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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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직 (韓圭稷, 1845年 ~ 1884年 )은 朝鮮 末期의 無冠이다. 本貫은 淸州(淸州), 字는 楯座(舜佐)이며, 號는 다옥(茶玉)이다. 府使 한승렬의 아들이며, 한규설 의 兄이다. 명성황후 의 寵愛를 받았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1864年 弱冠의 나이로 武科에 及第하여 宣傳官에 除授되었다. 그 뒤, 中樞府經歷·함안郡守·尙州鎭營將·경흥부사·禁衛營千摠·吉州牧使·經常右水使 및 左水使 等 外方의 武官職을 歷任하였다. 1881年 에는 全羅道兵馬節度使가 된 뒤 곧이어 左邊捕盜大將에 任命되었다. 1882年 에는 잡아들인 容疑者 5名을 甚하게 拷問하여 죽인 罪로 순안에 流配되었다.

壬午軍亂 直後 [ 編輯 ]

같은 해에 壬午軍亂 이 일어나자 國王의 特命으로 풀려나, 罪를 容恕받고 다시 左捕盜大將에 任命되었다.

壬午軍亂 以後 [ 編輯 ]

1883年 右捕盜大將에 改任되었다가 곧이어 摠戎使가 되어 絨緞에 올랐다. 또한 다시 御營大將으로 任命되었고 事大黨 內閣의 重鎭으로 자리를 굳혀 갔다. 1883年 9月 에는 權知協辦이 되고 다시 工曹判書·協辦軍國事務, 軍務司를 거쳐 新設 敎鍊小人 親軍全榮의 監督까지 兼任하였다. 1884年 에는 다시 機器局과 惠商公局 總販을 겸하였다. 그 以後, 1884年 8月 에는 前領事가 되어 以前에 別途 設置된 鍊戎臺를 통해 모든 軍事 訓鍊을 統轄하였다. 이때 그 동안 急進開化派 박영효 가 養成하던 新式 軍隊까지 親軍全英에 編入, 開化派 로부터 軍權을 빼앗아 버렸다. 이로 因해 開化派 들과 사이가 宏壯히 나빠졌다.

甲申政變 과 最後 [ 編輯 ]

1884年 12月 4日 김옥균 , 박영효 , 홍영식 , 서광범 , 서재필 , 서재창 , 박영교 急進開化派 들이 甲申政變 을 일으키자 민영목 , 민태호 , 조영하 , 윤태준 守舊派 와 한규직과 이조연 等 親淸 穩健開化派 들은 急進開化派 들에 依해 殺害당했다.

기타 [ 編輯 ]

이조연 , 윤태준 과 같이 穩健開化派 認知 守舊派 인지 相當히 曖昧한 人物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種種 穩健開化派 로 分類됨에도 不拘하고 閔氏 戚族과 매우 가깝게 지냈고 김홍집 , 어윤중 , 유길준 等과 달리 急進開化派 와의 對立이 매우 甚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