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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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年 日本 帝國主義 에 맞서 武裝한 義兵

義兵 (義兵)은 主로 韓國史 에서 正義를 위해 自發的으로 組織된 民兵 을 뜻하는 말이다. 倡義軍 (昌義軍)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 韓國의 歷史 에는 壬辰倭亂 , 丙子胡亂 과 같은 外敵의 侵略에 맞서 自發的으로 構成된 民間 武裝 組織을 義兵이라 하였다. [2] 大韓帝國 時期의 義兵 亦是 이러한 흐름과 相通하는 것으로 이들은 변변한 武器도 갖추지 못하였으나 日本 帝國主義 에 맞서 싸웠다. [3]

朝鮮時代 以前 [ 編輯 ]

朝鮮時代 以前에도 外敵의 侵略에 맞서 自發的으로 義兵이 일어났다. 다만, 大體的으로 朝鮮時代 以前에는 義兵이라는 用語를 使用하지 않는데 이는 朝鮮 以前에는 個人의 支配하는 士兵 이 存在하였고 때로는 士兵이 나라의 命을 받아 活動하기도 하는 等 官軍과 非官軍의 區分이 模糊하기 때문이다.

高麗時代 三別抄 는 考慮가 降伏하기 以前에는 崔瑀 의 士兵集團이었으며, 大夢抗爭 에서 有名한 金允侯 살리타 를 무찌를 때 그의 身分은 僧侶였고 그가 이끈 軍隊는 奴婢가 主軸이 된 民兵이었다. 그리하여 朝鮮時代 以前의 民兵들을 義兵이라 일컫지는 않는다.

朝鮮時代의 義兵 [ 編輯 ]

壬辰倭亂 期間 동안 各地에서 義兵이 組織되어 日本과 맞서 싸웠다. 義兵이 參與한 有名한 戰鬪로는 행주大捷 , 晉州大捷 等이 있다. [4]

義兵은 農民이 主軸을 이루었으나, 그들을 組織하고 指導한 것은 前職 官僚와 士林 그리고 僧侶들이었다. 義兵의 身分 構成이 다양하듯이 思想的 基盤도 다양하였지만, 儒敎의 忠義精神이 核心을 이루고 있었다. 儒敎를 발전시킨 것이 國防을 疏忽히 한 點도 있지만, 그 代身 國民들의 忠誠心을 培養하여 그 底力이 徐徐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또한, 韓國은 예로부터 鄕村 共同體가 鄕土 防衛를 떠맡아 온 오랜 傳統이 있기 때문에 義兵 部隊의 組織은 매우 수월하였다. [5]

임란 當時 가장 먼저 義兵을 擧兵한 곳은 嶺南地域으로 慶州를 中心으로 한 文川會盟 이 軍民合同作戰의 導火線이 되었다. 義兵들은 鄕土 地理에 익숙하고, 鄕土 條件에 알맞은 武器와 戰術을 攄得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은 兵力으로 大軍과 敵對하기 爲해서 正面 衝突보다는 埋伏·奇襲·僞裝 等과 같은 遊擊 戰術을 많이 써서 敵에게 큰 괴로움을 주었다. 義兵은 各處에서 일어나 그 數를 헤아리기 어려우나, 그中에서도 많은 戰果를 거두고 名聲을 떨친 사람은 平安道의 조호익 (曺好益)· 양덕록 (楊德祿)· 西山大師 , 咸鏡道의 정문부 (鄭文孚), 京畿道의 김천일 (金天鎰)· 심대 (沈岱)· 홍계남 (洪季男), 慶尙道 宜寧의 郭再祐 (郭再祐), 高齡의 김면 (金沔), 陜川의 정인홍 (鄭仁弘), 永川의 권응수 (權應銖), 忠淸道의 조헌 (趙憲), 全羅道의 고경명 (高敬命), 김덕령 (金德齡), 黃海道의 이정암 (李廷?), 江原道의 四溟堂 等이다.

戰亂이 長期化되면서 日本軍에 對한 反擊 作戰은 한層 强化되어, 只今까지 散發的으로 일어난 義兵 部隊 等을 整理하여 官軍에 편입시켜 地形地物을 利用한 作戰 等 官軍의 戰鬪 能力을 强化시켜 義兵들은 한層 組織性을 띠게 되었다.

丙子胡亂 詩에도 各地에서 義兵이 組織되어 淸나라 軍의 主要 侵攻路를 中心으로 크게 抵抗하였다.

大韓帝國 時期의 義兵 [ 編輯 ]

日本 憲兵의 韓國人 公開 處刑 (1900年代)

大韓帝國 時期 日本 帝國主義 의 侵略에 맞서 싸운 各地의 民兵 亦是 義兵이라 불린다. 이들은 13道 倡義軍을 組織하여 서울 攻擊을 試圖하는 等 强力히 抵抗하였으나, 結局 國權回復에 成功하지 못한 채 日本軍에 依해 鎭壓되거나 解散될 수밖에 없었다. [6] 그러나, 이들의 相當數는 獨立軍 光復軍 에 參與하여 抗日 武裝 獨立運動의 母胎가 되었다. [7]

大韓帝國 時期 日本 帝國主義에 對抗하여 일어난 義兵은 1895年의 乙未義兵 과 1905年 以後의 乙巳義兵· 정미의病 李 代表的이다.

1895年 義兵은 흔히 乙未義兵이라 하며 地方의 名望있는 儒生 을 中心으로 斷髮令과 명성황후 弑害에 反撥하여 일어난 것이다. 初期 義兵은 兩班 中心의 活動으로 인해 큰 成果를 거둘 수 없었다. 이들 中에는 흥선大院君 執政期에 鎖國政策의 思想的 基盤을 提供한 李杭魯 의 門下生이 많았으며 衛正斥邪 의 名分에 依해 蜂起하였다. 俄館播遷 이 일어나고 日本의 影響力이 어느 程度 退潮瑕疵 乙未 義兵은 大部分 解散하였다. [8]

1905年 乙巳勒約 이 締結되자 國權回復이 가장 큰 課題로 떠올랐고 全國 各地에서 다시 義兵이 蜂起하였다. 이를 乙巳義兵이라 한다. 이 時期 義兵 亦是 初期에는 최익현 等 地方의 名望있는 儒生에 依해 始作되었으나 鬪爭 隊列에서 곧 脫落되었다. 崔益鉉은 官軍이 鎭壓하자 國王에게 칼을 겨눌 수 없다는 封建 倫理에 依해 스스로 投降하였고, 이 代身에 무명의 儒生과 農民이 義兵의 主軸이 되었다.

1907年 大韓帝國 軍隊解散 後 相當數의 軍人이 義兵에 合流하였다. 當時 義兵將은 심남일 , 안규홍 과 같은 沒落 兩班이거나 신돌석 과 같은 平民이었다. 이들의 要求 亦是 乙未義兵의 衛正斥邪라는 名分보다는 公平한 土地의 分配와 같은 封建 收奪의 解體를 包含한 것이었다. [9] 이 해 일어난 義兵을 정미의病 理라 한다. 特히 1907年과 1910年 사이의 義兵 鬪爭은 매우 激烈하여서 日本側의 公式統計로 볼 때에도 15萬餘名의 蜂起, 2851回의 衝突에 1萬 6700名 死亡, 負傷 3萬 6770名으로 總 5萬 3千餘名의 義兵 死傷者가 發生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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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年 義兵 蜂起의 數는 約 5萬 名, 衝突 件數는 304回, 1908年에는 約 7萬 名 그리고 1450餘件, 1909年 約 2萬 8千餘名의 義兵과 950餘件의 衝突 그리고 1910年에는 約 1900餘名과 147件의 衝突 件數를 記錄하고 있다. 그 被害 內容을 보면 1907年부터 1910年까지 義兵이 死亡 16,700餘名, 浮上 36,770餘名이고 日本軍 死亡 130餘名, 浮上 270餘名 그리고 韓國人 死亡 1,250餘名, 日本人 120餘名으로 68,800餘戶의 家屋의 小室로 統計되어...『日韓合邦秘史』上, pp.366-367 [10]

當時 義兵 鬪爭이 가장 活潑한 地域은 全南 地域이었으며 이 地域의 日本人 地主가 義兵 活動의 主要 目標가 되었다. 1909年 木浦 日本人 商業會議所의 强力한 要求로 日帝는 이른바 南韓暴徒 大討伐作戰을 벌여 國內 義兵들과 決戰을 벌였다. 그 結果 義兵 活動은 決定的인 打擊을 입었고 根據地를 滿洲 等地로 옮기게 되었고, [11] 이들은 獨立軍 의 主軸으로 成長하였다. [1] [ * ← 南韓暴徒 大討伐作戰 링크參考 ]

이 時期의 有名한 義兵 活動가로는 洪範圖 , 김상한 , 신돌석 , 安重根 等이 있다.

時期別 義兵 [ 編輯 ]

1895年 乙未義兵
1905年 乙巳義兵
1907年 정미의病
1908年 13道 倡義軍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최용범,《하룻밤에 읽는 韓國史》, ISBN   9788992920162 .
  2. 조원래,《壬辰倭亂과 湖南地方의 義兵抗爭》,아세아문화사, ISBN   8942815596 .
  3. 이태룡,《韓國近代史와 義兵鬪爭 1, 2》, 重名出版社, ISBN   8957010521 / ISBN   895701053X
  4. 兄弟義兵將 마을 雙醫師에 가보셨나요?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晋州 攻防戰에 參戰한 兄弟 義兵將을 기리는 雙義士 關聯 記事.
  5. 글로벌稅契對百科 , 〈壬辰倭亂〉, 水軍과 義兵의 抗爭.
  6. 이태룡, 앞의 冊.
  7. 윤병석, 《義兵과 獨立軍》, 세종대왕기념사업회, ISBN   893070526X
  8. 韓國史特講編纂委員會, 韓國史特講, 서울대학교출판부, 240 ~ 241 쪽, ISBN   89-7096-115-1
  9. 앞의 冊, 242쪽.
  10. 조선통감부硏究 2, 국학자료원, 강창석, 54~55쪽, ISBN   895410200X
  11. 韓國史特講,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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