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國王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 朝鮮의 歷代 國王 에서 넘어옴)

朝鮮 國王
朝鮮國王
朝鮮의 王室 文章.
呼稱 殿下
官邸 景福宮
招待 太祖
마지막 高宗
設立 1392年
廢止 1897年
前身 高麗 國王
後身 大韓帝國 皇帝
法廷繼承者 조선국 王世子

朝鮮 國王 (朝鮮國王)은 朝鮮 國王 이다. 在位할 때에는 住商(主上), 上(上), 聖像(聖上), 當宁(當佇) 等으로 불리다가 [1] 生前에 王位를 물려 주었을 境遇에는 上王(上王)으로 불렸다. 朝鮮 時期 生前에 讓位하여 上王이 된 國王으로는 太祖 , 定宗 , 太宗 , 斷種 , 高宗 이 있었다. 이 가운데 高宗은 大韓帝國 의 狀況制였다. [2] 朝鮮 國王에게는 세 가지 公式 이름이 주어졌다. 태어나며 作成된 이름은 라고 하였고 事後에 廟號 시호 가 獻呈되었다. 朝鮮 國王은 大槪 廟號 로 불린다.

朝鮮의 國王은 一般的으로 太祖에서 純宗 까지를 이르지만, 順從의 境遇 선대인 高宗이 大韓帝國 을 宣布하여 皇帝가 된 以後 承繼하였기 때문에 嚴密히 말하면 朝鮮의 國王이 아니라 大韓帝國의 2代 皇帝이다.

이름과 尊號 [ 編輯 ]

朝鮮 國王의 이름은 (諱)라 하고 生前에는 勿論 死後에도 임금의 이름을 使用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피휘 하였다. 死後에는 廟號 시호 等의 尊號를 따로 지어 追崇하였고 廟號는 事後 該當 國王을 가리키는 代表的인 名稱으로 使用되었다.

휘와 피휘 [ 編輯 ]

朝鮮의 國王들도 태어나면서 지어 받은 이름이 있었고 이를 (諱)라고 한다. 例를 들어 英祖 의 휘는 金(昑)이다. [3] 漢字 文化圈의 君主制에서는 임금의 이름에 使用된 글字의 使用을 忌避하였는데 이를 피휘 라 한다. [4] 朝鮮의 國王은 태어나서 받은 이름으로 불리는 境遇는 아주 어릴 때 잠깐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別途의 兒名을 使用하는 境遇가 많았다. 휘보다는 作爲로 불리는 게 一般的이었는데 이나 大君 의 爵位가 주어지면 주어진 爵位와 함께 低下 等으로 불리다가 卽位 하면 住商 殿下 等으로 불렸다. [1] 피휘는 現在 在位 中인 國王 뿐만 아니라 先代 國王의 휘에도 適用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짓는 王室의 立場에서도 사람들의 不便을 줄이기 위해 되도록 쓰이지 않는 漢字를 골라 外資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 慣例였다. [5] 이름을 붙이는 것에 신중하였기 때문에 어릴 때에는 따로 兒名으로 부르거나 國王의 嫡長子의 境遇엔 이름 없이 "原子 아기씨" 程度의 呼稱을 使用하였고 封爵하여 冠禮를 하거나 世子로 策定되면 그제서야 正式으로 이름을 지어 휘로 삼았다. [6]

廟號와 시호 [ 編輯 ]

人組 인열왕후 의 陵인 章陵 의 標石

死後에 붙여지는 廟號는 太祖나 世宗과 같이 두글자로 이루어진다. 앞의 글字는 國王의 區分을 위하여 여러 글字를 쓰지만 뒤의 글字는 組(祖) 아니면 種(宗) 두 글字 가운데 하나를 選擇한다. 朝鮮 國王이 死亡하면 臣下들이 모여 공(功)과 德(德)을 살펴 功이 크다고 할 수 있으면 "朝"를 德이 많다 할 수 있으면 "종"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實際 廟號는 後任者와 臣下들의 政治的 決定에 따라 定해지곤 하였는데 例를 들어 世祖의 境遇 臣下들이 新種(神宗), 睿宗(睿宗), 成宗(聖宗)을 廟號의 候補로 올렸으나 睿宗 이 끝내 "朝"가 들어가야 한다고 하여 世祖가 되었다. [7] 廟號는 王室의 祠堂 宗廟 에 新株를 올릴 때 使用되어 後代에서 該當하는 國王을 부르는 代表的인 名稱으로 使用된다. 廟號는 한番 定하였더라도 事後에 다시 追尊하여 變更하기도 한다. "朝"의 權威가 "종"보다 높기 때문이다. 高宗은 大韓帝國의 皇帝임을 宣言한 뒤 영종, 正宗, 順從을 各各 英祖, 正祖, 順調로 追尊하였다. 現在 韓國의 歷史에서 불리는 이름은 高宗이 追尊한 뒤의 것이다. [8]

한便 諡號는 業績을 기리기 위해 붙이는 이름으로 [9] 例를 들어 太祖의 諡號는 "강헌지引繼韻城門新舞臺王"(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10] 이다. 뜻을 풀이하면 "하늘이 내린 天運을 받들어 成人의 文化와 神과 같은 武威를 갖춘 大王"으로 太祖 李成桂가 새로 나라를 세웠음을 强調한 諡號가 된다. 이 가운데 "강헌"은 明나라에서 내린 諡號이고 뒤의 것은 朝鮮에서 自體的으로 獻呈한 諡號이다. 朝鮮은 中國과 事大關係에 있었기 때문에 明나라 時期에는 明나라에서 내린 諡號를 함께 使用하였으나, 淸나라 가 세워진 後 小中華史上 이 생겨 對外的으로는 如前히 中國이 내린 諡號를 받았지만 內部에서는 이를 使用하지 않고 獨自的인 시호만을 使用하였다. [11] 大韓帝國의 宣布 後 高宗은 皇帝로서 明나라에서 받은 시호 亦是 神主에서 削除하였다.

地位 變動 [ 編輯 ]

英祖 는 兄에게서 王世弟로 冊封된 뒤 王位에 올랐다

朝鮮의 國王은 卽位함으로써 君主로 在位하였고 死亡하거나, 讓位 또는 廢位되면 次期 國王이 君主의 地位를 繼承하였다.

繼承 [ 編輯 ]

朝鮮 國王의 繼承權은 嫡長子에게 優先的으로 주어졌지만 반드시 그와 같이 施行되지는 않았다. [12] 建國 初期인 太宗 의 王位 繼承을 놓고 벌인 王子의 亂 은 別個로 하더라도 모두 27 名人 歷代 朝鮮 王 가운데 嫡長子로서 王位에 오른 境遇는 8 名에 不過하다. [13] 朝鮮에는 自動으로 附與되는 繼承序列이 存在하지 않았다.

朝鮮 國王은 生前에 미리 後嗣를 定하여 두었다. 後嗣로 定한 人物이 아들이라면 朝鮮의 王世子 로서 흔히 "世子"로 불렸고 王의 嫡長子인 原子(元子)를 世子로 冊封하는 것을 優先으로 여겼지만 [14] 英祖의 境遇와 같이 동생에게 繼承權을 주어 王世弟가 된 境遇가 있다. [15] 國王이 살아있을 때 王世子가 嫡長子를 낳으면 王世孫으로 冊封하였다. 王世子가 王位를 繼承하여 새 國王으로 卽位하면 王世孫이 自然스럽게 王世子가 되었으나 여러 이런저런 理由로 王世子가 卽位하지 못하고 死亡하면 王世孫이 王位를 繼承하기도 하였다. 朝鮮에서는 正祖 憲宗 이 王世孫으로서 直接 王位를 繼承하였다. 憲宗의 境遇 아버지인 驍名世子 가 病으로 死亡한 境遇이고 正祖의 境遇 思悼世子 가 그 有名한 뒤주에 갖혀 죽임을 當하는 罰로 死亡하였기 때문에 王世孫으로서 王位를 繼承하였다. [16]

朝鮮 後期에 이르면 國王의 直系 血族인 嫡統의 代가 끊어져 傍系가 繼承하는 境遇가 늘어나게 된다. 純祖의 뒤를 이른 헌종이 後嗣 없이 死亡하자 다음 王位는 思悼世子의 3男인 은언군 의 孫子 哲宗 이 뒤를 잇게 되는데 은언군은 정조時期 逆謀 事件에 휘말려 江華島로 流配되었고 哲宗 臺에 이르면 有名無實한 王族으로 庶民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哲宗에게는 "江華도령"이라는 別稱이 붙었다. [17] 哲宗 亦是 後嗣 없이 死亡하여 다음 王位는 驍名世子의 養子로 入籍한 高宗 이 繼承하게 된다. 高宗의 生父는 흥선大院君 이었으나 戶籍上 養父는 驍名世子이므로 高宗은 卽位 뒤 驍名世子를 翼宗으로 推尊하였다. [18]

讓位 [ 編輯 ]

朝鮮 國王은 生前에 繼承者에게 兩位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讓位하면 上王으로 불린다. 太祖가 正宗에게 讓位하여 上王이 되었다가 正宗마저 太宗에게 讓位하자 太祖는 太上王, 定宗은 上王이 되는 狀況이 되기도 하였다. 太宗 亦是 生前에 世宗에게 讓位하여 上王이 되었다. [19]

朝鮮 國王의 地位는 不可侵의 지존이었기 때문에 王位를 讓位하는 일을 言及하는 것 自體가 不忠으로 비춰졌다. 世宗이 文宗 에게 代理淸淨 을 맡기는 過程에서 世宗은 臣僚들과 7年 동안이나 葛藤을 겪어야 하였다. [20] 國王과 王世子는 父子之間이라 할 지라도 朝鮮의 政治 에서 서로를 牽制하는 主體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國王이 世子를 牽制하기 위해 일부러 兩位를 表明하는 일도 있었다. 國王이 王位를 물려주고 上王이 되겠다고 하면 속 마음이야 어떻든 世子는 自身의 孝心을 보이기 爲해 罪人을 自請하여야 하였다. 영조는 政治的 狀況에 따라 思悼世子에게 讓位하겠다 表明하여 政局을 自身이 願하는 方向으로 끌어내는 方法을 使用하기도 하였다. [21]

戰爭과 같은 非常 狀況에서는 讓位하지 않더라도 調整을 둘로 나눠 各各 獨立的으로 活動하는 分組를 세우기도 하였다. 壬辰倭亂 時期에는 광해군 이 分組를 運營하였고 丁卯胡亂 에는 소현세자 가 分組를 運營하였다. [22] 分組는 非常 狀況이 終了되면 다시 國王의 親庭 體系로 돌아갔지만 分組 時期 王世子의 活動 內容은 種種 葛藤을 불러왔다. 宣祖는 明나라가 光海君의 分組에 直接 勅書를 내리는 等 自身의 地位가 萎縮되자 兩位를 하겠다는 表明으로 自身의 地位를 强化하였다. [23]

廢主 [ 編輯 ]

朝鮮의 國王은 反正 으로 逐出되기도 하였다. 朝鮮 時期에는 세 番의 反正이 있었는데 世祖가 端宗을 몰아낸 것은 後날 再評價 되어 世祖贊尉 로 불리지만, 中宗 人組 의 反正은 後代에도 正當한 反正으로 여겨져 中宗反正 , 仁祖反正 等의 用語가 굳었다. 이렇게 反正이 일어나면 前任 國王은 廢位되어 廢主(廢主)로 불린다. [24]

廢主에게는 廟號와 諡號를 定하지 않고 宗廟에도 新株를 올리지 않으므로 卽位 以前의 封爵名으로 불리게 된다. 斷種 은 廢位 뒤 魯山君으로 불렸고, 연산군 , 광해군 亦是 이와 같은 理由로 卽位前 爵位가 붙여졌다. 다만 端宗은 後代에 再評價 되어 肅宗 臺에 이르러 廟號가 追尊되었다. [25] 《朝鮮王朝實錄》은 廟號가 붙은 國王의 歷史 記錄은 《實錄》이라 하고 廢位된 王의 것은 《日記》라 하여 區分하였다.

推尊 [ 編輯 ]

살아있을 때에는 王位에 있지 않았으나 後날 子孫이 王位에 오르면 王으로 追尊하는 境遇가 있었다. 이를 追尊王이라 한다. 太祖 李成桂는 王位에 오른 뒤 自身의 4代祖를 各各 木造 , 翼祖 , 賭租 , 桓祖 로 追尊하였다. [26] 以後로도 傍系가 卽位하는 境遇 自身의 先祖를 王으로 追尊하는 境遇가 있어 朝鮮의 追尊王은 모두 이는 象徵的인 措置였기 때문에 朝鮮의 實際 國王 目錄에 包含하지는 않지만 廟號가 있으므로 宗廟에 神主가 있다. [27] 追尊王 亦是 當代의 政治的 産物이다. 正祖는 英祖에 依해 죽임당한 思悼世子 를 卽位 後 章宗으로 推尊하였는데 後날 高宗이 다시 追贈하여 長調가 되었다. 正祖는 儒敎의 가장 큰 價値 가운데 하나인 孝를 앞세워 思悼世子의 追尊과 함께 水原 華城 을 築造하여 王權 强化를 꾀했다. [28]

王으로 追尊하지 못하고 作爲만을 追尊한 境遇엔 追尊領이라고 한다. 太祖의 5代祖 이양무 는 4代祖까지만 追尊王을 認定하는 慣例에 따라 將軍의 爵位를 追尊하고 先凋枯考慮將軍尊靈(先祖考高麗將軍尊靈)이 되었다.

大院君 은 달리 推尊 節次를 거치지 않은 國王의 生父이다. 直系가 끊어져 傍系에서 王位를 繼承하면 卽位한 王의 生父를 王室의 다른 王族들과 區分하여 大院君의 爵位를 附與하였다. 大院君은 大槪 國王의 卽位 時點에서 이미 死亡한 狀態였지만 高宗의 生父인 흥선大院君 의 境遇엔 高宗 卽位 後 政府의 實權을 掌握하였다.

權力 [ 編輯 ]

勤政殿 品階石

朝鮮은 理論的으로 國王이 絶對的 主權을 지녔다는 點에서 專制君主制의 面貌를 보이지만 實際에서는 臣僚의 影響力이 크게 作用하는 官僚制 社會였다. [29] 朝鮮은 建國부터 정도전 을 비롯한 新進士大夫 에 依해 主導되어 王權에 對한 牽制와 宰相權의 主導가 두드러진 가운데 이루어졌다. [30] :19-20 朝鮮의 國王은 여러 次例 王權의 强化를 圖謀하였으나 臣僚들과 適當한 線에서 妥協하여야만 하였다. 王子의 亂 은 正宗을 앞세운 鄭道傳의 宰相權 于先 思想과 王의 直接 統治를 이루고자 한 太宗의 衝突이었으며 [30] :20 以後 世祖의 簒位 亦是 비슷한 衝突의 性格이 있다. [31]

儒敎的 以上을 統治理念으로 내세운 朝鮮은 國王 亦是 《 大學 》이 말하는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의 當爲에서 自由로울 수 없었고 競演과 같은 活動을 통해 스스로 儒敎的 以上의 模範이 되어야 하였다. [32] 이와 같이 國王은 “大抵 君主는 百姓에 依存한다.”라는 《 朝鮮經國典 》의 原則을 지켜나가는 "聖君"李 되기를 要求받았다. [33] 實際로 國王이 臣僚를 掌握하지 못하면 反正 이 일어나거나 各種 逆謀와 叛亂이 發行하였기 때문에 國王은 스스로를 節制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臣僚와 妥協하여야 하였다.

朝鮮 中期 以後 調整은 士林派 가 掌握하였고 朋黨 政治 가 發達하게 되었다. 中宗時期 이미 朝鮮은 君主의 權力이 弱하고 臣下의 發言權이 剛하다는 군약신강 이 言及된다. [34] 그러나 王室 亦是 끊임 없이 王權의 强化를 試圖하였으며 이러한 國王과 臣僚들 사이의 緊張과 妥協이 朝鮮의 政治를 이어가는 原動力이었다. [35]

統治 [ 編輯 ]

朝鮮 初期 에는 六曹 의 業務 監督 權限이 議政府에 있었으나 太宗이 이를 革罷하여 六曹 職階制 를 施行하였다. [36] 以後 六曹의 判書들은 國王에 直接 報告하여야 하였고 이들을 비롯하여 宗親府 等의 王族 管理 部署나 司憲府 , 司諫院 等의 堂上官 들은 아침에 王에게 業務를 報告하는 常參 을 하였다. 常參은 每日 하는 것이 原則이었으나 實際로는 2 - 5 日에 한 番씩 이루어졌다. [37]

實際 統治 業務는 六曹 各 部處와 傘下 機關에서 이루어졌고 이들의 組織은 《 經國大典 》에서 規定하였다. [38] 地方에 對한 統治는 8度로 나뉜 道單位 行政區域에 對해 觀察使 [39] 임명하고 그 下部는 都護府, 郡, 現, 목 等을 두어 守令을 임명하였는데 이들 모두는 國王이 任免權을 가지고 있어 朝鮮은 强力한 中央集權制를 維持하였다. [40]

朝鮮 後期 가 되면 議政府는 有名無實하게 되고 備邊司 가 最高委 政府 組織으로 浮刻된다. 여러 朋黨의 所屬으로 備邊司에 參與하는 臣僚들은 三四와 함께 備邊司를 통하여 自身들의 政策을 貫徹하고자 하였고 英祖 等의 國王 또한 備邊司를 통해 蕩平策 과 같은 方法으로 朋黨 間의 競爭을 調整하여 自身의 뜻을 貫徹하려 하였기 때문에 高宗의 統治 制度 革罷가 이루어 질 때까지도 備邊司는 朝鮮의 實質的인 最高 統治 機構로 作動하였다. [41]

朝鮮 後期의 勢道政治 는 애初 正祖가 臣僚의 朋黨을 牽制하고 王權을 强化하고자 試圖한 것이었으나 以後 特定 家門에게 權力이 쏠리면서 오히려 王權을 極度로 약화시키는 結果를 招來하고 만다. [42]

逆謀와 叛亂 [ 編輯 ]

朝鮮 時期는 數 많은 逆謀 事件과 叛亂이 있었다. 逆謀는 主로 王位 繼承權을 主張할 수 있는 王族을 내세워 反正을 試圖한 것으로 實際 그런 試圖가 있었던 境遇도 있지만 己丑獄事 정여립 境遇와 같이 朋黨 政治에서 相對 黨을 彈壓하기 위한 口實로 作動하기도 하였다. [43] 朝鮮 後期의 王族과 士大夫는 늘 逆謀와 엮일 수 있다는 緊張感을 지닌 채 살아야 하였다. 남이 의 境遇와 같이 逆謀로 處罰되었으나 後날 政敵에 依해 陋名이 씌워졌다는 再評價가 이루어지는 境遇도 있었다. [44]

民亂 [ 編輯 ]

朝鮮 後期는 民亂 의 時期였다. 民亂은 支配層의 逆謀와 달리 사람들이 飢饉, 傳染病의 流行 等에 시달리는 가운데 苛酷한 稅金의 受取와 貪官汚吏의 專橫等에 反撥하여 일어났다. 洪景來의 亂 의 境遇 이에 더해 地域 差別이 問題가 되었고 [45] 壬戌農民蜂起 는 朝鮮 後期 最大 規模의 民亂이었다. [46]

生活 [ 編輯 ]

朝鮮 國王의 衣服인 衮龍袍

國王은 私生活이 아예 認定되지 않는 地位였고 一擧手 一投足이 모두 國家의 公的 活動으로 取扱되어 規定에 따른 行動이 要求되었다. [47] 朝鮮의 國王은 儒敎的 理念의 模範으로서 《 主禮 》等이 提示하는 各種 禮法에 따라 生活하여야 하였다. 朝鮮은 王室의 境遇도 士大夫의 家門 運營에서 擴張된 槪念으로 理解하였다.

朝鮮 時代 士大夫에게 주어진 禮法은 祖上의 祭祀를 받들고 손님을 待接하는 것을 意味하는 "奉祭祀 接賓客"이라는 말로 壓縮되었는데 이는 國王도 同一하게 適用되어 祭祀를 받드는 宗廟 祭禮 와 外國의 使臣으르 待接하는 鳶調整社(宴朝廷使) 等의 儀禮 規定이 整備되었다.

冠婚喪祭 는 生涯 週期에 따른 士大夫의 儀禮를 말하는 것으로 冠禮 , 婚禮 , 葬禮 , 祭祀 를 말한다. 國王과 王世子의 冠婚喪祭는 國家의 儀禮로서 擧行되었다. 日常生活人 衣食住 亦是 모두 規定에 따라 運營되었다.

儀禮 [ 編輯 ]

國朝五禮儀 》는 나라의 儀禮를 크게 吉禮(吉禮), 嘉禮(嘉禮), 賓禮(賓禮), 軍禮 (軍禮), 凶禮(凶禮)로 나누고 이에 따른 儀禮 節次를 記錄하였다. 宗廟 再禮는 吉禮에 屬하고 王妃 또는 王世子費와의 婚禮는 家禮에 屬하였다. 使臣의 接待는 賓禮, 軍隊의 熱病과 사냥 等은 軍禮였으며 國王의 葬禮는 凶禮에 屬하였다. [48]

國王의 各種 儀禮는 國家 事業이었으므로 調整 臣僚들과 議論하여야만 하였는데 國王의 喪服을 입는 期間을 두고 論爭을 벌인 禮訟 은 結局 朋黨의 分化가 일어난 原因이 되기도 하였다. [49]

婚姻 [ 編輯 ]

朝鮮의 王妃는 高麗 와 달리 公式的으로 1 名만이 認定되었다. [50] 國家를 家門의 擴張으로 認識한 朝鮮 時代에 王妃는 "國母"(國母)로 여겨졌으며 國王과 같이 모든 生活이 公的 領域으로 取扱되었다. 王妃는 內命婦 의 首長으로 各種 儀禮를 管掌하였고 國王이 死亡하여 새 國王이 卽位할 때까지 臨時로 國家의 儀禮를 책임지거나 새로 卽位한 國王이 어리면 垂簾聽政 을 통하여 政治에 關與하기도 하였다. [51]

朝鮮의 王世子는 大槪는 8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世子로 冊封되며 배필도 함께 맞았다. 王妃나 王世子妃는 揀擇 을 통하여 決定되었는데 理論的으로는 朝鮮 全體의 士大夫가 王室과 婚禮를 할 資格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揀擇이 이루어지는 期間 동안에는 禁婚令이 내려져 士大夫 家門의 未婚 女性은 婚禮를 치를 수 없었다. 揀擇은 모두 세 次例에 걸쳐 이루어지며 候補를 차츰 줄여나가 最終的으로 한 名을 골랐다. [52] 朝鮮의 前兆인 考慮는 外戚의 權力에 對한 牽制 裝置가 없어 元나라의 駙馬國이 되기 前까지 特定 家門에서 王妃를 繼續 排出하며 權力을 掌握하는 弊端이 있었고 [53] 朝鮮 初 國魂에 對한 별다른 規定이 없던 時期 太宗은 春川 府使 利속이 婚談을 拒絶하자 이를 빌미로 揀擇 制度를 만들어 外戚에게 王室이 휘둘리는 일을 防止하고자 하였다. [54] 揀擇은 國王이 主導權을 쥐게 되므로 政治的 判斷에 따라 王妃나 王世子를 選定할 수 있었다. 朝鮮의 國王은 普通 血統과 家門은 名望이 높아 威信을 살릴 수 있으면서도 勢力은 작아 國政에 큰 影響을 주지 못할 家門을 選擇하였다. [54]

國王은 王妃 外에 妾인 後宮 을 둘 수 있어 빈(嬪), 貴人(貴人), 昭儀(昭儀), 熟議(淑儀) 等의 內命婦 爵位를 주었다. 中期까지는 熟議 等의 爵位를 내린 뒤 차츰 昇給하는 것이 慣例였으나 正祖 代에 들면 원빈홍씨 의 境遇와 같이 곧바로 빈의 爵位를 주게 되었다. [55] 많이 알려진 後宮으로는 燕山君의 後宮인 淑容 張氏 , 肅宗의 後宮인 희빈 張氏 , 英祖의 生母인 숙빈 崔氏 等이 있다.

王妃에게서 태어난 첫 아들인 嫡長子를 原子라고 稱하였고 原子가 王世子로 冊封되는 것을 理想的으로 여겼지만, 그렇지 않은 境遇엔 여러 後宮의 아들들이 王位를 繼承하기도 하였다. 英祖의 生母 숙빈 崔氏는 寒微한 집안의 孤兒로 태어나 宮女로 入宮하였다가 後宮이 되었기 때문에 영조는 卽位 期間 내내 自身의 正統性에 對한 是非에 시달려야 하였다. [56]

衣食住 [ 編輯 ]

衮龍袍 는 朝鮮 國王의 日常服이다. 團領 의 一種인 衮龍袍와 함께 翼善冠 을 쓰고 허리에 玉帶를 매었으며, 木靴(木靴)를 신었다. [57]

임금의 食單은 水剌床 으로 불렸으며 各種 飯饌 12가지가 올라가는 12첩 飯床이 規定이었으나 [58] 儒敎的 以上의 模範을 보여야 하는 國王은 飮食도 儉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였기에 大槪는 飯饌의 가지 數를 줄여 내었다. 正祖의 境遇엔 이러한 儉約이 强調되어 밥床에 일곱 그릇 以上을 올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正祖가 먹은 食單으로는 紅斑. 냉이탕, 저包抄 等이 올랐고 구이로 錦鱗魚, 隱語, 歲갈비구이 等이 자반으로 淡鹽民魚, 半乾大口. 六場, 黃肉茶食, 生雉片脯, 붕어찜 等이 올랐다. [59] 飮食은 朝鮮의 國王이 自身의 趣向대로 고를 수 있는 몇 안되는 項目 가운데 하나였다. 世宗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었다는 記錄이 있고 [60] 正祖는 비린내가 나는 물고기類를 꺼렸다. [59]

國王은 宮闕 에 머물러 生活하며 情事를 살폈다. [61] 公式的인 儀禮는 景福宮 勤政殿 , 昌德宮 仁政殿 과 같은 正殿에서 이루어졌고 이들 停電은 各 宮의 中央에 位置하였다. 그 옆으로 國王이 平素 居處하는 大田이 있었으며 景福宮의 大田은 康寧殿 이고 昌德宮의 大田은 大造殿 이다. 三綱五倫 의 夫婦有別 項目은 國王에게도 適用되어 王妃는 中宮殿(中宮殿)에 따로 살았고 이때문에 中宮이나 中前은 王妃의 別稱이 되었다. 景福宮의 中宮殿은 交泰殿 이다.

葬禮와 祭禮 [ 編輯 ]

健元陵 은 太祖의 무덤이다.

國王의 死亡은 "붕어"(崩御)라 하였다. 國王이 死亡하면 國喪(國喪)으로 葬禮를 치렀다. 廟號 시호 가 定해지고 葬地가 定해지면 國王의 무덤인 이 造成되었다. 國王의 葬禮는 極盡한 禮를 다하여 5 個月間 36 가지 節次로 進行되었다. [62] 여러 禮法에 따른 節次가 많기도 하였지만 王陵의 造成에 時間이 걸렸기 때문이다. 王陵이 造成되면 發靷하여 運柩하였다. 朝鮮 歷代 國王의 實錄은 大槪 葬禮를 위해 準備한 行長 으로 마감된다. 行長은 죽은 이의 이름과 尊號를 밝히고 簡略한 傳奇를 싣는 것이 普通이다. [63]

廢位가 된 境遇가 아니라면 死亡한 國王의 廟號를 적은 神主를 만들어 宗廟에 配置한다. 宗廟 亦是 士大夫의 家門에 設置된 祠堂 의 擴張으로 理解되었는데 祠堂에 모시는 神主는 當代 家主의 4代祖까지의 神主와 功德이 높아 神主를 永久히 모시는 不遷位가 함께 놓인다. 宗廟 亦是 이와 같은 禮法에 따라 不遷位로 모신 神主와 새로 卽位한 國王의 4代祖 神主를 모시게 되고 다른 神主들은 永寧殿 에 따로 모아둔다. [64] 宗廟의 不遷位는 時間이 지날 수록 漸次 늘어 처음 施行된 연산군 時期에는 太宗의 神位만이 不遷位였으나 高宗 臺에 이르면 太祖, 太宗, 世宗, 世祖, 成宗, 中宗, 宣祖, 仁祖, 孝宗, 顯宗, 肅宗, 英祖, 正祖가 不遷位가 되었다. [65] 現在 宗廟에는 19 실(室)에 19 위의 王과 30 위의 王后의 申奏가 있다. [64]

國王이 宗廟에서 올리는 祭祀를 宗廟 祭禮 라 하였다. 새로운 季節이 始作되는 1月, 4月, 7月, 10月에 定期的인 祭祀인 定時制를 지냈고 國家에 좋든 나쁘든 큰일이 있을 때에는 臨時制를 지냈다. 宗廟 祭禮는 儒敎의 祭禮 規定을 國王의 規模로 擴張한 것이다. 儒敎 祭禮의 核心的 節次는 祖上에게 술과 飮食을 올리는 象徵 意識인 初獻禮, 亞獻禮, 終獻禮의 三獻禮와 以後 子孫이 함께 飮食을 나누어 飮福을 비는 飮福禮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國王의 擧動과 祭祀床을 차리고 神位를 모시는 일 等이 더해져 宗廟 祭禮를 構成하게 되며 祭禮가 이루어 지는 동안 宗廟 祭禮樂 이 演奏된다. [66]

目錄 [ 編輯 ]

實際 卽位한 國王 目錄 [ 編輯 ]

臺數 廟號 · 軍號 生沒年度
在位
시호 陵墓 備考
名 · 淸의 시호 朝鮮 自體 시호
第1代
太祖
太祖
1335年 - 1408年
1392年 - 1398年
 
 
成鷄 成桂
單 旦
 
 
강헌 康獻 [67]
 
 
知人界韻城門新舞臺王
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 고황제
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 高皇帝
健元陵
健元陵
고황제 高皇帝
第2代 定宗
定宗
1357年 - 1419年
1398年 - 1400年
放課 芳果
警 ?
公正 恭靖 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
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厚陵
厚陵
永安對群 永安大君
第3代 太宗
太宗
1367年 - 1422年
1400年 - 1418年
방원 芳遠 公正 恭定 盛德神功문무광孝大王
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獻陵
獻陵
정안대군 靖安大君
第4代
世宗
世宗
1397年 - 1450年
1418年 - 1450年
도 ? 掌憲 莊憲 英文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영릉
英陵
忠寧大君 忠寧大君
第5代 文宗
文宗
1414年 - 1452年
1450年 - 1452年
香 珦 恭順 恭順 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
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顯陵
顯陵
第6代
斷種
端宗
1441年 - 1457年
1452年 - 1455年
홍위 弘暐 -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郭孝大王
章陵
莊陵
第7代
世祖
世祖
1417年 - 1468年
1455年 - 1468年
有 ? 혜장 惠莊 熱문영무新성인효大王
烈文英武神聖仁孝大王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광릉
光陵
陳平大軍 晉平大君
咸平大君 咸平大君
振揚대군 晉陽大君
首陽大君 首陽大君
第8代 睿宗
睿宗
1450年 - 1469年
1468年 - 1469年
黃 晄 讓渡 襄悼 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
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昌陵
昌陵
해양대군 海陽大君
第9代 成宗
成宗
1457年 - 1494年
1469年 - 1494年
穴 ? 강정 康靖 人文獻無欠성공효大王
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宣陵
宣陵
者乙山君 者乙山君
잘山臺群 ?山大君
第10代 연산군
燕山君
1476年 - 1506年
1494年 - 1506年
융 ? - - 燕山君墓
燕山君墓
연산군 燕山君
第11代 中宗
中宗
1488年 - 1544年
1506年 - 1544年
驛 ? 供犧 恭僖 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
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정릉
靖陵
盡誠대군 晉城大君
第12代 人種
仁宗
1515年 - 1545年
1544年 - 1545年
號 ? 影幀 榮靖 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孝陵
孝陵
第13代 明宗
明宗
1534年 - 1567年
1545年 - 1567年
換 ? 貢獻 恭憲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
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江陵
康陵
敬遠대군 慶源大君
第14代
宣祖
宣祖
1552年 - 1608年
1567年 - 1608年
菌 鈞
年 ?
소경 昭敬 腺腫 宣宗
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宣祖 宣祖
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穆陵
穆陵
하성군 河城君
第15代 광해군
光海君
1575年 - 1641年
1608年 - 1623年
魂 琿 - - 光海君墓
光海君墓
광해군 光海君
第16代 人組
仁祖
1595年 - 1649年
1623年 - 1649年
種 倧 장목 莊穆 列朝 烈祖
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人組 仁祖
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章陵
長陵
陵양도정 綾陽都正
능양군 綾陽君
능양대군 綾陽大君
第17代 孝宗
孝宗
1619年 - 1659年
1649年 - 1659年
號 淏 忠善 忠宣 先聞장무신성현인大王
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
欠薦達도광의홍렬
先聞장무신성현인名義정덕대王
欽天達道光毅弘烈
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
영릉
寧陵
봉림大君 鳳林大君
第18代 顯宗
顯宗
1641年 - 1674年
1659年 - 1674年
年 ? 長角 莊恪 純문숙武經인창효大王
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소휴연경돈덕수성
純문숙武經인창효大王
昭休衍慶敦德綏成
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崇陵
崇陵
第19代
肅宗
肅宗
1661年 - 1720年
1674年 - 1720年
順 焞 희순 僖順 장문헌武經名元曉對王
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明陵
明陵
第20代 警鐘
景宗
1688年 - 1724年
1720年 - 1724年
尹 ? 各貢 恪恭 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
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義陵
懿陵
第21代
英祖
英祖
1694年 - 1776年
1724年 - 1776年
金 昑 將順 莊順 영종 英宗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

英祖 英祖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원릉
元陵
연잉군 延?君
第22代
正祖
正祖
1752年 - 1800年
1776年 - 1800年
산 ? 公船 恭宣 [67] 定宗 正宗
문성武列成人장효大王
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正祖 正祖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 先皇帝
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 宣皇帝
健陵
健陵
先皇帝 宣皇帝
第23代
順調
純祖
1790年 - 1834年
1800年 - 1834年
공 ? 先覺 宣恪 [67] 純宗 純宗
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
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

順調 純祖
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 숙皇帝
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 肅皇帝
仁陵
仁陵
숙皇帝 肅皇帝
第24代
憲宗
憲宗
1827年 - 1849年
1834年 - 1849年
 
 
換 奐
 
 
장숙 莊肅 [67]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
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 城隍祭
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 成皇帝
景陵
景陵
城隍祭 成皇帝
第25代
哲宗
哲宗
1831年 - 1863年
1849年 - 1863年
 
 
原犯 元範
便 ?
 
 
充警 忠敬 [67]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
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 腸皇帝
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 章皇帝
睿陵
睿陵
德완군 德完君
腸皇帝 章皇帝
第26代
高宗
高宗
1852年 - 1919年
1863年 - 1897年 [68]
再黃 載晃
兄 ?
-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 太皇帝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 太皇帝
홍릉
洪陵
翼城軍 翼成君
太皇帝 太皇帝
光武帝 光武帝

追尊王 目錄 [ 編輯 ]

廟號 生沒年度 시호 追尊年度 陵墓 備考
名 · 淸의 시호 朝鮮 自體 시호
木造
穆祖
  ?   - 1274年 안사 安社 - 人문성목大王
仁文聖穆大王
1411年 德陵
德陵
太祖 의 高祖父
翼祖
翼祖
生沒年 未詳 行李 行里 - 강혜성익大王
康惠聖翼大王
지릉
知陵
太祖 의 曾祖父
賭租
度祖
  ?   - 1342年 춘 椿 - 公義性度大王
恭毅聖度大王
義陵
義陵
太祖 의 祖父
桓祖
桓祖
1315年 - 1361年 자춘 子春 - 煙霧성환대王
淵武聖桓大王
정릉
定陵
太祖 의 아버지
德宗
德宗
1438年 - 1457年 숭 崇
腸 暲
回看 懷簡 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
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
1475年 景陵
敬陵
世祖 의 長男
成宗 의 아버지
도원군 桃源君
義警世子 懿敬世子

元宗
元宗
1580年 - 1619年 部 ? 公糧 恭良 경덕인憲政목장효대王
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1632年 章陵
章陵
宣祖 의 다섯째 아들
人組 의 아버지
정원군 定遠君
庭園大院君 定遠大院君
晉종
眞宗
1719年 - 1728年 行 ? 恪敏 恪愍 [69] 溫涼예명철문효장대왕
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

溫涼예명철門驍將 소皇帝
溫良睿明哲文孝章 昭皇帝
1776年 영릉
永陵
英祖 의 長男
正祖 의 養父
驍將世子 孝章世子
소皇帝 昭皇帝
莊祖
莊祖
1735年 - 1762年 선 ? - 章宗 莊宗
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
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

莊祖 莊祖
수덕돈경홍인경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신문환무장헌광효 醫皇帝
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范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神文桓武莊獻廣孝 懿皇帝
1899年 隆陵
隆陵
英祖 의 次男
正祖 의 親父
思悼世子 思悼世子
莊獻世子 莊獻世子
章宗 莊宗
醫皇帝 懿皇帝

文鳥
文祖
1809年 - 1830年 영 ? 綱目 康穆 [69] 翼宗 翼宗
체원찬화석극정명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
體元贊化錫極定命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

文鳥 文祖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 益皇帝
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 翼皇帝
1834年 首陵
綏陵
順調 의 長男
憲宗 의 親父
高宗 의 養父
驍名世子 孝明世子
翼宗 翼宗
益皇帝 翼皇帝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신명호, 王이 받는 冊封 名稱들, 封爵名 , 韓國文化史, 우리歷史넷
  2. 上王 , 實錄위키
  3. 英祖 大王 行長 , 朝鮮王朝實錄
  4. 피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신명호, 祖上과 나의 連結, 名 , 韓國文化史, 우리歷史넷
  6. 신명호, 〈 朝鮮時代 國王 呼稱의 種類와 意味 〉, 《歷史와警戒》, 2004, vol., no.52, pp. 47-67 (21 pages)
  7. 宗廟에서 부르는 이름, 廟號 , 韓國文化史
  8. 신병주, 死後에도 이어진 王의 權威 , 韓國文化史, 우리歷史넷
  9. 시호 , 實錄위키
  10. 朝鮮王朝實錄 》〈 朝鮮王朝實錄/太祖實錄/叢書 〉첫 番째 記事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性(姓)은 李氏(李氏), 휘(諱)는 單(旦), 者(字)는 軍陣(君晉)이다."
  11. 朝鮮 後期 王들, 淸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徹底히 숨겼다 , 朝鮮日報, 2007年 9月 11日
  12. 李永春, 朝鮮時代의 宗法 , 韓國文化史, 우리歷史넷
  13. 신병주, 朝鮮 王의 다양한 特性 , 韓國文化史, 우리歷史넷
  14. 次期 太陽, 王世子의 冊封 意識 , 文化財廳
  15. 김문식, 王世弟 , 韓國文化史, 우리歷史넷
  16. 김문식, 王世孫 , 韓國文化史, 우리歷史넷
  17. 哲宗 , 우리歷史넷
  18. 翼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 太上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 糖尿病 世宗이 7年 論爭 끝에 만든 '슬기로운 後繼 養成法'···代理淸淨 , 京鄕新聞, 2020年 4月 7日
  21. 思悼世子 가지고 논 英祖 , 동아사이언스, 2013年 9月 15日
  22. 김문식, 分組 , 韓國文化史, 우리歷史넷
  23. “光海君에 讓位” 15番 濫發, 臣下들 忠誠 盟誓 끌어내 , 中央日報, 2021年 4月 23日
  24. 장녹수 等을 참하고 廢主의 今人·花押·承命牌를 鐵牌하다 , 〈中宗實錄〉 1卷, 中宗 1年 9月 2日, 《朝鮮王朝實錄》
  25. 魯山君의 諡號를 抽象하다 , 〈肅宗實錄〉 32卷, 肅宗 24年 11月 6日, 《朝鮮王朝實錄》
  26. 太祖의 4代 祖上에게 尊號를 올리다 , 〈太祖實錄〉 1卷, 太祖 1年 7月 28日, 《朝鮮王朝實錄》
  27. 宗廟 - 朝鮮王朝 歷代 王과 王妃 및 追尊된 王과 王妃의 神主를 모신 儒敎 祠堂 , 文化遺産新聞
  28. 華城 行宮 華城 行宮-孝心과 王權 强化의 象徵 , 每日經濟, 2021年 3月 17日
  29. 이헌창, 〈 朝鮮王朝의 政治體制: 絶對君主制 〉, 《經濟史學》, 2017, vol.41, no.3, 通卷 65號 pp. 215-272 (58 pages)
  30. 홍순민 外, 《朝鮮時代社 1 - 國家와 世界》, 푸른역사, 2015年, ISBN   979-11-5612-043-8
  31. 世祖의 王權强化 , 新編韓國史, 우리歷史넷
  32. 朝鮮 王政의 前提(專制)省 , KBS WOLRD NEWS, 2011年 6月 4日
  33. 신병주, 王室의 權威와 牽制 裝置 , 韓國文化史, 우리歷史넷
  34. 審議의 一과 盜賊을 잡을 方策에 對해 議論하다 , 〈中宗實錄〉 9卷, 中宗 4年 10月 5日, 《朝鮮王朝實錄》
  35. 유홍림, 〈 韓國 政治理念의 歷史와 課題 〉, 《韓國政治硏究》 第11輯 第2號, 2002年
  36. 6兆 職階制 , 歷史用語解說, 우리歷史넷
  37. 常參 , 實錄위키
  38. 經國大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9. 觀察使 - 地方 最高의 行政長官이자 軍事 指揮官 , 우리歷史넷
  40. 朝鮮王朝史의 特徵과 時期區分 , 新編韓國史, 우리歷史넷
  41. 備邊司 , 實錄위키
  42. 勢道政治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3. 己丑獄事 , 우리歷史넷
  44. 權力의 均衡을 무너뜨린 ‘南怡의 죽음’ , 中央日報, 2009年 9月 26日
  45. 洪景來의 亂 , 우리歷史넷
  46. 壬戌農民蜂起 , 우리歷史넷
  47. 萬人之上 朝鮮國王, 私生活은 없다 , 오늘의 韓國, 2014年 10月 14日
  48. 임혜련, 朝鮮에서 施行한 다섯 가지 儀禮 , 韓國文化史, 우리歷史넷
  49. 禮訟(禮訟) , 實錄위키
  50. 王妃 , 韓國文化大百科事典
  51. 박홍갑, 王后가 하는 일 , 韓國文化史, 우리歷史넷
  52. 國王의 婚禮, 王妃 揀擇과 婚姻 , 文化財廳
  53. 高麗時代 最高 門閥 인주(仁川) 李氏 , 仁川in, 2019年 9月 24日
  54. 揀擇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5.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實錄위키
  56. 英祖, 어머니 숙빈최씨의 이름을 바꾸다? , 韓國學 資料포털
  57. 王室의 生活 , 國立故宮博物館
  58. 와! 朝鮮時代 이런 일이 - 賃金의 밥床 '水剌床' , 어린이朝鮮日報, 2008年 9月 5日
  59. 飮食에서 百姓의 삶을 바라본 ‘王의 밥床’ , 文化財廳
  60. 罪人에게 阿附한 理髮 等을 罷職할 것을 上王에게 여쭈다 , 〈世宗實錄〉 9卷, 世宗 2年 8月 29日, 《朝鮮王朝實錄》
  61. 王朝의 象徵, 宮闕 , 韓國文化史, 우리歷史넷
  62. 朝鮮 王의 葬禮 “5個月間 36가지 節次로 進行…屍身에 110餘 겹 옷 입혀” , 百歲時代, 2022年 8月 29日
  63. 行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4. 宗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5. 不遷之位 , 實錄위키
  66. 宗廟 祭禮 및 宗廟 祭禮樂 , 文化財廳
  67. 大韓帝國 皇帝로 追尊 後 削除
  68. 1897年에 大韓帝國 皇帝로 卽位해 1907年까지 在位.
  69. 大韓帝國 皇帝로 追尊 後 削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