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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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金開南)
本名 榮州, 東學入道後 개남,
出生 1853年 9月 15日
태인縣 種訟理 지금실
(現 정읍시 산외면 지금실)
死亡 1894年 12月 3日 (42歲)
全州 草綠바위
性別 男性
本館 渡江金氏
別稱 者는 機船, 20代 기범, 個男裝, 個남將軍, 개남國王
職業 勳章, 政治人, 宗敎指導者
宗敎 天道敎 ( 東學 )
家族 김대흠(簿), 7男妹의 3兄弟中 막내
親戚 김시풍(武科及第,全羅監營 令狀)
웹사이트 https://blog.naver.com/sang4323

김개남 (金開南, 1853年 9月 15日 ~ 1894年 12月 3日)은 1894年 東學 農民 宣言 의 指導者이자 革命家로서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사람이다. 敎科書 等에서는 전봉준 , 손화중 과 東學農民軍 3代 指導者의 한 사람으로 紹介하고 있다. 族譜에 실린 이름은 榮州(永疇), 어릴적 이름은 機船(琪先), 成人이 되어 기범(箕範), 本貫은 渡江(道康) 이다. 東學에 入道한 後 東學의 敎理에 따라 太平天國으로 밝은 理想的인 나라를 南쪽으로부터 연다는 뜻으로 號를 개남(開南)으로 定했다. 東學農民革命期에는 김개남大接主, 個男裝(開南丈) 또는 개남將軍(開南將軍)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1]

全州和約以後 全琫準은 금구,원평에 대도소를 設置하여 全羅右道를 號令하였고, 金開男은 南原에 대도소를 設置하여, 茂朱, 鎭安, 龍膽, 長壽, 順天, 落雁, 高興 等을 비롯한 전라좌도를 號令하였다. 또한 金開男은 麾下의 김인배로 하여금 順天에 영호都會所(嶺湖都會所)를 設置하게 하여 河東,眞珠 等 嶺南의 西南部地方까지 그 勢를 떨쳤다. 第2次 蜂起時 全琫準의 東學農民軍은 忠淸監營이 있던 公主로, 金開男의 東學農民軍은 兵營이 있던 淸州로, 손화중의 東學農民軍은 羅州로 進擊하였다. 金開男은 11月 10日 淸州兵營을 攻擊하였으나 日本軍에 敗한 後 진잠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態인 너듸마을(산내면 장금리) 매夫人 서영기 집에 避身해 있다가 林秉瓚의 告發로 12月 1日 황헌주에게 逮捕되어 全州로 移送되었다. [2]

全裸觀察使 이도재 는 金開男의 名聲에 怯을 먹고 電柱에서 서울로 押送하는 일이 危險하다고 느껴 12月 3日 任意로 處刑하고 그 머리만 서울로 移送하여 12月 25日 西小門 밖에 3日間 嚆矢(梟示)되었다. 享年 42歲였다. 王을 中心으로 하는 "輔國安民"을 主張하던 전봉준 等의 勤王主義者와 달리 腐敗한 朝鮮 政府를 否定하고 南쪽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金開男은 革命家였다.

金開男은 1894年 12月 1日 全羅監司 이도재에게 붙잡혀 全州 草綠바위에서 卽決處分되면서 같은 날 붙잡혔지만 서울로 押送되어 日本 工事 等에게 두달 與間의 裁判을 거쳐 空超記錄이 있는 全琫準 等과 달리 記錄이 없다는 理由로 그의 活躍相은 歷史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3] 이처럼 空超 等 記錄이 없다는 理由로 當時 兩班들과 日本軍의 公共의 敵이었던 金開男은 그 後의 記錄을 基礎로 오늘날 "非妥協的 戰鬪的 冒險主義者"로 몰거나 "全琫準 將軍의 手下 人物" 程度로 認識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生涯 [ 編輯 ]

初期 [ 編輯 ]

1853年 (哲宗 4年) 태인縣 산외면(現 井邑市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대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인은 이웃 금구의 원평과 더불어 湖南에서 東學이 가장 그 勢를 떨친 곳이다. 金開男을 爲始로 東學農民革命 當時 24名의 接主가 渡江金氏였다는 點이 이를 나타낸다. 特히 산외면 동곡리는 한때 全琫準이 살았던 곳으로 金開男의 出生地이면서, 이웃 고을 態인 주산리에 최경선, 원평에 金德明과 金開男의 從兄(從兄)인 김삼묵, 김문환 父子 等 東學의 重鎭 人物들이 周邊에 살았던 곳이다. 特히, 金開男이 12살 때 高敞에서 全琫準의 아버지 전창혁은 全琫準을 데리고 같은 마을로 移徙와 訓長을 하였고, 이 때 두살 아래인 전봉준과는 같은 鶴洞으로, 같은 마을의 義兄弟로 親하게 지냈다고 한다. [4]

渡江 金氏의 中農 家庭에서 자란 金開男은 키는 작지만 총명하였고 마을 少年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했으며 말썽꾸러기로 隣近에 所聞이 藉藉했다고 한다. 特히 어린 時節 大多數의 아이들이 수박서리, 닭서리를 하던 것과는 달리 돼지署理까지 했다고 하니 金開男의 通이 얼마나 컷었는지 斟酌할 수 있다. 金開男은 幼年期에 漢學을 修學하였고 兵書를 많이 耽讀했으며 茶山의 牧民心書 , 經世遺表 를 읽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隣近에서 글깨나 읽는 선비집안으로 待接을 받으며 살았다. 金開男은 19歲에 沿岸李氏와 結婚했으나 1年만에 喪妻한 後 任實郡 出身의 全州李氏와 再婚하여 윗只今실로 分家하고, 1男 3女를 둔다. 結婚後 몇年間 任實로 다니면서 얼마間 訓長을 했다고 한다. [5]

東學農民革命 以前 活動 [ 編輯 ]

金開男은 全國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사람들과 親分關係를 맺었고, 當時의 朝鮮社會를 겪으며, 東學의 물결을 經驗한다. 金開男은 언제 東學에 入道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1884年 乃至 1886年 쯤으로 推定된다. 1891年 東學의 2代 敎主인 崔時亨이 全羅道 一帶의 布德을 위해 태인縣에 왔을 때 只今室의 김개남 집에 머물렀고, 金開男은 여름옷 다섯 벌을 지어 올렸다고 한다. [6]

金開男은 1892年 12月 全國의 東學 敎徒들이 全羅道 三禮에서 貪官汚吏 除去와 敎祖 身元 運動을 벌였을 때, 全羅道地方의 接主들과 함께 수많은 敎徒들을 動員하여 卓越한 指導力을 發揮했다. 1893年 3月 忠淸道 報恩 장내리에서 輔國安民과 斥倭羊의 旗발을 내걸고 報恩集會가 열렸을 때 金開男은 全羅道 敎徒를 動員하여 崔時亨으로부터 태인포(泰仁包)라는 佈明을 받았고 同時에 大接主의 臨帖을 받았다. 이때 손병희, 김덕명, 손화중 等 19名도 같이 大接主로 任命된다. 以後 그는 湖南의 接主들과 接觸하면서 現實批判과 社會改革에 뜻을 같이하는 井邑大接主 손화중 (孫化中), 금구(원평)大接主 김덕명 (金德明), 珠算接主 최경선 (崔景善) 等과 緊密한 關係를 維持했다. [7]

全羅道 一帶에 東學이 퍼져 나가던 그 때의 狀況을 當時의 漢學者인 黃玄은 《 오하기문 》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敵(東學農民革命軍)이 지난날 고부에서 처음 일어났을 때 그 우두머리들은 態인 사람이 많았다. 이런 까닭에 全羅左,우도에서 태인접은 接主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優待를 받았으며, 다른 地域의 接主들은 모두 태인이라는 呼稱을 부러워하였다 . [....] 全琫準과 김기범(김개남)의 나이는 모두 마흔 살쯤되었다. 기범의 집안은 態인 地方에서 몇臺에 걸친 土豪였던 까닭에 그 地方 사람들은 이들 집안을 '渡江 金氏'라고 불렀다. 詩風 또한 이들과 한 집안 사람들이다. 기범의 사람됨은 陰險하면서도 意志가 굳은 面이 있어 자못 武力으로 사람들에게 굴림하였다. 그리하여 亂이 일어났던 初期에 그 집안 사람들은 大部分 그를 따라 亂에 參與하게 되었으며 渡江 金氏 中에 接主가 스물 네名이나 되었다 . 기범은 스스로 꿈에 神靈이 나타나 손바닥에 '개남(開南)' 두 字를 써 주었다고 말하면서 '개남'을 號로 삼았다. 이렇게 되어 태인은 敵의 巢窟이 되어 財物이 山처럼 쌓이고 집집마다 4~5 마리의 말을 길렀으며 [....] 집집이 銃을 쌓아 두었는데 적은 境遇라도 10餘 자루가 되었다.


第1次 蜂起 [ 編輯 ]

1894年 , 1月 10日 말목場터에서 東學 農民革命軍 은 擧兵하여 고부官衙를 襲擊하여 全琫準의 아버지 전창혁을 救出하고, 武器를 押收하였으나, 趙秉甲을 逮捕하지 못한다. 전창혁이 出所 3日만에 死亡하자 全琫準과 함께 金開男은 김낙삼 · 김문행 等 1,300餘 名을 이끌고 古阜 白山 에 모인 뒤 農民戰爭의 本部인 湖南倡義所(湖南倡義所)를 設置, 全琫準, 손화중, 金開男의 이름으로 창의문을 發表한다. [7]

以後 東學農民革命軍은 全羅觀察使 김문현이 보낸 官軍 千餘名과 싸운 황토현 戰鬪에서 4月 7日 勝利한다. 이 勝利로 東學農民革命軍의 威勢에 危機를 느낀 政府는 長通位이며 淸州兵士인 洪啓薰을 양호초土沙로 任命하고 壯衛營의 兵丁을 輕軍으로 命한다. 全州에 到着한 洪啓薰은 全羅監司 김문현으로부터 그間의 狀況을 듣고 令狀 김시풍과 幹部 金永培 等 金開男과 親한 12名을 東學軍과 協助했다는 理由로 草綠바위에서 4月 10日 梟首한다. 김시풍은 渡江金氏로서 金開男이 그의 族姪이다.

4月 23日 精誠 황룡촌에서 洪啓薰의 京軍과 東學革命軍의 戰鬪에서 또다시 東學農民革命軍이 勝利한다. 以後 破竹之勢로 東學農民革命軍은 前進하여 4月 27日 전주성을 占領한다. 4月 8日 김문현 全裸觀察使가 罷職되고 새로 任命된 김학진 觀察使는 全州에 赴任하지 못한 狀態였다. 全州城이 陷落되었다는 報告를 받은 朝廷은 4月 29日 淸나라에 派兵을 要請하고 이는 日本軍을 끌어들이는 契機가 되었다. 東學農民軍과 官軍間의 일晉 日退가 거듭되는 가운데, 靑軍과 倭軍이 들어오는 狀況이 되자, 全琫準과 金開男은 討伐 責任者인 홍계훈 과 妥協해 東學徒 를 迫害하지 않을 것과 執綱所를 設置할 것을 合意한다.


執綱所 時期 [ 編輯 ]

執綱所 設置와 閉廷改革案에 對해 全裸觀察使 김학진으爐터 署名을 받은 全琫準과 金開男은 全羅道를 右道와 左道로 나누어 號令했다. 卽 全琫準은 금구, 원평에 대도소를 設置하고 全羅右道를 號令하고, 金開男은 南原에 대도소를 設置하고, 武裝, 淳昌, 鎭安, 長壽, 용담, 順天, 落雁, 高興 等 전라좌도를 號令했다. 이렇게 全羅道 53個 郡縣에 모두 執綱所를 設置하였다.이는 우리나라 最初의 近代 民主自治行政의 始作 이라고 할 수 있다. 當時 個男裝의 影響力이 미치는 전라좌도 地域에서는 治安確立이 잘 되어 犯罪가 줄어들자 百姓들의 稱頌이 대단했다고 口傳되고 있다.

"全琫準은 數千의 무리를 거느리고 금구원평에 雄據하면서 全羅右道를 號令하였으며, 金開男은 數萬의 무리를 거느리고 남원성에 雄據하면서 전라좌도를 統轄하였다." [8]

金開男은 南原에 據點을 定한 直後부터 積極 勢力을 擴張했다. 全羅左道의 境界를 넘어 慶尙道 涵養과 眼醫까지 勢力圈을 擴大하려고 하였다. [9] 또한 麾下의 김인배를 順天에 보내 영호大會所를 設置하게 하여 慶尙道 河東, 晉州까지 進出하였다. 이처럼 金開男의 名聲은 慶尙道까지 傳해졌다.


第2次 蜂起 [ 編輯 ]

2次 蜂起를 처음 試圖한 大接主는 남원대都所에서 全羅左道를 이끌던 김개남이었다. 梅泉 黃玹은 [오하기문]에서 1894.8.19.南原에서 氣泡 決意를 하였다고 記錄하고 있다. 日本軍이 景福宮을 奇襲(7.23)한지 한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全琫準은 8月 25日 南原으로 金開男을 찾아와 淸日戰爭의 판세나 變化를 기다려보자고 하였고, 金開男은 조기蜂起를 主張한다.

" 奉遵 : 只今의 情勢를 살펴보면 日本과 淸나라가 繼續하여 戰爭中에 있지만 어느 쪽이 勝利하든 틀림없이 軍隊를 옮겨 먼저 우리를 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비록 人員數는 많다고 하나 烏合之卒에 不過하므로 쉽게 무너져 우리들이 所望하였던 것을 끝내 實現할 수 없게 될 것이다. 事情이 이러하니 歸化한다는 名分으로 各自 四方으로 흩어져 狀況의 變化를 지켜보는 便이 더 낫겠다." " 개남 : 大衆은 한番 흩어지면 다시 모이기 어렵다 ." [10]


그런데 보름 後 금구 원평에서 事態를 지켜보던 全琫準은 9月 10日 裁縫機를 決定한다. 三禮에 대도소를 設置하고 4千餘 名의 東學農民軍을 집결시켰다. 그러나 東學農民軍은 곧바로 서울로 進擊할 수 없었다. 蜂起를 願하지 않았던 北接의 消極的인 態度와 남接의 强勁한 立場 間의 葛藤 때문이었다. 南-北接 間의 葛藤은 한 달이라는 時間을 虛費하게 만든다.척양척왜(斥洋斥倭)의 旗발을 들고 일어선 農民軍에게 이것은 後日 돌이킬 수 없는 悔恨으로 남는다. 한 달이 지난 10月 12日 全琫準은 三禮를 出發하여 論山으로 北上한다 . 그리고 北接의 孫秉熙와 聯合戰線을 펼치며 公州 攻擊(우금치 戰鬪)을 敢行했으나 피로 물든 언덕만을 남기고 失敗하였다.

金開男 部隊는 全琫準이 北上한 이틀後인 10月 14日 南原을 出發, 任實을 거쳐 全州에 들어갔다 . 當時 記錄에 依하면, 全州로 向하는 金開男 部隊에는 “總統을 맨 自家 8千餘 名이요, 그 길이가 百餘 里에 걸쳐 있었다 ”고 할 程度로 큰 軍勢를 자랑했다. 10月 16日 全州에 到着한 金開男은 고부郡守 양필환, 南原府使 이용헌, 順天府使 이수홍 等을 苛斂誅求의 嫌疑로 處斷하였다. 以後 10月 23日 當時 東學農民軍에 가장 反撥이 甚했던 錦山을 占領하고, 11月 10日 진잠을 거쳐, 11月 11日 회덕 신탄진 占領, 11月 13日 새벽에는 회덕과 問議 方面에서 청주성을 攻擊하였다.

記錄에 依하면, 當時 신탄진 方向에서 청주성 攻擊에 나섰던 金開男 部隊는 約 萬 五千 名 程度 되었고, 問議 方向의 金開男 部隊는 서장옥 等 北接 農民軍이 合勢하여 萬餘 名쯤 되었다고 한다. 金開男의 淸州 兵營 攻擊은 日本軍의 火力앞에 失敗하였다.


逮捕와 最後 [ 編輯 ]

金開男은 日本軍에 敗하여 진잠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態인 너듸마을(산내면 장금리)에서 매夫人 서영기 집에 避身해 있다가 林秉瓚의 告發로 12月 1日 황헌주가 이끌고 온 70餘名의 官軍에게 逮捕되어 全州로 押送되었다. 政府에서는 論功行賞으로 임병찬에 任實郡數를 除授했으나 임병찬은 이를 辭讓했고, 임병찬 代身 황헌주를 任實郡數로 除授했다. 官軍은 東學農民軍의 强勁派 第1巨頭인 金開男을 逮捕하자 逃避憂慮가 있다는 理由로 卽時 捕縛하였다. 그리고 황소 달구지에 위에 태운뒤 열 손가락에 大못을 박았다. 게다가 소나무 서까래로 金開男을 뺑 둘러 엮어 놓고 脫出하지 못하게 짚둥우리를 서까래 이에 덮어 씌었다고 한다. 그가 잡혀 全州監營에 끌려갈 때, 消息을 들은 百姓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많은 軍事 어디다 두고 짚둥우리에 묶여 가다니 그게 웬 말이냐''' .

全羅監司 이도재는 金開男을 全州로 押送한 뒤, 이대로 漢陽까지 押送될 境遇 中途에 脫走할 憂慮가 있고, 百姓들이 많이 몰려들어 다시 東學亂이 發生될 憂慮가 있다는 理由로 金開男을 卽決 處刑시켰다. 그 때의 光景을 梅泉 黃玹은 이렇게 傳하고 있다.

倒載는 마침내 亂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敢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卽時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內臟을 끄집어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普通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怨恨을 가지고 있는 者들이 다투어 內臟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祭床에 올려놓고 祭祀를 지냈으며 그이 머리를 箱子에 넣어서 大闕로 보냈다 .

?  黃玹 , 《 오하기문

그의 需給(首級)은 漢城府로 移送, 12月 25日 西小門 밖에서 3日間 내걸렸다가 以後 南部 各 地方에 조리돌렸다고 한다.

金開男에 對한 處刑이 있은 後 日本公使와 朝鮮政府 사이에는 한때 波紋이 있었다. 日本公使 이노우에는 1894年 12月 27日 朝鮮政府에 書翰을 보내 비도(농민군)의 處刑은 愼重을 期해야 하며 逮捕된 匪徒들은 淨土臺(征討隊) [11] 에 넘겨 處理토록 하라고 要求하였다. 이럼에도 不拘하고 全裸觀察使가 金開男을 地方에서 單獨으로 處刑하자 日本公使는 朝鮮政府에 全羅監司를 불러들여 그 까닭을 嚴重히 調査하여 알려주고 그에 對한 處分 問題는 共同으로 相議 하자고 要求해 왔다. 難處하게 된 朝鮮政府에서는 經緯를 解明하고 그에 對한 處分을 할 것이니 불러들여 調査하는 것만은 再考하여 달라고 要請하여 艱辛히 謀免하고, 이도재는 減俸 3個月의 懲戒를 받았다고 한다.

영호大接主 김인배 [ 編輯 ]

全羅左道의 執綱所 統治를 指揮했던 김개남(金開南)은 智異山 너머 慶尙道 一帶에 執綱所를 設置하려 努力했다. 그리하여 部下인 김인배 (金仁培)를 영호大接主라는 職銜을 주어 順天地域으로 내려보냈다. 곧 김인배를 嶺南과 湖南 아래 地域의 最高 頭領으로 임명한 것이다. 김인배는 금구 出身으로 金德明의 麾下에 있던 24歲의 熱血 靑年이었는데, 戰鬪에서 그 能力을 높인 산 金開男이 麾下로 끌어 들인 것이다. 그는 영호大接主로서 順天에 接所를 차리고 執綱所 活動을 展開했다. 그에 對해 農民軍 討伐隊長이었던 이두황은 “지난해 6月 以後 금구의 도둑 우두머리 김인배가 이끄는 무리는 여러 地域에서 모인 10萬名이었다”면서 “順天 城中에 들어와 영호都會所를 設置하고 官家의 武器를 거둬들이고 남의 돈과 財物을 빼앗으면서 敢히 郡守(軍需)라고 일컬었다”고 報告했다.

김인배는 直系 農民軍을 거느리고 現地 農民軍의 協力을 얻어 蟾津江을 넘어 河東 眞珠를 席卷했다. 晋州는 南海地帶의 要衝地로 兵營을 두었는데 김인배가 이끄는 農民軍의 손에 陷落되었다. 日本軍과 官軍이 釜山에서 派遣되어 蟾津江으로 밀려오자 河東 麗水 光陽에서 熾烈한 戰鬪가 벌어졌다. 김인배는 마침내 光陽에서 잡혀 머리가 잘려 죽었다.

김인배의 아내는 男便의 죽은 날을 몰라 祭祀를 지낼 수가 없었다. 그女는 떡시루에 흰 쌀가루를 깔고 每日 아침 들여다보았는데 12月 9日 쌀가루에 새 발자국이 뚜렷이 나타나서 祭祀날로 定했다 한다 [12] . 이 말대로 김인배는 12月 9日 죽음을 當했다.

김인배는 죽음을 앞두고, 同行했던 妻男 조氏에게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한다.

丈夫가 나서 죽을 자리에서 죽음을 얻는 것은 떳떳한 일이요. 다만 뜻을 이루지 못함이 恨이로다. 나는 함께 살고 함께 죽기를 盟誓한 同志들과 最後를 같이할 것이니 그대는 집으로 돌아가 父母를 奉養하라.

東學農民革命 以後 [ 編輯 ]

김인배의 境遇처럼 많은 後孫들은 農民軍들의 屍體를 찾지 못해 故人이 쓰던 用品이나 나무 人形을 만들어 묻는 家廟(假墓)를 만들고 받들었다. 문경에서 農民軍의 家廟를 發掘하여 나무 人形의 痕跡을 찾아낸 적이 있었다. 또 賂物을 쓰거나 줄을 大暑 잘린 머리를 찾아 缸아리에 담아 墓地에 묻기도 했다.

東學農民戰爭에는 農民軍 1百萬名이 參與했고 10萬名이 죽었다고 한다. 日本은 淸日戰爭 때부터 朝鮮에 唯一하게 憂慮되는 것은 東學農民軍이 背後에서 攻擊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따라서 日本의 베테랑 正規軍인 第19大隊를 動員하여 東學正土臺를 構成, 모두 射殺하도록 命令했고, 實際로 東學農民革命 當時부터 그 以後까지 東學農民軍을 繼續해서 죽이고 彈壓했다고 한다.

當時 살아남은 東學農民軍들은 山속이나 섬으로 逃亡해 몸을 숨겼고 죽음을 면한 妻子息은 財産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當事者나 家族은 살아가면서 決코 農民軍에 加擔한 事實을 가슴에 묻어두고 말하지 않았다. 逆賊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東學農民革命 戰爭에서는 敗했지만 最後까지 抗爭의 脈을 이어간 部隊는 바로 김개남포라는 事實에 異議가 없다. 東學農民革命 以後 義兵戰爭, 3.1萬歲運動,光州學生運動, 4.19革命, 그리고 光州民主化抗爭과 6月抗爭 等 歷史의 滔滔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 [13]

爭點과 論難 [ 編輯 ]

金開男과 全琫準은 어떤 關係였나 [ 編輯 ]

  전봉준 共初에 따르면 全琫準은 金開男에 對해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金開男은 내가 王사(王事)에 協力하자고 勸告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처음에는 相議한 바가 있었지만 끝에는 決斷코 相關하지 않았다. [7]
 
— 전봉준, 〈 全琫準空超 (全琫準供草)〉

全琫準이 裁判을 받는 過程에서 얘기한 이 內容 때문에 두사람의 關係가 좋지 않다고 보는 視角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學者들은 두 사람間의 關係를 다양하게 解釋하고 있다. 第2次 東學農民革命 戰爭過程에서 全琫準과 金開男의 關係에 對해서 提起되는 다양한 主張을 살펴본다. 이이화, 右尹, 조경달은 葛藤關係路로 보았고, 신용하, 박찬승은 協力하기 어려운 關係라고 보았으며, 정창렬, 이진영, 이병규 等은 戰略的 協力關係를 形成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金開男과 全琫準은 正말 어떤 關係였을까?


같은 마을에 산 義兄弟 [ 編輯 ]

全琫準은 1855年에 全羅道 高敞 黨村에서 태어났다. 全琫準이 열살 때쯤 勳章인 아버지 전창혁을 따라 金開男이 살던 태인의 只今실로 移徙했다. 이때부터 約 4年間 全琫準과 金開男은 한 마을에 살게 된다. 金開男은 全琫準보다 두 살 위였고, 또 只今室에는 金開男의 집안인 渡江 金氏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리고 金氏들은 먹거리는 떨어지지 않을 程度의 中農들이었다. 이와 달리 全琫準의 집안은 외톨이인데다가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한다. 이들은 한 洞네에 살면서 전창혁 勳章의 鶴洞으로, 義兄弟로 自然스레 親分을 맺었다. 全琫準은 그 後 只今실을 떠나 이곳저곳 옮겨 살다가 東學農民革命이 일어나기 數年 前에 古阜 組소리에 자리를 잡았다. 記錄에 따르면, 金開男의 仲媒로 全琫準의 큰 딸 전옥례는 지금실의 강만복과 結婚해서 金開男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 이런 點으로 보아 全琫準과 金開男은 어릴때 因緣을 맺은 後부터 서로 往來하고 親分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結局 두 사람은 世上을 한 番 뒤집어 엎을 計劃을 머리를 맞대고 짜냈던 것으로 보인다.


全琫準과 金開男은 함께 제1차 東學農民革命을 일으켰다! [ 編輯 ]

1894年 1月 全琫準의 아버지 전창혁은 다시 赴任한 고부郡守 趙秉甲에게 끌려가 苦楚를 當한다. 외아들에 一家 親戚도 없던 全琫準은 義兄弟이자 태인의 東學待接主人 金開男을 찾아가 아버지 救出을 論議했다. 두 사람은 1月 10日 말목場터에 모여 蜂起를 일으켜 아버지룰 救出하고, 貪官汚吏 고부郡守 趙秉甲을 懲討했다. 이 後 金開男과 全琫準은 손화중, 金德明 等과 聯合하여 白山에 東學農民軍 倡義所를 세우고 창의문을 發表한다. 이들은 4月 7日 황토재에서 全羅監營軍에 勝利하고, 이어서 4月 23日 將星 황룡촌에서 洪啓薰의 京軍에 勝利한 後 全羅道 一帶를 席卷하며 4月 27日 전주성까지 占領했다. 全州城에서 京軍과 다시 맞붙어 여러 날 싸움을 벌였는데, 農民軍에게도 많은 被害가 있었다. 官軍과 東學農民軍은 5月 7日 이른바 全州和約을 맺고 全琫準과 金開男의 東學農民軍은 電柱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各 地域에 執綱所를 두고 東學農民軍 스스로 行政을 맡아 다스렸다.

全琫準과 金開男은 이 무렵부터 方向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全琫準은 一旦 全州에서 물러났다가 뒷날 機會를 엿보아 再起하자는 主張을 폈고, 金開男은 내친걸음에 서울로 쳐 올라가야 한다는 强勁論을 편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金開男은 强勁派, 全琫準은 穩健派로 指目된 것이다.


裁縫機 卽, 2次 東學農民革命을 함께 일으키다 [ 編輯 ]

처음 裁縫機를 主張한 것은 김개남이었다. 全琫準은 8月 25日 南原으로 金開男을 찾아와 裁縫機를 挽留했다. 그러다가 9月 8日 裁縫機를 決定한다. 9月 8日 再蜂起 決定後 全琫準은 금구 都會所 麾下 農民軍을 武裝시켜나갔다. 9月 9日 農民軍을 高山에 보내 軍器와 物品을 가져오게 했고, 10日에는 태인官衙로 軍需米와 軍需錢을 금구원평 都會所로 보내도록 四通을 보냈다. 이어 10日과 13日에는 三禮 農民軍이 여산의 火藥, 銃알 等을 빼앗아 갔고, 14日엔 全琫準이 直接 800名을 거느리고 三禮에서 와서 全州의 火砲, 彈丸 等을 거두어 갔으며 16日엔 農民軍 100餘名이 위봉산誠意 武器를 거두어 갔다.

같은 時期에 김개남度 裁縫機와 關聯하여 準備를 한다. 9月 8日 김개남 麾下의 農民軍은 五方을 나타내는 旗발 8000餘個를 새로 만들었고, 脯를 쏘며 忌祭를 올려 出戰儀式을 했다. 金開男은 15日 以前부터 南原大道所 또는 南原大道所金開男의 이름으로 南原, 능주, 光州, 谷城 等에 通文을 보내 軍需米와 軍需錢을 確保하였다. 全羅監司 김학진에게도 軍需物資를 보내라고 通文을 보냈다. 9月 17日에는 直接 南原 官衙의 軍紀를 빼앗는 한便, 民家에서 物資를 거두어 장태, 火藥, 수레 等을 만들었다.

이러한 事實로 볼 때 全琫準과 金開男은 서로 合意下에 9月 8日 以後 本格的으로 再蜂起할 채비를 했음을 알 수 있다.


全琫準과 金開男은 서로 協議下에 裁縫機를 하였다 [ 編輯 ]

全琫準이 9月 12日 裁縫機를 했는데, 金開男은 參與하지 않고 한달 後에 따로 움직였다는 主張이 있다. 그러나 이는 事實과 다르다. 全琫準은 9月 初 裁縫機를 決定하고 三禮에서 蜂起한 後 本格的인 北上은 10月 12日 이었다. 全琫準은 北上이 늦어진 理由에 對해 " 몸이 아프고 또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움직이기 어려웠고 겸하여 新曲이 나오지 않아 自然히 10月에 이르렀다 "고 [全琫準空超]에서 밝히고 있다.

또 다른 理由는 忠淸道 一帶 東學農民軍, 卽 北接의 合流를 기다린 것도 큰 要因이었다. 崔時亨이 蜂起를 許諾한 事實이 10月 11日頃 全琫準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全琫準은 4000餘名의 東學農民軍을 이끌고 三禮를 出發하여 10月 12日 論山에 到着하였다. 孫秉熙가 이끈 東學農民軍은 報恩에서 出發하여 15日頃 論山에 合流하였다.

한便, 金開男은 거의 같은 때인 10月 14日 8000餘名을 이끌고 南原을 떠나 16日 全州에 到着하였다 . 또한, 손화중,최경선은 光州와 羅州로 가서 海路를 통한 挾攻에 對備하였다. 이처럼 10月 中旬에는 實質的으로 全羅道와 忠淸道 一帶의 東學農民軍이 總動員되어 武力蜂起할 수 있는 體制가 完成된 것이다.


全琫準은 公州監營 攻擊, 金開男은 淸州兵營 攻擊 [ 編輯 ]

이러한 東學農民軍의 一致된 戰略은 北上과 攻擊過程에서도 立證된다. 全琫準과 孫秉熙는 10月 21日頃 論山을 出發하여 公州監營으로 向한다. 異人(23日), 哮咆(24日), 能治(25日)에서 前哨戰을 벌였다. 이때 金開男은 미리 全琫準과 協議한 대로 淸州兵營으로 北上 中 10月 24日 錦山을 占領한다. 또한 손화중은 羅州를 攻擊하였다.

이어서 全琫準과 孫秉熙가 11月 8日~10日 公主를 攻擊할 때, 金開男은 5000餘名을 이끌고 北上하여 11月 10日 진잠을 占領하고, 11日 회덕.신탄진을 經由하여 13日 淸州를 攻擊하였다. 이때 淸州 地域의 서장옥 東學農民軍이 合勢하였다.

이처럼 金開男과 全琫準의 實際 北上 시키는 2~3日 差異로 서로間 緊密한 協議下에 進行된 것으로서, 보기에는 비록 量子의 攻擊方向은 달랐지만 東學農民軍의 戰略的 必要에서 온 것이라는 主張이 있다.


全琫準의 公主 攻擊時, 金開男이 淸州를 攻擊해야 할 理由는 무엇일까? [ 編輯 ]

첫째, 淸州는 公主와 함께 서울로 가는 主要通路이다. 日本軍 淨土代가 南下하면서 西쪽으로 公主路線(서로軍), 東쪽으로 大邱兵站路線(東로군), 中央으로 淸州路線(中央軍, 本隊)의 3路를 取하여 내려온데서도 알 수 있다. 둘째, 當時 全羅道와 忠淸道에서 農民軍에게 陷落되지 않은 곳은 충청감영人 公主와 兵營人 淸州 뿐이었다는 點이다. 따라서 서울로 가려는 東學農民軍으로서는 公州監營과 함께 淸州兵營을 占領할 必要가 있었던 것이다. 셋째, 東學農民軍은 公主攻擊에 參與하지 못한 一團의 東學農民軍을 합류시켜 前歷을 擴大할 必要가 있었다. 卽 報恩의 손병희 側 東學農民軍은 論山의 전봉준 軍에 合流하여 公主를 攻略한다. 그런데 9月 23日부터 淸州를 威脅하던 서장옥의 東學農民軍과 沃川,嶺東,問議 等 淸州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東學農民軍이 淸州 攻掠에 參與한 것이다. 넷째, 淸州攻擊은 東學農民軍의 勢力擴大를 의미함과 同時에 官軍과 日本軍의 戰鬪力이 公主로 集結되는 것을 豫防하는 方便이기도 했다.

이처럼 9月 裁縫機는 全琫準과 金開男, 손화중의 全羅道 東學農民軍과 손병희 및 서장옥의 忠淸道 東學農民軍이 一致된 戰略 속에 치룬 總力戰이었다.


金開男과 林秉瓚의 眞實 [ 編輯 ]

金開男을 密告하여 逮捕하게 만든 이가 金開男의 親舊이자 義兵將 임병찬이다. 金開男은 日本軍에 敗하여 진잠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態인 너듸마을(산내면 장금리) 매夫人 서영기 집에 避身해 있다가 林秉瓚의 告發로 12月 1日 强化兵房 황헌주에게 逮捕되어 全州로 移送되었다. 金開男은 態인 너듸마을의 매夫人 서영기 집에 潛居해 있었는데 이웃 種訟理 林秉瓚이 김종섭을 시켜 송두용 집으로 誘引했다. 그것은 種訟理는 회문산의 地脈으로 너듸마을 보다 險하고 높은 곳에 位置하여 있으니 더욱 安全한 곳으로 와 있으라는 것이었다. 임병찬은 金開男을 誘引해 놓고 김송현, 임병욱, 송도용을 시켜 全羅道 觀察使 이도재에 告發하니 이도재는 황헌주로 하여금 强化甁 80名을 거느리고 種訟理에 와서 12月 1日 새벽 金開男을 잡아갔다.


大河小說 《토지》의 김개주의 모델은 김개남 [ 編輯 ]

박경리의 大河小說 ‘ 土地 ’에는 600餘 名의 人物이 登場한다. 이中 ‘김개주’는 中人出身으로 壓制者의 목을 秋風落葉같이 날려버린 東學 義兵將이자 상민의 英雄이며, 신비로운 모습으로 表現된다.

박경리 大河小說 ‘토지’ 人物辭典을 펴낸 한국방송대 이상진 敎授는 著書에서 ‘토지 김개주’라는 人物을 이렇게 評했다.

김개주는 歷史上의 實存人物인 東學軍 長壽 金開男을 모델로 한 人物이다 . 兄인 우관禪師가 있는 鷰谷寺에 休養次 와 있는 동안 그곳에 불공드리러 온 尹氏 夫人을 劫奪해 아들 김환을 얻는다. 後에 革命의 虛無感과 常民에 對한 不信을 가지고 있었음이 아들인 김환의 回想을 통해 드러난다. 東學亂이 鎭壓된 後 全州 監營에서 梟首당한다.

이 作品은 5代째 大地主로 君臨해오던 崔參判 宅에서 며느리인 別堂아씨가 下人 九千(一名 김환)과 눈이 맞아 도망친 데서 始作한다.

特히 土地의 1部가 東學農民革命의 失敗로부터 始作되고 ‘김개주’의 아들 ‘句踐’(김환)에 對한 事實이 밝혀지면서 興味를 더함에 따라, ‘토지’에서의 김개주의 比重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있다. 東學農民革命이 失敗로 돌아간 後 金開男의 東學農民軍 加擔者들은 暴徒나 反逆者로 찍혀 숨어 살다가 乙未事變과 斷髮令에 激忿해 일어난 義兵運動에 參與하였고, 以後 抗日運動과 武裝 獨立運動으로 發展해 나갔다는 것이 作家가 김환의 삶을 통해 照明하고자 한 意圖로 보인다.

土地의 作家 박경리는 어린시절 統營에서 보내면서 金開男에 對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고, 그래서 그 분에 對한 이야기를 썼으며, 金開男은 世界的 革命家로서 後輩 作家들에게 作品化를 勸告하기도 했다고 한다.


金開男과 東學 [ 編輯 ]

東學의 2代 敎主 崔時亨이 布敎를 위해 全羅道를 巡廻하던 中 態인 지금실의 김개남 집에서 約 15日間 묶었고, 이 當時 金開男은 옷 5벌을 지어 바쳤다고 한다.

金開男은 忠北 報恩 身元集會時 崔時亨으로부터 태인 大接主의 命을 받게 될 만큼 東學에서의 位置가 公告했다. 金開男과 더불어 東學農民革命에 參與한 渡江金氏 接主가 24名이나 된다는 것은 그의 位置를 더욱 實感하게 한다.


김개남,全琫準과 大院君과의 關係 [ 編輯 ]

2차봉기와 關聯하여 "大院君 四柱論"과 "自發的 蜂起론"으로 見解가 對立되고 있다. '大院君 四柱論"은 李相伯, 유영익 等이 主張하고 있고, "自發的 蜂起론"은 정창열, 신복룡, 서영희, 김養殖, 배항섭 等이 主張하고 있다.

흥선大院君 을 만났던 東學軍 指導者들 中 전봉준 을 비롯한 大多數는 大院君과의 만남 事實을 끝까지 自白하지 않고 처형당하였으나, 그는 死刑당하기 直前 흥선大院君 을 만났다고 陳述하였다.

李相伯 에 依하면 '大院君은 全琫準의 妻族 8寸이자 全州大道所 度집醬 송희옥을 先攻注射로 任命하고 大院君의 側近인 박동진 정인덕 은 이 송희옥과 接線하여, 全琫準에게 密旨(密旨)를 보내 大院君의 뜻에 따라 再蜂起할 것을 注文하였던 것이다. [14] 김개남에게는 大院君의 孫子 이준용 을 통하여 全 承旨 李建榮 과 接觸하고 李建榮은 金開男을 만났다. 이에 全琫準, 金開男이 積極 呼應하였다는 主張이 있다.

逮捕된 以後 裁判過程에서 全琫準은 이를 否定하고 있으나 金開男은 全裸觀察使 이도재가 國文하자 大院君의 指示에 依한 것이라고 高喊을 치자 處刑한다. [15] ' 이처럼 金開男을 卽決處分은 한 것은 金開男의 部下들이 그를 脫出하게 할 수 있다는 憂慮였다는 主張과 함께 興宣大院君과의 關係를 숨기기 위해 이도재가 卽時 處刑했다는 說이 있다.


王朝 打倒 또는 새 王朝 建設 疑惑 [ 編輯 ]

스스로 개남國王(開南國王)이라 稱하고 朝鮮 의 李氏 政府를 打倒하자는 强勁論的 主張을 했다는 疑惑이 있다. [16] 그런데, 最近 金酸素模寫로 任命된 조시영이 1894年 11月 21日부터 1895年 1月 22日까지 各級 機關과 주고받은 公文을 날짜別로 記錄해 놓은 資料인 [消耗事實]李 發見되었다. 金酸素毛穎에서 乙未年 正月 6日 議政府, 軍務衙門, 內務衙門에 보낸 報告書에 따르면, 김산과 關聯하여 東學農民軍을 逮捕하고 處理하는 內容을 詳細하게 記錄하고 있다. 그런데 이 內容 中에 特히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個남의 處所로 보낸 臣下라고 일컫는 小草(疏草)’ 라는 대목이다.

이는 臣下로서 金開男에게 보내기 위해 作成한 上訴의 草案이라는 意味이다. 이는 于先 全羅道 南原에 있던 金開男의 東學農民軍과 慶尙道 金泉의 東學農民軍이 매우 깊게 連結되어 있다는 點을 보여준다. 그리고 金開男이 王을 自處했다는 主張이 많은데 이를 뒷받침해주는 證據가 되기도 한다. 全羅道와 慶尙道 連結程度, 그리고 金開男의 性格 等을 硏究하는데 있어서 重要한 根據資料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7]

金開男의 名聲을 들은 慶尙道 김산의 한 儒生은 金開男이 王을 稱하고 南原을 占據하고 있다는 말을 記錄으로 傳하고 있다.

"김기범이란 者가 개남王이라며 僭稱하고 남원부를 分割하여 占據하였다고 한다."

家族 關係 [ 編輯 ]

  • 아버지 김대흠(金大欽)(1817 ~ )과 어머지 益山 李氏: 3男 4女 둠
    • 兄: 김영백(金永百) [18]
    • 兄: 金映洙(金永秀) [18]
  • 첫째夫人: 沿岸李氏, 16歲인 1868年 한 살 아래인 15歲의 沿岸 李氏와 結婚, 1869年 7月 25日 傷處(子女 없음)
  • 둘째夫人: 이 後 세살 아래인 全州 李氏와 再婚하여 1男 3女를 두고, 夫人은 90歲까지 生存하였다.
  • 아들 김백술(金伯述)(? ~ 1952): 慶州金氏와 結婚하여 2男 5女를 둠
    • 孫子 김환옥(金煥?. 1919 ~ 1997): 4男 4女 둠. 상기(호영,戶主), 腫氣(호진), 定期(승민), 진기
    • 孫子: 김환섭: 2男2女를 둠. 人氣, 대완
    • 孫女(5): 孫壻: 김일덕, 정관택(胎氣, 태수), 이경진, 송영록, 이대우(김오례- 商術, 相國, 常數)

關聯書籍 및 論文 [ 編輯 ]

  • 박경리, [토지]
  • 김기전, [다시 쓰는 東學農民革命社], 圖書出版光明, 2005年
  • 金善東, [念佛처럼 서러워서], 작은숲, 2014年 :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245-267쪽
  • 박준성, [勞動者 歷史 이야기], 2009年 : 같은 時代, 다른 삶 - 김개남, 黃玹, 이기 223쪽
  • 신영복, [邊方을 찾아서], 2012年
  • 신정일, [똑바로 살아라- 신정일이 쓴 朝鮮의 進步主義者들], 茶山草堂,[2008] :새로운 南朝鮮을 열어젖히리라." 열 番째 進步主義者 김개남 = 281
  • 신정일, [韓國史, 그 變革을 꿈꾼 사람들], 이학사, 2002年 :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東學의 指導者, 김개남 293-318쪽
  • 신정일, [오직 正義], 판테온하우스, 2017年: 새로운 世上을 向한 民衆의 꿈, 김개남 236-252쪽
  • 신정일, [甲午東學農民革命踏査記], 푸른領土, 2014年: 처음부터 끝까지 革命家였던 김개남 173-190쪽
  • 이덕일,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한겨레출판사, 2008年: 김개남- 새로운 南朝鮮을 開創하다,
  • 全北史學會, [東學農民革命의 記憶과 歷史的意義], 全北史學會.井邑市, 2011年
  • 박맹수, [開闢의 꿈, 東아시아를 깨우다], 모시는 사람들, 2012年

  • 김상기, [東學과 東學亂],
  • 김호성, "東學革命과 金開南의 役割" 政治情報硏究, Vol.1, [1998]
  • 김인덕, "영호大道所와 全羅南道 東部地域의 東學農民革命 - 김인배의 活動과 順川, 光陽, 麗水地域 戰鬪를 中心으로 -", 崇實私學, Vol.34, [2015]
  • 김봉곤, "南原地域 東學農民革命과 士族의 對應", 南道文化硏究, Vol.0 No.26, [2014]
  • 박대길, "東學農民革命 指導者 金開男의 處刑 經緯와 殉國 터", 件地人文學, Vol.18, [2017]
  • 박대길, "東學農民革命의 始作, 고부蜂起", 東學學報, Vol.25, [2012]
  • 소병철, "智異山卷 東學農民革命에 나타난 理想社會의 비전", 東學學報, Vol.0 No.35, [2015]
  • 원재연, "近代 履行期 湖南 儒林의 時務론(時務論)과 東學(東學) 認識", 朝鮮時代史學報, Vol.74, [2015]
  • 李熙根, "1894年 東學指導部의 第2次 起兵 推進과 그 性格" 東學硏究, Vol.6, [2000]
  • 이병규, "1894年 10~11月 錦山.鎭山에서의 金開男과 日本軍의 活動", 全北私學 第26輯 71-99쪽
  • 이병규, "김산 消耗靈의 設置와 東學農民軍 鎭壓 活動", 東學學報, Vol.0 No.41, [2016]
  • 신영우, "1894年 남원대都所의 9月蜂起論과 金開男軍의 解散背景", 東學學報, Vol.33, [2014]
  • 이진영, " 金開南과 東學農民戰爭", 韓國 近現代史 硏究, Vol.2, [1995]
  • 정인숙, "近現代 女性 家事에 나타난 歷史敍述의 特徵課그 意味-銀村 조애영, 小鼓當 고단, 小井 李徽의 作品을 中心으로", 古典文學硏究, Vol.54,[2018]
  • 채길순, "南原地域 東學農民革命의 展開 過程 硏究 -史跡地를 中心으로", 東學學報, Vol.33, [2014]
  • 홍동현, "高興地域의 民族運動과 1894年 東學農民戰爭 - [高興郡敎區歷史]를 中心으로", 南道文化硏究, Vol.0 No.35, [2018]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다시쓰는 東學農民革命社, 김기전 씀
  2. 이병규, 1894年 錦山.鎭山에서의 金開男과 日本軍의 活動
  3. 이이화, 發掘 東學農民戰爭 人物列傳, 한겨레新聞社
  4. 다시쓰는 東學農民革命社, 김기전 씀
  5. 이진영, "金開男과 東學農民戰爭", 韓國近現代史硏究, 1995年; 이이화, 發掘 東學農民戰爭 人物列傳, 한겨레新聞社
  6. 海月先生文集
  7.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441b
  8. 정석모, "甲午略歷"
  9. 黃玹, 오하기문
  10. 黃玹, 오하기문
  11. 日本軍
  12. 曾孫子 김영중의 證言
  13. 신영복, "邊方을 찾아서", 2012
  14. 李相伯, 東學黨과 大院君, 1962
  15. 李相伯, 東學黨과 大院君, 1962
  16. 南朝鮮(南朝鮮)의 王을 꿈꾼 人物, 김개남
  17. 이병규, "김산 消耗靈의 設置와 東學農民軍 鎭壓 活動", 東學學報, Vol.0 No.41, [2016]
  18. 歷史問題硏究所, 《다시 피는 綠豆꽃》 (역사비평사, 1994) 176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김개남"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