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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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崔時亨
出生 1827年
朝鮮 慶尙道 慶州
死亡 1898年 (72歲)
大韓帝國 漢城府
國籍 朝鮮
別稱 初名(初名)은 최경상 (崔慶翔)
雅號(雅號)는 海月(海月)
活動 期間 1861年 ~ 1897年 陰曆 4月 5日
敎派 東學
隨行 聖職 東學 (現 天道敎 )
稱號 東學 第2代 敎主
稱號 期間 1863年 陰曆 12月 10日 ~ 1897年 陰曆 4月 5日
職業 宗敎人, 敎育者, 思想家, 詩人
前任者 최제우
後任者 손병희
配偶者 初吹 密陽 孫氏
契聚 安東 金氏
三聚 손시화
子女 최덕기(長男)
최윤(딸)
최동희(次男)
최동호(三南)
父母 최종수(簿)
親戚 최익환(孫子)
최진환(孫子)
최옥환(孫子)
정순철 (외손)
최인혜(曾孫女)
최제우 (元隻 族叔父)
손병희 (妻男)
손천민 (同腹 妻조카)
방정환 (査頓 姻戚)
天道敎
主要 人物
최제우   · 최시형   · 손병희   · 박인호
전봉준
經典
東經大全   · 龍潭遺詞
海月神社 法說
義菴成事 法說
敎理
侍天主   · 事人如天   · 人乃天   · 後天開闢
歷史
東學   · 東學 農民 革命
關聯 團體
天道敎 中央摠部
天道敎 淵源會
天道敎維持財團
天道敎청우당
文化遺産
天道敎 中央大敎堂   · 天道敎 任實敎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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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 1827年 ~ 1898年 )은 朝鮮 時代의 宗敎인, 敎育者, 思想家이자 東學 의 第2代 敎主이다. 初名은 輕傷(慶翔), 號는 海月(海月), 本館 慶州 (慶州)이며 慶尙道 慶州 에서 出生하였다. 최종수(崔宗秀)의 아들이다. 먼 一族 叔父이기도 하였던 스승 최제우 가 靑年이었던 그를 거두어 가르친 뒤, 최제우 의 首弟子가 되었고 그의 道脈을 이어 받아 東學의 第2代 敎主로 就任했다. 本名은 최경상으로, 1875年에 이름을 최시형으로 바꾸었다.

生涯 [ 編輯 ]

崔時亨은 일찍이 孤兒가 되어 苦生을 하였으며, 종이 만드는 造紙所(造紙所)에서 일하였다. 1861年 (哲宗 12年) 造紙所를 찾아 온 먼 一族인 최제우 와 世上과 哲學 談論 等을 나누었으며, 그의 弟子가 되어 東學 敎徒가 되었고 1863年 최제우 의 後任으로 第2代 敎主가 되었다. [1] 1864年 朝鮮 政府의 彈壓으로 崔濟愚가 處刑되자 太白山에 隱身하였다가, 뒤에 官憲의 監視를 避해 安東 , 蔚珍 等地로 돌아다니며 布敎에 힘썼다.

1871年 (高宗 8) 이필제 (李弼濟, 또는 다른 이름은 吏筆)가 그의 承諾 없이 敎祖 身元 運動 을 展開하여, 領海 (寧海)에서 이필제의 亂 을 일으켜 東學에 對한 政府의 彈壓이 加重되자 小白山 의 暗窟에 避身하였다. 그 뒤 寧越 을 거쳐 麟蹄 에 가서 《 東經大全 》을 刊行하고, 이어 丹陽 에서 《 龍潭遺詞 》를 發刊하는 等 經典 을 完成하였다. 1884年 甲申政變 으로 政局이 騷亂하여 東學에 對한 彈壓이 緩和되자, 組織 强化에 힘써 六壬制 (六任制)를 確立하고 全國에 六壬소 (六任所)를 設置하여 宗敎로서의 體制를 갖추어 나갔다.

1892年 손천민 (孫天民), 손병희 等의 主張에 따라 忠淸道 觀察使 에게 敎祖의 身元과 布敎의 自由 및 貪官汚吏의 肅淸 等을 要求하는 글을 보냈으나 默殺당하였다. 1893年 흥선大院君 은 東學徒들이 上京하여 景福宮 앞에서 複合上疏運動을 벌이는 機會를 利用하여 이준용 을 王으로 推戴하려 하였다. [2] 精巧 는 1893年 2月 11日 부터 2月 13日 까지 3日間 박광호를 小斗로 하는 約 50名의 東學敎徒들이 上京하여 宮闕 앞에서 敎祖 身元을 歎願하며 連坐示威를 벌인 事件을 大院君이 시킨 일이라고 主張하였다. [2] 이때 精巧 는 大院君이 隱密히 東學黨 數萬 名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張差 不軌를 圖謀하여 그의 孫子 이준용을 (王으로) 推戴하려 했으나 結局 失敗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2] 崔時亨은 전봉준 等이 흥선大院君 等과 謀議하는 것을 否定的으로 評價했다. 大院君에 依해 이용당하리라는 것이 崔時亨의 主張이었다. 그러나 전봉준 은 이 뒤로도 東學農民軍에 對한 支援을 約束하는 흥선大院君 의 말을 信賴하고 그와 連結을 繼續 하였다.

1893年 2月 東學敎徒들은 第2次 身元運動을 展開하여, 박광호(朴光浩)를 疏頭(疏頭)로 하여 各 道의 東學 代表者 40餘 名을 보내어 高宗에게 直接 上疏를 올리고 大闕 앞에서 사흘 밤낮을 痛哭하게 했다. 姑從으로부터 解散을 條件으로 善處를 約束받고 一旦 解散했으나, 施行될 幾微가 보이지 않으므로 다시 第3次 身元運動을 計劃하고 報恩 대도소 (大都所)에 全國 敎徒들의 集結을 命令하였다. 그와 함께 敎祖의 身元과 腐敗 官吏의 處斷 및 宗敎의 自由를 主張하며 斥倭양창의(斥倭洋倡義)의 旗幟를 들고 大大的인 示威를 敢行하려 했다. 이에 唐慌한 朝廷으로부터 派遣된 宣撫使 어윤중 과 面談하여 善處를 約束받고 于先 慶尙道 觀察使 조병식 (趙秉式), 令狀(營將) 윤영기 (尹泳璣) 等 貪官이 罷免되자 自進 解散했다.

그는 모든 運動에서 一切의 暴力 事件을 嚴禁하도록 示達했다. 그러나 1893年 12月부터 1894年 1月에 올린 東學徒 및 農民軍의 상소 中 崔時亨의 彈劾 上疏에 依해 慶尙道 觀察使 조병식 (趙秉式), 令狀(營將) 윤영기 (尹泳璣) 等이 罷職되긴 했으나 以後 高官들은 農民들의 上疏文을 檢閱하였고, 事態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 전봉준 과 그의 一家를 잡아들이고, 全琫準의 父親에게 刑問을 加害 죽게 한다. 1894年 古阜 接主 전봉준 이 農民과 東學徒를 指揮하여 東學 農民 運動 을 일으키자, 初期에는 그러한 暴力 事件에 對해 反對하는 立場을 [3] 取하였다. 나중에 敎主로서 이에 呼應하여 北接(北接) 算學 東學徒를 蹶起시켜, 淸算(靑山)에 集結했다가 회덕(懷德)의 官衙를 襲擊하여 武器를 奪取했으나 官軍과의 衝突을 避해 于先 解散시켰다.

그러나 各地의 官軍을 擊破하여 要求 條件의 理解를 受諾 받고, 東學軍을 解散시켰던 全琫準이 日本軍의 上陸과 政府의 要求 條件 不履行을 理由로 陰曆 9月 다시 氣泡(起包)하자 그도 北接 各地의 接主들에게 總蹶起를 命令하였으며, 10萬 名의 兵力을 引率하여 論山 에서 남接軍(南接軍)과 合勢하였다.

이에 官軍·日本軍의 聯合軍과 公州 에서 싸워 慘敗하고, 論山을 거쳐 長壽 等地에서 連霸하고 嶺東 · 淸州 로 避身했다가 1898年 原州 에서 송경인 (宋敬仁)의 密告로 붙잡혀, 漢陽으로 押送되어 絞首刑 되었다.

죽은 뒤 1907年 高宗 의 特旨로 身元되었다.

崔時亨의 後繼 東學 敎主로는 義菴 손병희 가 이어받아 3代 敎主가 되었으며 後에 東學을 天道敎 로 改名하게 된다.

기타 [ 編輯 ]

이필의 民亂 當時 [ 編輯 ]

崔時亨은 人乃天 思想을 中心으로 平和的인 宣敎와 政治問題에 干涉하지 않는다는 原則을 내세웠다. 그러나 1871年 忠淸北道의 東學 接主 中의 한사람인 이필제가 敎祖의 身元을 名分으로 蜂起하려 하자 崔時亨은 이를 反對하며 勝算이 없을 것이라고 警告를 했다. 結局 이필제의 蜂起軍은 大敗하고 말았다.

東學 農民運動 當時 對應 [ 編輯 ]

第2代 敎主 崔時亨이 이끄는 北接은 남接의 다른 指導者였던 全琫準의 騎兵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다. 최시형 以下 北接 指導部는 布敎의 自由를 얻는 데에만 關心이 있었다. 1次 蜂起 때에도 北接은 參加하지 않았다. [4] 當時에 東學의 主要 指導者였던 오지영의 陳述에 따르면, 崔時亨은 湖南의 全琫準과 湖西의 서장옥은 나라의 逆賊이고 斯文亂賊 이다 라 規定하고, 同時에 남接의 農民軍을 칠 豫定이었다. [5] 當時 남接의 指導者인 김개남 等은 朝鮮 政府를 否定하고 스스로 개남國王(開南國王)이라 稱하였다. 崔時亨은 전봉준 亦是 朝鮮 政府를 否定하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疑心하기도 했다.

남접과 달리 北接은 中農 以上이 많아 改革에 關心이 없었다. [4] 北接의 目的은 최제우 의 名譽 回復과 東學의 布德 自由 許容이 目的이었다. 北接은 最大限 政治的 問題에서 回避하려 했고, 흥선大院君 과의 連結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남接耳 3次 蜂起를 準備하자, 北接은 남접 農民軍을 攻擊하려고까지 했다. [4] 北接은 되도록 政治的 問題에서 回避하려 했다. 그러다가 그해 9月 崔時亨이 弟子들의 懇曲한 說得을 하면서 參與하게 되었다.

日本軍이 官軍과 함께 農民軍을 壓迫하자, 崔時亨 等은 처음에는 協商論人 畫展론(和戰論)을 펼치다가, 마침내 現實狀況의 急迫함을 認識하여 스스로 自身의 主張을 抛棄하고 北接을 全琫準의 武裝鬪爭 路線에 同參시켰다. [5] 人心이 卽 天心이고 이는 天運이 이르는 바이다. 故로 너희들은 途中(道衆)을 動員하여 全琫準과 協力, 이로써 敎主의 怨恨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道의 큰 뜻을 實現시키라! 이로써 孫秉熙 等이 이끄는 北接이 남접과 힘을 합쳐 蜂起 [5] 에 加擔했다.

家族 關係 [ 編輯 ]

  • 父親 최종수(1804~1841)
  • 아내: 密陽 孫氏 (? ~ 1899.10.11.)
  • 딸: ?
  • 딸: ?
  • 딸: ?
  • 아내: 安東 金氏(? ~ 1887. 2. 24.)
    • 아들: 최덕기(德基 솔峯 1875.1.24. ~ 1893.10.15.)
    • 딸: 최윤(潤, 1878 ~ 1956)
  • 아내: 손시화(孫時嬅) - (1964.8.4-1938.3.23.) ( 義菴 孫秉熙 의 누이同生)
    • 아들: 최동희 (1890.1.4-1927.1.26.)
    • 아들: 최동호 (1897-1923.)
      • 孫子 최익환(1913 3.19 ~ 1999 6.14)
      • 孫子 최진환
      • 孫女 최문환
        • 曾孫女 최인혜

崔時亨을 다룬 作品 [ 編輯 ]

TV 드라마 [ 編輯 ]

各州 [ 編輯 ]

  1.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 〈東學革命〉 , 최시형.
  2.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2007.4, 京仁文化史) 315~316쪽.
  3. 신복룡 (2001年 12月 20日). 《韓國史 새로 보기》 初 2刷판. 서울: 圖書出版 풀빛. 168~179쪽쪽. ISBN   89-7474-870-3 .  
  4. 박은봉, 《韓國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3) 259페이지
  5. 양필승, 世界史 속에서 전봉준:韓國民族主義의 形成과 文明史的 危機, 中央日報 WIN, 1996年 7月號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