 存在하였던 것으로 推定된다.

朝鮮 時代의 漢陽 地域이며, 現在의 서울 地域이다. 高麗 文宗 21年(1067年) 南京吉地설 에 따라 처음 設置되었다.

位置와 領域 [ 編輯 ]

男警의 領域은 東쪽을 대봉(大峰), 西쪽을 기봉(岐峰), 北쪽을 緬嶽(面嶽), 南쪽을 舍利(沙里)로 삼았다. 이 가운데 緬嶽(面嶽)은 北岳山 을 가리킴이 明確하다. [1] 舍利(沙里)는 ‘모래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龍山 一帶의 漢江 白沙場으로 생각되기도 하나, 緬嶽에서 바라볼 수 있는 視野의 限界를 考慮하면 朝鮮 時代의 황토현(黃土峴) 앞으로 推定된다. [2] 대봉(大峰)은 昌德宮 뒤 鷹峯(應峰)에서부터 송현 (松峴)까지의 山줄기로, 기봉(岐峰)은 仁王山 으로 推定된다. [3]

南京 行宮의 領域이 좁아 그 南쪽을 景福宮 領域으로 삼았다는 朝鮮王朝實錄의 記錄이 있는데 [4] , 이를 考慮하면 南京 行宮은 鄕園地 (香遠池) 西쪽 언덕 附近으로 推定된다. [5] 南京 行宮에는 연흥前(延興殿), 천수전(天壽殿), 北녕門(北寧門), 남名文(南明門) 等의 建物이 있었다. [3]

南京 遷都 論爭 [ 編輯 ]

最初로 南京을 세운 것은 高麗 文宗 21年( 1067年 )이다. [6] 文宗 22年( 1068年 )에는 南京에 宮闕을 지었다. [7] 1099年 一貫 金謂磾의 主張에 따라 肅宗 6年( 1101年 ) 9月에는 南京開創都監(南京開創都監)이 設置되었으며 [8] , 3年 뒤 肅宗 9年( 1104年 ) 5月에는 男警의 离宮이 完成되었다. [9] 新都市라 할 수 있는 南京에는 거란 사람들도 歸順하여 살았다. [10]

一貫(日官)인 최사추 等은 다음과 같이 上訴하였으며, 이는 南京 建設에 影響을 미쳤다.

‘저희들이 노원역(盧原驛), 해村(海村), 龍山(龍山) 等地에 가서 算數(山水)를 살펴본즉 都邑을 定하기에 合當하지 않고 오직 三角山 緬嶽(面嶽) 南쪽의 算數 形勢가 옛 文獻의 記錄에 符合되오니 請컨대 三角山 主龍의 中心 地點인 南向館에 그 地形대로 都邑을 建設하소서!’라고 하니 王이 좋다고 하였다.
(中略)

‘南京을 새로 建設하는 데는 반드시 땅을 넓게 차지하고 百姓들의 農土를 많이 빼앗아야 될 것이오니 請컨대 경위령(京緯令)의 말한 바에 根據하여 山에 依據하여 形勢를 取하기도 하고 물로 地形을 표하기도 하되 于先 안으로 算數 形勢를 따라 東으로는 대봉(大峯)까지, 南으로는 舍利(沙里)까지, 西로는 奇峯(岐峯)까지, 北으로는 緬嶽(面嶽)까지를 境界로 삼으소서!’라고 하니 王이 좋다고 하였다.

 
— 《高麗史》 , 世가 第11 肅宗 7年(1102年) 3月의 記事

이러한 天道의 論理를 提供한 것은 金謂磾라는 一貫으로 보인다. 金謂磾는 道詵의 비기·답산가, 그리고 著者가 不明確한 신지祕事(神誌秘詞)를 根據로 個性의 至德이 그의 時期에 衰하였음을 이야기하였다 [11] . “建國한 後 1百 60餘 年에 목멱벌에 都邑한다”고 하며, 그 根據로는 앞선 도참서들 말고도 五行說, 卽 存在者들에게 附與되는 屬性들의 相應 體系 亦是 그 뒷部分에서 引用되었다. 祕記의 內容으로 引用된 文章에는 “11, 12, 1, 2月을 重慶에서 지내고 3, 4, 5, 6月을 南京에서 지내며 7, 8, 9, 10月을 署經에서 지내면 36個國이 와서 朝貢할 것이다.”가 包含되어 있고, 이는 妙淸의 亂 과 같은 高麗朝의 여러 事件들에서 여러 次例 根據로 活用되기도 하였다.

공민왕 1356年 以後 南京 遷都 作業을 進行하고 이 過程을 主導하였다.

1357年 1月 壬辰日에 王이 봉은사에 가서 太祖 進展에 參拜하고 漢陽(漢陽)에 遷都할 데 對하여 占을 쳤더니 王의 손에 '正(靜)'字가 잡혔다. 다시 이제현에게 命令하여 占을 치라 하였더니 '東(動)'字를 얻었다. 王이 기뻐하여 “그대가 몸을 깨끗이 하고 祭祀하여서 吉한 占卦를 얻었으니 참으로 나의 마음이 洽足하다.”
 
— 《高麗史》39卷 世가 39卷

라고 하여 國王의 천도 意志가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持續的인 戰爭과 飢饉으로 인해 그 實行이 힘들었던 것 같다. 明確한 中斷 記事는 없으나 공민왕 卽位 10年을 넘기면서 積極的인 遷都 進行 記事를 찾아볼 수는 없게 된다. 또한 尹澤 等의 儒學者들이 恭愍王을 制止했다는 點 또한 確認할 수 있다. [12]

이러한 천도 論議는 禑王 , 공양왕 또한 進行했었으나 恭愍王代와 同一한 理由로 인해 모두 棄却되었다. [13] 恭讓王은 1390年 9月 南京으로 薦度하기는 하였으나 [14] , 1391年 2月 開京으로 다시 還都하는 일이 있었다. [15]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이종묵 (2006). 《朝鮮의 文化空間 1》. 서울: 휴머니스트. 61쪽. ISBN   9788958621171 .  
  2. 최종현; 김창희 (2013). 《오래된 서울》. 서울: 冬夏. 26쪽. ISBN   9788996787228 .  
  3. 최종현; 김창희 (2013). 《오래된 서울》. 서울: 冬夏. 27쪽. ISBN   9788996787228 .  
  4. 《太祖實錄》 太祖 6卷 3年 9月 9日, 鄭道傳 等에게 漢陽의 宗廟·辭職·宮闕·市場 等의 터를 定하게 하다. 國史編纂委員會
  5. 최종현; 김창희 (2013). 《오래된 서울》. 서울: 冬夏. 28-30쪽. ISBN   9788996787228 .  
  6. 《高麗史節要》 卷5, 文宗 21年 “改楊州, 爲南京留守官, 徙旁郡民, 實之.”
  7. 《高麗史節要》 卷5, 文宗 22年 “創新宮于南京.”
  8. 《高麗史節要》 卷6, 肅宗 6年 “置南京開創都監 …”
  9. 《高麗史節要》 卷7, 肅宗 9年 “南京宮闕成.”
  10. 《高麗史》 卷14, 世가 勸第14, 睿宗 12年 8月 “契丹投化人, 散居南京圻內者, 奏契丹歌舞雜戱以迎駕, …”
  11. 《高麗史》 卷122 列傳 勸第35
  12. 《高麗史節要》 卷26, 공민왕 6年 2月 “命李齊賢相宅于漢陽, 築宮闕. 開城尹致仕尹澤上言, “妙淸惑仁廟, 幾至覆國, 厥鑑不遠, ?今四境有虞, 訓兵養士, 猶懼不給, 興工勞衆, 恐傷本根.””
  13. 《高麗史》 卷133 列傳 勸第46 신우 1 신우 元年, 第112卷 列傳 第25 박의중 等
  14. 《高麗史》 卷45, 世가 勸第45, 恭讓王 2年 9月 “丙午 遷都于漢陽, …”
  15. 《高麗史》 卷46, 世가 勸第46, 공양왕 3年 2月 “丁卯 至自南京,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