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곤
(李載崑,
1859年
4月 8日
(
陰曆 3月 6日
) ~
1943年
7月 11日
)은
朝鮮
末期의 王族이자 政治人,
大韓帝國
의 皇族으로
정미七赤
의 한 사람이며, 1907年부터 1909年까지 李完用 內閣의 學部大臣을 지냈다. 獨立運動家인
이관용
은 그의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 本貫은
全州
로서
高宗
과는 같은 行列의 王室 宗親이다. 興완군
이정응
에게 入籍된 婉順軍
이재완
의 親同生이다
[1]
. 본적은
京城府
鍾路이며, 雅號는 動員(東園)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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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京畿道
楊州郡
에서
參奉
,
縣令
을 지내고 增 議政府左贊成에 追贈된 이신응(李愼應)과 그의 夫人 全州崔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圖本(李道本)은 增 吏曹判書이고, 曾祖父 이戌初(李述初)는 增 吏曹參判이다. 舒川郡 李滉(西川君 李榥)의 아들 이정욱(李廷煜)의 6代孫이다.
1880年
過去
에 及第하여
承政院
의 벼슬을 始作으로
弘文館
敎理와 地方의 縣監 等을 거쳤다.
1896年
祕書遠景,
1898年
宗正院頃,
1902年
會計員頃 等을 지내며 漸次 高位職에 올랐다.
1907年
韓日新協約
締結 때는
學部大臣
으로서 功을 세웠고,
日本
政府로부터 勳1等 旭日臺數長을 徐薰받았다.
以後
新社會
,
大同學會
,
大韓女子興學會
, 漢字統一回,
國民演說回
等의 各種 親日 團體에서 任員을 맡는 等 積極的인 親日 活動을 하였고,
1909年
이토 히로부미
가
安重根
에 殺害되었을 때는 漢字統一回 支會長으로서
漢字統一回伊藤博文追悼會
를 開催하였다.
1910年
韓日 倂合 條約
이 締結된 뒤 日本 政府로부터
自作
作爲와 恩師公採 5萬원을 받고,
朝鮮總督府 中樞院
拷問에도 任命되었다.
1912年
에는 日本 政府로부터
韓國倂合記念章
을 받았다.
韓日 倂合 後에는 佛敎界와 王室을 中心으로 꾸준한 親日 活動을 했다.
1915年
朝鮮總督府가 後援하여 組織된 佛敎 宗團인 三十本産聯合事務所 顧問을 맡았으며,
1917年
에는
佛敎擁護回
拷問도 歷任했다. 1915年
다이쇼 天皇
卽位 祝賀를 위한 行事가 京城紳士에서 열렸을 때 參席했고, 1917年
純宗
이 日本 皇室 參拜를 갈 때 遂行했다.
3·1 運動
때
권중현
과 함께 爵位를 返納할 意思를 表示했으나 日本 政府로부터 拒絶當한 바 있다. 日帝 强占期 동안 광나루에 別莊을 갖고 있을 만큼 호화롭게 살았고,
1960年
報道에 따르면 子孫들도
서울
中區
세종로에서 富裕한 生活을 하고 있었다.
[2]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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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年
發表된
親日派 708人 名單
과
2008年
發表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自身의 爵位를 習作 받은 孫子
이해국
과 함께 選定되었다.
2006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調査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106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2007年
大韓民國 親日反民族行爲者財産調査委員會
는 이재곤 所有의 土地에 對한 國家 歸屬 決定을 내렸다.
[3]
國家에 歸屬된 이재곤의 財産은 詩가 約 43億 원 假量이며, 後孫들은 調査 段階에서부터 異議申請을 提起한 바 있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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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部 : 이신응(李愼應)
- 某 : 全州崔氏(全州崔氏), 최병익(崔秉益)의 딸
- 否認 大邱西氏(大邱徐氏,
1858年
12月 7日
~ ?) 서계순(徐啓淳)의 딸
- 둘째 아들:
이원용
(李源鎔,
1889年
~
1943年
)
- 아들 : 이윤용(李潤鎔)
- 셋째 아들 :
이관용
(李灌鎔,
1891年
~
1933年
)
- 아들 : 이면용
- 아들 : 이윤용(李潤鎔)
- 이들: 이순용
- 兄 :
이재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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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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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6年 12月).
〈이재곤〉
(PDF)
. 《2006年度 調査報告書 II - 親日反民族行爲決定理由서》. 서울. 145~161쪽쪽. 發刊登錄番號 11-1560010-0000002-10. 2007年 9月 26日에
原本 文書
(PDF)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6月 18日에 確認함
.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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